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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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에 나오는 전설의 새에 대한 내용은 청조(산해경)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이자 정복왕조. 296년[5] 으로 거의 300년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중국대륙을 통치한 제국이며 역대 왕조 중 황통의 중단없이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왕조이다.[6][7] 기간은 1616년부터 1912년까지이다.
만주족은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다.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8] 이라 하고, 흥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또한 21세기 이전 기준 최후의 퉁구스계 주권국가로, 만주족을 중심으로 몽골인, 티베트인, 위구르인 등 다수의 민족들이 연합한 다민족국가였다.
1636년 4월 11일, 후금의 홍타이지가 국호를 '다이칭 구룬(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으로 개칭하면서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 1644년에 이자성의 난과 남명을 제압하고 중국 북경에 입관(入關)했으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라는 3명의 걸출한 성군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불리는 장장 120여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9] 티베트, 신강, 내외 몽골 등 광활한 번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18세기 내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며 찬란한 중국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뿌리깊은 부정부패와 만한갈등 탓에 백련교도의 난과 각종 민란들이 터지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하며 모든 면에서 망국의 색이 짙어졌다. 1840년에는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중국은 노골적인 식민열강들의 이권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이후 양무운동(동치중흥)이나 변법자강운동(광서신정) 등으로 근대화 움직임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는 역부족이었고, 19세기 말에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운동 등 온갖 시련을 겪다가 결국 1912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식적으로 붕괴했다.
다만 제국은 1912년에 붕괴했음에도 청 황실은 1924년까지 자금성에 머무르면서 소조정이라는 형태로 존속했다. 또한 1912년에 퇴위했던 선통제가 1917년에 군벌의 추대로 장훈복벽으로 복위하여 잠시 복고하기도 했으나, 10여일 만에 진압되면서 북양정부에 다시 귀속되었다. 결국 소조정마저 1924년 핍궁사건으로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쫒겨나면서 청나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황성(皇姓)은 아이신 기오로(愛新覺羅). 아이신 교로라고 쓰기도 하며, 현대 중국어로는 '아이신 줴뤄'로 발음된다. 한국어로는 애신각라이다.
2.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만주어로 다이칭 구룬. '구룬'은 국(國)이란 뜻의 만주어 독음이다. 한자로는 대청(大淸)이다. 19~20세기에는 대외 문서에서 '중화대청국'(中華大淸國)이나 '대청제국'(大淸帝國)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문으로는 '대청'(Great Qing)[10] 또는 '대청제국'(Empire of Great Qing)으로 부르고 현대 중국에서는 '청조'(淸朝)라고 불리고 있다. 다이칭 구룬과 거의 같은 뜻으로 위대하다는 뜻의 '암바'라는 만주어 단어를 써서 '암바 칭 구룬'(Amba Cing Gurun), '암바 다이칭 구룬'(Amba Daicing Gurun)으로 부르기도 했다. 만주족이 지배민족이라 국가라 '만청(満淸)'이라고도 불렸다.
다른 중국 왕조들과 달리 국명이 추상 명사이다. 요(요하), 금(안출호수), 원(대재건원), 명(명교) 등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중국에 자리잡은 역대 국가들은 춘추전국시대의 각 국명에서 유래한 전통적 지명에서 나라 이름을 따왔기 때문에 매우 이질적이다. 그 이유로는 음양오행설에 따라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물 수(水) 변이 들어간 '청'(淸)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1] 다른 설로는 청나라의 만주어 원음인 '다이칭'(Daicing)이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의미했기 때문에 원래 국명이 '전사의 나라'를 뜻한다는 말이 있다.
2.2. 국기[편집]
원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정식국기가 따로 없었다.
청나라는 1862년 서양나라들이 가진 국기가 있을때 자신들은 없는걸 제국의 큰 문제로 여겼고 삼각 황룡기를 국기로 제정했다. 그러다 1881년, 이홍장이 외국 해군기들 사이에서 삼각기는 너무 튄다며 서태후에게 사각기로의 교체를 주청하였고, 1889년부터 사각 황룡기가 해군기및 국기로 공식 지정되었다. 그 이전에는 공식적인 국기 또는 국장이 없었고 그나마 의장기나 팔기군의 팔기를 사용했다. 국기의 모티브 역시 팔기였다. 따라서 해당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팔기군의 깃발들이 아니라 황룡기가 나온다면 이는 고증오류다.
황룡기의 바탕색인 노란색은 황제의 상징이며, 용을 숭상하는 중국답게 용은 청나라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곧 '짐이 곧 국가다'라는 인식을 주기 위한 위엄이라고 한다.
삼각 황룡기를 바탕으로 한 황제기도 있었다.
2.3. 국장[편집]
청나라의 국장
청나라의 국장. 위의 사진을 모티브로 채색된 것.
또 다른 버전.
역대 중국의 국장들. 제일 밑에 청나라의 국장들이 나온다.
청나라도 국기와 함께 국장(나라의 문장)도 쓰였다. 팔기군의 팔기처럼 오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노란 깃발에 바깥 테두리는 파란색 계열이며, 배와 등의 비늘, 뿔, 혀가 붉고 몸이 푸른 용이 새겨져 있는데, 청나라 시대의 국기에서 따왔다. 용 주변에 태양, 흰 구름이 연기처럼 표현되어 있다.
2.4. 국가(國歌)[편집]

1911년 공식 국가가 지정되었지만 곧바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망하여 단 131일 동안만 사용되었다.
3. 역사[편집]

4. 영토[편집]
청은 전성기에 카슈미르의 라다크 지역과 길기트 발티스탄 지역, 카자흐스탄 잠발리주와 알마티주, 키르기스스탄, 투바 인민공화국, 와칸 회랑, 타지키스탄 일부, 네팔 일부, 부탄 일부, 인도 아루나찰프라데시, 미얀마 카친 주, 베트남 북쪽 끝과 박롱비 섬, 라오스 일부, 외만주, 몽골 등[12] 청나라가 18세기 중반까지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하면서 중국의 영역은 만주, 내몽골, 신장, 티베트에 걸치는 광범위한 땅에 걸치게 되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로 이미 국력이 쇠퇴하여 각종 조약을 통해 일부 영토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청 멸망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는 현재까지 외몽골 독립 이외에는 큰 변동없이 영토가 보존되고 있다. 티베트는 청나라 멸망 이후 독립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직후 한국전쟁 당시 다시 합병되었다.
전성기의 청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몽골제국에서 갈라져나온 원나라보다도 더욱 거대한 영토를 자랑한 제국이다. 청말 민초 이래 망해놔서 지금 중국이 다시 수복했던 내몽골, 티베트와 위구르만이 아니라 외만주와 외몽골 전체, 더불어 대만, 카자흐스탄 동부 지역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서양의 여러 열강들과 여러 조약을 통해 일부 영토를 잃었으며, 투바와 외몽골[13] 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인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칭하이성, 마카오, 홍콩은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에 포함된다.
5. 문화[편집]

청 시기의 문화는 가히 중국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기들 중 하나였다. 특히 청나라는 한족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일부러 문화를 진흥시켰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 시기의 《강희자전》, 옹정제 시기의 《고금도서집성》, 건륭제 시기의 《사고전서》 등이다.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홍루몽》 외에도 《요재지이》, 《유림외사》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청나라 문학 작품이다. 특히 《요재지이》는 중국의 판타지 소설 모음집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귀신들이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그 특징이며 믿거나말거나 식의 구전 이야기[14] 들이 많이 실려 있다. 당대 청나라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허나 이 자유로운 분위기는 오직 순수 문학이나 소설에 한정되어서, 만주족의 권위를 침범하거나 청나라에 반대되는 내용들은 얄짤없이 검열받았다. 건륭제 시기에 특히 문자의 옥이 많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중국 문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기도 했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과 열하의 피서산장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의 양식이 많은 것에 반해, 청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기본적으로 한족의 건축방식을 답습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동군연합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나 티베트 등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 또한 화려함과 정교함을 숭상하여 이전보다도 거대한 크기의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고, 색유리를 사용하여 건물을 꾸미는 것이 유행했다. 타 민족들의 문화에 대하여 야만적이라고 배척했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 비하여, 스스로가 이민족이었던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타 문화에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앞서 말한 열하의 피서산장이다. 피서산장에 있는 보타종승사원(普陀宗乘之庙)은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따 지었는데, 타민족의 문화를 천시하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사례였다.
