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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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端相
1628 - 1669[1]

1. 개요
2. 생애
3. 문장과 학문
4. 정관재기
5.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조선의 문신, 학자. 연안 이씨이며, 호는 정관재(靜觀齋)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제학, 청풍부사, 인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좌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월사(月沙) 이정구의 손자이고, 예조/이조판서, 대사성, 대사헌, 대사간, 대제학을 지낸 백주(白洲) 이명한[2]의 아들이며, 대제학, 예조판서를 지낸 이일상(李一相)의 동생이다. 아들인 이희조와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형제, 창계(滄溪) 임영의 스승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당시 본인과 집안이 화를 입었던 경험으로 척화론의 입장에 있었으며, 조정에 머물 때 송준길, 송시열 등의 산당과 뜻을 함께하고 현종 초 기해예송에서는 송시열의 체이부정설을 옹호했으며 공의, 사의 논쟁에도 참여하였다. 주자의 <<대학장구>>의 정당성 옹호를 위해 역대 학설을 정리한 <<대학집람(大學集覽)>>을 편찬했다. 문집으로 '정관재집(靜觀齋集)'이 전한다.


2. 생애[편집]


이명한과 반남 박씨 사이의 넷째 아들이다. 1628년(인조 6년) 부친의 임소인 남양부에서 출생하였다. 1636년 9세에 병자호란이 발생하였고, 가족들과 강화도에 피신하였으나 강화도 함락시 셋째 형 이만상(李萬相)과 포로가 되어 개성까지 끌려간다. 인조가 항복한 뒤 다른 포로들과 박석현(礴石峴)에 이르렀을 때 당시 소현세자를 수행하던 고종사촌 홍주원[3]이 옆을 지나가자, 이단상이 급히 홍주원을 불러 그가 이단상을 찾을 수 있었다. 홍주원은 사촌들이 포로가 된 것을 알고 인조에게 요청하여 청의 진중을 왕래하여 수소문해 이들을 다시 찾아냈고 은그릇과 패영(貝纓)으로 값을 치러 풀려날 수 있었다.홍주원 행장 참고

그러나 둘째 형 이가상은 모친을 찾으러[4]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청군에게 죽었고, 조모도 병을 얻어 사망한다. 호란 이후 부친 이명한은 전쟁 책임으로 척화 5신으로 지목되어 심양에 5개월 동안 구금되었으며, 큰 형 이일상은 척화신으로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해 유배되었다가 이명한이 이조판서가 되자 청의 고관의 자제 압송 요구로 심양으로 끌려갔다 돌아왔다. 1645년 호란 10년 후 역병이 창궐하며 부친과 이만상이 세상을 떠나, 가족 중 큰 형 이일상과 이단상 본인만 남게 된다. 이후 이일상을 부친처럼 따르며 학업에 집중하였고, 1648년 진사시에서 장원, 1649년 정시 병과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오른다. 재경관료 대표 가문 출신으로 김육을 중심으로 하는 한당에 속할 법한데, 출사 후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5] 조정에서의 활동은 산당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효종 시기 이조, 병조정랑을 거쳐 대간, 승정원, 시강원 등 청요직을 역임한다.[6] 관직에 있는 동안 호서의 산림들과 의견을 같이 하며 소인의 도학적인 정통성을 옹호한다. 서인 강경파에 속해 남인과 북인과 대립했다.[7] 효종 승하 전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병을 얻었고, 현종이 재위하며 중앙 조정을 떠났다. 현종의 동궁 시절 스승이었던 바 조정에 여러차례 불렀으나 출사를 사양하였고, 상소를 통해 조정 현안에는 의견 개진을 하였다. 현종 재위 시기에는 외직인 청풍부사(1661년), 인천부사(1664년)를 1-2년 가량만 역임했다.

인천부사에서 물러날 즈음에 이단상은 ‘공의(公義)/사의(私義) 논쟁’에 휘말려든다. 홍문관 수찬이던 김만균이 병자호란에서 조모가 순절하였기에 청사의 영접을 회피하며 사직하였고, 승지 서필원이 김만균을 파직하고 처벌할 것을 청한다. 이에 송시열은 주자의 복수론[8]을 인용하여 김만균을 옹호한다. 이에 서필원은 부자, 군신간의 의리는 조손, 형제 관계와 다르다며 복수 범위에는 차별이 있다고 반박한다. 그 사례 중 하나로 호란으로 형제가 죽었지만 나랏일에 앞장선 홍명하, 허적, 이일상[9]을 거론한다.

