선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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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제14대 국왕. 묘호는 선조#묘호(宣祖), 시호는 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휘는 연(昖).
조선 왕조 최초로 적통 출신이 아닌 국왕이다. 원래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던 순회세자가 갑자기 이른 나이에 요절하면서 명종의 뒤를 이을 친자식이 없자, 왕실 종친 가운데 후사(後嗣)를 정하도록 하였고, 덕흥군 제삼자(德興君第參子) 즉 어린 하성군이 선택되어 명종과 인순왕후의 양자로 들어가 명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초창기에는 숙모이자 법적으로 어머니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곧 철렴하고 1년만에 친정을 하게 된다.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으로, 왕위 계승도를 보면 선조 시기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계보도가 나눠지며, 이후 조선 임금들은 모두 선조의 직계 후손들이 된다.[9]
2. 생애[편집]
2.1. 하성군 시절[편집]
1552년 11월 11일에 한성의 인달방에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3남으로 태어난다. 하동군부대부인은 집현전의 학사로 일하다가 세조 치세에 영의정으로 등극한 정인지의 증손녀이고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로 하성군은 중종의 서손자이다. 선조의 본명은 이균으로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하동군에서 이름을 따와 하성군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성군이 태어난 잠저, 도정궁은 덕흥대원군이 어린 시절에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인데 터가 안 좋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끝나가던 즈음에 우물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을 바꿔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우물이 아주 잘 나오는데 별 말을 다한다며 무시하고 집을 마저 지었다. 나쁜 터인 줄 알았더니 미래의 왕이 태어난 것이다.[10]
덕흥대원군은 하성군이 8살이 되기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하성군은 숙부인 명종의 지시로 중종의 장남이자 서백부인 복성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명종은 사망한 덕흥대원군을 대신하여 조카들에게 많은 정을 주었는데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한 이유도 있었다. 3형제를 자주 궁궐로 불렀는데 특히 하성군을 총애하였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명종은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궁궐로 불러서는 익선관을 벗고 조카들에게 써보라고 말한다. 하원군과 하릉군은 명종의 말대로 써보았는데 하성군만 극구 사양하였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임금과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고 묻자 하성군은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디 충과 효는 하나라고 대답하였다. 감동한 명종은 하성군에게 "이 관은 네 것이니라."고 대답하였다.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의심받기도 하나 일단 이 일화는 광해군일기의 선조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11]
1565년 9월 15일에 명종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신하들은 후계자 지명을 서둘렀다. 의식이 없어서 대화가 불가한 명종 앞에 신하들이 모여들었고 영의정인 이준경이 말을 꺼내는데 명종은 의식이 없어서 당연히 대답이 없었다. 2일이 지난 17일에도 명종이 일어나지 않자 신하들은 인순왕후와 후계자 문제를 논의한다. 인순왕후는 평소에 명종이 총애하던 하성군에게 간호를 맡긴다. 조선에서 왕의 간호는 세자의 업무이기에 하성군의 간호는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낙점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명종은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문제는 수면 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명종도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왕인 자신을 두고 하성군을 후계자로 논한 신하들을 잡지 않았다. 선조 시절에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우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신하가 왕의 후계자를 택하는 것은 '택군'이라 하여 역모에 준하는 처벌이 내려지는 중범죄이다. 이준경의 건의를 책망하지 않고 넘어간 점이나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올린 선비인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을 감안하면 명종은 하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걸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히지만 명종이 진심으로 하성군을 후계자로 인정하였는데 공개적으로 지명하지 않은 것인지 하성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만 아직 자신의 나이가 많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서 중전에게 아들을 얻으면 세자로 지명하고 실패하면 하성군에게 물려주자는 차선책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조실록과 그 행장에는 1565년에 병이 깊어진 명종이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명종실록에 없다는 점이 의심을 불러온 것이다. 후대의 추정으로는 하성군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확정짓는 행위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만 동의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명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한 사실을 후손들은 알지만 당시에는 모르는 일이다. 하성군을 후계자로 선포하고 명종이 아들을 낳으면 후계 문제는 심각하게 복잡해지는데 당시 명종은 30대이므로 자식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30대는 현대의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후계자를 얻어야 하는 왕임을 감안하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년 후인 1567년 6월 28일에 명종이 다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내정한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인순왕후는 을축년의 일에 따라 덕흥대원군의 삼남인 하성군으로 결정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을축년의 일은 하성군이 명종을 간호한 일을 의미한다. 인순왕후도 당시의 일을 계기로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도 인순왕후의 선언을 수용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신하들 사이에서도 하성군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성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은 이미 고인이고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도 하성군이 즉위하기 1달 전에 사망한다. 게다가 하동부대부인의 친정 역시 권세가 큰 가문이 아니고 아직 하성군도 혼인하지 않은 몸이므로 처가의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척신들이 발호할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감도 적었다. 그리고 하성군은 복성군의 형식적인 양자이다. 중종의 적자인 인종과 명종이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중종의 서장자인 복성군의 양자가 서열상으로도 가장 높다. 복성군의 처가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복성군의 아내도 이미 고인이어서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마땅한 선택지도 없었다. 중종의 손자 중에서 적자는 덕흥대원군이 낳은 3형제와 덕양군의 아들인 풍산군이 전부이다. 가장 많은 아들을 둔 해안군은 적자가 없고 서자만 두는 바람에 덕흥대원군은 하원군만 남겨두고 하릉군과 하성군을 이복형들의 양자로 보냈다. 이걸로도 모자라 금원군 슬하의 왕자인 영양군과 봉성군은 3촌 조카가 아닌 5촌 종질들 중에서 양자를 들였다. 하원군은 덕흥대원군의 장남이고 풍산군은 덕양군의 장남이므로 양자로 데려올 수 없으므로 남은 후보군은 하릉군과 하성군이고 심지어 하릉군은 이 당시에 작위조차 하릉군이 아니었다. # 하성군을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대원군의 막내아들로만 인식하면 하성군이 엄청난 방법을 통해서 범접하지 못하는 자리에 올라온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는 경쟁자가 적었고 조선의 종법을 감안하면 하성군에게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상태로 즉위하기에 차라리 어린 후계자를 옹립해서 성년이 되기 전까지 군주의 역량을 기르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으니 선호되는 측면도 있었다. 세자로 책봉된 막내아들인 의안대군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도 하성군과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추정된다.
