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기사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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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기사르 전투
영어: Battle of Montgisard
프랑스어: Batalla de Montgisard
파일:1920px-Schlacht_von_Montgisard_2.jpg
시기
서기 1177년 11월 25일
장소
팔레스타인 몽기사르
교전국
파일:800px-Arms_of_the_Kingdom_of_Jerusalem.png 예루살렘 왕국
파일:Coat_of_Arms_of_Prince_Bohémond_VI_of_Antioch.png 안티오키아 공국
파일:external/images.wikia.com/Knights.png 성전 기사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Flag_of_Ayyubid_Dynasty.svg.png 아이유브 왕조
지휘관
파일:800px-Arms_of_the_Kingdom_of_Jerusalem.png 보두앵 4세
파일:Coat_of_Arms_of_Prince_Bohémond_VI_of_Antioch.png 르노 드 샤티용
파일:220px-Armoiries_Eudes_de_Saint-Amand.svg.png 오도 드 세인트 아맨드
파일:800px-Blason_de_la_ville_de_Morbecque_(59)_Nord-france.svg.png 험프리 2세
파일:Ibelin_coat_of_ Arm.png 발리앙 디블랭
파일:House_of_Courtenay.svg.png 조슬랭 3세
파일:800px-Blason_Grenier.svg.png 레지날드 그레니어
파일:Coat_of_Arms_of_Prince_Bohémond_VI_of_Antioch.png 보에몽 3세
파일:800px-Armoiries_Tripoli.svg.png 레몽 3세[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Flag_of_Ayyubid_Dynasty.svg.png 살라흐 앗 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Flag_of_Ayyubid_Dynasty.svg.png 타키 앗 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Flag_of_Ayyubid_Dynasty.svg.png 아마드†[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Flag_of_Ayyubid_Dynasty.svg.png 디야 앗 딘
병력
총원: 3,000 ~ 4,500명
기사: 375기
성전 기사단: 80명
보병: 2,500 ~ 4,000명
총원: 20,000 ~ 26,000명
피해
전사자: 1,100명
부상자: 750명[3]
사상자: 18,000 ~ 24,000명
결과
예루살렘 왕국의 승리.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평가
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예루살렘 왕국의 나병왕 보두앵 4세이슬람 세력의 맹주 역할을 하던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의 결전. 이 전투에서 보두앵 4세의 기지에 허를 찔리고 대패한 살라딘은 이후 보두앵 4세가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 왕국과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2. 배경[편집]



2.1. 아모리 1세의 이집트 원정[편집]


보두앵 4세의 부왕 아모리 1세파티마 왕조의 내전에 개입하여 이집트 원정을 감행, 기독교의 5대 교구 중 유일하게 이슬람권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성 마르코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수복하고 파로스의 등대에 십자가를 거는 등 맹위를 떨쳤다. 또한 카이로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이집트를 예루살렘 왕국의 속령으로 삼았지만, 성전 기사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를 완전히 직할령으로 편입하려다가 누르 앗 딘에게 뒤통수 맞고 십자군에 우호적이던 토후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실책을 저지른다.