본시 이단상은 서필원과 친하였기에[11] 자신의 집안 내력이 오해를 일으킬까 간여하지 않으려 했다. 처음에는 송시열의 인용이 인명도 틀리고 사실의 내용도 잘못된 것임을 밝혔는데, 이 사실을 공적으로 언급하면 송시열이 난감해질 것을 고려하여 스스로 오인한 것을 수정하도록 배려하였다. 하지만 상기 고사에서 송나라의 유홍이 조부의 원수인 금나라에 사신으로 임명되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사행에 임한 것을 주자 또한 칭찬했다는 사실을 들어 송시열의 복수5세설에는 의심을 보였다. 서필원의 입장에 가까웠던 이단상은 추가로 예기, 주례, 춘추와 한유, 주자 등의 저술에서 언급된 복수의리를 검토한 후 부모, 조부모까지는 사은이 중하나, 고증조나 종형제, 붕우간에는 공의가 우선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사의의 허용 범위를 조부모까지 확대하여 송시열 주장 일부를 수용하며 절충하였으나, 공의를 위해 사의를 굽히고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서필원이 기본적인 입장은 끝까지 옹호한 셈이다.[12]

그러나 서필원이 자신의 집안사를 언급하자 공개적인 비판에 나섰다. 1664년 '應旨論時事疏'를 현종에게 올리며 송시열이 주장한 복수의 대의를 옹호하고, 서필원의 주장이 ‘학문적 근거를 갖추지 못하고(無識), 도리에 어긋났다(駭悖)’고 하였으나, 서필원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그의 충정을 헤아리지 못했음을 함께 이야기한다.[13] 그리고 송시열이 출사를 꺼리는 이유가 김좌명, 김우명 형제와의 사이 때문이니 그러한 처지를 헤아려 달라고 현종에게 주장한다.[14] 김좌명 형제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들은 송시열과 친하지 않을 뿐 혐원이 없는데 친구 이단상이 국정의 문제를 자신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문제를 왜곡했다고 상소하였다.[15] 서필원 또한 반문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단상의 주장은 미래를 그르칠 망언이라고 비난한다.

송시열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오랜 친구인 서필원과 김좌명에게 공개적인 비난을 당하며 난감한 처지에 놓인 이단상은 세상이 다 아는 김좌명 형제와 송시열의 불화를 임금이 몰라 실상을 아뢴 것 뿐이며, 서필원의 주장을 무식하다고 표현했지만 그의 의견에는 공감한다며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그 해명에 대해서도 서인 내부에서도(김익렴) 이단상이 서필원을 옹호하고 송시열을 비난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16] 이단상은 송시열에게 편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송시열 또한 이단상의 본뜻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답신을 한다.링크 이 같은 과정에서 오랜 친구와 절교하게 되고, 산림에서도 비난을 받게된 이단상은 곤혹스러움에 빠지며 은거를 결심하게 된다.[17] 일부러 月課를 짓지 않아 파직되었는데, 송준길과 홍명하, 조복양이 그를 남겨둘 것을 간청하여 부응교에 제수되나 사직소를 올리며 낙향한다.[18]

결과적으로 이단상의 주장은 서필원의 입장에 가까웠으나, 송시열과의 친분을 고려하여 전반적으로는 그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1665년(38세) 선영이 있는 양주의 이일상의 농막에서 자신의 호이기도 한 정관재(靜觀齋)[19]를 짓고 학문과 강학에 집중한다.[20]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도학과 상수학(象數學)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중앙 정계와의 끈은 완전히 놓지 않았으며 예송에 관련하여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사촌 박세채에게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청의 강압과 관련된 외교적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자[21] 소옹의 상수학에 근거하여 자신이 직면한 명청교체기의 무기력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22] 이는 주위의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박세채는 그의 상수학이 玩物喪志의 폐단으로 흐를 것을 우려하며, ‘하늘의 운행에는 상세하지만 사람의 현실에는 소략하고, 도식에 급급하여 의리를 소홀하다’며 비판하며 이러한 병폐를 고치기 위해 논어와 맹자, 소학과 근사록 등 전통적 공부 방법으로 돌아올 것을 충고한다. 송시열도 이단상에게 마음 공부에 힘쓰라고 충고하는 한편 그의 先博後約한 학풍이 전통적 공부 방법에서 벗어날 위험성을 늘 걱정했다. 이단상 또한 그러한 우려를 잘 알고 있기에 제자들에게도 경계한 바 있다.[23]

