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베드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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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뉴베드포드.jpg

1. 개요
2. 역사
2.1. 포경 산업 도시
2.2. '자유 도시'
2.3. 직물 공업 도시
2.4. 현대
3. 사건사고
4. 여담


1. 개요[편집]


New Bedford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항구 도시. 뉴베드퍼드로도 표기된다. 인구는 약 10만으로, 주에서 9번째로 큰 도시이다. 1652년에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이다. 19세기 전반 뉴베드포드는 미국 최대의 포경 산업 도시로 번영하였고, 소설 모비 딕의 배경이 되었다. 19세기 말엽 고래잡이가 쇠락한 후에는 직물 공업 도시가 되어 중요성을 유지하였고,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포르투갈계 미국인이 정착하였다.[1]

현재 뉴베드포드는 모비딕을 내세운 관광업과 어업 및 해산물 가공업 등이 주요 산업이다. 시내에는 포경 박물관이 있다. 시가지는 아쿠시네트 강 하구에 위치하며, 건너편의 도시 페어헤이븐과 같은 광역권을 이루고 있다. 도시 북서쪽에 뉴베드퍼드 지역 공항이 있다. 여객선 터미널도 있으나, 허리케인 방지용 하구둑의 도개교를 통하기에 페리 급만이 운행한다.

2. 역사[편집]


파일:뉴베드포드 구도심.jpg

뉴베드포드 구도심 전경

본래 아쿠시네트 강 유역에는 약 1만에 달하는 왐파노아계 원주민이 거주하였다. 1602년, 유럽인 최초로 뉴잉글랜드 해안 탐사에 나선 영국인 항해가 바솔로뮤 고스놀드가 일대를 조사하였다. 1652년 유럽계 이주민들은 원주민들로부터 아쿠시네트 하구의 470 km2 일대를 매입하고 다트머스 식민지를 세웠다.[2] 다만 원주민들은 토지 매각 개입을 인지하지 못하였고, 점차 늘어나던 유럽 이주민들은 기존의 약속보다 더 많은 토지를 농장으로 활용하였다. 이에 1675년 양측 간에 충돌이 벌어졌고, 원주민들은 다트머스 식민지를 공격했으나 '러셀의 방앗간' 등 요새화된 건물들에 농성하던 유럽인들을 축출하지 못하였다. (필립왕 전쟁)

한편 1656-57년의 금지 조치 이래로 보스턴과 플리머스의 청교도 공동체로부터 박해를 받은 퀘이커 교도들은 1691년부터 남쪽 해안의 다트머스로 대거 이주하였다. 주민의 과반을 이루게 된 퀘이커 교도들은 1699년 첫 회당을 세웠다. 일대의 비옥한 토지 덕에 정착은 수월했고, 이에 뉴포트포츠머스 등지의 퀘이커와 침례회 및 청교도 신자들이 이주해왔다. 본래 농촌 마을들의 느슨한 연합이던 다트머스 식민지는[3] 점차 1729년에 항구 마을로 설립된 베드포드를 중심으로 두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베드포드에는 다수의 조선공, 직물공, 기계공, 대장장이 등 다양한 기술 장인들이 유입되었다. 그중에는 당대의 포경 산업 중심지인 낸터켓에서 이주해 온 고래잡이 및 (향유를 이용한) 고급 촛대 제작 가문들도 있었다. 따라서 18세기 말엽 베드포드 항구는 고래잡이와 대외 무역의 장이 되었고, 도시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베드포드는 뉴런던 등의 다른 항구 도시들처럼 영국군에 점령되어 방화를 당했다. 독립 후 다트머스 식민지는 베드포드 출신 러셀 가문의 제안으로 '뉴베드포드'로 개칭되었다. (1787년 2월 23일)[4] 영국 해군의 해안 봉쇄로 침체되었던 베드포드의 경제는 1790년대 들어 호황을 이루게 된다. 1792년 도시 최초의 신문인 메들리 (뉴베드포드 마린 저널)이 창간되었고, 같은해 6월 첫 우체국이 들어섰다. 낸터켓과 달리 심해항이 있던 뉴베드포드는 빠르게 신생 미국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1796년에는 페어 헤이븐[5]과의 다리도 놓였다. 한편 독립 이후 미국은 많은 이민자들을 받았다. 18세기까지 영국-네덜란드계 개신교도들이 주를 이루던 메사추세츠의 인구 구성은 19세기 초엽 대규모의 아일랜드 이민과 함께 급변하였다. 뉴베드포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1818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시내에 성 마리아 성당을 세웠다.[6]

2.1. 포경 산업 도시[편집]


18-19세기 윌리엄 로츠와 새뮤얼 로드먼과 같은 퀘이커 교도들은 뉴베드포드의 포경업을 발전시켰고, 미영전쟁의 2차 봉쇄가 풀린 후 도시는 본격적으로 미국 포경업의 중심이 되었다. 동쪽의 마타포이셋에서 제작한 포경 선박들은 뉴베드포드에서 출항하여 대량의 고래를 포획하였고, 선상 해체 기술이 도입된 후에는 최대 4년까지 바다에 나가기도 하였다. 포경선들이 돌아온 도시에는 고래 기름과 향유, 경랍 등의 특산물로 가득했다. 세계 최대의 포경 산업 도시로써 뉴베드포드는 (1인당 소득 상) 북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손꼽혔고, 약 1만의 장정들이 포경업에 종사하였다. 1857년 기준 뉴베드포드 항에는 329척의 선박이 정박하였고, 그 가치는 1200만 달러에 이르렀다. \