결국 이집트에서 퇴각한 아모리는 뒤늦게 원래 계획대로 동로마 제국 함대의 지원을 받아 다미에타를 공격했으나, 정작 육상에서의 공격을 맡은 십자군이 시르쿠에게 패퇴하면서 아모리 1세가 예루살렘으로 도주했고 귀국하던 동로마 함대는 폭풍우를 만나 다수의 선박을 상실한다. 이에 이집트 원정의 실패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십자군은 대외적으로 동로마 제국에게 그 책임을 돌렸으나, 이집트를 공략하기 위해선 동로마 함대의 지원이 절실한 탓에 아모리 1세와 마누일 대제 사이의 우호 관계는 어떻게든 유지될 수 있었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아모리는 이번에는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엘모 2세를 끌어들여 알렉산드리아로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던 중 아모리 본인이 이질에 걸려 병사하면서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은 흐지부지되었고, 누르 앗 딘의 뒤를 이은 살라흐 앗 딘아이유브 왕조가 오히려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1174년 5월 15일 시리아와 이집트의 강자이자 새로운 지하드의 수장, 누르 알 딘이 죽었다. 윌리엄조차도 그를 정의로운 왕자(王者)이자 신실한 사람으로 존경했다.아모리 왕은 누르 알 딘의 죽음을 이용해 북쪽으로 진격했으나 이질에 걸리고 말았다. 아랍인 의사들과 프랑크 의사들은 치료 방식을 두고 논쟁을 벌였고 그는 서른여덟 살에 불과한 나이에 7월 11일 예루살렘에서 사망했다. ... 그러나 언제나 예루살렘의 발목을 잡았던 전략적 악몽이 이제 현실로 나타났다. 카이로의 수장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점차적이지만 시리아, 이집트, 예멘 그리고 이라크의 상당 부분을 강력한 술탄 국가로 통합하면서 예루살렘을 고립시켰다. 아랍어를 쓰는 도시 출신의 레반트 귀족이었던 트리폴리의 레몽은 살라딘과 휴전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그것은 살라딘에게도 역시 시간을 벌어주는 꼴이 되었다.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2.2. 살라딘의 등극과 보두앵 4세[편집]


아모리 1세의 아들이자 마누일 대제의 질녀 마리아 콤니니를 계모로 둔 보두앵 4세는 어릴 때부터 궁정에서 기욤 드 티레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기욤이 극찬한 것처럼 매우 총명했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난을 타개할 역량이 있었으나 나이와 건강이 받쳐주지 못했다. 13세의 나이로 왕이 된 보두앵 4세는 밀 드 플랑시의 섭정을 받았고, 밀이 사망하자 오촌 당숙이자 비둘기파의 좌장인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섭정을 맡음으로써 험프리 드 토롱과 함께 보두앵이 살라딘과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던 1176년, 보두앵 4세가 성년이 되면서 레몽 3세의 섭정 통치 기간이 끝나게 된다. 왕권을 장악한 보두앵 4세는 평화 조약을 파기한 뒤 베카 계곡을 급습하여 장기 왕조를 공략하려던 살라딘이 퇴각하게 만들고 마누일 대제와 우호 관계를 재정립한다. 그러나 아모리 1세 때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예루살렘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연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동로마 해군이 우트르메르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됨으로써 살라딘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One of Baldwin’s first actions as king was not to ratify the peace treaty with Saladin that Raymond had initiated. This policy had proven disastrous, for it had allowed Saladin to surround the Franks unopposed. That same month, Baldwin led a raid into the lands around Damascus. .In August he led another raid to the Beka'a valley and defeated a garrison of Damascus led by Saladin’s nephew, Shams al-Daula Turan-Shah.

왕으로서 보두앵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레이몬드가 시작한 살라딘과의 평화 조약을 비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살라딘에 저항하지 않고 프랑크인들을 포위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손해가 큰 것으로 판명되었다. 같은 달(7월 : 보두앵 4세가 성년으로 인정받은 월)에, 보두앵은 다마스쿠스 주변의 땅을 급습했다. 8월에는 다시 베카 계곡으로의 습격을 지휘하여 살라딘의 조카 샴스 알-다울라 투란샤가 이끄는 다마스쿠스의 수비대를 격파했다.

Marx, Francesca Ann <Transformation and Medieval Aristocracy: Werewolves, Lepers, and the King’s Body>


On the July 1176, the second anniversary of his coronation, Baldwin IV came to age and Raymond of Tripoli's regency ended. The peace of treaty made by Raymond with Saladin in 1175 was not ratified by the king. Arab writers relate that July 1176 King Baldwin led a raid into the lands around Damascus while the sultan was Aleppo. This change is policy may well have reflected the young king's own wishes, ... On 1 August 1176 Baldwin IV led the army of the kingdom to the Beka'a valley where he was joined by Raymond III and the army of Tripoli. They raided this fertile area with impunity and defeated an attack by the garrison of Damascus led by Saladin's nephew shams al-Daula Turan shah. This led Saladin to abandon the siege of Masyaf.

