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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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현 집권당.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천두슈[12] , 리다자오의 주도하에 창당됐다. 1949년부터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중국 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집권정당인 독재정당이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에는 공산당 말고도 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8개의 민주당파 정당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정치활동만 하고 있으며, 정권 교체는 실질적으로 할 수도 없고 시도 자체도
하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을 옹호하는 이들은 당내 파벌간 견제가 작동하고 정년과 임기제가 정착되어 있어, 제도화된 파벌간의 권력 교대가 정권교체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2022년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3기 연임을 확정해 반대 계파를 지도부에서 일소하고 정년과 임기 제한이 사문화되며 이들의 주장이 실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음이 입증되었다.
약칭은 중공(中共).[13] 중국 현지에서는 더 줄여서 그냥 "당"(党)이라고도 부른다. 일당제인 중국에서는 중국 정부가 곧 중국공산당이기 때문에[14] , 다른 나라에서 자국 중앙 및 지방 정부를 단순히 "중앙 정부 혹은 지방 정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국 대륙내에서 중국인들이 "당"이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 이 곳을 가리킨다. 당원은 90,000,000명 이상이다.[15]
전국대표대회라는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가 있다. 공산당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데 여기서의 결정이 다음 회의 때까지의 중국 정책방향을 결정한다.[출처]
2021년 11월, 공산당은 19기 6중전회를 개최한다. 중앙정치위 및 중앙정치국의 성과 총결산을 통해 제 2022년 20차 당대회의 전열 정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현 당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인 시진핑이다.
2. 역사[편집]
2.1. 창당[편집]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영향을 받고 5.4 운동의 시류를 탄 천두슈 등의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이전에 학계에서는 1920년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라는 단체에서 출발했다고 해석되고 있다.
제1차 당대회는 1921년 7월에 있었는데, 이때 50여 명의 당원을 대표해 13명의 중국인과 2명의 외국인(코민테른에서 파견)이 참가하였다.[16] 초기에는 1921년 노동조합서기처를 설립,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를 조직, 후원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처음에는 광동군벌 천중밍, 직예군벌 우페이푸 등과의 합작을 도모했으나 천중밍과는 영풍함 사건으로, 우페이푸와는 2.7 사건으로 결렬했으며 쑨원과 연합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식으로 1차 국공합작에 나서게 된다. 이어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혁명군의 건설을 도왔으며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객군 반란 진압, 국민당의 2차 동정과 남정에 적극 참여하여 대중운동을 선동하여 군사작전을 도왔고 공산당을 선전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며 국민당을 잠식하려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공간의 갈등이 끓어올랐고, 이런 갈등은 쑨원이 사망한 후에 폭발했다. 1925년 8월 20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와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은 이를 구실로 후한민, 쉬충즈, 린썬, 쩌우루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을 대거 숙청했다. 장제스는 이 숙청에 가담하면서 국민당의 2인자로 자리잡았지만 북벌 문제를 놓고 공산당과 갈등을 빚었고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중산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한다. 하지만 국공 갈등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영왕운동, 천도논쟁, 난징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보로딘은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급기야 4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시켰다. 결국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장제스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27년 5월, 하두인을 비롯한 우파 장령들이 마일사변을 일으키며 분공을 요구했고 펑위샹도 분공을 요구, 거기에 코민테른의 5월 지시가 내려오게 되면서 1927년 7월에는 우한 국민정부와 공산당도 결별하게 되었고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시작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 때문에 8.7 긴급회의를 통해 천두슈가 실각하고 취추바이가 집권하여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주도했으나 역시나 실패했다. 12월 광저우 폭동의 실패의 결과로 6만에 달하던 당원이 1만명으로 급감하는 등 공산당의 피해는 심각했다.
2.2.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과 대장정[편집]
하지만 마오쩌둥과 주더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중국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했으며 특히 강서성에 건설된 강서 소비에트는 계속 확장,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되었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상하이의 임시 당중앙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마오쩌둥은 실각했고 오토 브라운과 28인의 볼셰비키라 불리는 소련 유학파들이 군사 노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 중앙 소비에트를 비롯한 여러 소비에트 지구들이 분쇄되었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멸망했다.
1934년 공산당은 대장정에 올랐으며 1935년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복귀했다. 이후 장궈타오와 마오쩌둥의 분쟁이 있었으나 사천성에서 해방구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 장궈타오의 4방면군이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당하면서 마오쩌둥의 우위가 확실해졌고 마오쩌둥은 섬서성 연안에 정착하였다. 2차 양광사변을 즈음해서 반장항일에서 핍장항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장제스에게 항일을 위해 화해하자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어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장쉐량은 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체포하고 국공합작을 강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여 중일전쟁 당시에는 어쨌든 느슨하게나마 연합해 있었다.