1669년 송준길의 추천으로 부제학을 제수 받아 상경하였으나 병으로 사망한다.[24] 사돈이자 친우인 김수항이 묘비명을 작성하였다.링크

사후 아들 이희조가 글을 수습하여 박세채와 임영, 김수항, 남용익의 산정 도움을 받았고, 제자인 함경도 관찰사 윤지선이 문집인 정관재집(靜觀齋集)을 간행하였다.문집 해제우리말 번역 링크


3. 문장과 학문[편집]


호란 후 집안이 평안하지 못하여 뚜렷한 사승 관계를 맺지 못했고, 주로 부친과 큰 형에게 배웠다. 문장이 뛰어난 가문 출신으로 본인도 문장에 자부심을 가졌다.[25][26] 외사촌동생인 박세채의 평에 따르면 그의 문장은 화려한 수사와 규정된 법도에 얽매이지 않았고 한번 붓을 잡으면 막힘없이 써내려 가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또한 동년배들이 따를 수 없는 박식하고 주밀한 문장에 더하여 세상 이치(名理)에 대한 고민까지 갖추었음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장점이라 평가했다. 젊은 시절의 글을 보면 술과 시를 좋아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직설적인 언행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동안 상수학(象數學)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학문으로, 주자학(심성론과 예론 위주) 일변도의 학풍이 아닌 낙론, 북학으로 이어지는 서인 내부의 개방, 진보를 이끈 학자[27]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17세기 주자학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의견도 제시된다.[28] 주역과 상수학에 진력한 것은 현종 시기 낙향 이후이며 이전까지는 대학과 심경을 위주로 한 전통 주자학에 충실하였다. 특히 사위인 이행과 김창협에게도 송대 도학 이론을 재정립한 심경을 열심히 가르쳤다. 제자로 아들인 이희조와 김창협, 김창흡, 임영 등이 있다.

1660년 송시열의 체이부정설을 비판한 허목의 상소로 예송논쟁이 본격화되는데, 기년복을 주장하던 송준길(당시 55세)이 허목에 대한 반박 상소를 준비하며 이단상(당시 33세)에게 의견을 구한다. 이단상의 학문적 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 이후 윤선도가 송시열에게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며 비판하고, 서인 중 재경관료의 대표인 원두표와 산림의 일원이자 송시열의 사돈인 권시마저 윤선도를 두둔할 때 이단상은 송시열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나선다. 그들의 배후로 윤휴를 지목하며 절교 선언을 하고, 송준길에게는 남인과의 관계를 끊도록 조언한다. 불충 혐의가 씌워져 논쟁의 대응이 어려워져 낙향한 송시열에게는 '지나친 신념에서 비롯된 가벼운 행동(過信輕動)'이라며 조정에 머물도록 권유하고, 예송을 지금 수습하지 못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편지로 설득한다. 이후 송시열을 대면한 이단상은 그의 너무 준엄한 성품을 두고 지나치게 온화한 송준길의 성격과 반반씩 나눠 가지면 좋겠다고 하기도 한다. 이후 송시열은 20세 연하의 이단상에게 친구로 대하며 조정에서 조부와 부친을 이어 서인의 중추로 활약하기를 기대했다고 한다.[29]


4. 정관재기[편집]


이단상이 정관재를 짓자, 송시열이 정관재기를 써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벗 연안(延安) 이유능(李幼能=이단상)이 동교(東郊) 밖 영지동(靈芝洞)에 터를 잡아서 집을 짓고 정관(靜觀)이라 이름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선비된 자로서 누구인들 이치를 관찰하여 스스로 터득하고 싶지 않으랴마는, 마음이란 본시 살아 있는 물건이어서 물욕에 유혹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항상 어지럽고 시끄러워 마치 물결이 움직이고 불이 이글거리듯이 잠시나마 정지하고자 해도 되지 않다가 마침내 그 마음을 원수같이 여기게 되니 어찌 그 근본을 세워서 약간의 이치나마 엿보겠는가.

지금 유능이 이미 벼슬을 그만두고 조용히 임학(林壑)에 거처하니, 그 처소는 이미 정(靜)한 것이다. 그러나 몸이 비록 정한 데 있어도 마음이 이를 주재(主宰)하지 못하면 그 해됨이 태악(台嶽)의 좌치(坐馳)보다 더 심할 것이니, 유능이 사물 밖에 초연해서 이해와 득실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고요해서 요동되지 않는 일체가 진정 거울이 밝고 물이 정지된 상태와 같을 것이다. 그런 뒤에 도서(圖書)를 옆에 두고 조석으로 즐긴다면 저 천지 귀신의 신묘함과 고금 흥망의 변화도 모두 뚜렷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마음이 이미 사리를 깨달아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세상 걱정을 잊는다면 수명의 부족함도 모르게 될 참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일이겠는가.

