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스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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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스티브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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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80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1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3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4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5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1988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90 MLB 올스타전 로고.pn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80
1981
1983
1984
1985
1988
1990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왕
마이크 보디커
(볼티모어 오리올스)

데이브 스티브
(토론토 블루제이스)


로저 클레멘스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1087353010.0.jpg

데이비드 앤드루 스티브
David Andrew Stieb[1]

출생
1957년 7월 22일 (66세)
캘리포니아 주 샌타애나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서던 일리노이 대학교
신체
183cm / 83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78년 드래프트 5라운드 (TOR)
소속팀
토론토 블루제이스 (1979~1992)
시카고 화이트삭스 (1993)
토론토 블루제이스 (1998)
기록
노 히터 (1990.9.2)

1. 개요
2. 선수 경력
2.1. 대학 시절
2.2. 1978 - 1981년
2.3. 1982 - 1985년
2.4. 1986 - 1987년
2.5. 1988 - 1990년
2.6. 1991 - 1993년
2.7. 1998년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전 야구 선수.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투수 bWAR[2], 완투, 삼진, 이닝 통산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대학 시절[편집]


대학 시절까지 주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고등학교 및 대학교 감독에게 등판 권유를 받았지만, 부모님이 팔을 망가뜨린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발 투수가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하자 스티브는 팀을 위해서 며칠간 수업을 받고 아주 좋은 슬라이더를 가진 투수가 되었다. 외야수로도 .394의 타율에 12홈런을 날린 에이스 타자였던 스티브는 당시 신생팀이던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드래프트된다.

2.2. 1978 - 1981년[편집]


외야수로 뛸 줄 알았던 스티브는 팀이 자신을 투수로 전향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자 반발했지만, "가장 메이저에 빨리 가는 방법"이라는 말에 설득당해 순순히 투수로 전향하고 프로 첫 해인 1978년은 마이너를 격파하며 보냈다.
1979년의 블루제이스는 53승 109패를 기록한 메이저리그 최악의 팀이었다. 스티브는 이 팀에서 19회 선발 등판해 4.31의 방어율로 8승 8패를 기록한다. 대학 시절에 17이닝만 던진 선수 치고는 매우 좋은 기록이었다.
1980년에는 3.71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생애 첫 올스타전에도 출장하는 등 명실상부한 2선발로 올라선다. 다만 팀은 67승 95패로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을 뿐이었고, 스티브 개인의 승패 기록은 12승 15패였다.
1981년, 파업으로 인한 단축시즌에는 3.19의 방어율로 팀내 최고 성적을 기록했으나, 11승 10패만을 거뒀다. 팀은 37승 69패로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득점지원 없는 약팀에 지친 스티브는 팀과 대립각을 세우며 트레이드를 요구했지만, 핵심 자원이었기 때문에 결국 팀에 남았다.

2.3. 1982 - 1985년[편집]


스티브는 1982년에 리그 최다인 288.1이닝을 던져 17승 14패, 3.25의 방어율로 생애 처음 사이 영 상 표를 받았다. 지난 2년 간 나갔던 올스타 출전에 실패했지만, bWAR는 7.6, 리그 1위로 세이버 관점에서는 충분히 사이 영 수상이 가능한 좋은 시즌이었다. 블루제이스는 다른 시즌과 똑같이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지만, 이번엔 차순위 팀과의 승차가 0경기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창단 후 블루제이스가 꼴찌에서 두 번째 팀과의 승차가 10경기 이하였던 적은 1982년이 처음이었다(...) 스티브는 팀과 6년 총액 5백만 달러의 당시로써는 매우 큰 계약을 맺으며 팀과의 관계가 좋아진다.
1983년, 또다시 278이닝을 던져 17승 12패, 3.04의 방어율을 기록한다. AL에서 방어율 3위, 이닝 소화 2위, bWAR 1위의 매우 좋은 시즌이었지만 사이 영 표를 하나도 받지 못한다. 팀은 최하위를 처음으로 벗어나 89승 73패로 중위권에 위치했다.
1984년, 스티브는 267이닝(리그 1위)를 던져 2.83의 방어율, 16승 8패와 bWAR 7.9(리그 1위)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사이 영 순위는 7위에 불과했다. 블루제이스는 89승 73패로 동부지구 2위를 기록한다. 라이벌 잭 모리스가 이끌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지구에서 우승하고 월드시리즈도 우승했다.
1985년의 블루제이스는 강팀이었다. 뉴욕 양키스를 제치고 6할 승률로 동부지구를 우승해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나갔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스티브에게는 득점지원이 오지 않았다. 리그 1위인 2.48의 방어율로 불과 14승 13패를 거뒀을 뿐이었다. 블루제이스는 여유있게 우승을 차지해 스티브의 등판 순서를 조정할 수 있었고,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한 ALCS에서 스티브는 1, 4, 7차전에 선발로 등판하였다. 1차전에서 8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된 스티브는 4차전에서도 6.2이닝 1실점으로 역전승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7차전에서 스티브가 5.2이닝 6실점으로 무너지며 블루제이스의 첫 포스트시즌은 끝나고 만다. 6회말 2사 만루에서, 평범한 플라이볼이 강풍에 힘입어 3타점 3루타로 돌변한 것. 로열스는 월드시리즈에서도 이겨 창단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스티브의 사이 영 순위는 역시 7위였다. 스티브의 계약은 다시 한 번 갱신되어, 당시 역대 최장기, 최고액 계약 중 하나인 11년 총액 2500만 달러에 뛰게 된다.