명종이 승하하자 하성군이 왕으로 즉위하여 선조가 된다. 즉위가 끝나고 선조의 즉위에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투서가 밀려들었는데 이준경이 이미 대행대왕[12] 께서 정한 일인데 무슨 공이냐고 반문하면서 투서를 모두 모아서 불태웠다. 동시에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된다. 선조의 치세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70년을 방치되었다가 고종의 치세에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각계의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복원한다. 정작 고종 본인이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켰음을 선포한 곳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이었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도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
선조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서자 출신의 방계 인사로 적자가 낳은 대군이 아니다. 그동안 장남은 아니어도 왕비나 세자빈이 낳은 적자가 후계자로 올랐다. 성종은 삼촌인 예종보다 먼저 후계자로 지명된 의경세자의 아들이라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오른 셈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삼촌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무시할 수 없었으나 3살이라 너무 어려서 왕위는 성종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적통 문제를 따지면 성종에게 위험이 될 소지가 있어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인수대비를 안순왕후보다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계유정난과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세조와 중종도 과거 대군이었다. 적장자 출신인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 전부고 그마저도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한 기간이 10년 미만이다. 물론 선조도 서자는 아니고 엄연히 덕흥대원군의 적자이니 서자 출신인 왕은 영조가 최초이다. 잠시 왕비에 올랐다가 후궁으로 격하된 희빈 장씨를 숙종의 첩으로 간주한다면 경종이 최초가 된다.
2.2. 즉위[편집]
처음부터 선조는 왕이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은 중종의 9남, 그것도 서자이며 선조 자신은 3남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선에는 방계승통의 사례가 조선 역사상 없었다. 성종의 경우 선대 왕 예종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성종은 예종의 형이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방계승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올랐을 뿐이다.[13]
즉위 후 나이가 어려서 양모이자 법적으로 모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 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 할 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잡는 한편 명종 대에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광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을 위해 민생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선조 2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大院君)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 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는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4]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이젠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왕위를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인 덕흥군이나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한낱 절을 할 수도 없었다.[15]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생부에 대한 추숭 떡밥이 여럿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왕위 계승자로서 제대로 된 후계자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은 분명 있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명종의 후사(後嗣)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척신 집안의 일원인 대비 인순왕후 심씨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에 적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1575년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2.3. 목릉성세(穆陵盛世)[편집]
즉위 직후 율곡 이이를 통해 즉위를 반대하던 부패한 척신 심통원[16] 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한 면모는 보였지만, 사림간 붕당이 크게 대두되면서 파당(동인VS서인) 갈등 문제도 새롭게 수면 위로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사대부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명종 대에 역적으로 몰려 숙청된 윤임을 사면 복권시켰다. 그 이후 윤임의 5남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해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그 윤흥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다 부하들과 함께 부산 다대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 시기의 치세는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17] 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사실 목릉성세는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전 시기에 비해서 민생이 확실히 나아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18] 무엇보다도 그것에 선조가 기여한 부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명종 대에 사단칠정논변이 명종의 업적은 아니지 않은가? 민간주도라는 성격에서 정조 대에 문예부흥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2.4. 종계변무와 기축옥사[편집]
1588년 명나라 측에서 태조 이성계를 간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조선 왕실 족보인 선원록을 마침내 제대로 고쳤다.[19] 사대를 했던 조선 왕실과 성리학 유학계의 너무나 오랜 숙원으로, 이른바 '종계변무'[20] 라고 한다.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서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이 악용된 것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왕의 권력을 위협할 권신이나 국정을 농단하여 나라를 망칠 간신으로 생각하여 죽이거나 쫓아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동인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며 친국을 자주 실시하며 옥사를 즐기는 등의 가학적이고 잔악한 모습을 보이며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 증폭시킨 공안 사건이었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이러한 방식은 생산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권 그 자체의 획득이 목적인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정개청은 본인이 권신이나 간신이 아니며 차라리 조정에서 들어와 관리를 생활한 다음 감옥에 가두는 것이 낫다고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끝내 사망했다.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과 숙종 때 반대파 서인 측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들은 수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 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21] 이 옥사로 인해 사망한 사람만 수백명 가량으로 가히 조선 역사상 최대규모의 옥사라 할만했으며 정확히 백명이 죽었던 그 악명 높은 갑자사화의 몇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22]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건저 문제)과 관련해 류성룡과 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가 정철만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자신이 조정에서 관리로 추천받지 않으면서 권간이라는 이유로 옥사 당시에 희생된 최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
2.5. 임진왜란 시기[편집]
많은 유림들이 억울히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인해 더 서인과 동인 사이에서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진행되던 1592년에 조선 역사상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그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23]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너무나 많은 왜군의 대규모 외침에 전면 패주 상황이 계속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 쫓아내주리라 기대하고,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24] 로 인해 참패. 수도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평안도 영변부에서 광해군에게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고 왕권의 일부 권한을 일부 위임하여 조정의 절반인 분조(分朝)를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듯 넘겨줬다.