아, 만물에 모두 자득(自得)의 이치가 있는데 이를 정관(靜觀)하지 않으면 능히 터득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므로 명도(明道)가 소자(邵子)와 화답한 시(詩)가 있고, 득실(得失)은 본시 분명한 것인데 이를 정관하지 않으면 능히 분변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므로 회옹(晦翁)이 저군(儲君)에 대한 진언이 있었는데 유능은 요점을 얻었다 이를 만하다.

근래에 그가 논한 일월(日月)의 운행(運行)하는 도수(度數)와 격물치지(格物致知) 등에 대한 설(說)들을 보니, 그 정(靜) 가운데서 얻어진 바가 적지 않았다. 이같이 계속하여 그만두지 않는다면 후일의 성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유능의 선왕고(先王考) 월사 상공(月沙相公=이정구)은 도(道)가 임금의 계책을 빛나게 하고 문장(文章)이 종계(宗系)의 욕스러움을 씻어서 울연(蔚然)히 성조(聖朝)의 대아 군자(大雅 君子)가 되었고, 그 선군(先君)인 상서(尙書) 백주공(白洲公=이명한)도 문장과 명망으로써 한 시대의 첫째가 되는데 유능이 능히 선대의 업적을 이어받았으니 초야에 묻혀 있는 자취와는 도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비록 고요하고 한산한 곳에 길이 있고자 하나 어찌 되겠는가. 내가 알기로는 여기서 관찰하는 바가 마침내 쓰임이 될 것이니, 이 한가한 때에 더욱 힘쓰기 바란다. 비록 불행하여 끝내 쓰임이 되지 않더라도 쓰일 만한 인격을 더욱 양성하게 될 것이다. 이미 태극에 동과 정이 있다 하였으니 일을 멀리하고 사물과 떠나서 한쪽에만 치우침도 성인의 대중(大中)의 도가 아니다. 유능은 어떻다고 보는지.

숭정 기원 후 무신년(1668, 현종9) 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송자대전』 권141, 기, 「정관재기」



5. 가족 관계[편집]


6대조는 학자이자 바둑으로 이름 높았던 이석형이다.[30] 조부는 문장으로 이름 높았고 임진왜란 당시 대명외교를 담당했던 월사(月沙) 이정구이다. 부친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신이며 대제학을 지낸 이명한이다. 모친은 선조가 영창대군을 부탁한 고명칠신 중 한 사람인 박동량의 딸이다. 박동량의 손자는 박세채이며, 이단상과 박세채는 곧 외사촌이다. 이단상의 큰 형 이일상(1612-1666)도 대제학에 올랐다.[31] 1628년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 바로 출사하지 못할 정도였다. 3대가 대제학에 올라 문명이 대단히 높았다. 둘째 형 이가상(1615-1637) 또한 문과 급제자이며 나만갑의 딸과 혼인하였다. 급제 후 관직에 나가기 전 병자호란이 발생하였고, 병자호란 당시 모친을 찾아 헤매던 중 청군에 피살되었다. 아내 나씨는 이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사망하였다. 셋째 형 이만상(1622-1645)은 진사 급제하였으나 당시 돌았던 역병에 걸린 부친의 병구완을 하였고, 부친 사망 후 본인도 몸을 상해 요절하였다.