청나라 때도 사회적으로는 일단 기본적으로 유교식 이념들을 깔고 들어갔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중화의 합법한 계승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유교를 더더욱 강조했고, 어떤 면에서는 명나라보다도 엄격한 경우가 잦았다. 당연히 부계중심적인 사회였고,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남성과 함부로 이혼할 수 없었으며[15] 사회적으로 그 제약도 상당히 심했다.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재산을 소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제사를 지내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문제들에도 남자에 비해 훨씬 하등한 대접을 받았다. 나중에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러한 남녀불평등을 타파한다고 했으나, 이 오랜 폐해는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홍등가, 동성애, 매춘 등 성 관련 풍습들은 청나라 초기에 들어서 크게 탄압받았다. 강희제나 옹정제 등은 황제가 주도해서 이들을 때려잡았고, 이때문에 중국의 매춘 산업은 청나라 초기에 쇠퇴하였다. 허나 인간의 욕망을 억누를 수는 없었던지, 건륭제 시기 말에 이르자 홍등가가 다시 대대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톈진, 충칭, 항커우 등의 대도시들에는 거대한 규모의 매춘굴들이 자리잡았으며 고위 관료들부터 평민들까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상하이는 19세기 들어 서양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매춘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18세기 들어서는 젊은 과부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당시 청나라 사회에서는 어린 여성들이 나이 많은 고위급 남성들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는데, 이 남편들이 결혼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버림에 따라 이 어린 신부들이 과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가문 내에서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가 없었는데, 만일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평생 아이를 낳아 기를 희망도 없이 홀과부로 늙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은 몸도 아니니 가문 내에서 잘해줄 리도 없었다. 청나라 조정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지해서 함부로 어린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는 집들에게 상을 내리며 이 풍습을 없애보려 노력하였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나이 많은 남편이 죽으면 함께 죽어 정조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열녀다'라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청나라 사회는 갈수록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갔다.
다만 이 내용들을 보고 청나라 시대에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에도 문제가 있다. 청나라 시기에는 무역과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가문의 남성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이때 남자들이 사업 등의 이유로 집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집에 남아있던 아내가 집안의 경제권을 쥐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여성들은 남아도는 시간과 돈으로 사회적 활동에 참가하거나 사찰의 법회 등에 참석하고는 했다. 경우에 따라 달랐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한편 청대에는 수많은 한족여성들이 만주족 남성들의 첩이나 노리개가 되었다. 태평천국 격문에도 언급될 정도이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썩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식의 성씨와 본관을 떠올리면 쉽다.[16][17][18]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19] '아이신'은 만주어로 '금'(金, 쇠가 아니다.)이라는 뜻인데, 만주족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금(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은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다만 만주 수렵민족 시절의 씨족 사회가 영향을 주어서 만주족이 성씨나 풀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대신 중원에 입관하면서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게 생겨났는데, 이름 첫글자를 한족식 한 글자 성씨처럼 쓰는 것이다. 구왈기야 오보이가 이름인 '오보이'의 첫글자를 따서 '오 대인'으로 불린 게 대표적이다.
한국에서 "너 왜 그런 (노출심한)옷을 입고다니냐?"같은 유교적인 말에 "지금이 조선시대야?"라는 표현을 쓰듯 현대 중국에선 "지금이 청나라야?"라는 표현이 종종 쓰인다. 한국의 조선처럼 가장 가까운 전통적인 전근대 시대이기 때문이다.
청 대의 의복은 만주족의 전통의상인 챵꽈(남성)와 치파오(여성)이다. 물론 한족의 전통 의상인 한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기는 하였으나, 청 황실이 만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만한차별을 엄격히 하면서 아무래도 한족의 영향보다는 만주족의 의복과 더 닮아있다. 만주족의 기본 의상인 치파오는 기본적으로 원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허리 아래쪽에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족의 한푸는 기본적으로 하늘하늘하고 소매가 넓으며 품이 커서 여유가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치파오는 상대적으로 더 몸에 딱 붙어 굴곡을 강조하고 몸매를 더 잘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현대의 치파오는 1910~20년대 서양식 의복의 전래에 따라 근대적으로 개량된 것으로, 청나라 말기에 가서야 등장한 것이기에 청나라 대의 보편적인 의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청나라는 입관 이후 한족 이후 원나라의 선례를 밟지 않기 위하여 피지배계급이었던 한족의 의복 문화를 근절하고 만주족의 전통 복식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중화 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한족에게는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청나라 조정도 할 수 없이 타협,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 원칙을 내세워 남성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으로 만주족의 복식을 답습하되, 여성과 도사, 승려 등의 경우에는 일부 한족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청나라가 오래 이어지며 만주족의 통치가 당연시되기 시작하자, 점차 여성의 복식 역시 만주족의 복식을 자연스레 닮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청 말에는 명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였다.
청나라 일반 남성의 경우, 장삼이나 장포(長袍)를 기본적으로 걸친 후, 그 위에 조끼 형태의 마과나 마갑 등을 덧대어 입는 경우가 흔했다. 참고로 장삼은 긴 원피스 형태의 남성용 치파오라고 할 수 있는 옷으로, 옆트임이 존재한다. 또한 마과나 마갑의 경우, 본디 만주족들이 말을 탈 때 보온용으로 위에 걸치던 조끼 형태의 단상의였는데, 청 초기에는 만주족의 특권으로 여겨져 함부로 입을 수 없었으나 옹정제 연간에 한족 일반 백성들도 입는 것이 허가되었다.[20] 한편 청나라 여성이 입었던 것이 그 유명한 치파오인데, 양옆에만 트임을 주며 허리를 매지 않는 형태였다. 소매끝과 옷깃, 밑단 등에 다양한 색의 천을 달아 포인트를 주었으며, 특히 목선의 경우 둥근 형태가 기본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깃이 올라가는 형태를 띠며 점점 화려해졌다. 또한 그 위에 비갑이나 피풍이라고 하여 소매가 없는 조끼 비슷한 방한용 겉옷을 두르기도 하였으며, 보통 신분이 높을수록 이 비갑과 피풍의 무늬가 화려한 경향이 있었다.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청나라 시대 여성들의 독특한 머리 모양은 '양파두'라고 부른다. 정수리에서 머리를 길게 두 갈래로 가른 다음, 편방이라는 비녀에 감아 만든 것이다.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시간과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머리 모양이라서 평민들보다는 귀족층이나 돈많은 세가들의 여인들이 주로 하던 머리 스타일이었다. 한편 남성의 경우, 남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양모'라고 부르며, 말꼬리털 등을 붉은색으로 염색한 실을 등나무처럼 가벼운 재질로 만든 원뿔 모양의 모자에 늘어뜨린 것이다. 입고있는 의복은 '조복'이라고 부르며, 현대에서의 군대 예복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종묘제례, 즉위식, 조회 등 중대사에서만 간간히 입고 나오는 의식용 복장이었다. 또한 남성이 어깨에 두르고 있는 저 독특한 모양의 장식도 청나라 시대 인물들이 굉장히 많이 입고 다니던 것인데, 이를 '피령'이라고 부르며, 길복이나 조복 등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걸치고 다니는 일종의 예식용 칼라 정도로 보면 된다. [21] 남성이 매고 있는 목걸이의 경우, '조주'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르며 108개의 구슬로 이루어져 있다. 구슬들 사이사이에 '불두'라고 하여 좀더 크고 재질이 다른 구슬들을 정확히 4개를 끼우며, 이는 1년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주의 뒤에는 탑모양의 장식과 구슬들을 꿰어만든 기다란 끈을 늘어뜨렸는데, 이를 '배추'라고 불렀다. 신분과 관직에 따라 조주의 품질 역시 달라졌으며, 만인지상의 황제의 경우에는 상아로 만든 조주에 황금을 장식하여 사용했다고도 한다.
또한 현대까지도 중국의 오랜 악습으로 남아있는 전족의 경우, 만주족의 전통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한족의 전통양식이다. 강희제는 오히려 이 전족이 여성의 노동력을 하락시켜 국가에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전족을 금할 정도였으나,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만주족 가문들이 이 풍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근대 시기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다.