이때 실록은 선조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회의 중에 혼자 사라져서는 점을 치고 있었던 정황이라든가, 한양에서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종친들에게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 몇 시간 후에 도주를 한다든가, # 자기만 강을 건너고는 배를 가라앉혀 자기를 따라오며 고생하던 신하들을 버린다든가, # 하는 내용들이 마치 슬랩스틱을 곁들인 블랙코미디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선조는 부랴부랴 개성부와 평양부를 거쳐 영변을 거쳐 의주목으로 급하게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 자체는 고려-거란 전쟁이나 고려-몽골 전쟁 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택하며 결국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군 현종과 달리 선조의 파천은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욕을 대차게 먹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의 국토와 만백성을 버리고 자기 안위만 챙기고자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나라와 백성을 버린다면 관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것이고 스스로 일어난 의병도 와해될 공산이 크다. 물론 왕이 잡히면 패전은 기정사일이지만 문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도망가고자 했다는 것.
한양을 떠난 선조는 급기야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는데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갑자기 왕은 전쟁이 터지면 군대를 모아 반격을 해야하며 왕이 요동으로 떠나지 않으면 신하들이 따를것이라고 선조를 상대로 직접적으로 조선을 지킬것을 주장하는 기록을 보아 이미 한양을 떠난 직후나 혹은 한양을 떠나기 전부터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을 지난 후에 영변에서는 선조가 대놓고 요동으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명에 망명한다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명은 조선군을 지휘하는 선조가 타국으로 도망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너무나 빠른 선조의 도망 속도 때문에 혹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가경의 의심을[25] 하게 되고, 이에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26] 압록강의 배를 요동 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 의사를 완강히 표했다. 거기에다 신하들의 눈물 머금은 반대[27] 에 결국 의주목까지 피난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일단락되듯 무산되었다. 특히 영변대도호부에서 왕실과 종묘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세자였던 아들 광해군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사직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의 왕이자 어버이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일신에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크게 받게 되었다.[28] 특히, 그냥 내준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서애 류성룡의 문헌인 징비록에 따르면 '남대문 안 창고'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은 왕족으로서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는커녕 각지에서 온갖 횡포와 민폐만 끼치고 다녔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잡어들어다가 바쳤을 정도.[29]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밑바닥까지 실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선조 자신도 당연히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내심 우려했다.[30] 임란 말기에 우려한 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 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 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 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의심병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각종 고문과 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전쟁이 한참인 시기임에도 이순신을 가차없이 숙청한 점이다.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와 이오시프 스탈린도 적어도 강력한 적을 앞두고 전쟁을 하던 시기에는 숙청하지 않았고 한신이나 게오르기 주코프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들은 더 중용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후임으로 선발한 원균의 무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점은 선조의 큰 실책이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지명한 원균의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대패하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한다. 이 부분은 선조도 할 말이 없었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하였고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인정할 정도. 사실 이건 선조만의 잘못은 아닌데 원균이 자기합리화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라 선조는 물론이고 많은 신하들도 원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다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원흉이 선조이다. 막바지에야 상황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출진하지 않으려 버티던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죽일 듯한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31]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 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 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2.6. 후계 문제[편집]
임진왜란 발발 후 평안북도 의주까지 몽진하는 와중에 광해군을 영변부에서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分朝)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장남 임해군이 차남 광해군보다 왕위 계승에서 우선 순위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싸이코패스적 기질의 광패한 망나니인지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에게 분조를 맡겨놓고서도 항전 활동 중인 그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진다. 그래서 아들 광해군을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보았고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 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생전 양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잦은 양위 소동은 세자의 정치적인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왕권강화 쇼로 보는 입장이 많다.
