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라-티베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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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영국의 압력 행사
3.2. 민사르 전투
3.3. 티베트의 라다크 침공
4. 종전


1. 개요[편집]


중국어 森巴战争
영어 Dogra–Tibetan War / Sino-Sikh War

1841-42년 시크 왕국 하의 도그라 왕국 (미래의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과 청나라 치하 티베트 간의 전쟁. 도그라 왕국의 장군 조르와르 싱이 도그라의 속국인 라다크의 서부 티베트 영유권 주장을 빌미로 티베트 (간덴 포드랑)를 침공했으나, 영국의 압박 속에서 실패하고 전사하였다. 이후 티베트 군이 역으로 라다크를 침공했으나, 그 역시 실패하여 양측은 기존의 영토에 대한 현상 유지의 휴전을 맺었다. 당시의 국경은 현재까지도 중국-인도 국경으로 이어진다. 전쟁 막판 티베트의 라다크 원정은 티베트 역사상 마지막 대외 침공으로 기록되었다.

2. 배경[편집]


10세기 토번 제국의 붕괴 후 티베트는 분열되었다. 서쪽으로 이동한 토번 왕실의 후예들은 느가리 (서티베트)의 구게라다크에 각각 왕조를 세웠는데, 17세기 들어 둘은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 결과 라다크가 구게를 정복하고 느가리를 석권하였다. 다만 17세기 후반 위짱 (티베트 중부)을 통합한 겔룩파달라이 라마 5세는 1680년 구게를 점령하며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 일대를 통일하였다.[1] 한편 1703년 카슈미르 남부에 세워진 라지푸트계 도그라 왕국은 시크 왕국에 복속했으나 1830년대 들어 독자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다. 도그라 장군인 '인도의 나폴레옹' 조르와르 싱 카흐루리아는 1834-36년 라다크를 세 차례 원정하여 복속시켰고, 1839-40년에는 발티스탄의 막폰 왕국도 복속시키며 현재의 카슈미르 지역을 통일하였다.

3. 전개[편집]


자신감을 얻은 조르와르 싱은 과거 전성기 시절 라다크의 영토였던 느가리 지역을 회복한다는 명분 하에 4천 도그라-라다크-발티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당시 티베트 군대는 대부분 라싸시가체 방면에 있었기에 라다크 방면에는 6천여 병력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분산되어 있었다. 따라서 도그라 군은 판공 호숫가의 루독을 점령, 가르톡의 티베트 군을 격파하였다. 조르와르 싱은 패주하는 티베트 군을 추격하여 현재의 인도-중국-네팔의 접경에 해당하는 푸랑 (타클라코트)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그는 티베트 측에 느가리와 위짱의 경계인 마윰 고개 서쪽의 영토를 요구했다.

3.1. 영국의 압력 행사[편집]


한편 (영국 직할령인) 우타라칸드까지 도그라 영향력이 미치고 티베트의 직물 수입에 차질이 있을까 우려한 영국은 도그라 측에 1841년 내로 티베트에서 철수하라고 압박하였다. 당시 시크 왕국까지도 영국에게 유화적이었던 상황이라 도그라 왕국도 영국에게 설설 기던 때였고, 따라서 조르와르 싱은 히말라야 접경 지역의 점령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눈이 녹는다면 완전히 철수할 것을 약속하였다.

3.2. 민사르 전투[편집]


이러한 저자세는 도그라 원정군의 사기 저하와 조르와르 싱의 위신 저하로 이어졌고, 11월에 파견된 1만 티베트 군은 도그라 군이 지키던 마윰 대신 마짱의 마쿠안 강을 통해 진격하여 도그라 군을 격파하고 푸랑을 수복하였다. 일대에 배치되었던 도그라 분견대 역시 일소되었다. 조급해진 조르와르 싱은 티베트 군과 단번의 회전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 푸랑으로 나아갔고, 양측은 3주간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에 조르와르 싱은 푸랑과 티베트 주요부 와의 보급로를 끊고자 카르날리 강을 따라 난 오솔길로 푸랑 북쪽, 마팡용추 호수 인근의 민사르에 주둔하였다. 그러자 티베트 군은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푸랑-시가제 간 도로 주변에 매복하였고, 도그라 군대가 당도하자 퇴로를 차단하였다. 폭설과 함께 사면에서 포위된 도그라 군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패하였고, 조르와르 싱은 부상을 입은 후에도 계속 싸우다 티베트 기병의 창에 목이 베여 전사하였다. 도그라 군은 3백의 전사자와 7백의 포로를 내었고, 나머지는 라다크 방면으로 패주하였다. (1841년 12월)

3.3. 티베트의 라다크 침공[편집]


추격에 나선 티베트 군은 레에서 하루 거리인 둠브라 (누브라 협곡)에 주둔하였다. 티베트 군은 레를 포위했으나 도그라측 원군이 당도하자 장기전을 계획하고 인근 드랑쩨에 진영을 세웠다. 그러자 라다크 인들은 강물을 모았다가 터뜨리는 수공으로 티베트 군을 혼란에 빠뜨렸고, 도그라 군은 패주하는 티베트 군을 추격하여 추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도그라 군은 조르와르 싱의 복수로 티베트측 장수를 잡아 참수했다 한다.

4. 종전[편집]


수세에 몰린 티베트는 종주국인 청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당시 영국과 1차 아편전쟁을 치르고 있던 청조는 제2의 전선을 만들 여력이 없어 휴전을 제안했다. 다만 도그라 왕국의 마하라자 굴랍 싱 역시 종주국인 시크 왕국의 내전에 개입하려 했기에 휴전 협상에 응하였다. 1842년 9월의 휴전 조약에서 티베트는 시크-도그라 측의 라다크 병합을 인정하였고, 시크-도그라 측은 느가리 지역에 대한 옛 라다크의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였다. 따라서 양측의 국경은 1684년의 상태로 남았고, 라다크-티베트 상인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보장되었다.

동시에 라다크의 남걀 왕조는 멸망하였고, 조약에 따라 안전이 보장된 기존 왕실에는 (1820년에 별궁이 세워진) 스톡의 영지가 주어졌다.[2] 한세기 후 중인국경분쟁 도중 중국 측이 라다크-티베트 국경은 확정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자 인도는 해당 휴전 협정을 근거로 들며 반박하였다. 이에 중국 측은 인도측 초소가 당시 국경보다 더욱 전진되어 있다며 재반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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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1684년의 휴전 조약으로 무굴 제국에게도 승인된다[2] 이는 1947년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