흔히 '중국 모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사발 모양의 모자는 청나라의 관모(官帽)인데, 명나라의 사모, 복두 등과는 그 형태가 확연히 달라 '청대관모(清代官帽)라고 따로 부른다. 겨울에는 벨벳으로 안을 덧댔고, 여름에는 등나무나 비슷한 가벼운 재질로 삿갓형 관모를 만들어 사용했다. 모자 위에 있는 단추나 꼭지 부분은 공식적인 석상이거나 예식 상에서만 달았고, 사적인 자리거나 일상에서는 떼고 모자만 썼다. 특히 고위 관료들은 모자 위에 공작새 깃털이나 붉은 술 장식도 달았는데, 이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대단한 명예였다. 공작새 깃털은 1-3개까지 달 수 있었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공작 깃털을 달 수 있었다.
모자의 꼭지 부분의 색깔과 장식은 계급에 따라 달라졌다. 고위급 관료들은 흔히 진주를 즐겨썼고, 1품 관리들은 루비 등 붉은색 투명 홍옥을, 2품은 산호 등 불투명한 붉은 홍옥을, 3품은 사파이어 등 투명한 푸른 옥을, 4품은 불투명한 푸른 옥을, 5품은 수정같은 투명한 백색 보석을, 6품은 진주 등 보석을, 7품부터 9품까지는 종종 황금이나 자줏빛 보석을 즐겨 사용했다.
6. 경제[편집]
경제적인 면에서도 청나라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17세기 말이 되자 명나라 침략 과정에서 입었던 경제적 피해도 어느 정도 복구가 이루어졌고, 청나라가 농업을 대대적으로 진흥함에 따라 경작지가 증가하고 인구가 명 말기에 비해 거의 2배 수준인 3억 명으로 증가했다. [25] 아메리카 대륙에서 땅콩, 고구마 등이 유입되었고, 해금령을 내려 무역을 거의 완벽하게 차단했던 명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해외 교역량도 증가했다. 청나라는 광동 체제라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이는 오직 광저우 한 곳에서만 해외 교류를 허가하고 조정의 허락을 받은 공행들만 서양 상인들과의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또한 강희제 시기에는 황하를 치수하고 대운하를 건설, 남북의 교류를 활성화하면서 지역 간의 무역이 폭증하며 내수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톡톡히 거두었다. 특히 이 대운하가 경제적 효과가 엄청났는데, 청 조정은 이 운하를 이용하여 북부의 베이징으로 밀, 소금, 비단 등 필수품과 사치품들을 남쪽에서부터 운송해와 필요를 채웠으며, 남부의 상인들은 이 물건들을 수도의 엘리트층에게 판매하며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26] 명나라 말기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황제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경제는커녕 기본적인 내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나[27] 청나라 들어서는 황제들이 직접 치수와 경제를 책임지고 떠맡았다. 이 덕분에 중국 전역에서 상품작물의 재배가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단순히 자급자족용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장들이 생기자 당연히 중소형 도시들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우리가 현재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시들도 정말 웬만한 대도시급이 아니면 그 역사가 청나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28]
전세계에서, 특히 유럽 지역의 상인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어 비단과 차, 도자기 등의 고급 상품들을 사가면서 중국에는 그야말로 은이 쏟아졌다. 가장 대표적으로 스페인 제국이 아메리카 광산에서 채굴한 은의 20~30%가 필리핀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통계 자료가 있을 정도이다. 덕분에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강남 지방에서는 멕시코에서 흘러들어온 은을 이용하여 무역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이와미 은광 등 세계 최대 규모의 은 광산을 가지고 있던 에도 막부도 중국으로의 은 유출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 때문에 나중에는 중국과의 무역을 엄격하게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6세기에 중국에서 은의 가치는 유럽보다 2배 가량이나 더 높았다. 중국에서 은의 가치를 훨씬 더 높게 쳐주자 유럽의 상인들이 바리바리 은을 싸들고 중국을 찾아간 것이다. 아무튼 중국에서는 이렇게 유입된 은을 이용하여 옹정제 시기에는 은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29] 다만 서양의 침탈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부터는 은의 유출이 심각해지면서 이같은 조세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못했고, 이는 사회 불안정을 불러와 청나라의 멸망을 촉진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크게 전근대 중국의 경제사는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지역 간에 사치품, 필수품 교류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송나라 시대이고, 두 번째가 바로 1550년부터 1800년대까지 진행된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점차 교환경제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의 권한이 굉장히 강화되었다. 특히 청나라 시기에는 서양과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엄청난 부를 쌓으면서 권력을 거머쥐기도 했다.
하지만 1인당 GDP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에는 가장 개인이 풍요롭게 살았던 때는 북송 시대이다. 1340년 기준으로 26.5테일이었으나, 명나라 시기 들어 19테일로 줄어들었고 청나라 들어서는 14테일 수준으로, 거의 절반에 가깝게 떨어졌다. [30] 북송 시기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국가였지만 북송 멸망 후 1인당 GDP에서 이탈리아에게 추월당했고, 명나라 시기에 와서는 GDP가 답보 상태인 이탈리아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영국의 90%, 네덜란드의 40%에 못 미칠 정도로 떨어졌다. 청나라 시기 1인당 GDP는 더 하락했으며 나라에 망조가 들어가던 19세기 중반 즈음에는 영국의 2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1840년 당시 청나라의 1인당 GDP를 당시 초강대국인 대영제국과 비교해 보았을 때, 중국의 1인당 GDP는 영국의 14.95% 밖에 되지 않았다. 다만 중국의 물가가 영국보다 훨씬 저렴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수치가 23.57%까지는 올라가기도 한다. 그래봤자 영국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치이기는 하다. 대한민국 원으로 환산하면 1840년대 청나라의 1인당 GDP는 2020년 기준으로 297만원 정도였다. 당시 원 기준으로 1,260만원 정도의 1인당 GDP를 자랑하던 영국과 비교하면 훨씬 뒤떨어지는 셈이다.
청나라는 광산 산업의 사유화를 상당히 장려했다. 명나라 시기에는 정부가 광산 산업을 독점했기에, 생산력이 북송 시기나 청나라 시기에 비해서도 꽤나 낮았다. 개인 사업가들은 광산 사업에서 얻은 이익의 15분의 1을 나라에 바쳐야 했고, 그 외에도 보호비, 뇌물 등으로 상당수가 관료들의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때문에 개인 사업가들은 광산 사업을 기피했고, 나라가 거의 광산을 독점하다시피하자 생산력이 당연히 낮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광산업에서 거의 손을 놔버렸고, 무기나 동전 따위를 주조하는 데에 필요한 철과 금, 은 따위의 금속들을 대부분 시장에서 사들이는 방안으로 선회하면서 중국의 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광둥성을 중심으로 해서 광산업이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청 중반기에 들어서부터는 초기 형태의 은행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무역이 발전하면서 먼 거리를 이동해야만 하는 상인들의 수는 늘었다. 이 상인들은 무거운 금과 은 따위를 이 먼 거리 동안 계속 가지고 다니기가 힘드니 돈을 모아 상단을 설립하였고, 출발하기 전에 미리 은을 맡겨놓고 차용증을 받은 후 도착한 이후에 해당 상단 지점을 찾아가 증서를 보여주고 은을 받았던 것이다. 18세기 즈음에 다다르자 이러한 은행 네트워크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자본의 유동성이 증가하면서 중국 대륙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흔히 중국의 왕조들이 상인들을 천시하고 경제를 옥죄었다는 편견이 있는데, 따지고 들어가보면 완벽한 사실은 아니다. 7세기에 당나라가 경제에서 손을 떼버리는 쪽의 정책을 펼치면서 후대의 왕조들은 모두 경제에 큰 관여를 하지 않았고, 그냥 되는대로 놔두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명나라의 경우 세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고, 소금 등 일부 필수품들을 제외하면 국가가 독점하거나 간섭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청나라도 당연히 이같은 선례를 따라갔고, 경제에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정부의 간섭이 뜸하니 시장경제가 활기를 찾았고, 대상인들이 등장하며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31]
개항 이후에는 외국과의 대규모 무역이 실시되면서 청나라의 세수는 가파르게 증가한다.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들 때문에 상품에 붙는 관세 비율은 낮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무역이 촉진되며 관세와 이금세로 얻는 소득은 청나라 재정에서 날로 커졌다. 그럼에도 청나라 정부는 청말에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이는 막대한 배상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방만한 재정 운영과 부정부패 ,낙후된 행정 때문이었다. 당장 토지세인 전세만 하더라도 청나라 멸망 직전 기준으로 3,500만냥으로 10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많은 토지는 토지 대장에서 누락되거나 실제와 맞지 않았다. 전국의 토지와 수확량을 체계적으로 정확히 조사해야 해결 가능한 문제였지만 청의 광대한 영토를 감안하면 조사사업 자체가 배꼽이 배보다 더 커지고도 남았다.