잦은 양위 소동에서 드러난 변덕과 견제, 이후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의 탄생까지 겹치면서 세자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한층 더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진 않았다. 조정 당파 중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건 소북 그중에서도 류영경의 탁소북에 국한된다. 나머지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은 모두 광해군을 지지했다. 전란 기간 중 신하들에게 전위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선조의 권위가 취약했던지라 전란을 통해 충분히 능력이 검증된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고 나이(20살 이상)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할 명분도 없었다.[34] 선조 승하 당시 영창대군 나이는 겨우 만 2살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도 당시 종법 해석으론 별 문제가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에 이미 사대부 사이에서도 적자가 태어나 양자를 파양하고자 하는 소송은 기각하는 판례가 형성되었고[35] 왕가의 법도대로 광해군이 서자이건 차자이건 정식 세자로 옹립된 이상 군신명분이 세워져서 영창대군은 태어난 순간 신하가 되기 때문에 한번 세워진 명분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게 그 당시 성리학 종법 제도로 왕가는 물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졌기 때문이다. 설사 아무리 정통성이 있다고 한들 군국 대사를 처리해야 할 군주에 2살짜리를 옹립하는것은 선조나 인목왕후는 물론 류영경의 소북에서도 불가능한 걸 알고 있었다.[36]사신은 논한다. 상(上)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452)[32] 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軍臨)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奉行)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間爭)하여 반드시 승락(承諾)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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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런 양위 소동에 제대로 열받은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선조에게 양위 소동을 두고 류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양위 소동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선조를 의도적으로 돌려까는 상소다. 이 상소를 읽은 선조는 빡쳐서 정인홍을 귀양보낸다. 결국 선조는 양위 소동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어가면서 벌인 쇼라는 것을 선조가 직접 인증해버렸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계축일기 등에 등장한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음모론 때문에 당시 어의자 국왕 주치의였던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그야말로 "찹살 떡밥거리" 정도이다.
선조가 때때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바꿔볼까 잠깐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과 왕세자의 갈등 구도의 연장선이었고 나이 차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장성한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류영경에게 건넸으나, 류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결국 사사된 이후 대역죄로 부관참시에 처해진다.
2.7.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편집]
선조의 대표적 치적 중 가장 많이 간과되고 있는 치적이다."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족)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대는 여진족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대규모 침입이 잦아졌고, 이에 대응하여 여진 정벌도 마지막으로 빈번히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호에 대한 응징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년)에는 함경북도 경원부(慶源府)의 니탕개(尼湯介) 등이 2~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阿山堡)를 함락시키는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6진이 위협을 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현지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벌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방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약 10년 전에 발생한 이 니탕개의 난은 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개를 무자비하게 초토화시켰다.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한 둔전을 여진족이 습격하여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국경수비병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납치해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기습적으로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수급(머리) 38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이 녹둔도 침공에 대한 당시 선조의 대응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조선은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북방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11월에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400여 기를 주어 강을 건너 추도(楸島)의 여진족을 치게 하여,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어서 이듬해인 1588년(선조 21)에는 본격적으로 녹둔도를 공격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1월 14일에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시전부락(時錢部落)을 향해 진격, 15일에 장막 200여 채를 태우고 380명의 목을 베는 등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족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은[37]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여진 정벌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함경도의 변경을 수차례 공격하고 약탈하였는데, 특히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 추장 이라대(伊羅大)·역수(易水) 등은 먼 곳에 사는 홀라온과 연결하여 조선의 변경을 활발히 침공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은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함경도 지역에 이렇게 빈번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변경의 수비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번호의 이탈 및 여진족의 침입을 완전히 근절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선조 31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분노한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에 1599년(선조 32년)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선조 33년) 4월 14일에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38] 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산위(야산)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쌍그리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壯快)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투항하고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정세는 