자녀들의 혼맥이 엄청나다. 당대 명문과 중첩된 혼인을 맺을 수 있는 서울의 서인 명문가임을 입증한다. 소현세자를 심양까지 호종한 척화신이자 우의정을 지낸 이행원의 딸과 혼인하였고, 큰아들은 지촌(芝村) 이희조이다. 이희조는 김수흥[32]의 딸과 혼인하였고, 부친 사후 송시열의 제자로 들어간다. 대사헌, 이조/공조참판을 지냈으며, 노소 분열 당시 노론의 선봉에 선다. 둘째 이하조는 김수증[33]의 손녀와 혼인하였다.[34] 딸들은 각각 이조참의 이정기의 아들 이행, 김수항의 아들이자 본인의 제자인 김창협, 민유중의 아들이며, 송준길의 외손자,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의 손자이며 강화학파의 창시자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과 혼인하였다. 안동 김씨 김수증 삼형제와는 모두 사돈을 맺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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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내용은 논문을 기반으로 정리되었다. 우경섭, 靜觀齋 李端相의 생애와 사상(1), (2)[2]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남구만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조의 실제 작가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3] 1606 - 1672. 이단상의 조부 이정구의 외손자이다. 곧 고모의 아들이다.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와 혼인하여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다. 홍봉한, 홍인한, 홍국영 등의 선조이다.[4] 모친이 강화도에 들어가는 배를 먼저 탄 것을 몰랐다고 한다.[5] 이귀의 아들 이시백, 이시방 형제, 신흠의 손자 신정과 친했다고 한다. 이귀, 이시백, 이시방과는 같은 가문으로 먼 친척이기도 하다. 이석형의 손자 대에서 갈라졌고, 큰 손자 이수장의 손자가 이정화로 이귀의 부친이며 이시백, 이시방의 조부이다. 셋째 손자 이순장의 손자가 이정구이며, 그의 손자가 이단상이니 같은 항렬에 속한다. 훗날 절교하게 되나 김좌명, 서필원과도 교분이 깊었다.[6] 고위 관료로 성장하는 전형적인 코스이다[7] 김장생의 견해를 비판한 윤선도, 그리고 정인홍을 두둔하던 권시를 공격하였다.[8] '복수의 의리는 5대까지 유효하다'[9] 이단상의 큰 형[10] 이단상과 사돈 사이[11] 1656년 충청감사로 부임하는 서필원에게 송별시를 써주고, 1662년 서필원과 당시 대제학 김수항[10]의 갈등이 있었을 때 김수항에게 편지하여 서필원을 변호해준 바 있다.[12] 참고: 정만조, 조선 현종조의 사의, 공의 논쟁[13] '서필원이 조손 관계로 단정한 것은 진실로 무식(無識)한 짓이었지만, 이른바 참작하여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요지는 전혀 소견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14] 효종 말기 김육의 무덤에 수도(隧道)를 참용한 일로 김육의 아들인 김좌명을 처벌하라는 민유중의 청이 있었다. 김좌명 형제가 민유중의 배후에 송시열이 있다고 여겨 그를 원망한다고 하였다.[15] ‘淸名之士를 자처하는 이단상이 벗을 속이고 팔아먹었다(賣友)’[16] 위에 언급된 것처럼 이단상이 논쟁 당시 송시열이 인용한 고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며 논리에서 서필원을 유리하게 만들어준 바가 있다.[17] 난감해진 이단상의 처지를 걱정한 송시열이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가 전한다.링크[18] 이후에도 고대 경전에서 복수와 관련된 전거를 수집하고 논쟁의 상소와 편지글을 모아 '복수설' 상중하를 지었다.[19] 남이섬의 유일한 호텔인 정관루의 본관 이름이 '정관재'로 같은데 이단상의 정관재는 양주에 있었기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20] 본격적으로 학문에 집중한 시기가 이 때부터 사망시기까지 길어야 5년으로 학문적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김창협이 쓴 글에서 '편차(編次)하신 책들을 꺼내 보이면서 논저(論著)하고 싶은 것들을 일일이 말해 주었는데, 그러면서 “앞으로 내가 수십 년을 더 살 수만 있다면 내 뜻을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는데 1-2년 후에 사망하게 된다. 김창협은 스승이자 장인인 이단상이 뛰어난 문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학문의 길을 선택한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링크[21] 현종의 벌금, 임인관 사건[22] 기본적으로 天道와 人性의 선함을 믿는 유학자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선택할 수 있었던 사상적 저항 방식 중 하나였다.[23] '이(상수학)는 학자가 몰라서 안 되지만 초학자의 급무는 아니니, 혹 許遠함에 힘쓰고 數學에 빠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저 큰 틀만 대략 이해할 뿐 절대 거기에 전념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存心向裏하고 切問近思하는 일에 노력을 더하고 날로 힘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24]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에서 졸기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다.실록 졸기실록 졸기2[25] 조부, 부친, 숙부 이소한은 송나라의 소순, 소식, 소철 3부자에 비견되었다고 한다.[26] '건국 이래 우리 집안만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경우는 없었다'고 남긴 글이 있다. 이 글처럼 실제로 조부와 아버지, 큰형 이일상이 대제학을 지내 3대가 대제학을 지냈다는 당시 유례 없는 일을 탄생시켰다.[27] 김창협과 김창흡의 스승으로 그들에게서 이어지는 홍대용, 박지원의 북학까지 이어지는 출발점을 이단상에서 찾아왔다.[28] 참조된 논문인 우경섭 교수의 견해[29] 양송과 처음에는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이단상이 양송의 출사를 비난하며 그들의 실패를 장담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재경관료와 산림의 대립을 보이는 일화이기도 하다.[30] 한 해에 3번 장원급제했다고 한다.[31] 예조/호조/공조판서, 좌/우참판 역임.[32] 김수항의 둘째 형[33] 김수항의 큰 형[34] 이하조의 처제가 영빈 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