2.4. 1986 - 1987년[편집]


1986년은 스티브의 침체기의 시작이었다. 그는 전반기에 5.80의 방어율로 2승 9패를 기록하였다. 당시 전문가들에 따르면 팔꿈치 문제로 슬라이더의 구위가 약해진 것이 문제였다. 올스타 이후 회복하여, 스티브는 7승 12패 4.74 방어율의 조금 더 나은 기록으로 시즌을 마무리했고, 팀은 AL 동부 4위에 그쳤다.
1987년, 스티브는 185이닝을 던져 4.09의 방어율과 13승 9패를 기록했고, 팀도 포스트시즌에 나갈 것처럼 보였다. 7경기가 남았고, 지역 2위에 3.5경기차로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루제이스는 귀신같이 남은 7경기를 다 져서 지구 우승에 실패하고 스티브도 그 중 한 경기에서 5회만에 강판당해 팀의 패배에 일조했다.

2.5. 1988 - 1990년[편집]


1988년, 스티브는 16승 8패, 3.04의 방어율로 부활한다. 특히, 시즌의 마지막 31.1이닝동안 무실점을 유지했고 마지막 세 번의 등판은 완봉승이었다. 하지만 팀은 1위와 불과 2게임차로 지구에서 4위를 기록했다.
1989년, 스티브는 17승 8패, 3.35 방어율로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ALCS에서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1차전과 5차전에 등판하여 모두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팀도 1승 4패로 패배했고 리키 헨더슨이 엄청난 퍼포먼스로 만장일치 MVP를 받았다. 오클랜드는 1989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거둔다.
1990년은 스티브의 승운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발한 시즌이었다. 그는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11승 3패를 기록했고, 시즌이 한 달 남은 9월 8일에 개인 최다인 시즌 18승째를 거뒀다. 하지만, 마지막 등판 다섯 번은 승운이 따르지 않아 스티브는 18승 6패로 시즌을 마쳤다. 스티브는 이 해 사이 영 상 투표에서 5위를 기록했다.

2.6. 1991 - 1993년[편집]


1991년, 스티브는 처음 아홉 번의 등판에서 4승 3패로 시즌을 시작하지만, 어깨와 허리 부상이 연달아 터지면서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팀은 잭 모리스가 2승을 거둔 미네소타 트윈스에 밀려 ALCS에서 또 탈락했고, 미네소타는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1992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잭 모리스를 2년, 1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FA로 영입했고, 노장 데이브 윈필드 역시 FA로 데려왔다. 모리스는 돈값을 해주며 이적 첫 해에 21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스티브는 8월에 마지막 선발 등판을 하고 불펜으로 강등되었고, 9월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된다. 블루제이스는 8월 25일에 제프 켄트와 유망주 라이언 톰슨을 뉴욕 메츠에 넘기고 데이비드 콘을 데려온다. 콘은 스티브 대신 선발 역할을 해주며 4승 3패를 기록했고, 1루수 존 올러루드와 2루수 로베르토 알로마가 타선의 중심을 잡아준 데 힘입어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1992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이 되었다.스티브도 월드시리즈 반지를 받았지만, 그는 더 이상 팀의 중심 투수가 아니었다.
1993년에 스티브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단년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허리 부상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마이너에서 재활하며 보낸 끝에, 메이저에서는 겨우 4경기만 던지고 은퇴를 선언한다. 한편,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또 우승했다.

2.7. 1998년[편집]


만 40세가 된 스티브는 친정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코치직을 제안받았다. 몇 년간의 휴식으로 부상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을 알게 된 스티브는 구단의 허락을 받은 뒤 다시 한번 마이너를 뚫고 팀에서 롱릴리프로 활약한다. 시즌 후 팀은 스티브에게 1년 더 뛸 것을 요청했지만 스티브는 아쉬움이 없다며 쿨하게 은퇴를 선언한다.