게다가 대토지를 보유한 사람들은 토착 호족이거나 힘 있는 관료들이었는데, 이들의 저항을 억누르는건 청조 입장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성적인 부패로 세리들과 고위 관리들이 착복하는 세금 역시 엄청났다. 지세 개혁도 어렵고 부패 척결도 어려우니 무작정 세금을 인상해서 이런 식으로 떨어져나가는 세금을 매꾸려고 해도 수탈의 대상인 농민이 반발할게 뻔했다. 이런 문제들로 말기 청나라의 낙후된 재정 시스템은 멸망할 때까지 개혁되지 못하고 혁명으로 세워진 중화민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조적으로 일본은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등의 반발 속에서도 1873년 7월부터 지조개정법을 실시해 모든 토지에 토지 가격의 3%에 해당하는 세금을 매년 걷어 근대화와 군비에 필요한 재정을 안정적으로 마련했다. 청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신해혁명도 청나라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한 철도사업 국유화 결정이 초래했으니 청나라 말기에 일본보다 재정 근대화가 한참 늦은건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다. [32]
7. 종교[편집]
그 이전의 중국 왕조보다 불교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며 청나라가 티베트를 흡수하면서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서 중국 내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들도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강희제는 베이징에서 규모가 제일 큰 티베트 불교 사원인 옹화궁을 설치했다.
8. 군대[편집]
역사는 누르하치가 창건한 만주족의 팔기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누르하치는 팔기제를 확립하여 단순한 군대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할도 겸하게 하였고, 거의 호적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겼다. 러시아 제국이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많은 시베리아의 이민족들이 몽골과 만주족이 있는 만주 지역으로 몰려 갔고 이들은 만주족이 원나라 옥새를 발견한 이후부터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후 홍타이지는 만주팔기를 본따 몽골족들로만 이루어진 몽골팔기를 새롭게 만들어 군력을 강화하였다. 1644년에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난 이후에 투항해온 투항한 명나라 군인들을 이용해 녹영군을 창설했지만 명나라 한족들은 만주족을 이민족으로 폄하했기 때문에 투항한 명나라 군인들 숫자는 많지 않았다. 팔기군 자체가 만주족이 대부분이였지만 몽골족도 포함된 이후 여러 이민족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팔기군에는 조선인들과 소수 한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나라 한족들 중 명나라를 버리고 만주족 군대에 투항한 자들은 소수였다. 명나라 한족들 입장에선 만주족 군대들은 정복하러 온 이민족 군대였으며 명나라 시절 한족들과 한족 군인들은 명나라에 충성하며 만주족에 심하게 대항하였다. 홍타이지는 심하게 대항하는 명나라인들을 전멸시킬 생각으로 대규모의 만주족 군인들을 명나라로 보내 원정 공격을 하였다. 명나라를 공격할 때 당시 만주족 군인 규모는 역사상 최대의 군사 규모였으며 이것은 로마의 투라야누스 군대보다 숫자가 많은 것이였다.
청나라 초기의 군대는 명나라 시절에 물려받은 화기를 나름대로 활용하여 그 전성기에는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평화기가 지나치게 오래가자, 팔기군이나 녹영이나 요새에 짱박혀있는 경우가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훈련과 실전 경험이 줄어들며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강희제 때와 옹정제 시기, 그리고 건륭제 시기에도 서부 지역으로 몇 차례 군사 원정이 있기는 했으나, 18세기 말 즈음에 들어서는 청군의 규모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반면 효율성은 거의 바닥을 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가경제 시기에는 낫과 곡괭이 따위로 무장한 한족 반란군에게도 쩔쩔맸고, 태평천국의 난 때에도 반란군들을 제대로 진압하기는 커녕 쫓겨다니기에 급급했다.[33] 청군의 최대 약점은 무기의 열세였다. 명나라를 진압한 이후 청나라의 화포와 무기 등은 거의 진보하지 못했고, 1700년대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총, 군함, 대포 등이 혁신적으로 발전한 데에 반하여 중국 무기는 거의 17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 화력의 열세 때문에 수십만 청병이 단 2만 명도 되지 않는 서구식 군대에 무너지기도 했다. 단, 오해가 있는게 1차 아편전쟁때의 서양열강은 나폴레옹 시절의 머스킷 소총을 그대로 들고왔고 기관총도 없었다. 당연히 전술 역시 나폴레옹 전쟁때의 전열보병이 기본이었고 이 전열보병으로 중동,인도,중국 등의 타 문명권들을 제압한거지 기관총과 속사대포는 생각보다 훨씬 한참 이후에나 쓰였다. 2차 아편전쟁부터 그나마 신무기라 할 수 있는 퍼커션 캡이 쓰였으며 후장식 총과 맥심 기관포, 주퇴복좌기 속사포 등 흔히 '근대의 신무기' 하면 떠오르는 무기들은 의외로 거의 20세기가 가까워진 의화단 전쟁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됐다.
나라가 망할 기운이 들자 더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청나라 조정은 드디어 노후화된 군대를 개혁하기로 결심한다. 1860년에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몇 만도 안되는 서구 열강 군대에게 청군이 농락당하자, 증국번, 이홍장, 만주족 출신 문상 등은 서구식 무기들을 수용하여 서양식 훈련을 받고 제식을 갖춘 신군의 창설을 결정하였다. 이홍장은 지방에서 회군을 조직했고, 문상과 몇몇 청 황친들은 베이징에서 신기영(神機營)을 창설하여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신기영은 대략 2,500여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이 손쉽게 수많은 강도 떼들을 진압하자 황실도 이에 마음이 움직여 대대적인 서구식 군대의 창설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만주족 관료들은 피지배민족인 한족들과 힘을 합쳐 서구식 함대와 군대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푸저우에 군항을 설치하여 15척에 달하는 군함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난징, 톈진, 란저우 등에도 새로운 군사기지들이 설치되며 외형상으로는 현대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한편 서구 열강들은 비상이 걸렸다. 열강들은 중국이 힘을 키우면 자신들이 공을 들이고 있는 아시아 식민지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했고, 중국에서의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34] 청일전쟁 이후 건설된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바로 군대 근대화의 최종 결과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때 혁명군과 타협을 하고 오히려 청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신건육군이라고 하기도 하는 청나라 북양군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 위안스카이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신해혁명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편성을 완료한 신군은 16개 사단,14개 혼성여단,4개 독립연대,금위군 2개 여단 소속 30만 1,800여명에 달했다. 각 사단의 병력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1개 사단에 해당하는 1만 2천명 정도였다. 신군은 무기만 현대적인 소총과 중화기를 갖췄다 뿐이지 체계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군대인 이홍장의 회군 등과는 대조적으로 제복부터 편제,훈련,전술까지 완전히 서구화된 진정한 근대 군대였다. 물론 러일전쟁을 거치며 각 사단 총원을 1만 8,400명이 넘게 증원하고 각종 신무기를 국산화한 동시기 일본 육군을 상대하긴 부족했다. 그러나 내부 반란 진압이나 제한적인 국외 개입은 어느정도 가능한 전력이었다. 일본에게 패배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고 의화단의 난 당시 열강 연합군에 또 패전한 청나라 입장에서는 그동안의 한족에 대한 불신감을 떨치고 마지막 쇄신을 시도한 셈이었다. 폐쇄적인 팔기와 대조되는 근대적인 현대 육군을 건설하려면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에게 많은 비중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창 봉기를 시작으로 신군이 결국 이반하면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만다. [35]
8.1. 해군[편집]
입관 이전부터 청나라는 수전에 약했다. 병자호란 전후로는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의 명나라 항장들이 원래부터 사병처럼 부리던 포병대와 수군을 써먹었고 이들이 팔기한군의 모태가 되었을 정도. 입관 후에도 청나라는 명나라의 사례를 그대로 이어받아 엄격한 해금령을 펼쳤다. 또한 만주족은 주로 말을 타던 기병 위주였기에, 배를 타야하는 수전에는 미숙했고 이때문에 당시 육군 대부분은 만주족이였지만 청나라의 수군은 명나라에서 귀순하거나 흡수한 한족 투항병의 비중이 높았다. 청나라는 항저우와 전장에 수군 기지를 두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이들이 주로 대만 섬으로 도망간 정성공의 약탈 부대나 동남아의 해적들, 그리고 왜구들로부터 청나라 해안가를 방비하는 역할을 했다.