그의 대관식 2주년인 1176년 7월, 보두앵 4세가 성인이 되었고 트리폴리의 레이몬드의 섭정이 끝났다. 1175년 살라딘과 레이몬드가 맺은 평화조약은 왕에 의해 비준되지 않았다. 아랍 기록자들은 1176년 7월 보두앵 왕이 술탄이 알레포에 있는 동안 다마스쿠스 주변의 땅을 급습했다고 말한다. 이 정책은 젊은 왕의 소망을 반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 1176년 8월 1일 보두앵 4세는 왕국의 군대를 이끌고 레이몬드 3세의 트리폴리의 군대와 합류하여 베카 계곡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제재 받지 않으면서 이 비옥한 지역을 급습했고 살라딘의 조카 샴스 알-다울라 투란샤가 이끄는 다마스쿠스 수비대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로 인해 살라딘은 마샤프의 공성을 포기했다.

버나드 해밀턴, Professor of Crusading History, University of Nottingham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3. 전개[편집]


1177년, 로마 해군의 철수를 확인한 살라딘은 즉각 2만 6천의 병력을 이끌고 카이로에서 북상하여 아스칼론으로 출정한다. 소식을 접한 보두앵은 레몽 3세와 보에몽 3세를 하림으로 보내 요새를 공격토록 한 뒤, 자신은 아스칼론에 가까운 케락의 영주 르노 드 샤티용, 토롱의 험프리 2세, 발리앙 디블랭, 오도 드 세인트 아맨드가 이끄는 성전 기사단을 비롯해 친히 580명의 병력을 이끌고 살라딘보다 먼저 아스칼론으로 향했다.

An anonymous Christian writer in north Syria described how in this crisis 'everyone despaired on the life of the sick king, already half dead, but he drew upon his courage and rode to meet Saladin.' Baldwin had little military experience and would normally have relied on the advice of the constable, Humphrey II of Toron, but he was gravely ill at this time. The campaign was therefore organised by Prince Reynald, the king's executive regent.

시리아 북부의 한 익명의 기독교 작가는 이 위기를 '모든 사람이 이미 반쯤 죽은 병든 왕의 삶에 절망했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말을 타고 살라딘을 만나러 갔다.'라고 묘사했다. 보두앵은 군사 경험이 거의 없었고 평소에는 사령관인 토론의 험프리 2세의 조언에 의존했을 것이지만, 그는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다. 그 군사 활동은 따라서 왕의 집정관으로 통치하는 레이날드 공작(르노 드 샤티용)에 의해 조직되었다.

The king led his forces out to meet him but soon withdrew into the city again when he realised how hopelessly outnumbered he was. Saladin considered that the royal army posed no threat and determined to leave it in his rear and to march straight on to Jerusalem: this is confirmation that the Frankish estimates of the size of Baldwin's army were approximately correct, not just exaggerations designed to make the Christian victory appear miraculous.

왕은 군대를 이끌고 그를 만나러 나갔지만, 곧 그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열세인지를 깨닫고 다시 도시로 철수했다. 살라딘은 왕의 군대가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자 자신의 후방에 남겨두고 예루살렘으로 곧장 진군하기로 결심했다. : 이것은 단지 기독교의 승리를 기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과장이 아니라, 보두앵의 군대 규모에 대한 프랑크인의 추정이 거의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Saladin did not expect the Franks to leave the safety of Asclaon and was so confident of this that he had not bothered to station a detachment of men to watch the city and bring him news of troop movements This lack of elementary caution cost him dearly for the king and Prince Reynald were able to liaise with the Templars of Gaza and the lead their combined forces along the coast, unperceived by saladin's men. By 25 November the sultan and his main army had reached the hill of Mont Gisard, or Tell Jazar near Ibelin and his troops were about to ford a small stream when they were quite unexpectedly confronted by the Frankish host. Many of his men had dispersed to raid the countryside and consequently he lost the advantage of overwhelmingly superior numbers, though he still had a larger force than the Franks.

