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프리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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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의 제3대 해군인민위원.
2. 생애[편집]
2.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1916년 1월, 기병으로 복무하다 부대에서 잠깐 탈영했다. 무정부주의자와 손을 잡고 미하일 벰 소장 살해에 가담했다. 1917년 3월부터 군사병원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다 1917년 9월 적군에 합류해 크렘린 공습을 치르다 부상을 당했다. 1918년 7월 노농적군에 입대해 제1기병군 특수부대장을 역임했다. 1919년 심각한 부상을 입은 후 체카에 파견됐다. 1919년 하반기에 그는 모스크바 특별부서에서 고위 정치인 보좌관으로 일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소속 무정부주의자 체포에 동참했다.
2.2. 전후[편집]
1927년 프룬제 군사대학 고위 지휘관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1934년 7월 10일 소련에 NKVD가 창설되며 소련 인민위원회 정치행정부가 NKVD 국경수비대 본부로 개명됐다. 7월 11일, 프리놉스키가 최고 책임자로 임명됐다.
2.3. 대숙청[편집]
1937년 12월 12일, 크라스노다르 지방에서 개최된 소련 최고회의 1기 연방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니콜라이 예조프 최측근에서 대숙청의 주요 시행자 중 1명으로 등극했다. 1938년 9월 8일, 제2사령관을 건너뛰고 해군인민위원으로 임명됐으나 1939년 4월 6일, 갑자기 파시스트 음모에 가담했단 이유로 NKVD에 체포됐다. 아내와 17세의 아들이 처형된 다음 날 프리놉스키도 처형됐다. 보통 대숙청 피해자들은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사후 복위됐지만 프리놉스키는 NKVD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직도 복위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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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1년 1월 24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전량 박탈[2] 왼쪽부터 마트베이 시키랴토프, 니콜라이 예조프, 프리놉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