조선이 정벌로써 통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족 통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누르하치 및 그와 적대하는 홀라온 양쪽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번호를 끌고 가고자 했는데, 이 중 홀라온은 더 나아가 1603년(선조 36년) 조선의 변경을 직접 군사적으로 습격하였고, 1605년(선조 38년) 3월에는 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동관진을 약탈한 여진 홀라온의 본대는 본거지로 퇴각하였으나, 300여 기는 건가퇴(件加退)에 남아 있었고, 원래 있던 1천여 명의 여진족과 함께 조선의 북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려,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이후 1607년(선조 40년) 누르하치가 홀라온 세력을 격퇴한 이후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여진족을 자신의 본거지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은 울타리가 되어주던 번호를 상실한 채로 강대해진 후금의 누르하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물론 선조는 이후에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그렇게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호(藩胡)들은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2.8. 목릉[편집]
자세한 내용은 목릉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포은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 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는데,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완전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 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였다.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는데 목릉이 조성된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하는데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끝내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40]
카카오맵 리뷰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41]
3.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선조(조선)/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임진왜란에서 보인 처참한 행적 덕분에 대중적으로 큰 증오를 받는 왕이다. 사실 임란 때의 실책만으로 욕을 먹는 것은 아니고, 다른 때에도 비난받을 일을 많이 일삼은 폐급 군주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다.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 보신적인 행태로[44]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45][46][47] 무엇보다도 임진왜란 때 드러난 국가 지도자로서의 결격 사유 때문에 전반적인 여론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니까 파천으로 대표되는 무책임한 면모와 이순신 해임 등 전시의 무능 때문에 대중적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다.[59]
그나마 선조 집권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초기 이후로 여러가지 국가 체제의 모순이 쌓여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 대동법의 프로토 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는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매우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졌다. 문제는 진행 과정에서도 당대에는 지주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며 즉위 후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 내내 제자리걸음만 걸었다는 것이다.[62][65]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68] 했으나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일각에서는 "선조는 성리학 카르텔의 수장이었으므로 좋은 기록을 받았다"거나 "전시 대비에 무능하고 게을렀다"는 식으로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선조 옹호자들에게는 매우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 오히려 선조는 대의명분이나 유교적인 절차를 허례허식 따위로 치부하며 제멋대로 정치를 했다. 이러한 성향이 좋은 쪽으로 시너지를 냈더라면 파격적이고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선조의 방종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전란 전에는 기축옥사 같은 그리고 전란 후에는 칠천량 해전 같은 가히 최악의 결과만 가져왔다.[69] 임진왜란 중에 보인 해괴하고 황당한 파천 계획만 보더라도 선조는 대의명분보다 일신의 이득만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같은 행태는 국가적인 위기 중에도 사회 전반의 안녕을 도모하기보다는 단기적 손익 계산에 혈안인 현대의 정치인에 가깝지 전제군주제 시대의 왕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쟁 중의 선조의 평가는 군주로서 결격 수준이며 가히 최악이다. 선조는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쉬지 않고 북으로 몽진했고 의주에 이르르자 아예 타국으로 도주하면서 어린 아들에게 선위할 것처럼 분위기를 짜 놓았다. 여차하면 자기 국가를 버리고 요동에서 새로운 정권을 만든 후 전란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통치하겠다는, 왕으로서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죄악인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실행에까지 옮겼다가 이 따위 작자를 왕으로 모셨던 조선은 물론 명나라와 함께 심지어 적국인 왜까지 삼국 모두를 당혹시켰다.
이렇듯 선조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일신의 안위와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실로 평범한 백성보다도 못한 행동거지였다. 선조가 암군으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이 탓이다. 덤으로 명신들과 명장들이 세력을 키운다 싶으면 여지없이 숙청해 버렸으며 전쟁이 끝나자 돌아와서 실권을 잡은 후에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선위쇼 같은 얕은 술수 따위나 쓰면서 지대추구를 꾀했을 정도로 간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선조가 분명 머리 좋고 인재를 보는 눈이 좀 있었다는 것까지는 주류 사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점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선조는 지능만 좀 높았을 뿐, 그 지능을 국가와 민족에 이롭게 사용할 지혜는 전혀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임금이었다. 오히려 그 좋은 머리를 자기 잇속 챙기는 데만 사용할 줄 알았지, 국가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다스리는 방법은 전혀 몰랐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한낱 장사치에나 어울리지, 한 국가를 다스릴 그릇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사회의 한계로 인해 왕손이라는 이유로 왕 자리를 차치해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총평하면 일부 인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지도자로서 필요한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 됨됨이가 졸렬하고 천박한데다 기본적인 도덕관념조차 결여되었고 무엇보다도 최고위 정책결정권자로서 정작 진짜 필요한 정책적 혜안이 탁월한 것도 아니라서[72]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일국을 다스려야 할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보신과 권력욕 충족 외에는 별다른 성실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거시적 비전도[73] 원칙도 없는[74] 방만한 국정 운영으로 제대로 된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75]