살라딘은 프랑크인이 아스칼론에서의 안전에서 벗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이 사실을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도시를 감시하고 군대의 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한 파견대를 배치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주의의 부족은 왕과 레이날드 공작에게 가자에 있는 템플 기사단과 그들의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 했고 그들은 병력을 이끌고 해안가의 군대와 연합했는데 살라딘의 부하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11월 25일에 술탄과 그의 주력 부대는 이벨린 근처의 몽기사르 언덕, 혹은 텔 자자에 도착했고, 그의 군대는 뜻밖에 프랑크족 주력과 마주쳤을 때 작은 개울을 향해 진격하려 했다. 그의 부하들 중 많은 수가 주변 지역을 습격하기 위해 흩어졌고, 결과적으로 그는 프랑크족보다 더 큰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수의 이점을 잃었다.

버나드 해밀턴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이때 살라딘보다 먼저 도착한 보두앵 4세는 십자군의 사기를 복돋기 위해 성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구원의 기도를 올렸고, 이에 고무된 십자군은 용맹히 선두로 나아가는 보두앵 4세의 뒤를 따라 2만이 넘는 아이유브군을 향해 돌격을 감행한다.

God, who manifests his strength in the weak, inspired the sick king. He dismounted, prostrated himself on the ground before the Cross, and prayed in tears. At this sight the hearts of all the soldiery were moved and they swore on the Cross not to give way and to hold as traitor any man who turned his bridle. They remounted and charged.

약한 상황에서 그의 힘을 나타내시는 하나님께서 병든 왕에게 영감을 주셨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 십자가 앞에서 스스로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이 광경을 보고 모든 군인의 마음이 감동하여, 그들은 십자가에 엎드리지 않고 고삐를 돌린 어떤 남자라도 배신자로 간주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들은 말에 다시 올랐고 돌격했다.

시리아의 미카엘, Patriarch of the Syriac Orthodox Church [4]


Hearing that the land of the Lord was more than usually bereft of its defense, in consequence of this removal of its troops, Saladin made a sudden irruption into it at the head of a countless force; and, making no stop on the frontiers, forthwith penetrated into the heart of the country, as though he should possess it. The Christian prince, adorning the leprosy of his body by the energy of his mind, assembled as large an army as the time would permit; and, as he was about to fight the battle of his God, and not his own, he was undismayed at the number of his enemies. Preceded, therefore, by the cross of the Lord, and about to engage near the town of Rama, which his opponents had besieged, he relied on the Divine assistance, and routed these terrific armies of an abandoned race. Saladin, taking to flight, escaped with difficulty, while thousands of his hosts were slain.

주님의 땅이 평상시보다 방어력을 상실한 상태라는 것을 들은 살라딘은 수많은 군대의 선두에 서서 갑자기 그 땅으로 침입하였다. 그리고 국경에서 멈추지 않고, 마치 그 땅을 차지해야 할 것처럼, 그 나라의 심장부로 침투하였다. 기독교 군주는 그의 정신력으로 몸의 나병을 가리며, 때가 허락하는 한 큰 군대를 집결시켰다. 하나님의 전투를 치르려고 할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적의 수에 대해 겁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십자가에 앞서서, 적들이 포위한 람라 마을 근처에서 교전하려고 하니, 그는 신성한 원조에 의지하여 내키는 대로 움직이던 민족의 매우 많은 군대를 물리쳤다. 살라딘은 도망쳤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뉴버그의 월리엄, 12th-century English historian and Augustinian canon [5]


보두앵 4세를 중심으로 한덩어리가 된 수백기의 기사들의 돌격은 순식간에 아이유브군의 전열을 돌파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아이유브군은 카이로에서 아스칼론까지 오면서 지친 상태였으므로 기사들의 중앙 돌파를 제대로 막아낼 여력이 없었고, 자신을 호위하던 쿠르드족 친위대까지 와해되자 스스로 칼을 뽑아야 할 정도로 위기에 처한 살라딘은 즉시 전장을 이탈했다. 발리앙 디블랭이 이끄는 기병대가 추격해오면서 자칫 살라딘도 포로가 될 뻔했으나 경주용 낙타를 타고 간신히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