3. 여담[편집]



3.1. 노히트 노런과의 악연[편집]


스티브의 메이저리그 커리어 동안 노히터가 될 뻔했던 경기는 다음과 같다.
  • 1985년 8월 25일: 8회까지 노히터였지만, 9회 선두타자 루디 로와 바로 다음 타자 브라이언 리틀에게 홈런을 맞았다. 그들의 통산 홈런은 각각 18개, 3개이다.
  • 1988년 9월 24일: 9회 2사 투 스트라이크까지 노히터였지만, 훌리오 프랑코의 2루수 땅볼이 불규칙 바운드되며 내야안타로 출루한다. 프랑코 본인도 다음날 "그 타구는 아웃이어야 했고, 스티브는 노히터의 자격이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할 만큼 어이없는 결과였다.
  • 1988년 9월 30일: 바로 다음 등판(!)에서, 스티브는 또 9회 2사 투 스트라이크까지 노히터를 유지하지만, 극심한 타격 부진을 겪던 대타 짐 트레이버에게 절묘한 위치에 떨어진 안타를 맞고 만다.
  • 1989년 8월 4일: 퍼펙트 게임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스티브는 9회 2사 투 스트라이크까지 퍼펙트 게임을 유지했지만 로베르토 켈리에게 2루타를 맞고 말았다.
  • 1989년 8월 26일: 6회 2사에서, 로빈 욘트의 3루쪽 땅볼을 3루수 켈리 그루버가 늦게 처리하여 주자가 출루한다. 이 실책성 내야안타가 경기의 유일한 피안타였다.

스티브는 1990년 9월 2일에 토론토 블루제이스 최초이자 유일한 노히터를 기록한다. 심지어 스티브가 현역으로 덕아웃에 있었던 마지막 경기에서는, 어떤 유망주 투수가 9회 2사까지 노히터를 이어가다 마지막 타자에게 홈런을 맞았다.


3.2. 명예의 전당?[편집]


스티브의 통산 bWAR는 56.4, fWAR는 43.8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이다. 하지만 커리어의 대부분을 약팀에서 보내서 클래식 스탯이 퍼포먼스에 비해 좋지 못했으며, 커리어가 짧은 편이라 통산 성적도 높지 않다.

2009년에, 세 명의 야구 사학자들은 1980년대 메이저리그 투수들에 대한 랭킹을 매겼다. # 선정 당시 명예의 전당에 있던 투수는 1위 놀란 라이언 단 한 명이며, 이후 2위 버트 블라일레븐, 10위 잭 모리스가 추가로 들어갔다. 스티브는 역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투수인 토미 존 뒤에 있는 4위이다. 빌 제임스 역시 두 개 이상의 사이 영을 받았어야 하지만, 하나도 못 받은 투수 명단에 스티브를 올렸다.

하지만 스티브는 명예의 전당 투표 1년차에서 1% 정도의 투표만을 받아, 바로 탈락했다. 스티브 본인도 "내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한 성적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렇게 바로 탈락한 것은 모욕적이다"고 발언했다.

  • 형 스티브 (Steve) 역시 야구 선수였다. 그가 성공했다면 스티브 스티브같은 이름을 쓰기는 이상하므로 한국어 표기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 선수 생활 초기에는 난폭하고 미성숙한 성격을 가졌다. 에러를 저지른 수비수나 콜을 잡아주지 않는 심판 등에 소리를 지르는 건 다반사. 하지만 동료 선수들은 "스티브는 야구장 밖에서도 같은 성격이다"고 두둔해 주었으며 이후 따라온 수많은 불운과 인생 경험으로 성숙해졌다.
    • 불과 만 29세에 자서전을 출판했다. 유명한 스포츠 선수들이 보통 선수 생활이 끝날 때쯤, 아니면 은퇴 한참 뒤에 자서전을 쓰는 것과 큰 차이. 덕분에 놓친 노히터 게임에 대한 자세한 리뷰를 볼 수 있다.
  • 잭 모리스와 라이벌 기믹이 있었다. 똑같이 미성숙한 성격에, 강속구를 뿌리고 80년대 최고의 투수 후보라는 점이 공통점. 선수 시절의 평가는 모리스가 좀 더 높았는데, 키, 몸무게, 구속, 승수가 더 높은 점 때문이었다. 심지어 방어율도 모리스가 높았다. 하지만 이 평가는 이후 역전된다. 모리스가 해설자 시절에 보여준 구설수를 보면, 모리스는 미성숙한 성격을 고치지 못한 듯 하다.
  • 은퇴 후에는 리노(도시)에서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 유튜버 Secret Base는 스티브의 선수 생활을 조명하는 거의 4시간에 달하는 다큐멘터리를 올렸다. # 스티브를 에이허브 선장에 비유하며 선수 시기의 기록, 놓친 노히터, 어이없는 사이 영 상 투표 결과 등을 다뤘고, 스티브는 다른 투수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80년대 최고의 투수이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다큐멘터리는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개의 제도권 언론에게 소개되었다.

4. 관련 문서[편집]



[1] 발음 STEEB[2] fWAR는 로이 할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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