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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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陀羅尼 / धारनी dhāranī(범어)

한량없는 뜻을 지니고 있어 모든 악한 법(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을 지니게 한다는 불교 용어.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 ‘dharani’를 그대로 음차 표기한 것이고, 의역하면 진언(眞言)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신비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지는 주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총지(總持) · 능지(能持) · 능차(能遮)라고도 번역되는데, 짧은 구절 안에 능히 무량하고 무변한 이치를 섭수해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라니를 기억함으로서 다른 모든 것을 연상하여 잊지 않게 하고, 선한 법을 가지고 악한 법을 잘 막을 수 있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보살이 타인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라니를 얻어야 하고 다라니를 얻게 되면 무량한 불법을 잊지 않고 자유자재로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짧게 주(呪)라고도 한다.

불경을 읽기 전에 개경게에 이어서 읽는 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 흔히 알려진 '수리수리 마하수리'도 원래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1]가 전문이고 천수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다라니 '정구업진언'이다. 그리고 이쪽 분야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옴 마니 반메 훔도 다라니의 일종이기도 하다. '사바하' 역시 다라니에서 나온 말이다.

다라니는 대체로 악을 없애고 복을 빌 때, 망자의 명복을 빌 때, 또는 불보살 공양이나 참회 의식에 독송되는 형태로 쓰인다. 한국에서는 천수다라니가 가장 많이 독송되는데, 이 다라니를 독송하면 뜻하는 바대로 이루어진다는 보편성이 있어서라고 한다. 특히 밀교(密敎)에서는 다라니를 지니고 외움으로서 마음을 통일하고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다라니를 중시했고, 일종의 주문처럼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 애초에 '주문'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다라니에 얽힌 영험담이 많이 전하고 있다.

진언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같은 의미에서 나온 번역어이기는 하지만 다라니와 진언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대체로 천수경처럼 짧은 것을 '진언' 또는 주(呪)라고 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나 능엄주(능엄신주)처럼 긴 구절로 된 것은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

보통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한역될 경우 그 불경 문구의 의미를 한문 문장으로 번역해 놓지만 다라니만큼은 발음 그대로 최대한 그 음만 번역하는 것이 원칙인데, 다라니는 그 문구와 발음 자체에 힘이 있기 때문에 원문의 전체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2] 그리고 밀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려는 뜻이 있다고 소개된다. 때문에 다라니만은 한자로 쓰지 않고 범자 즉 산스크리트 문자를 부기하거나 아예 산스크리트어로 새겨 두는 경우도 있었으며, 다라니는 완전히 해석하기 어렵고 또 어떤 것은 아예 해석이 불가능한 것도 많다.

밀교에서는 주다라니라고 해서 재난을 없애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고, 때문에 여러 밀교 의식과 함께 여기에서 독송되는 다라니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탑 모양과 같은 그림 속에 경전의 전문(全文)을 써 넣는 ‘탑다라니’라고 하는 것도 있고, 다라니 자체에 위력이 있다는 믿음에 따라 사찰에서 탑을 지을 때 다라니를 함께 봉안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이레 뒤에 죽어 16지옥에 떨어질 바라문을 구제하기 위하여 외우도록 한 것으로 이 다라니를 일곱 번 외우고 탑 안에 안치하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여겨졌으며, 사리탑을 77번 돌고 이 다라니를 77번 외운 뒤에 77벌을 써서 작은 토탑 77좌를 만들어 그 안에 다라니를 하나씩 봉안해 공양하면 수명이 연장되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며 영원히 삼악도를 벗어나 태어나는 곳마다 모든 부처를 만나게 된다고 여겨졌다.

गते गते पारगते पारसंगते बोधि स्वाहा(범어 원문)

竭帝竭帝 波羅竭帝 波羅僧竭帝 菩提僧莎呵(쿠마라지바 번역)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현장 번역)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넘어가자.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