2.3. 국공내전[편집]
중일전쟁 말기인 1945년 초에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자, 공산당의 중심지였던 산시 및 화북일대가 무주공산이 되었고 더욱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동남부해안에 집결해있는 일본군과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틈을 노려 화북지역을 공산당이 재빠르게 장악하였다. 이후 공산당군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무려 120만 명의 군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본의 실수가 중국공산당에게 하늘의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소련은 8월 폭풍작전으로 만주지역을 발빠르게 장악하여 만주지역에 주둔한 관동군을 조선반도로 몰아내었다. 소련이 전후 만주를 중국공산당에게 양도한다는 약속을 하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어쨌든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며 중일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마무리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세력경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중재로 두 당 사이에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공산당 토벌을 목표로 선공을 가하면서 2차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중국공산당은 내전 초기 연전연패하면서 본거지인 옌안까지 함락당할 정도로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거느린 대군이 게릴라전으로 중원에서 국민당의 본거지인 난징-상하이 부근에서 북부로 가는 보급을 방해하면서 1947년 겨울에 만주에서 국민당의 50만 대군에게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여기에 장제스가 내전에 승리하기 위해 군비에 몰빵하는 재정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이 독이 되어 난징-상하이 지역의 경제가 붕괴하면서 이후 공산당은 기세를 몰아서 국민당을 몰아붙여서 1949년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대륙본토를 대부분 장악한다.[17]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공산당 창립 초창기에 있었던 코민테른 제1차 대회의 중국공산당 소속 참가자 13명 중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2명이었고, 4명은 혁명 활동 중 전사하고, 나머지 7명은 중국 국민당 혹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향하였다. 다만 2명은 중공 정부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재입당이 허용되어 이후 대륙에서 관리로 일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중국국민당과 더불어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본토와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보내주었고, 좌우합작을 모색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부분적으로 협력관계를 맺기도 했다. 조선의용대처럼 이념과 상관없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은 경우도 많이 있었다.[18][19]
2.4. 1949년 이후[편집]
마오쩌둥 집권 당시에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의 초대형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 이후는 대륙 시절의 중화민국만큼은 대륙을 그럭저럭 운영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덩샤오핑 이후 개방개혁 정책이 효과를 봐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20][21]
빈부격차, 부정부패, 오염 문제도 상당히 크고, 중국인들도 1당 독재를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등 정치에 관한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 조금씩 통치의 경직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그 불만을 교묘히 컨트롤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낮추고 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 시기에는 정부 비판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지만[22] 그 이후부터는 언론의 비판은 눈감아주는 추세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어떠한 경우의 정부 비판도 금지되었지만, 현재는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하급 공무원 비리, 환경오염, 행정 부조리 등은 보도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배합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게다가 상기에 언급된 지방행정의 비리나 부조리, 환경오염 등은 중앙정치에 있어서도 손해가 되고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런 지방 부정의 불만이 쌓이다 보면 결국 각 지방에서 동시적으로 터지는 불만을 막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중앙 입장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문제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국이 이렇게 좀 유연해진 건 원자바오 등 나름 온건한 그 시절 중국 지배자들의 스타일 덕분도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시진핑 정권이 출범하면선 다시 악화되고 있다. 사실 악화라는 것도 좀 웃긴 게 마오쩌둥 심지어는 국부천대 이전 장제스 정권 시절에도 중국은 사실상 독재 시기로, 국민(인민)이 참정권을 가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이야 대만이 중화권에선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평가받지만, 그건 장제스 독재 시절에 대항한 민주파들의 공이 크고, 국공내전 당시만 해도 사실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 놈이 그 놈으로 보일 여지는 다분했다.[23] 게다가 먼저 집권한 집권당의 특성상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부패정당이란 낙인이 찍혀버렸고, 당시만 해도 약자를 위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택동의 공산당은 일반인들이 혹할만한 정당이었다.
사실 중국공산당의 당내 역할만 보면 후진타오 집권 시기까지는 일본 자민당과 상당히 비슷한 측면이 있다. 최고 지도자 1인 결정보다는 계파들 간의 합의나 원로 영향력이 더 큰 편이었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부터는 사실상 북한의 조선로동당과 유사하게 이 파벌 통치가 아닌 최고지도자 1인 중심 체제가 되었다. 즉, 2018년 3월 시진핑이 사실상 종신 독재를 선언하면서 저 돌아가면서 하는 파벌 통치는 끝났다는 것이다.
