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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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 카페 왕조의 제5대 왕이다.
2. 생애[편집]
필리프 1세와 홀랜드의 베르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했을 때 부왕 필리프 1세가 미리 정해둔 이름이 있었지만 한 성직자로부터 루이로 불린다면 장차 위대한 왕이 될 것이란 예언을 듣고 루이로 지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 대부분을 생 드니 성당에서 보내며, 신부들의 보호어린 사랑을 받았고, 부왕의 명으로 철통 같은 호위를 받았지만 거추장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즉위할 때, 그의 이복형제 플레리와 결탁한 랭스 대주교가 그의 대관식의 정당성을 비난하기도 했다.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로 동시대와 후대의 잉글랜드인들에게도 존경받았다고 한다.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 1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플랑타주네'[1] 의 배신으로 패배하여 궁지에 몰렸을 때, 쾌활한 낯으로 식탁에 앉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난 좌절하지 않는다. 숱한 불행들이 날 단련시켰다."
이후 순식간에 헨리 1세의 반대파를 끌어모아 전세를 역전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의 왕들[2] 및 지방의 대봉건제후들과 전투를 벌였고,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약탈을 일삼는 지방의 불량 악덕영주(robber baron)들과 많이 싸웠다. 그래서 악덕영주의 약탈에 시달리던 교회 성직자와의 관계가 좋았다. 젊을 때는 많은 전쟁을 한 '전사왕'이었지만 식탐이 심하여 40대가 되어선 몸이 매우 비대해져서 '비만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3] 1137년 생피에르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3. 결혼 생활[편집]
생 드니 성당에 헌신적이었던 루이 6세는 로슈포르의 루시엔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루이 6세는 3년 뒤 결혼의 불완성을 핑계로 이혼했다.[4] 다만 말이 좋아서 이혼이지 실제로는 왕비를 내치는 것이라서 로슈포르의 루시엔의 부친과 형제들은 이 이혼에 분노하여 루이 6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루이 6세가 왕비로 삼고 9명의 자식을 보았던 여인이 사보이아 백작 움베르토 2세의 딸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였다. 그녀는 칙칙하고 어두컴컴하기만 한 프랑스 왕궁에서 예외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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