다라니 가운데 하나인 반야심경의 말미에 등장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경우는 현대 한국의 표준 반야심경 번역의 경우 현장의 번역을 따르고 있는데, 현장 이전에도 이미 쿠마라지바가 반야심경을 한역하여 소개한 바 있었다. 한국 학계 일각에서는 도올 김용옥을 비롯하여 한역된 다라니 역시 인도의 원음을 중국 한문으로 옮긴 번역문이므로 이러한 다라니들도 인도의 원음대로 산스크리트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스와하'로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도올의 주장에 대해서 한국의 역술인들의 반응은 "웃기고 있네"였다고 한다. 한국의 자현 비구도 이에 동의했는데, 애초에 현장이 한역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그 말 자체가 7세기 현장이 방문했던 인도 지역에서 현장 자신이 수학한 날란다 대사원의 승려가 사용하던 말을 번역한 것인데, 21세기에 쓰이는 산스크리트어 기준의 '가떼가떼 바라가떼 바라송가떼 보디스와하' 발음과 7세기 현장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번역할 때 귀로 들었던 현지 산스크리트어 발음 중에 어느 쪽이 더 석가모니 부처의 시대에 더 가깝겠느냐는 것이다. 7세기에서 21세기에 걸치는 거의 1400년에 걸치는 시간 동안에 산스크리트어 자체가 7세기 발음에서 훨씬 변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운위되는 것이 '언어의 가변성'이다. 인류문화학에서는 지역연대가설이라고 해서 어떤 문화는 그 발상지보다 그것이 전파된 지역에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다는 지적이 있다. 쿠마라지바나 현장이 불경을 번역했던 5세기와 7세기 이후에도 산스크리트어는 계속 사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5세기나 7세기 당대와는 그 모습이 많이 바뀌었을 수밖에 없는데, 언어의 가변성에 따라 5세기(혹은 7세기) 당대의 원음으로부터 상당히 많이 바뀐 말을 단순히 '인도 본고장의 언어'라는 이유만으로 당대 번역보다 높게 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원본'의 자리에까지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3] 다만 그 '아제아제'라는 음독도 중고한어식 음독인 '가뗴가뗴'와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채 와전된 발음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교 일각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예수 그리스도공생애열두 제자들 그리고 사도 파울로스의 행적을 엮은 신약성경의 '정본'은 당시 서구 세계에서 널리 쓰이던 그리스어로 기원후 1세기 무렵에 번역된 70인역(셉투아진트)이고, 이후 히브리어 성경 원본을 토대로 구약 전체를 성 예로니무스가 4세기 후반에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가 쓰였다. 이후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에 쓰여진 히브리어 성경 이른바 사해문서가 발견되면서 성경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 불이 붙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 본인이 사용했던 언어로부터 현지 언어로 번역된 경론을 사용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세계 그리스도교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서 교회 즉 가톨릭정교회는 기존의 라틴어, 그리스어로 이루어지는 의식과 전례들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싹 바꾸는 등의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당시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는 아람어이므로 신약성경도 마땅히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것을 정본으로 치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실제로 현대 히브리어 번역 신약성경을 소개하는 곳도 있다.[4] # 이거에 대해서 뉴스앤조이에서 지적하는 기사를 낸 적도 있다.

히브리어 원전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셉투아진트)이나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역시 엄연히 성경의 정본으로 인정되는 이유가 현장의 반야심경의 경우처럼 언어의 가변성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현행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성경을 본다고 한들 그게 당대 히브리어, 당대 아람어를 과연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라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아람어를 썼다고 해서 아람어로 주기도문을 읽어야 가장 원문에 가깝지 않느냐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원문에 가까운 것'과 '원문 그 자체'인 것은 분명히 별개의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사해문서가 집필된 이후에도 아람어도 그리스어도 라틴어도 계속해서 변화를 겪었는데[5] 단지 현지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높게 쳐서 번역본보다 낮춰 보는 견해는 위험하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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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뜻은 "길상하신 세존이시여 길상하신 세존이시여, 지극히 길상하신 세존이시여 원만성취하소서’이고, 더 쉽게 풀이하면 “좋은 일이 있겠구나, 좋은 일이 있겠구나, 대단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지극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다. 불경에서는 구업이라고 해서 자기가 평소에 말로 지은 일체의 업(카르마)이 입에 남아 따라다니고 있으며, 이 진언을 세 번 외움으로서 불경을 입에 담기 전에 입을 '한번 헹궈 낸다'는 의미를 갖는다.[2]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의 번역이 금지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3] 현장은 인도에 직접 유학해서 날란다 대학에서 인도 불교를 배운 입장에서 쿠마라지바의 번역을 두고 "발음을 옮길 때 틀리게 옮긴 것이 너무 많다"고 투덜댔지만, 쿠마라지바와 현장은 활동 시기가 2백 년이나 차이가 난다. 2백 년 동안 언어 변화가 전혀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현대에도 처음 번역할 때와는 사용된 언어의 뉘앙스가 많이 달라져서 예전 번역서를 읽으면서 위화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 새로 재번역을 하거나, 아예 10년 주기로 번역을 새로 하는 출판사도 있다.[4]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예수는 히브리어를 썼다"고 한마디 했다가 "예수는 아람어를 썼는데?"라는 교황의 지적에 네타냐후 총리는 "아람어를 쓰기는 했지만 히브리어도 알고 있었다"고 한 발 물러선 일화가 있다.[5] 좀 더 극단적인 이들 중에는 셉투아진트가 원본이 그대로 전해진 것은 아니며 성경 변개의 상징이라고까지 몰아갔지만, 오히려 사해문서의 발견으로 셉투아진트가 또 다른 형태의 고대 히브리어 본문을 오롯이 보존하고 번역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그 가치가 올라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