3. 중국공산당의 특징[편집]
3.1.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편집]
중국공산당을 단순한 중국의 집권여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공산당은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 학계, 문화계, 체육계, 종교계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침투해 있다. 대학이나 기업 등에도 당 조직이 설치되어 있고 공산당원이 우대받는다. 공산당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직에 해당하는 성장이나 시장 등이 그 행정구역의 1인자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당직을 맡고 있는 성위원회나 시위원회의 당서기가 1인자고 성장이나 시장은 2인자에 불과하다. 성장이나 시장도 당내에서는 부서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를 들면 원칙적으로 광둥성 성장은 시정부의 책임자인 광저우 시장에게는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시당의 책임자인 광저우 시위서기와는 직접적으로 업무상 상하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광둥성 성위서기는 둘 모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24]
마찬가지로 국영기업이나 대학에서도 그 기업이나 학교의 당서기가 총경리(CEO)나 총장보다 상급자다. 물론 국무원처럼 공직을 맡고 있는 총리나 각 부의 부장이 당조서기를 겸임하는 경우 공직을 맡은 사람이 그 조직의 1인자가 되기도 하지만, 가끔씩 국무원 부장 등 몇몇 공직이 구색정당 출신 인사에게 할당될 때는 실질적 권한은 당조서기로 임명된 부부장이 장악하게 된다. 민간기업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기업 내 공산당원들의 조직인 당위원회가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거기다 공산당과의 관계가 출세나 사업확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 경영진은 당원일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당의 규율과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25]
3.2. 파벌 경쟁[편집]

3.3. 능력주의와 꽌시의 공존[편집]
[26]
중국공산당의 당원 선발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다. 먼저 무신론자여야 하고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약칭 공청단)이라는 예비 조직에 들어간 뒤에 약 3년이 걸리는 능력 검증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거꾸로 실력있는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서 체제를 유지하고 당 내의 세대 교체를 하려고 하는 기능도 있다고. 실제 사례로 중국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등 점점 입당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다. 심지어 처음엔 차단되었던 자본가들도 많이 입당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는 '꽌시', 즉 인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정경유착도 상당히 심각하다. 더군다나 정부와 기업, 민간이 힘을 합쳐 그것을 덮기 위해 사실상 통제한다고 보면 된다.
공산당 최상층부에는 태자당이라 불리는 개국공신의 2세, 3세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공청단에서 제도적으로 고급 당료가 끊임없이 수혈되고 있기 때문에 태자당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자당과 공청단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상호견제 하기도 하고, 그 드넓은 중국의 모든 지역을 커버하고, 당이 모든 것을 지도한다는 방대한 공산당 당조직의 전부를[27] 특정 파벌이 전부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 일례로 현 시진핑 국가주석은 정통 태자당이고, 후진타오 전 주석은 공청단 출신이다.[28]
여기에 지방조직[29] 에서 실력을 검증받지 못하면, 최고위직까지 오르기가 힘들다. 아무리 부모 덕을 보더라도 20대 중반부터 시작하는 당조직 말단에서 30년 안에 4-5 단계의 직위를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고속 승진해야 정치국 상무위원(정원 7명)의 후보자로 들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정원 205명)에 진입할 수 있다. 실력을 입증하더라도 비리에 연루되는 등 구설에 오른다면 그것을 덮어줄 수 있는 최고위층 인맥의 적극적 비호가 있지 않는 이상 낙마할 수 있다. 장쩌민도 80년대 상하이에서 부정부패 문제로 날아갈 뻔 했다가 보이보[30] 의 구원으로 살아남았고 시진핑도 푸젠 시절 밀수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 등의 위기를 겪었다. 물론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 인사들이 출세에서 부모 덕을 본 것은 맞지만, 신중국 수립 초기부터 부총리급 이상의 직위를 지낸 인사의 자녀들은 수백 명에 달했으니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대단한 경쟁을 뚫어낸 것이 맞다. 결국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 덩샤오핑의 9자녀들 가운데서도 장관급까지 오른 자는 전국 정협 부주석 덩푸팡 뿐이며, 이 자리도 거의 장애인 할당으로 얻은 자리다.[31]
4. 구조[편집]

4.1. 전국대표대회[편집]

중국공산당의 전당대회이다. 전 공산당원 중 3,000명 정도를 대표로 뽑아 5년에 1번 개최하고, 중앙위원회의 요청이나 전국 성급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때는 임시로 개최할 수 있다. 아래 위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차관급으로 예우한다.
