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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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吉松
1917년 8월 18일 ~ 1943년 8월 12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당시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서기,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12지대장 등을 활동한 공산주의자이다.


2. 생애[편집]


1917년 8월 18일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5년에 왕칭현립 제5소학교에 입학했으나, 1927년에 있던 수해로 인해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가까스로 1929년에 졸업하였다. 재학중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의 조직인 ‘친목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왕칭현 제3소학교 고등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3개월만에 중퇴해야했다.[1]

이 해 6월부터 1932년 6월까지 고향에서 그는 뱃사공으로 일했다. 동창생 박창수의 권유로 1932년 4월경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한 뒤 11월부터 중국공산당 왕칭현위원회 아동국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이후 서기로 활동하였다.[2]

20세가 되던 1936년 3월에 북만주 닝안현에 있던 동북항일연합군 제5군 제1사에 입대하였다. 이 때 아내인 김옥순도 같은 부대 지원부에 입대하면서 부부가 함께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같은 해 5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동북항일연군 제5군 정치주임 등의 요직을 맡으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나갔다.[3]

1937년 7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3사 조직과장이 되어 부금현 일대에서 일본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39년 3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군 3사 7단 정치주임으로 전보되어 허형식 등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 해 4월 중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부상당해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4]

1940년 4월에는 항일연군 제3로군 제6지대 중국공산당 북만주 위원회 서기겸 제17지대 정치지도원으로 부임하여 만주에서의 항일투쟁 조직의 영도와 정치 및 사상교육 등을 담당하였다.

1941년 6월부터 제3로군 12지대장으로 부임한 그는 대일항쟁을 주도하는 한편, 10월 경에는 북만주 지역에 있는 농민들을 모아 무장조직을 결성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반만주국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경탄압으로 인해 항일세력이 궤멸되어 갔고 이로 인해 19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에 걸쳐 동북항일연군도 쇠퇴하게 되었다. 이에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와 소련 극동군은 1942년 8월 초 잔존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을 소련 적군 제88특별여단(일명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으로 개편하였다.[5]

그리고 박길송에게 북만주에서의 투쟁을 중단하고 소련으로 들어올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박길송은 이를 거부하고 북만주 지방을 무대로 완강하게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였다.[6]

1942년 12월 30일 북만주의 북안성 칭청현에서 만주국 경찰들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게되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요양을 하던 중이던 1943년 1월 4일 일본인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같은 해 8월 12일 일제에 의해 사형되며 순국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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