심지어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오로지 자신 한 몸의 안위만을 위해 국가와 백성들을 포기해 버리는 추태를 보여 민심을 잃고 왕권에 먹칠까지 하는 등, 선조의 인간적인 하자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선조가 임란 동안 저질러 댔던 얼빠진 짓거리들을 보며 질린 나머지 나중에는 대놓고 왕의 면전에다 필부[76] 라는 멸칭을 사용했으랴. 전근대 사회에서 왕에게 대놓고 이런 멸칭이 공공연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의 권위에 심각하게 금이 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현대에 와서도 딱 그 수준에 맞는 대접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선조 옹호론자들은 끈질기게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만 이어졌다면 명군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만약이고 자시고 간에 선조에 대한 평가는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25년이라는 기나긴 집권 기간도 반영되어 내려진 것이다. 애초에 이상의 선조 관련 평가는 어디 어중이떠중이 재야학자들도 아닌 주류 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내려 왔던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선조가 명군감이라는 괴상한 미화가 나오는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정작 그 임란 전 25년 동안에도 국가의 발전에 선조가 제대로 기여한 것이 있었는지, 내세울 만한 업적이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다.[77]
설상가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결여되고 이기주의적인 지도자들이 대개 그렇듯, 자기가 그나마 지니고 있던 몇 안 되는 장점조차 자식들에게 제대로 계승해 주지 못했다. 선조는 조선 왕조 역사를 통틀어 자식농사까지 최악으로 지어 후대에 민폐를 무진장 끼친 것으로 유명한데, 왕자들이 하나같이 개차반이 된 이유도 남탓할 것 없이 결국 선조 본인의 잘못이 가장 컸다.[78] 이처럼 인간으로서는 됨됨이가 저열했고 국가지도자로서도 성과가 형편없었으니, 악인인 주제에 암군이기까지 하다는 박한 평가를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4. 가족관계[편집]
4.1. 친가(전주 이씨)[편집]
4.2. 배우자/자녀[편집]
- 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
- 후궁: 공빈 김씨
恭聖王后 - 후궁: 경혜인빈 김씨
- 후궁: 순빈 김씨
- 후궁: 온빈 한씨
- 후궁: 정빈 홍씨
- 후궁: 정빈 민씨
- 후궁: 귀인 정씨[84]
- 후궁: 숙의 정씨
- 후궁: 숙의 김씨
- 후궁: 숙의 한씨
- 후궁: 폐소원 윤씨
- 후궁: 상궁 김씨
- 후궁: 상궁 박씨
자식이 10명을 넘겼던 왕 중 하나로 이후에는 인조(6남 1녀), 효종(1남 7녀), 현종(1남 3녀), 숙종(6남 2녀)[85] 을 거쳐[86] 영조 때가 되어서야 2남 12녀로 10명 이상의 자녀를 둔 왕이 나온다.[87]
5. 기타[편집]
- 원래는 선종(宣宗)이었으나 1617년(광해군 9년) 선조(宣祖)로 변경됐다.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으로 오기된 것을 바로잡은 종계변무의 공로다. 사대주의 국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왕가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로 태조 3년(1394년)부터 200여년 간 조선의 정말 오래된 숙원이었다. 실록은 선조의 공을 종계변무 및 명나라 사람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도와 명을 친다는 무고를 바로잡은 것, 왜란을 극복한 공로로 돌리고 있다. 선조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인 광해군이 자신의 권위와 즉위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하고자 밀어붙인 사안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칭송과 권위를 덧붙이는 이유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권력자를 위해서다. 참고로 이 묘호는 북송의 건국자 태조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은이 황제로 추존되며 받은 묘호이기도 하다.
- 선조 재위 시기에 민간에서의 조보(朝報)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88]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와 같은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인쇄가 아니라 필사를 시켜 한성부윤(정 2품의 고위직, 현재의 서울시장) 이상 고위 관리 몇몇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해 배포하였는바 금지한 것.
-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직접 신무기를 만들어 류성룡에게 베타테스트를 권하기도 했다. 선조가 만든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부사수가 돌려가며 장전한다는 언급으로는 리볼버나 개틀링의 원리로 작동하는 공용화기로 추측된다. 이 와중에 사관은 임금이 전시에 직접 무기를 만들고 살펴보는 걸 왕이 쓸데없이 공졸을 논한다며 까고 류성룡도 세트로 깠다. 전쟁 발발 전에도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은 것을 보면 군과 국방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듯 보인다.
- 선조는 인물 욕심이 많았다. 과거 시험이 아니라 추천이나 평판 등을 누군가에게 듣고서 꼭 곁으로 불러 관직을 줬다. 중종-인종-명종 대를 지나면서 훈구파가 퇴조하고 사림파가 득세를 하게 됐는데, 선조는 사화(士禍)를 당하고 역적 취급을 받은 선비들을 죄다 사면하고 그 후손들 중 뽑을 만한 자를 가렸다.[89] 덕분에 선조 대와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선비들이 현재도 많이 조명되고 있다. 아울러 자연에 은둔해서 도를 닦는 사람들(산림 세력)까지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서 현감직이라도 꼭 내렸다고. 반면 비리를 저질러 탄핵된 인사들은 여지없이 끝까지 쫓아내 벌을 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처럼 끊임없이 많은 인재들을 발탁하고 돌아가며 등용하고 갈아치워 권력이 한 곳에 집중하는 일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이 그랬지만 선조는 그 중에서도 유난히 피로와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애초에 태어날때부터 몸이 허약했다고 하니... 실제로 왜란 전에도 이명, 소화불량, 심질[90] 에 시달린다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였을 지경. 특히 왜란 이후에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크게 받아 온갖 병이 도져 도저히 못하겠다며 광해군에게 계속 양위하려 하였다. 물론 이를 당대나 지금이나 왕권강화를 위한 선위파동 쇼라고 보기도 하나 극심한 정신병으로 실제로 양위하려 했던 걸로 보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91] 그의 아들들이 대부분 성격이 거칠고 모난지라 특유의 기질이 유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임해군도 난폭함과 더불어 우울증이 있었다고 한다.
- 지봉유설의 기록에 의하면, 선조나 그의 아들인 광해군 대에 잉글랜드의 사략선단이 조선 해안을 침공했다가 조선 수군에 의해 격퇴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일기에도 같은 기록이 있으므로 실제로는 광해군 시기의 일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지만, 지봉유설에서는 이 사건이 선조 때의 일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92] 지봉유설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사략선단은 프랜시스 드레이크[93] 의 함대라고 추정된다.
- 서양과 관련된 선조 대의 또다른 기록이 있는데, 포르투갈인 선원인 마링예이루[94] 가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으로 인해 조난당하여 조선의 해안에 표류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이 사람은 현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인데[95] 조선 조정에 의해 명나라를 거쳐 본국인 포르투갈로 송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에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이 명 만력제에게 바친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노예들이 조선으로 파견되어오자[96] 이들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신기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는 등, 서방과의 인연이 꽤 되는 왕이다.