4.2. 중앙위원회[편집]
4.2.1. 개요[편집]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4.2.1.1. 설립 근거[편집]
4.2.2. 연혁[편집]
4.2.3. 중앙위원회의 구성과 산하 조직[편집]

5년 주기로 개회하는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고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보통 1중전회)에서 총서기와 정치국 위원 등 최고지도부 및 중앙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전국대표대회에서 370명 가량을 뽑아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중앙위원회의 기수는 직전 전국대표대회의 회차를 기준으로 한다[예] . 위원의 임기는 5년이며 의결권이 있는 중앙위원과 의결권이 없는 후보위원으로 구분된다. 정식 중앙위원의 수는 205명으로 고정되어 있다. 하술할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을 제외한 나머지 180명의 중앙위원은 장관급의 대우(중국에서는 부/성의 책임자라는 의미의 성부급(省部级)으로 부른다.)를 받는다. 다음은 중앙위원들이 역임하고 있는 당직 혹은 공직의 대략적인 목록이다.
- 대외연락부, 통일전선부 등 당중앙 주요 부서의 책임자

중국 4중전회 어떤회의인가, 공산당 '중전회'란?
중앙위원과 후보위원들의 집회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줄여서 중전회(中全会)라고 한다. 중전회는 기본 연1회 집회하나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는 해와 그 다음 해에는 각 두 번씩 집회한다. 매 5년 전국대표대회가 치러지는 해 가을에 두차례(7중전회와 새로운 기 출범후 1중전회), 새 지도부 출범 이듬해에 두차례(3월 양회 개회전 국가직 인선을 위한 2중전회와 가을 3중전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고로 중앙위원회 한 기(届) 당 중전회는 기본적으로 7번 열린다.
통상 1중전회는 전국대표대회 폐회 다음 날 바로 소집돼 정치국과 총서기 등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회의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2017년 10월 18차 전국대표대회 폐회 다음날인 10월 25일 열린 19기 1중전회에서 시진핑을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선출했다.
2중전회는 통상 가을 전국대표대회 이듬해인 3월 양회 개회 직전에 열려 5년간 정부 운영을 책임질 국가직 인사문제를 결정한다. 19기 2중전회는 시진핑 총서기를 국가직인 국가주석에, 리커창을 국무원 총리에 재추대했다.
3중 전회는 통상 5년을 임기로 하는 중앙위원회의 새로운 기(届)가 시작된 후 1년만인 가을(10월~11월)에 열리며 1년간 경제운영 결과를 토대로 향후 9년 집권기간(4년*5년)동안의 새로운 집정이념을 제시한다. 경제 사회적으로 역사적인 정책들이 논의 결정되기 때문에 3중전회는 흔히 ‘개혁회의’로 불린다.
대표적인 3중전회는 11기 3중전회(1978년 12월 18~22일)로 문화대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현대화건설에 관한 결의(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선언)을 이끌어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4중전회는 당 건설의 중요 방침과 전년도 3중전회 지도 노선의 수정 및 개혁 심화방안을 다루고, 5중전회는 국민경제 계획 심의에 중점을 두며, 6중전회는 특별한 고정 안건이 없는 회의로 전해진다. 7중전회는 보통 차기 전국대표대회 개회 준비를 위해 열리는 회의다.
- 문서가 있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 1959년 루산회의(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8차 전원회의)
-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
4.2.3.1.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편집]

중국공산당의 수장으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보통 1중전회)에서 선출된다. 국무원 당조서기(국무원 총리)와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회 당연직이다.
4.2.3.2. 정치국[편집]
중국공산당을 지도하며 정책을 토의·결정하는 기관으로서 중앙위원회 위원 중 24명을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뽑는다. 정치국에 들어갈 정도면 이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기관의 일원으로, 상무위원이 아닌 정치국원은 국가지도자급, 혹은 국가급 기관의 부책임자라는 의미의 부국급(副国级)으로 불린다. 부총리급으로 예우되는데 예외적으로 당 서열 8위인 국가 부주석은 부통령급이고 9위인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는 총리급으로 본다.(단 정치국원이나 정치국상무위원 겸직일 경우 해당)
또한 이들 24명도 당서열이 앞서나 그중 7명은 사실상 권력 서열 최고 정점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 된다.
다음은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겸임되는 공직 리스트이다.
