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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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
Rodrigo de Villandrando

출생
1378년 또는 1386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바야돌리드
사망
1457년 또는 1458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버지
페드로 데 빌란드란도
어머니
알돈자 디아스 데 코랄
형제
페드로 데 코랄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 베아트리체 데 주니가
자녀
페드로, 마리나
직위
리바데오 백작, 유쎌과 샤텔동의 영주, 용병대장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카스티야 연합 왕국 출신의 용병대장.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 왕국에 고용되어 잉글랜드 왕국에 맞서 싸웠다.


2. 행적[편집]


1378년 또는 1386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동북부 도시인 바야돌리드에서 출생했다. 조부인 후안 가르시아 구티에레즈 데 빌란드란도는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왕위를 놓고 페드로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을 때 기사로서 그에게 가담한 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시종장이자 갈라시아의 리바데오 백작인 피에르 드 빌렌스의 자매와 결혼했다. 아버지 페드로 데 빌란드란도는 밤비에라의 영주였으며, 삼촌인 루이 가르시아 데 빌란드란도는 바야돌리드의 영주였다. 형제 페드로 데 코랄은 스페인 중세 시대의 주요 역사 문헌 중 하나인 『크로니카 델 레이 돈 로드리고(Crónica del Rey Don Rodrigo )』의 저자이다.

그는 일찍이 프랑스로 들어가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내전에 참여했다. 1420년경 용병대를 처음 창설했고, 1422년 아마우리 드 세베락이 이끄는 프랑스 용병대에 합류했다. 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겨우 건져 달아났으며, 1427년부터 랑그독, 카르카손, 님 일대에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그의 약탈이 어찌나 심했는지, 프랑스인들은 그를 "도적의 황제"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1430년, 로드리고는 도피네 총독을 맡고 있던 라울 6세 드 고쿠르의 설득을 받아들여 보쥬, 철퇴, 창으로 무장한 400명의 용병대와 함께 프랑스군에 가담했다. 이후 안통 전투에 참여해 부르고뉴 공국과 사보이아 공국의 지원을 받아 도피네 전역을 석권하려던 오랑주 공국의 공작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의 4,000 가량의 적병을 숲길 정면에서 맞서 싸우는 동안 라울 6세 드 고쿠르와 리옹 보안관 움베르 드 그로슬리가 매복병을 이끌고 적의 양측면을 요격해 섬멸하도록 했다. 이때의 공적으로 종자에 발탁되었고, 프랑스군에 편입된 뒤 부르고뉴에 맞서 부르봉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31년 아라곤 국왕 추안 2세를 알현해 경의를 표한 뒤 리바데오 백작이 되었으며, 같은 해 포레즈에서 일어난 민중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봉기군이 생로맹르퓌로 도주하자 그곳까지 추격해 학살을 자행했다. 1432년 조르주 1세 드라 트레무아유에게 고용되어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레 퐁드세를 점령했다. 1433년경 10,000명의 용병대를 이끌고 메독을 습격해 수많은 이들을 사로잡은 후 막대한 몸값을 받고 풀어줬으며, 리가르드비아우르 등 많은 성채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헀다. 여기에 구르두즈 수도원을 점거하고 수도사들을 강제 추방한 뒤 막대한 돈을 지불받고 나서야 건물을 떠났다.

1433년 5월 24일, 로드리고는 부르봉 공작 장 1세 드 부르봉사생아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과 결혼했다. 이후 처남 샤를 1세 드 부르봉에게 6,000 크라운을 빌려주는 대가로 유쎌 성과 샤텔동 성을 인수했다. 1437년 카스티야로 파견되었던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밀사들이 에리송에서 그의 부하들에게 재물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이후로 그는 프랑스 왕실의 불신을 사기 시작했다. 1438년 샤를 2세 달브레의 군대와 함께 보르도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메독 시를 점거했지만 메독 요새를 함락하는 데 실패했다.

1443년 용병대장 장 살라자르가 지휘하는 로드리고 부대 일부가 스페인에서 돌아오면서 랑그독과 라우라케 일대를 심각하게 약탈했다. 샤를 7세는 이에 분노해 로드리고를 추방했다. 이후 로드리고는 프랑스 영지를 모조리 잃고 카스티야로 돌아간 뒤 리바데오 백작으로서 여생을 보냈으며, 자기 재산을 교회에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1457년 또는 1458년에 사망했다.

그는 첫번째 아내인 마르기르트 드 부르봉과의 사이에선 자식을 낳지 못했고, 두번째 아내인 베아트리체 데 주니가와의 사이에서 그의 뒤를 이어 리바데오 백작이 된 페드로와 딸 마리나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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