보두앵은 병상에서 막 일어났던 터라 비록 육신은 허약했지만 정신만은 훌륭했다.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모았더니 겨우 500명 남짓한 기사들이 모였다. 그들은 가지고 다니던 예수의 십자가 한 조각에 용기를 얻어 아스칼론으로 서둘러 달려갔고 무슬림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살라딘은 보두앵을 아스칼론에 가두어놓기로 결심한 채 자신은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했다. 비록 예루살렘은 잘 요새화되어 있긴 했지만 그 공격을 막아낼 병력이 부족해 보였다. 살라딘은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달성하게 될 영원한 명예와 영광에 대한 기대감에 눈이 멀어 방심했던 것 같다. 자신의 후방에 있던 보두앵의 소규모 군대와 성전기사단 병력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살라딘에게 들키지 않은 채 보두앵은 성전기사단에게 자신과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재빨리 응답하였고, 보두앵은 그 작은 군대를 이끌고 신속히 수도로 향했다. 한편 무슬림들은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으므로 11월 25일 그리스도교 군대가 접근했을 때 아직 싸울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살라딘의 군대는 몽지사르 성 근처의 좁은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었는데 분명 척후병 전위부대를 적절히 배치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결과, 프랑크군이 후방으로 갑자기 공격해 들어왔을 때 살라딘의 군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무슬림 군대 내에서는 제대로 전열이 형성되지도 못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프랑크 기병들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해오기도 전에 도망쳐버렸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이내 혼전을 빚는 난투극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지만 곧 제압당하고 말았다. 살라딘은 근위대의 노력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There were twenty-six thousand Saracen horsemen, only a few hundred Christians; but the Saracen were routed. Most were killed; Saladin himself only escaped because he rode a racing camel. The young king with his hands bandaged, rode in the forefront of the Christian charge – with St. George beside him, people said, and the True Cross shining as brightly as the sun. Whether or not that was so, it was an almost incredible victory, an echo of the days of the First Crusade.

사라센 기병은 2만 6천 명이 있었는데, 오직 몇백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나, 사라센 사람들은 패주하였고, 대부분이 살해당하였다. 살라딘 자신은 경주용 낙타를 탔기 때문에 탈출했을 뿐이다. 어린 왕은 손에 붕대를 감고 기독교의 돌격 부대 선두에서 말을 탔다. 성 조지가 그의 옆에 있었다고 했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십자가가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고 했다. 그것이 그렇든 아니든,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승리였고, 제1차 십자군 시대의 메아리였다.

Stephen Howarth[6]


이 전투로 살라딘이 공세에 동원했던 아이유브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보두앵은 해가 저물고도 계속해서 살라딘을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폭우가 내리자 어쩔 수 없이 추격을 단념했고, 상당한 타격을 받은 살라딘은 보두앵과 강화를 맺으면서 세력을 회복하는 데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Battle had not been joined until the afternoon, so darkness soon overtook the sultan's army as it fled and it was unable to hold any semblance of formation. It proved relatively easy for the Franks to round up and kill, or take prisoner, the raiding-parties of Muslim who had fanned out towards Lydda and Jerusalem earlier that day.

전투는 오후까지 이어지지 않았으나, 곧 어둠이 술탄의 군대를 뒤덮었기 때문에, 그 군대는 어떤 형태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날 일찍 리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해 온 무슬림의 습격 군대들을 프랑크 군대가 포위해서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The Next day the winter rains began and continued for ten days, which made it impossible for Saladin to regroup his forces The Frank captured more stragglers and, to make matters worse, when news of the defeat reached the Beduin of eastern Sinai they plundered the Sultan's base camp at al-Arish, so that he and the other survivors had to make their way back to Cairo with few supplies. Saladin reached Cairo on 8 December.

다음날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은 살라딘이 그의 군대를 재편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프랑크인들은 더 많은 침입자들을 붙잡았고, 설상가상으로, 패배 소식이 동부 시나이에 있는 베두인 족에게 이르렀을 때, 그들은 알 아리쉬에 있는 술탄의 주둔지를 약탈하였고, 그래서 그와 다른 생존자들은 물자를 거의 갖지 못하고 카이로로 돌아가야 했다. 살라딘은 12월 8일 카이로에 도착했다.