1661년에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지린에 해군 기지를 새롭게 세웠으며, 팔기군을 해군에 배치하기도 했다. 1677년에는 푸젠에 정씨 왕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독자적인 해군 기지를 따로 창설하였으며, 이 덕분에 얼마지나지 않아 정씨 왕국을 꺾고 타이완 섬을 청나라의 지배 하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와 비슷하게 해군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유럽과는 다르게 대양 해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이 해안가에 주둔하면서 외적들의 침입을 막고 방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강희제는 청나라의 해안을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크게 황해 쪽과 가까운 보하이해, 장쑤성과 저장성 인근 해안, 타이완 해협 인근 해안, 그리고 광둥성 해안으로 나누었다. 보하이해에는 덩저우 함대, 자오저우 함대, 뤼순 함대, 톈진 함대 등이 주둔했으며, 장쑤성과 저장성에는 장난 함대와 저장 함대, 타이완 섬에는 푸젠 함대, 광동 해안에는 광동 총독 직속 함대와 광동 함대가 각각 주둔했다. 강희제 시기의 청나라 해군선에는 각각 대략 40여 명의 수병들이 승선하였으며, 네덜란드 양식으로 만들어진 대포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해군은 건륭제 말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백련교도의 난과 묘족의 난 등이 연이어 터지자 청나라 조정은 해군보다 육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안그래도 기강이 날로 무너져가던 해군은 붕괴에 가속도가 붙으며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이때문에 아편 전쟁 때에 이르자 청나라의 해군은 서구식 무기를 갖춘 함선들에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 수병들마저 '이렇게 약했었나?'라고 놀랐다. 나름 한가닥 하는 해군력과의 혈전을 각오하고 왔던 서양 해군의 입장에선 의아할수밖에.
양무운동기에는 여러 서양식 전함을 매입하고 수병들을 훈련시켜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키웠고 장비들도 나름 괜찮았으나, 어수선한 근대화의 한계와 근본적인 실력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청불전쟁, 청일전쟁으로 모조리 수장되었다.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가 건설한 해군의 총 톤수는 8만 3,900톤에 각종 군함 78척에 달했다.
서태후가 사망하고 의화단의 난 역시 청나라의 참패로 돌아간 이후인 섭정 짜이펑의 집권 기간에는 어느정도 복구는 시도된다. 이를 위해 유럽과 미국에서 현대적인 구축함과 방호순양함 10척 등을 수입해 전체 인원 8,500명에 달하고 총 배수량 4만 5,000톤의 함대를 급하게 재건했다. 전근대 수군의 면모가 많이 남아있었던 양무운동 시기 북양함대에 비해 철저히 구미와 일본의 군사사상과 체제를 모방한 완전한 신식 군대였다는 점에서는 북양 신군과 같다. 그러나 청나라가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 패배 충격에 헤롱거리는 동안 일본 해군은 드레드노트급에 포함되는 2척의 카와치급 전함 가와치와 셋쓰를 1912년에 건조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으로 부상했다. 그래서 재건된 청나라 함대는 서류상으로라도 일본 해군을 압도하던 북양해군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중국인 수병들의 주도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해군 함선이 세계 일주를 도전하는 등 청일전쟁에 완패한 청나라로서는 어느정도 자존심은 세웠다. 둥사 군도를 놓고 일본과 분쟁이 벌어지자 군함을 파견하는 등 구색만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걸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중앙정부가 붕괴하며 청나라의 해군 재건 계획 역시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36]
9. 평가[편집]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나라 황제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受命天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내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대칸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佛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37]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기인의 세계에서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汗)으로 표상되었다.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중
지배층은 대부분 만주족이었지만 소속 민족이 다양했던 만큼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민족마다 청 군주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38] 으로, 북방의 몽골 지역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신강과 영하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 여겨졌다.[39] 청나라의 황제는 이러한 위치를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의 칸으로서 얻은 군사력을 중원의 엄청난 재력으로 유지, 통솔했다.
그러나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및 제조 금지[40] 등으로 비판을 받는 편이다. 특히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청의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잘 봐줘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 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해전에서도 명나라는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예가 랴오뤄 만 해전/요라만 해전(料羅灣海戰). 명나라가 다른 문명권과 다르게 유럽 세력과의 해전에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다른 문명들을 압도적인 속도로 능가하기 시작하고 있던 유럽 문물을 따라가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나라 지배층들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전 6권이 간행되어 중국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게 명나라 때의 일이고 군사학, 농업, 천문학 등에서의 서적이나 훈련 방법 등에서 유럽 문물이 의외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망조가 들어서 어이없게 날아가기는 했지만 명나라는 유럽식 훈련으로 수학과 과학이 동원된 사격술 등을 익힌 군대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정예병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다만 명나라와 싸웠던 당시 네덜란드는 전근대 시절이었고, 독립을 위해 온 힘을 유럽에 쏟던 30년 전쟁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청이 만난 영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영국은 당대 최강대국 중 하나인데다 산업 혁명을 일으킨 근대 국가인지라 청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당시 네덜란드도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로 나아가던 국가라 해전에서 비유럽은 물론 유럽까지 아주 탈탈 털고 다녔으나, 세계 제국인 대영제국과 결국 중소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네덜란드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
특히 건륭제는 평생에 걸쳐 전제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위해 반청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별별 시덥잖은 이유로 트집잡아 목숨을 앗아갔다. 이에 중국 학계는 스스로의 자생능력을 잃은 채 오래되고 오래된 고문을 다루는 고증학에만 치중하며 망해가고 있었다. 말기에도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 황족들은 대부분 황제국의 최상위 지배 계급으로서 누리는 권력에 탐닉할 뿐 근본적인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사실 세계의 유목민 왕조들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경우들이 매우 많다. 일단 정주 국가들의 경우 지배층들이 문명을 주도하며 여러 가지 것들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는 지배층들이 보통 지금의 지식인 계층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문명 발달에도 생각보다 영향력이 엄청났고 수학처럼 문명을 발달시키는 것에 기여한 학자들을 찾아보면 지배층 출신들이 많다. 심지어 가난한 것처럼 묘사되는 그리스 학자들도 자세히 알아보면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본인은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불로소득 계층이 많았다.
반대로 유목민들은 지배층이 직접 문물 발달에 기여하는 게 적은 편이었다. 보통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교류를 확산시켜 기여를 했다거나 하는 간접적인 식이고, 유목민들이 직접 과학 기술 혹은 수학과 관련된 서적을 쓰거나 하는 일들은 적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잘 이용한 유목민들도 있었지만 그런 유목민들은 결국 정주민과 동화되었다.
아무래도 유목민 지배층들이 문명에 직접 기여하는 것들이 적으면서 밑에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그 열매를 가져가니,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잠재력을 깎아먹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러시아처럼 자기들을 정복한 유목민들을 보고 고혈을 빨아먹는 거대한 기생충이라고 하며 평가가 매우 부정적인 곳들도 많다.[41]
하지만 청나라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게, 청나라의 지배는 독자적으로 창시한 제도도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유교를 필두로 하는 한족들의 사상과 문화가 기반이었고, 인문학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자연과학은 원래 관심 밖이었다. 명나라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명나라 시절부터 이미 기술력이 뒤쳐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청나라 역시 현시창을 느낀 뒤에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건 명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애초에 여진족은 유목민족이 아니라 농경, 어업, 수렵, 채집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해왔고, 청나라도 유목 제국이 아니라 엄연한 농업국이었다.