-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첫째아들 임해군을 수행해 피난했던 윤탁연의 후손들이 이것을 선조의 어진이라 주장했는데, 후손들은 이 어진을 윤탁연의 『중호관북일기』와 함께 대대로 보존해 왔다고 하지만, 감정사들은 ①전복 차림이 측면의 자세이고 ②좋은 필치가 못 되며 ③아무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선조의 어진으로 봐야 할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이 그림이 진짜 선조의 어진이라면 광해군의 얼굴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 원본은 아니고 누군가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이 이베이에 떴었다. 현재는 판매된 상태이고 이 어진은 선조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런 기록이 없어 진짜 선조의 모습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은 낮다.
- 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 / 추위에도 능히 홀로 피었네 /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 / 은은한 향기가 나오고 있음이어라.'(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여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언문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음력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다. 전문 현대어 해석은 조선 왕실의 한글 편지를 참조.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서예)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한석봉이는 액자(額字)가 비록 훌륭하지만 초서와 해서는 부족하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97]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98]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비 인목왕후와 유일한 적녀(嫡女) 정명공주도 명필로 유명했다.
- 은근히 삼국지연의에 관심이 많았다. 즉위 초 삼국지 내용을 언급하다가 기대승에게 까인 것은 유명한 일화인데 주변에서 들었다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잠저가 되었든 궁중이 되었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연의의 내용을 어린시절부터 접한 것은 확실하기에 한국 최초의 삼국지덕후들 중의 한 명으로 추정된다. # 그 외 선조 38년인 1605년엔 선조가 향시 과거에 '제갈량이 관우를 구하지 않았다'는 주제를 냈는데 '제갈량이 관우를 죽이려고 일부러 그랬다'라고 쓴 합격자를 보고 '이건 무슨 개소리냐?'라고 합격을 취소시키기도 했다. # 또 자치통감강목(제왕교육)을 공부하면서 왠만한 촉빠들도 실드치기 어려운 유비의 유장 통수를 가지고도 "유비는 호걸일 뿐 아니라 사실 인자한 사람이었다. 유장에 대한 처리를 보면 그의 선(善)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작은 악이라 하여 행하지 말고 작은 선이라 하여 행하지 아니하지 말라.'는 말은 삼대(三代) 이후에 없었던 말이다.","'사자(嗣子)가 하잘것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차지하라.'하였으니, 이 어찌 천하를 공공물로 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으며 제갈량이 아니면 어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 사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았다지만 임진왜란 때 관우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왕이기도 했고 왜란 직후 나온 소설 임진록에서는 장비의 환생 취급을 받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삼국지와 촉한과는 인연이 많은 왕이긴 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사실 진성 촉빠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99]
-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모진 풍파를 겪은 임금이다. 정여립의 난과 이몽학의 난 등 반란이 계속 일어난 데다가 조선 역사상 최고로 큰 전쟁인 임진왜란까지 겪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왜 하필 나냐고!라며 고함을 지를만할 정도로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 충분히 정신병이 걸리고도 남을 상황이긴 하다. 이 풍파는 선조가 죽어서까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6. 대중매체[편집]
6.1. 소설[편집]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는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에 대해 선조의 몸에 마수가 깃들었지만[100] 그걸 제외해도 원래부터 암군에 인성 자체가 구제불능이라고 묘사했다.[101] 같은 케이스로 설정된 원균[102] 과 비교해도 그 패악성과 인간성이 심각하게 묘사되어 주인공인 은동 입으로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인간 쓰레기라 평가되었고[103] 이순신의 경우 다시 지휘관에 부임했다가 은동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은 뒤로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연승하여 이 인간을 부들거리게 만들겠다는 증오심으로 싸움에 임했다.
-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 등장하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정여립의 난 에피소드 때 우의정 이양원이 이발의 팔십 노모를 제대로 고문하지 않고 보고를 올리는데 이 때 이양원을 갈구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 임진왜란 발발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이순신에게 한양을 내주고 함흥으로 퇴각한다. 이 때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진족을 끌어들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되려 여진족에게 살해당한다.
- 코락스의 대체역사소설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과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에 스쳐가듯 언급된다. 블랙 코미디 성향이 짙은 작품답게 한성을 떠나 의주까지 하루 수십 km를 주파한 행적을 두고 속도를 지배함으로써 시간을 지배한 최속군주라 비꼰다.
6.2. 만화[편집]
- 온리 콤판의 만화 <YI SOON SHIN>에서는 무능하고 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선조가 뚱뚱했다는 기록은 없다.[104] 사실 비만보다 더 문제는 서구권 폭군 클리셰대로 만화고기를 손으로 들고 뜯어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연산군 같은 폭군이라도 명색이 예법에 엄격했던 조선의 왕이 이런 창피한 짓을 신하들 보는 앞에서 할 리는 없으므로 한국인이 보기엔 심히 어색한 장면.
