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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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인천광역시 중구 개항로 45번길 21-32 (내동 3)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 찰스 존 코프 주교와 그 일행들이 세운 교회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인 '성 누가[2] 병원'[3] 과 같이 운영하였다. 최초의 성당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최초의 성당은 소실되고, 남은 신자들이 새로운 성당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기 때문에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성당은 소실되었어도 교회공동체[4] 는 송학동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 역사[편집]
2.1. 성당과 병원이 시작되다[편집]
1891년 초대 조선교구장 이였던 찰스 존 코프 주교는 본격적인 선교를 위해 중구 송학동 3가 3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 건설에 착수한다. 또한, 성당 공사 도중 찰스 존 코프주교는 지금의 성당 자리인 내동 3 부지를 매입하고, 의료선교를 위한 병원건립을 시작한다. 같은해 9월 31일 옛 성당이 완공되어 '성 미카엘과 모든 천신'의 성당으로 축성하고, 10월 18일 '성 누가 첨례일'[5] 에 병원이 완공되어 그 이름을 '성 누가 병원'이라 하였다.
2.2. 성 누가 병원의 업적[편집]
성 누가 병원은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진료개시 3개월만에 입원 34명, 외래 76명, 왕진 25건 등 이후로도 엄청나게 많은 조선인들을 돌보았다. 병원을 맡던 랜디스 박사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 소문을 듣고 전라도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성 누가 병원은 진료비를 일체 받지 않게 하여 아프고 가난한 조선인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올 수 있게 하였고, 온돌 입원실, 가마 엠뷸런스
2.3. 병원이 문을 닫다[편집]
1898년 4월 16일 성 누가 병원을 맡고 있던 랜디스 박사가 장질부사로 별세했다. 그로 인해 잠시 문을 닫았다가 카덴 박사나 와이어 박사 등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되었으나,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선교부의 지원이 끊기게 되면서 1917년 6월 성 누가 병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2.4. 성당이 무너지다[편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국 최초의 성당인 '송학동 성 미카엘과 모든 천신 성당'도 폭격을 받아 무너졌다. 그 뿐만아니라 당시 관할사제였던 조용호 신부가 납북되는 등 여러 곡절이 계속됐다. 53년 전쟁이 끝나고 교우들은 '성 루가 병원'이 있었던 내동 3번지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한다.
2.5. 지금의 모습으로[편집]
1955년 8월 28일 지금의 성당 자리에 정초식을 거행하고, 1956년 6월 23일 당시 한국교구 보좌주교였던 아서 차드웰 주교가 지금의 모습의 성당을 축성하였다.
2.6. 현 성당의 모습[편집]
2.7. 현 성당 완공 이후[편집]
- 1965년 '성 미카엘 유치원'을 설립한다.[7]
- 1989년 6월 25일 '나눔의 집'을 개원한다.
- 1993년 '성 미카엘 종합사회복지관'을 개관한다.
- 1998년 '아동복지관'을 개관한다.
- 2005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1호로 등재된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3.1. 드라마[편집]
3.2. 영화[편집]
3.3. 뮤직비디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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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당] A B C [현성당] A B C [1] 맞배지붕을 본뜬 지붕[2] 성 루가의 옛 번역명이다.[3] 당시 조선인들은 '영국병원'이라고 불렀다.[4] 사실 좀 어색한 단어이다. 원래 '교회'라는 단어가 '믿는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나, 한국의 개신교회당이 대중적으로 '교회'라고 인식되다 보니(원래는 개신교회의 예배 건물은 '예배당'이다.), 그와 구별하기 위해 뒤에 '공동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다.[5] '성 루가 축일'의 옛 번역명[6] 앞은 탁상제대이고, 뒤쪽은 벽제대이다.[7] 다만 유치원은 동인천 일대 학령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폐원됐다.[8] 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