버나드 해밀턴<The Leper king and his heirs>



4. 평가[편집]



He recognised the seriousness of the defeat and years later said to Ibn shaddad. 'Although it was so great a disaster, God, blessed be His name, made it good in the end by the famous victory at Hattin,'

그는 패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몇 년 후 이븐 샤다드에게 말했다. ' 이렇게 큰 재앙이기는 했지만, 하느님, 그의 이름이 복되신 하느님이 하틴에서 유명한 승리를 거두셔서 결국 그것을 좋게 하셨습니다.'

살라흐 앗 딘[7]


There is no doubt that Mont Gisard was great Frankish victory. when the kingdom seemed about to be lost, the courage of the young leper king and the good leadership of Prince Reynald had enabled its small army to inflict a crushing defeat on the invading forces.

몽기사르가 프랑크인의 위대한 승리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왕국이 사라질 것 같았을 때, 어린 나병왕의 용기와 레이날드 공작의 훌륭한 지도력은 작은 군대가 침략군에게 재기불능의 참패의 타격을 입게 하였다.

버나드 해밀턴


Baldwin’s ability as a military leader had been proven in the attacks of 1176, but it was at this battle that Baldwin’s reputation as being chosen by God seems to have taken hold. ... but their overcoming physical limitations in order to defeat a much stronger opponent becomes an empowering event for the people they lead.

1176년의 공격에서 보두앵의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은 증명되었지만, 신의 선택을 받는 것을 가지는 보두앵의 명성이 달린 것과 같은 일은 이 전투에서였다. ... 그러나 그들이 훨씬 강한 상대를 패배시키기 위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그들이 이끄는 백성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사건이 된다.

Marx, Francesca Ann


De fait, jamais plus belle victoire chrétienne n’avait été remportée au Levant et, en l’absence du comte de Flandre et du comte de Tripoli, tout le mérite en revenait à l’héroïsme du roi dont les dix-sept ans, triomphant pour un instant du mal qui rongeait son corps, s’égalaient à la maturité d’un Godefroi de Bouillon ou d’un Tancrède.

사실, 레반트에서 (이만큼) 가장 아름다운 기독교의 승리는 결코 없었고 플랑드르 백작과 트리폴리 백작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공적은 왕의 영웅주의로 돌아갔는데, 17세는 그의 몸을 갉아먹는 고통에서 잠시 승리했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나 탄크레드의 완숙함에 필적했다.

르네 그루세


5.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리들리 스콧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보두앵 4세와 발리안의 대면신에서 보두앵 4세가 살라딘에게서 16세에 대승을 거뒀다고 말하는 전투가 이 전투이다. 이 장면에서는 그 때는 100살까지 살 것 같았으나 이제는 30세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자각한 보두앵 4세의 발언이 이어진다.

이외에도 누나 시빌라와 대면한 보두앵 4세의 임종 장면에서도 그가 꿈을 꿨다는 말을 통해 다시 언급된다. 그때의 보두앵 4세의 모습은 아름다운 소년이었다는 말을 시빌라가 언급하며 임종 상황의 비극성을 크게 부각시킨다. 다만 작중에서는 여름날로 설정되어 있어, 11월경인 본래의 사건과 다른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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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몽 3세와 보에몽 3세는 당시 하림을 공격하고 있었기에 몽기사르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2]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 One of Saladin's great-nephews was killed in the melee while the sultan himself barely escaped with his life. (살라딘의 조카의 아들 중 한 명은 술탄 자신이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동안 혼전 속에 살해되었다.)[3]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 Raymond, the brother in charge of the Hospital of St, Jone at Jerusalem, reported that 1,100 Christians were killed in the battle, While the further 750 were severely wounded and were admitted to the Hospital for treatment. (예루살렘의 성 요한 병원 책임자의 동생 레이먼드는 이 전투에서 1,100명의 기독교인이 목숨을 잃었고, 750명은 중상을 입어 치료를 위해 그 병원에 입원했다고 보고했다.)[4] Michael the Syrian, quoted in René Grousset, The Epic of the Crusades(NY: Orien Press, 1970), 150-1.[5] William of Newburgh, Historia Rerum Anglicarum, Liber Tertius, XI; Stevenson, The History of English Affairs, Book Three, 11.1.[6] Stephen Howarth, The Knights Templar (New York, Barnes and Noble Books, 1991)[7] 버나드 해밀턴 <The Leper king and his hei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