- 웹툰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시대가 명나라인 점이 크다. 선조 이후의 중국은 청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왜구네이터 편에서 나대용이 이순신의 부하 나대용과 동일 인물이며 시대도 임진왜란 직전임이 밝혀져 사실상 선조가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 웹툰 <오성X한음>에서 등장해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율곡 이이에게 일부러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들었고 정여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바탕 피바람을 예고하는 등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정철을 배후에서 조정해 기축옥사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성과 한음에게 울면서 살려달라 통곡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자신의 손자와 더불어 박시백 작가가 제일 비판하는 군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조에 비해선 평가가 좀 낫긴한데 그래봤자 도찐개찐
-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에서 등장한다.
6.3. 게임[편집]
- <임진록 2> 오리지날 캠페인에서 유일한 캠페인 전용 등장 인물로 등장한다. 완전한 픽션을 다룬 확장팩과 달리 그나마 현실의 임진왜란 사건을 어느 정도 재현한 <임진록 2>의 캠페인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높은 편이며 전용 초상화도 있지만 이순신이나 권율처럼 자신이 직접 싸우는 장수 유닛이 아닌 '선조의 어가'라는 이동 밖에 할 수 없는 유닛으로 딱 1번 등장한다. 확장팩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도 나오는데 능력치가 좋지 않으며 행정 2/외교 1/군사 0이다.
- <토탈 워: 쇼군2>의 임진왜란 모드인 Morning Sun에서 조선 국왕으로 등장하며 후계자로 광해군을 두고 있다. 전투에서 장군 호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고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따라 능력 6성에 명예수치 만땅을 찍는 명군이 될 수도 있다.
6.4. 영화[편집]
- 2010년 개봉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배우 김창완[105] 이 연기했다.
- 2023년 개봉한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성우 겸 배우 배한성이 연기했다.
6.5. 드라마[편집]
- 1999년 MBC 드라마 《허준》에서는 배우 박찬환[106] 이 연기했다.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107]
불멸의 이순신과 교차해서 보면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주인공 허준 편에 서서 허준을 지원해주고 임진왜란 때는 분조를 이끄던 광해군을 걱정하는 인자한 성군으로 그려졌다. 다만 광해군과의 사이가 돈독하게 나온 것은 아니고 광해군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역사나 이후 다른 사극에 등장하는 선조에 비하면 부자지간이 나쁘지 않게 나온다. 인기있던 드라마라 선조의 이미지 재고에 도움이 될 법도했지만 대중들이 여기서 나온 왕이 선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극 중에서는 다른 사극에서 흔히 보이던 인물 이름을 알리는 자막이 1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선조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극 중에서 허준이 존재했던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1부에 등장한 '선조 1년'이라는 자막과 후반부에 등장하는 임진왜란뿐이다.
- 2000년 KBS 드라마 《천둥소리》에서는 배우 이호재[108] 가 연기했다. 기존의 선조에서 다르지는 않지만 조선군을 매우 나약하게 여긴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과대하게 부풀린 장계라고 여기는가 하면 서산대사가 행재소에 찾아와 "5천 승병이 일어났다"고 하자 서산대사가 떠난 이후 "파리 때만 모인다"고 비난하는 등 오로지 명나라 군대만 찾는다. 특이점이라고 하자면 호통칠 때 벼락치는 듯이 우렁차다는 게 특징이며 다른 임진왜란 배경 드라마와는 다르게도 신하들에게 하대한다.[109]
-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임동진이 연기했다. 위엄은 전혀 없는 선조인데 왕비인 의인왕후에게 내심 고마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드라마 내내 임해군과 충돌하며 광해군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곽정욱(아역), 최철호(성인)[110] 가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는 왕권에 집착하는 왕으로 묘사되었고 임진왜란으로 몽진을 하던 도중 이순신의 첫 승전보에 감격하며 이순신을 매우 중용하는 듯 보였으나 민중들이 이순신을 추앙하는 모습과 류성룡을 시기하는 윤두수와 이순신의 공적을 시기하는 원균의 보고가 겹치면서 점차 이순신을 위험시하기 시작하며 점차 암군의 면모를 보인다. 마지막까지도 명나라 유정의 말을 듣고 선전관을 보내 노량 해전을 준비하는 이순신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칙사를 가두고 출전했다"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6.6. 교양ㆍ다큐멘터리[편집]
1994년 KBS 교양 프로그램 《역사의 라이벌》 〈이순신과 원균〉 편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7. 관련 문서[편집]
- 경복궁
- 기자지
- 기축옥사(정여립의 난)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동구릉
- 만력제
- 목릉성세
-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
-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
- 붕당 정치
- 사림
- 사송유취
- 명종
- 선조 강화선생일기
- 선조국문유서
-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
- 신기비결
- 언해태산집요
- 의병
- 임진왜란
- 정유재란
- 조총
- 조선통신사
- 조선/왕사
-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
- 곽재우
- 권율
- 김덕령
- 대원군
- 류성룡
- 신립
- 원균
- 윤두수
- 이덕형
- 이항복
- 이산해
- 이순신
- 인목왕후
- 인빈 김씨
- 임해군
- 영창대군
- 정철
- 정여립
- 허준
- 분조(分朝)
- 진설
8. 둘러보기[편집]
- 문서 삭제식 이동(선조/생애 → 선조(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