경제의 발전과 함께 인구 역시 1820년의 4천에서 1860년의 2만 4천으로 크게 늘었다. 이에 힘입어 뉴베드포드는 1847년, 마침내 도시 (city) 지위를 얻었고, 같은해 뉴베드포드 사학회가 설립되어 도시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동시에 퀘이커 교도 자산가들은 역시 철도 등의 기반 시설 구축에 자본을 풀며 도시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이로써 1840년 뉴베드포드에는 철도가 들어섰고, 이로써 뉴욕-필라델피아-보스턴 등 미국 북동부 경제권에 포함되었다. 또한 그들의 평등주의에 의거하여 뉴베드포드에는 영국/아일랜드계 백인, 원주민, 서아프리카 흑인 등 다양한 인종의 노동자들이 출신에 상관 없이 함께 일하였다. 따라서 자연스레 뉴베드포드는 19세기 중반 들어 미국을 달군 노예 폐지론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2.2. '자유 도시'[편집]


파일:포트 라드먼.jpg

파일:포트 타이버.jpg
남북전쟁기의 요새인 포트 테이버 (로드먼). 인근에 포대도 남아있다.

관용적 분위기의 뉴베드포드는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 (Underground Railroad)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이를 통해 많은 남부 출신 흑인 노예들이 도시에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1838-41년간 도시에 거주하며 부두에서 일한 프레드릭 더글러스와 당대의 가장 뛰어난 작살이던 템플 토글을 개발한 루이스 템플 등이 있었다. 뉴베드포드 주민들 역시 흑인 인권 신장에 기여하였다. 일례로 원주민계 퀘이커 교도이자 거부였던 폴 쿠페의 노력 하에 뉴베드포드의 흑인 재산 소유자들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 해방령에 수십년 앞서 투표권을 얻었다.

흑인들과 함께 포르투갈과 그 대서양 식민지 (카보베르데, 아조레스, 마데이라)에서 이미 포경업에 익숙한 이민자들이 풍부한 일자리를 찾아 대거 뉴베드포드로 유입되었고, 1871년 세례자 요한 성당을 세웠다. 유대인 이민자들 역시 유입되어 포경선에 보급 물자와 각종 장비를 판매하였다. 뉴베드포드 경제의 주축이던 포경 산업은 1859년, 펜실베이니아에서 고래 기름을 대체할 석유가 발견되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남북전쟁 중에는 북군이 남군 측 찰스턴 항구를 봉쇄하기 위해 뉴베드포드의 (활동을 중단한) 포경선들을 매입하여 돌과 모래, 진흙을 실은 후 쿠퍼 강 하구에 가라앉히기도 했다.[7]

2.3. 직물 공업 도시[편집]


19세기 말엽, 쇠락하던 뉴베드포드의 경제는 직물업의 성장과 함께 회복되었다. 1875년 기준 왐숫타 공단에서는 1만 9천의 면화 더미를 2천만 야드의 옷감으로 제조하였고, 그로 인한 수익은 포경업 전체를 상회하였다. 왐숫타 공단은 1892년까지 세계 최대의 직물 산업단지로 남았다. 직물 공업의 호황으로 뉴베드포드는 19세기 중반 때보다 더 번영하였고, 마운트 워싱턴 유리 회사 (페어포인트)는 신흥 부유층을 위한 유리나 은제 공예품을 제작하였다. 도시의 부흥과 함께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폴란드 이민자들 역시 상당수 유입되어 각각 1877년 성심 성당, 1903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교구가 세워졌다. 세계 1차 대전 후에는 다수의 동유럽 유대인들이 유입되어 직물업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2.4. 현대[편집]


1920년대 들어 저렴한 노동력에 기반한 남부의 직물 공업이 발달하였고, 이에 뉴베드포드의 공장주들이 가격 경쟁을 위해 임금을 10% 삭감하려 하자 1928년 4월 대대적인 파업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장기 투쟁 끝에 그해 10월, 임금을 5%만 삭감하는 조건 하에 파업은 마무리되었다. 그와 상관없이 뉴베드포드는 결국 직물 공업의 패권을 잃었고, 20세기 중반 내내 인구 감소를 겪었다.

포경업과 직물업이 모두 쇠퇴한 후 뉴베드포드의 중심 산업은 어업과 제조업이 되었고, 근래에 들어서는 헬스케어 산업도 메사추세츠 주를 대표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1990년대 12%를 넘었던 실업률은 2005년 7%로 떨어졌고, 따라서 감소하던 인구는 21세기 들어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 2010년대 들어 시정부는 해안에 풍력 발전 단지 건설을 추진 중이다.

3. 사건사고[편집]


80년대의 뉴베드포드는 미국의 대표적인 범죄 도시 중 하나로 통했다.


4. 여담[편집]


파일:베드포드 감옥.png
  • 1829년에 세워진 에쉬 가 감옥은 미국에서 (현재까지 기능하는) 가장 오래된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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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따라서 무려 4개의 포르투갈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맺었다[2] 존 윈슬로우, 윌리엄 브라드포드, 밀레스 스타디쉬, 토마스 사우스워스, 존 쿠크가 왐파노아 족장 우사메퀸과 왐숫타 부자와 협정 체결하였다.[3] 퀘이커 교도들은 플리머스 측이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도록 일부로 흩어져 농장을 경영하며 1차 산업에 의존하여 살았다 한다[4] 공교롭게도 영국의 귀족인 베드포드 공작가에서도 러셀이란 이름을 쓴다[5] 1812년 뉴베드포드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도시가 된다[6] 지금도 메사추세츠는 아일랜드계가 많다. 뉴베드포드는 그중 거의 유일하게 아일랜드가 아닌 포르투갈계가 많은 도시이다[7] 이를 Stone Fleet 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