중국에서 한족 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매우 싫어하며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을 지배한 나라 중에 청 외에도 몽골족이 세운 제국도 매우 싫어하여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 애산 전투(원vs송) 이후 중국은 없다.)"이라고 말할 정도.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라고 생각하며, 19세기 중국이 근대화에 진입을 못 하고 열강의 각축에 밀린 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편 이런 한족 우월주의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만주족은 중국의 산타클로스’란 말도 있다. 사실 명조까지 중국의 강역이 아니었던 만주,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등은 전부 만주족이 정복하여 중국에 붙인 지역이기 때문. 만주족 왕조가 한족 왕조보다 유능했다고 돌려까는 내용이다. 맞기만 한 말은 아니지만 틀리기만 한 말도 아닌 게, 청나라는 명나라 등 한족 왕조들에 비해 영토가 매우 넓고 민족도 더욱 다양한 데다 지배민족이 다수의 한족이 아니라 소수의 만주족인 상황에서 한족 왕조와 같은 중앙집권제를 추구했기 때문에 통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주족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비단 한족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외몽골의 몽골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경향[42] 이 있는데, 외몽골 입장에선 청나라의 지배로 인해 같은 알타이계에 뿌리를 둔 내몽골과 탄누투바, 위구르를 잃었기 때문이다.[43]
물론 투바와 위구르는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고 위구르는 10세기부터 이슬람화되어 몽골인들과는 문화적 이질감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언어도 같고 원래부터 함께 살아온 내몽골이 분리된 건 외몽골 할하인들 입장에서 정말 뼈아프다.
이때문에 유튜브 같은 데서 보면 만주족은 중국인과 몽골인들 사이에서 자주 다굴당하는 편인데, 처음엔 원나라vs송나라 떡밥 논쟁에서 시작했다가 갑자기 청나라가 끼면 합심해서 청나라를 까는 재밌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44] 중국인은 만주족이나 몽골족이나 다 같은 주변 오랑캐로 치부해버리고 몽골인은 만주족들이 중국 좋은 일만 시켜놓았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중국 영토는 청나라 때 확정된 것이고 적어도 외몽골인 입장에선 같은 알타이계인 내몽골이나 튀르크 등을 잃었으니 화날 만 하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로,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가 후금 칸인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대원진국옥새를 바치면서 항복을 선언하자 천명이 대원에서 대청으로 계승되었다며 에제이를 배신하고 후금에 합류했다. 그리고 후금은 스스로를 중국 황제국으로 선포해 국호를 청으로 바꾼다. 특히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후금 때부터 만주에 합류한 데다 청나라 치하에서 우대를 받기까지 해서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강한 할하인과 달리 만주족을 되려 친척 민족이라고 생각하며 청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니며 한족은 만주-몽골의 노예였음을 강조한다. 실제로도 청나라는 사실상 만몽 연합정권이라 보는 분석이 자주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현재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한족 왕조인 송나라나 명나라 뿐만이 아닌 몽골족 원나라, 만주족 청나라 등 이민족에서 비롯된 것도 많다. 우선 변발이라는 특유의 머리 스타일부터 해서, 우리가 흔히 UFO 모자로 아는 모자는 사실 몽골인들의 전통의상 델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치파오 역시 만주족 복식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춘절 때 거는 재복을 비는 민화 역시 관우와 함께 나오는 동자의 헤어 스타일이 몽골족 변발이다. 사실 칭기즈 칸의 임팩트와 서구와 접촉한 마지막 중국왕조가 청인 연유 등으로 외국에 이들 유목민족의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 버린고로 이민족의 왕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중국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이 거란이 기원인 키타이일 정도.[45]
반면 서양에서는 신청사라는 사조를 이룰 정도로 청나라의 만주족 중심 세계제국으로서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쪽이 국제 중국사학계 주류 시각이다. 영미권, 구미 출신 중국사학자가 쓴 청사 대중서가 시중에 많이 소개될 정도인데, 비슷한 시기를 다룬 중국 학자들의 서적과 함께 읽다보면 미묘하게 다른 태도를 많이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국내 중국사학계와 중앙아시아사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국어였던 만주어 문헌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만주어의 학술적 위상이 서양사에서 라틴어가 차지하는 위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매우 높아졌고, 급기야는 한국의 여러 대학들이 역사 전공자들을 위해 만주어 강좌를 열고 만한사전을 내거나 한국의 여러 대중매체에서 만주어 고증을 시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중국의 어용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보이는 반응도 몹시 흥미로운데, 청나라를 중화민족이 이룩한 중화제국이 아닌 만주족의 세계제국으로 평가하는 신청사를 하나의 중국을 깨부수려는 서양 반중주의자들의 분탕질이라며 분개한다거나, 조선 배경의 한국 사극에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강조하며 청나라에게 무릎 꿇는 것을 치욕스러워하는 현상에 혼란스러워하거나, 그러면서도 청나라가 중국의 판도로 확보한 신강, 영하, 청해, 티베트, 내몽골, 만주 등의 지역은 원래부터 중화민족의 무대였다며 역사왜곡을 시도하는 등의 다채로운 반응을 엿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들은 만주족의 중원 정복으로 세워진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를 마냥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편이지만 사실 중국 입장에서 청나라는 매우 고마운 나라인데, 그 이유는 현재의 만주, 내몽고, 신장, 티베트 등 중화 문명과 별개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지역들이 청나라 때 중국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이다.[46] 현 중화인민공화국이 전통적인 중국 영역보다 2배 이상 넓은 강역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청나라 시기 영토 확장의 성과 덕분으로, 만약 청나라가 없었다면 만주, 신장, 티베트 등 현재 중국이 지키려고 하는 소수민족 지역들은 모두 독립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0. 역대 황제[편집]

11. 대외 관계[편집]
대외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점으로, 청이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에는 만주어와 러시아어로 체결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관련기사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이하 청 - 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 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 - 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 청 - 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긴 이유는 청 - 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당시 러시아 차르이던 표트르 1세와 이복 누나 소피야 간의 대립으로 내부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군사적으론 유리했으나 청에게 이전에 획득한 영토를 내주는 등 불리한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청 - 러 조약은 평등 조약이 되었다. 이는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한족 왕조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듯 싶다. 이자성의 순나라가 제대로 성공하여 약 300년 가까이 이어진다든가, 삼번의 난이 성공한다든가, 아예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여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등을 가정해도 말이다.
평등 조약이라는 것은 중화사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된다. 이 때문에 청 - 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조약문에는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만주는 한자 문화권이 아니였기 때문에 지리상으로 북방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남쪽에있었던 한족이 개입할 여지가 적었고 한문으로 적을 이유도 없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에 참여했던 통궈강의 경우는 한족 출신이지만 팔기에 편입되어 있었고 1688년 만주족으로 변경을 하게 된다.[47]
후대의 청나라에 비해 군사력이 한참 취약했기 때문에 단순한 비교는 곤란하지만 당장 한족 왕조인 북송도 요나라, 서하와의 군사적 충돌 문제 탓에 다른 한족 왕조들에 비해서, 심지어 만주족의 청나라보다도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중화 사상을 추구하지 못했다. 상국으로 인정받긴 했지만 명목상 북송의 제후국이었던 고려 또한 여요전쟁을 겪은 후부터는 명목상 북송과 요나라에 이중으로 사대하게 되었다. 만약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한족 왕조였다면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을 끝내고 평화 협정을 맺을 때 대외적으로는 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대내적으로는 중화 사상에 입각한 불평등 조약이라고 일종의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11.1. 북원[편집]
원나라는 명나라에게 대도를 뺏기고 북쪽 내몽골 및 만주 지역으로 물러가서 북원을 세웠다. 그 후로 명나라와 중국 대륙을 빼앗기 위해 많은 전쟁을 벌였다. 그래서 실제로 알탄 칸 때는 경술의 변을 통해 거의 원나라 부활 일보직전까지 성공했기까지 했으나 알탄 칸의 사후 약체화되었고, 외몽골의 오이라트와도 고비 사막을 경계로 툭하면 전투를 벌여 쇠약해진 상태에서 후금이 팽창하자 북원의 후신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가 대원진국옥새를 후금의 홍타이지 칸에게 바치고, 후금은 대원옥새를 바탕으로 중국의 황제를 선포,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여 황제국을 선포한다.[48]
이후 청나라는 북원의 영역인 내몽골과 만주 흥안성을 복속시키고 내몽골 왕공들을 대거 팔기군에 합류, 막강한 기병 전력을 갖고 명과 조선을 털어버리며 특히 조선에게는 희대의 굴욕을 주기까지 했다. 차하르는 청나라와의 연합으로 실질적으로도 내몽골 최강 세력이 된다. 그러나 청나라는 다른 몽골인들을 매우 탄압하였는데, 유목민인 그들에게 영역을 정해주고 그 영역을 벗어나면 심각한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몽골인 탄압이 정점에 이른 게 준가르를 멸망시킬 때였으며, 이때문에 오이라트인들은 몽골계 민족 중에서 청나라의 탄압을 가장 혹독하게 받은 민족이 되었다.
