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석(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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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석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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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6번
정국헌
(1987~1990)

김태석
(1991~1999)


레이
(2001)
SK 와이번스 등번호 63번
팀 창단

김태석
(2000~2001)


김용태
(2006)
LG 트윈스 등번호 29번
정현택
(1998~2001.7.24.)

김태석
(2002)


박만채
(2003~2006)



김태석
金泰錫 | Kim Tae-Seok

출생
1967년 2월 12일 (57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청주우암초 - 청주중 - 청주고 - 경성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입단
1991년 2차 1라운드 (전체 3번,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1~1999)
SK 와이번스 (2000~2001)
LG 트윈스 (2002)
지도자
경남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03)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04)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04)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7~2020)
경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1)
경성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2~)
프런트
롯데 자이언츠 전력분석원 (2005)
롯데 자이언츠 기록원 (2006~2016)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전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SK 와이번스의 역사적인 첫 경기의 선발투수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편집]


청주중, 청주고, 경성대를 졸업하고 1991년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 지명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2] 참고로 이 시즌 롯데는 드래프트에서 1차지명 박정태와 2차 1라운드 김태석, 2차 2라운드 전준호까지만 지명하고 3라운드부터 10라운드까지는 모조리 패스해버리는 패기를 보여줘 우려를 샀으나, 결과적으로 박정태와 전준호의 활약으로 1991년 포스트시즌 진출, 이듬해인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

그 와중에 김태석만 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영 부실한 활약에 머물렀다. 대부분 중간계투로 있었지만 땜빵 선발로 몇 차례 기회를 받았음에도 잘 살리지 못했고 결국 입단 이후 1993년까지 3년간 1승 8패에 그칠 정도로 활약이 저조했다.

본격적으로 기회를 얻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시즌이었다. 이 시즌 롯데의 주축 선수들 상당수가 방위복무를 병행하느라 전년도까지 기회를 받지 못했던 선수들이 대거 출전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김태석 또한 이 시즌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87과 2/3이닝을 던져 5승 6패 2세이브 5.13의 평균자책점으로 간신히 롯데팬들에게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다음해 1995년은 김태석이 방위복무를 병행해 출전기회가 크게 줄었지만, 이듬해인 1996년 소집 해제 후 제대로 포텐이 터지게 된다. 염종석의 이탈과 윤학길, 박동희의 부진으로 주형광을 제외하면 황폐화된 투수진을 김태석이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공백을 메꿨고, 본인 커리어 최초로 규정이닝을 돌파한 128이닝을 던져 8승 4패 2.95의 평균자책점으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1997년과 1998년은 2년 연속으로 팀이 꼴찌를 하는 안습한 행보를 보였지만, 김태석은 이 암흑기 동안에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팀에서 없어선 안될 레귤러로 안착했으며, 특히 1998년은 본인 커리어 최다인 138이닝을 던져 9승 13패 4.63의 평균자책점으로 아깝게 10승 달성은 하지 못했지만 당시 주형광문동환에 이어 팀내 다승 3위를 기록했다.

롯데가 준우승을 했던 1999년에는 강해진 팀 전력만큼 김태석은 출전 기회가 줄었지만, 그래도 14차례의 선발 등판을 포함해 78이닝을 던져 4승 2패 5.4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각 구단으로부터 보호명단 외 선수 1명씩을 데려오게 되었고, SK는 롯데에서 김태석을 데려왔다. 2000년 개막전에 선발 등판해서 SK 와이번스 역사상 첫 선발투수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2001년은 1군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방출되었고, 2002년에는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LG 트윈스로 이적했으나, 여기서도 1군에서 거의 뛰지 못한 채로 한 시즌을 보낸 뒤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인 2003년은 경남고 코치로 활동했다가 2004년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로 부임했지만, 시즌 도중 2군 투수코치로 보직변경이 되었다가 그해 말 구단 전력분석원으로 다시 보직이 바뀌었고, 2005년 말부터는 기록원으로 다시 보직이 바뀌어 다년간 기록원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이 당시 롯데 경기 중계에서 덕아웃을 비출 때마다 감독 옆에서 기록하고 있는 김태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7년 대구고 코치로 부임해 수 년간 지도하다가 2022년 말 모교인 경성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187cm라는 당시로선 상당한 장신에 얼핏 사이드암 스로로 착각할만큼 팔이 낮은 스리쿼터 스로 투수였다. 그나마도 원래 당시 신인이었던 1991년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언더핸드였는데[3] 큰 키의 장점을 살리고자 그 시즌이 끝난 직후 스리쿼터로 전향한 케이스였다.[4]

다만 큰 키에 비해 체중이 80kg도 채 되지않은 마른 체격이라 최고구속은 거의 138km 정도에 머물렀고, 공끝도 밋밋한 편이라 제구가 되지 않으면 맞아나가는게 일상이었다. 그나마 낙차 있는 슬라이더를 연마해 결정구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수 년간 레귤러급 투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통산 완투 횟수도 9차례나 기록할 정도로 나름 완투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도별 기록을 보면 커리어 하이 시즌을 비롯해 김태석이 그나마 두각을 나타내며 활약한 시기는 전부다 롯데가 하위권에 머물던 암흑기였고, 팀 성적이 좋았던 시기는 어김없이 김태석의 비중이 크게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커리어동안 확고한 레귤러로 자리잡진 못했고, 대체 선수 수준의 활약을 보인 셈.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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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학번[2] 사실 빙그레 이글스가 그의 연고팀이라는 점을 내세워 오래 전부터 김태석을 조용히 노리고 있었으나 그 점을 알고 있었던 강병철이 롯데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롯데가 재빠르게 지명한 것이다.당시의 기사[3] 당시 영상의 2분 41초에서 그의 투구폼을 확인할 수 있다.[4] 참고로 프로 마지막 해인 2002년 다시 사이드암으로 투구폼을 교정했으나 이 시즌 1군에서 고작 2경기 출전해 4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