11.2. 명나라[편집]

여담으로 청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옛 명나라의 유신들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썩혔다. 한족은 그 특유의 중화사상 때문에 '야만족'이 세운 청나라를 공식적인 중화의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만주족이 명나라를 도와준다고 사기를 치고 천하를 낼름 빼앗아 갔다고 여겼다. 청나라 옹호자들은 만주족이 사실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은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무너뜨린 이자성을 치고 그의 손에서 천하를 빼앗아왔다고 주장하지만 그래봤자 한족의 입장에는 마찬가지였다.
청 말기의 쑨원 같은 민족주의 혁명가들이나 반청 복명 인사들은 청나라와 '중국(명)'의 관계를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11.3. 조선[편집]

11.4. 러시아[편집]

11.5. 일본[편집]

11.6. 몽골[편집]
외몽골의 경우 1691년 돌론노르 회맹에서 칸들이 강희제에게 분명한 신속의사를 포명함으로써 청나라에 복속, 청의 외몽골 지방이 된다. 그러나 청이 멸망한 뒤 외몽골은 독립을 추진. 복드 칸국으로 독립하고 1924년 다시 몽골 인민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물론 자력은 아니고 러시아 내전 당시 소련군의 도움으로 독립했고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위성국이 된다. 반면 일찍이 대원전국옥새를 바치며 청 황실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계속 청과 호흡을 같이 하다 티베트와 함께 서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중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병력을 징집할 수 있게 된 한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병합을 당해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진다. 병자호란 때 한성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내몽골의 외번 몽골군이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몽고병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 같은 사례들을 분석해보면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퍼질 경우 주변을 침공하거나 하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예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49]
몽골족과의 관계에선 만몽 연합 정권을 내세웠고 실제로도 내몽골의 보르지긴(보르지기트) 일족은 황실의 외척으로서 황족의 권리를 누렸다. 그리고 청의 통치 영역이 아닌 외몽골의 할하 유목민은 회유책을 썼고, 청의 통치에 저항하던 오이라트인은 무력으로 응징해 버렸다. 그 외에 17세기에 러시아 남부로 이주했던 오이라트의 분파인 칼미크인의 일부는 러시아와의 불화로 인해 옛 준가르의 땅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50]
11.7. 그 외[편집]
오늘날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동튀르키스탄과 티베트가 중국에 속하게 된 것 또한 청대의 일. 동튀르키스탄의 경우 북방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무역 수입 및 생필품 공급지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 제국의 흥기를 경계하던 중화 왕조들은 종종 이 지역을 침공하였다. 오이라트의 잔당인 준가르가 다른 몽골 부족들과의 싸움에서 밀려 서쪽의 동튀르키스탄으로 도망쳐 준가르 칸국을 세웠으며 이후 청나라의 복속 시도에 계속 저항했다. 하지만 국력 차로 인해 준가르 칸국은 1757년 건륭제 때 멸망하였고, 서역 원정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고 생각했던 건륭제는 후환을 없앤다는 취지에서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 학살을 실시했다. 준가르족은 노예 납치 및 주변 민족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수탈로 원성이 높았기 때문에, 탈주가 봉쇄당한 상태에서 학살당했다. 청은 점령한 동튀르키스탄에 새로 정복한 곳이란 뜻에서 '신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남쪽에 있던 위구르인과 동쪽에 있던 후이족들을 이주시켜 유목민들이 다시 정착하지 못하도록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둔전과 요새를 건설하였다.
티베트의 경우 오랫동안 중원정권과 무관한 독립국이었으나, 1717년 준가르 칸국이 티베트 달라이 라마 계승 문제에 개입하자 1720년 강희제가 친청파 티베트군과 함께 원정군을 파견하여 준가르를 몰아낸 후 티베트를 복속시켰다. 청 말기 청이 쇠락하고 이 지역에서 봉기가 계속 일어났음에도 청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결국 티베트는 외몽골처럼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청에게서 독립하여 사실상 독립국처럼 행동했으나, 암도와 캄 지방은 중화민국 영향 하에 있었다. 1950년 중국을 평정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침공하여 중국의 지배 하에 든다.
영국, 프랑스 등은 교역을 하러 왔으나 청은 교역에 별 관심도 없었고 청나라 지식인들 중 서양 언어를 구사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교역이 확대되는 것도 원하지 않은 반면 영국에서는 은이 자꾸 청으로 흘러들어가 경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역 문제로 점점 고조되어 가던 양측의 갈등은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신장성은 신해혁명 이후 양쩡신, 반독립적으로 행동한 성스차이[51] 와 같은 친소 성향 한족 군벌들이 지배하고 있었고,러시아 제국 또는 소련과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였다. 중화민국이 신장을 직접 통제하려 할 때마다 강압적인 통제에 반발하여 위구르인들과 카자흐인들이 봉기하였는데, 결국 소련이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버리면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동시대 남아시아 최대 제국이였던 무굴 제국과는 별 분쟁없이 무역만 하고 지냈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 사이에 지구상에 가장 높은 산맥인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충돌이 아예 없진 않았다. 무굴제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청나라 령이었던 티베트를 침공했는데 티베트가 청나라 조정에 구원을 청했고 이에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맞붙었다. 청나라가 나라 상태가 멀쩡했다면 히말라야를 넘어온 인도군을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알다시피 당시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서 지진 않았지만 이겼다고 하기에도 뭐한 전투 이후 인도가 그냥 퇴각한다.
조선 외에 조공국으로 베트남, 미얀마, 그리고 코칸트 칸국과 카자흐 칸국이 있었다. 다만 코칸드 칸국의 경우 완전히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기 전까지는 청나라의 변방을 약탈하여 한족, 만주족, 위구르족 등 청나라의 민족들을 포로로 끌고 가기도 했다. 이 때 코칸드 칸국으로 잡혀온 한족들의 후손이 오늘날 구소련 국가의 둥간족이다.
12. 같이보기[편집]
12.1. 주요 사건 (시대순)[편집]
- 사르후 전투
- 영원성 전투
- 정묘호란
- 병자호란
- 나선정벌
- 문자의 옥
- 삼번의 난
- 네르친스크 조약
- 아편전쟁
- 난징 조약
- 태평천국의 난
- 아이훈 조약
- 베이징 조약
- 양무운동
- 청프전쟁
- 청일전쟁
- 변법자강운동
- 의화단 운동
- 신해혁명
12.2. 인물 (시대순)[편집]
[1] 청룡 그림은 국장 역할도 맡았다.[2] 대청제국지새. 청나라 전성기에는 만주 문자와 한자가 모두 새겨진 국새였으나, 청나라 말기 1909년에 만주족 대다수가 정체성을 제외하고 거의 한족화되면서 한자만 새겨진 위의 국새로 바뀌었다.[3] 짙은 회색은 타국에 빼앗겨 상실한 영토이다[4] 편의상 후금이라고 칭하는 것일 뿐, 공식 국호는 ‘아이신 구룬’, 즉 금국이었다.[5] 참고로 이 시기는 청나라가 건국되기 전 후금시절까지 합한 시간으로, 순 국호가 청나라였던 1636년을 기준으로 하면 276년이다.[6] 참고로 통일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는 한나라이고 그 다음이 송나라이다. 다만 한은 신나라의 건국으로 세조 광무제가 왕조를 복구하기 전까지 15년간 끊겼었고, 송은 정강의 변으로 황제가 잡혀간 뒤 북송이 멸망하고 이후 남송이 건국되는 바람에 황통이 한 번 끊겼다.[7] 또한 중국사를 통틀어 봤을때 이민족이 세운 나라가 약 300년이란 장기간 동안 광활한 국토를 지배하며 다스린 것은 가히 특기할 만 하다.[8] 청나라로 불리기 이전에는 후금(後金)이라 불리었다. 후금에서 청나라로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9] 참고로 청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나라이다. 명나라는 영락제부터 선덕제까지 평화로운 전성기가 40여 년을 채 못 갔고, 이후 토목의 변 등 천재지변과 임진왜란 그리고 외부로는 몽골과 만주 세력들의 침노를 받으면서 점차 몰락의 길을 걷는다.[10] 현행 병음표기로 qing은 '칭'으로 발음한다.[11]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국호를 바꾸고 8년 뒤에 정말로 중원을 정복한다.[12] 지도상에서 청의 판도를 중국 대륙을 넘어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간혹 있다.[13] 및 대만(중화민국을 독립국으로 볼 경우)[14]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간을 하다가 찢겨 죽은 여자와 개 이야기다. 《요재지이》에 따르면 이 여자가 관청으로 압송되어가던 중에, 민중들이 이 여자가 수간을 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자 간수가 돈을 받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간을 시켰다고 한다.[15] 정말 심각한 상해를 입히거나 여성의 가문이 매우 지위가 높으면 예외다.[16]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이런 식으로 성을 쓰는 것.[17] 그나마 가장 가깝게 비유하면 본관과 분파를 이름에 쓴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안동 권씨 복야공파 출신의 권철수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할라와 무쿤을 적용한 만주어식 이름 배열은 '복야공(파)(안동)권(씨) 철수'인 셈이다.[18] 만약 고대 로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로마인의 이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로마인 이름에서 세 번째 이름과 두 번째 이름의 관계와 같다. 예를 들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경우 코르넬리우스는 씨족의 이름이고 술라가 가문의 이름이다. 코르넬리우스 씨족 자체는 고대 로마의 전체 집정관 중 40%를 차지했을 정도의 최고 명문이지만 정작 술라 가문은 몰락하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어렸을 때 창녀의 돈을 받아 공부하기도 했다.[19] 그래서 '수수기오로' 등의 다른 기오로계 성씨도 있다.[20] 한편 중국 청나라 대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 이 마과인데, 이 마과도 아무나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황제의 색이던 황색마과의 경우,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가 친히 하사한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일반인이 입었을 경우 곧바로 끌려가 경을 쳤다.[21] 청나라 황제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저 피령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22] 해당 영상[23] 물론 해당 그래프에 나온 인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아대륙 상당수를 직접 통치하지 않아 그래프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감안해야 한다.[24] 또한 GDP가 국력의 유일한 척도가 아니라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청대에는 이미 유럽과의 과학기술 격차가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져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18세기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선진 경제의 1인당 GDP는 청나라의 수 배, 조세효율은 수십 배 높았다. 1750년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청나라의 수십 분의 1도 안 되는 인구로 청 조정보다 더 많은 세입을 올렸다. GDP가 아무리 높아봐야 그것을 국력으로 전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25] 이 때문에 청 말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기도 했으니 좋은 것만은 아니였다.[26] 청 조정은 세금을 주로 밀이나 은의 형태로 거두었으며, 이 때문에 운하를 운행하는 선박들은 운송품과 함께 조정에 바칠 세금도 함께 실어날랐다. 이 과정에서 거두는 세입도 엄청났다. 그랬기에 19세기에 서양 열강군대가 이 대운하를 차단해버리자 청 조정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화친을 청한 것이다.[27] 특히 명나라 말기에는 환관들과 황친들이 막대한 양의 대토지를 거느리면서 세입 자체가 줄고 경제는 피폐하져만 가고 있었다. 물론 청나라도 초기에는 말을 타고 달려서 그 말이 달린 데까지를 땅의 경계로 하는 다소 무식한 방법을 썼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땅의 재분배를 실시했다.[28] 명나라 때에는 엄청 거대한 대도시 몇 개와 조그만 도시들 몇 개, 그리고 시골 깡촌들로 지역이 나뉘어진 경우가 태반이었다. 중소형 도시들은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29] 일단 은본위제가 본격적으로 돌아가려면 기본적으로 은이 충분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함부로 실시하지 못하는 정책이다. 조선만 해도 19세기까지 은본위제는 커녕 물물교환에 크게 의존했을 정도다.[30] 다만 이는 인구 증가분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된다. 북송 시기가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던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나, 북송의 경제력이 더 강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31] 그런데 어느 시점 이후의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여 제대로 된 효과를 거둔 적은 드물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고 국가가 개입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대단히 적다. 아무래도 유교를 중시하는 사대부층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경제에 대한 실무적 지식은 약소했고 굳이 개입해서 망칠 바에야 차라리 상인들에게 일임하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32] 출처는 권성욱의 중국 군벌 전쟁 1부 4장[33] 이때문에 태평천국의 난 때에는 한족 세력가들이 자치적으로 군대를 모아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했다. 국가의 정규군이 무너지니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했던 것이다.[34] 미국과 러시아의 대사들은 각국에 중국의 군비 증강에 대비해야 한다고 긴급 전보를 쳤고, 나중에는 심지어 미국과 중국의 군사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백 년을 앞서 예측했다.[35] 출처는 권성욱의 중국 군벌 전쟁 1부 4장[36] 출처는 권성욱의 저서 중국 군벌 전쟁 1부 6장.[37] 이리장군(伊犁將軍, 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 다만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는 호자들과 위구르인과 회족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38] 칸의 만주어 발음이다.[39] 물론 청나라 황제는 티베트 불교를 더욱 선호했으며,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40] 본격적인 중원 천자로서의 청나라 황제들 중 화기의 연구 및 제조에 있어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긴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 뿐이며, 이쪽도 치세 후기부터는 화기의 연구 및 제조를 금지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리고 강희, 옹정 연간의 문자의 옥은 건륭제 때마냥 막나가지는 않았다.[41] 러시아 외에는 대표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왕조 관련 국가들이 있다. 몽골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기 전 중세 당시 바그다드는 장안과 더불어 세계 2대 도시라고 불릴만큼 찬란한 기술문화와 거대한 인구수를 자랑하는 대도시였다.[42] 사실 몽골인들도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에는 여진족들을 하찮은 족속들이라고 무시하던 역사가 있었다. 특히 이 경향은 외몽골의 할하 부족이나 오이라트가 심했다. 북원은 여진족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어서 딱히 신경쓰진 않았다.[43] 청나라는 몽골족의 일파인 준가르부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물론 오이라트 계열도 몽골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현 외몽골에서 할하 인과 함께 두번째로 많은 부류가 이 오이라트인들이다.[44] 물론 몽골 제국의 중국 정복에 대해서는 반대로 한족 우월주의자들과 만주족이 합심해서 몽골 제국을 까기도 한다. 전자는 남송의 멸망과 관련해서, 후자는 금나라의 멸망과 관련해서 몽골 제국을 깐다.[45] 홍콩의 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는 거란이고 퍼시픽은 잘 알다시피 태평양으로, 굳이 뜻을 해석하면 중화태평양항공 내진 중국태평양항공이라는 뜻이다. 남방의 홍콩에 소재한 회사에 거란 이름이 붙은 건 중국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키타이가 거란에서 유래해서이다. 이 표현은 미국은 원래 아메리카라 일컫지만 시적으로 일컬을 땐 컬럼비아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 Warhammer(구판)에 등장하는 세력 캐세이 역시 중국을 모티브로 했지만 이름은 거란족에서 유래하였다. [46] 청나라의 최대 강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보다 훨씬 넓었다. 현재의 중국이 가지지 못한 대만, 몽골, 연해주 및 서부 영토 일부를 더 가지고 있었다.[47]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구범진, 민음사)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편 참조.[48] 즉, 명이 아닌 원을 계승해서 황제국을 선포한 것이다.[49] 특히 일대일로 방향은 중화사상 같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옛날부터 진출하려고 했던 곳들이라 고전적인 느낌까지 있다.[50]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 남은 칼미크인들은 훗날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인 칼미키야 공화국을 이루게 된다.[51] 독소전쟁 초반 소련이 패배하자 소련을 배신하였다. 후에 소련이 승기를 잡자 스탈린에 접근하다가 장제스에게 헤임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