-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7명)
- 공산당 중앙정치법률위원회(정법위) 서기 궈성쿤
- 직할시의 시위서기(베이징시의 차이치, 상하이시의 리창, 톈진시의 리홍종, 충칭시의 천민얼) 4명[32]
- 부총리급 성의 성위서기(현재 광둥성의 리시, 신장 자치구의
천취안궈) 2명[33]
이상은 전인대와 국무원, 기율검사위 등 상무위원이 책임을 맡고 있는 국가 혹은 당 조직의 부수장들이다.
-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부총리급 부서의 장(중앙조직부장 천시, 중앙선전부장 황쿤밍)[38]
- 공산당 중앙위원회 판공실 주임 딩쉐샹[39]
- 공산당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 양제츠[40]
-
공산당 중앙재경위원회 판공실 주임 류허[41]
이렇게 상무위원 7명과, 상무위원이 아닌 정치국원 17명이 24명의 중앙정치국 위원이 된다. 아래 보직은 부총리급으로 예우받거나 위상이 정치국원에 못지않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현재(19기)는 정치국 위원이 맡고 있지는 않은 보직들이다. 중국의 정치상황 변동에 따라 이 보직들 일부는 다시 정치국원이 맡게 될 수도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부주석
- 국무원 국무위원(국방부 외교부 재경부 공안부 부장)
- 국무원과 정협의 비서장[43]
- 중앙위원회 소속 부의 부장(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 최고인민법원 및 최고인민검찰원장
-
24명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44]
4.2.3.2.1. 정치국 상무위원회[편집]
당과 국가의 사실상의 최고 권력 기구이자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거로 선출된다. 선출된 7명의 위원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불린다.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와 국무원 당조서기(국무원 총리)는 당연직이며, 그 외의 구성은 고정되어 있지는 않으며 인원도 적을 때는 5인부터 많을 때는 9인까지 늘어나는 등 변화를 겪었으며, 시진핑 총서기 취임 이후에는 7명으로 고정되었다. 주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국무원 상무부총리, 중앙서기처 제1서기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등이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으로 대입하면 대통령 겸 당대표와 당 원내대표, 5부 요인(국회의장, 국무총리, 대법원장, 헌재소장, 선관위장)과 국회 법사위원장, 감사원장과 경제부총리와 방통위장이 서로 만나 국가 중대한 사항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최고기구나 마찬가지이다. 정치국 상무위원의 직급은 국가기관의 최고책임자라는 의미의 정국급正國級으로 호칭된다.
'68세 이상은 상무위원을 맡지 않는다(七上八下)'는 암묵의 룰이 있다. 시진핑이 68세를 넘은 자신의 오른팔 왕치산을 상무위원으로 유임하여 이걸 깨려 한다는 관측이 있었는데, 일단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대신 국가 부주석으로 삼았다.
<현 19대 정치국 상무위원회>
※ 다음 인물들이 상무위원(당직)이며 별도의 직책을 겸임한다.
- 시진핑: 중앙위원회 총서기(당직), 국가주석(공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당직)
공산당 서열 2위이자 중국의 정부수반인 국무원 총리. 상무위원 인선에 따라 때로는 3위인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서열이 뒤바뀌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국가주석/총서기와 투톱으로 여겨졌고 때때로 정상회담에 국가주석 대신 참여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었던지라, 고도성장기 시절에는 주룽지, 원자바오 등의 총리들이 경제성장을 주도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때문에 국무원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기술관료들이 득세하고 시장경제 체제가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45] 가 많았고, 시진핑 집권 이후 당에 중앙재경위를 설치하고 측근인 부총리 류허를 주임으로 앉힌 뒤 경제정책에서도 당의 지도를 강조하는 등 시진핑의 1인 지도체제가 확고해지면서 총리의 위상 역시 예전같지는 않다.
공산당 서열 3위이자 중국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장. 국회의장에 대응하는 보직으로 당연히 그에 따른 외교업무도 같이 수행하고 있다. 타국의 입법부에 비해 전인대가 고무도장이라 그 위상에 비해 실권은 적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년에 한 번 열리는 전인대 전체회의와는 달리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수시로 열리며 각종 정책 및 법률을 수립 및 집행하는 기관이니, 홍콩보안법 같은 중요 법률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전인대 상무위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부총리와 각 부 부장(장관) 등 상무위원 아래의 공직에 대해서는 전체회의가 폐회중일 때에도 수시로 상무위원회를 통해 임면을 결정할 수 있는 만큼, 실제로는 정부의 인사권을 총서기와 공유[46]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직임은 분명하지만 그 존재감은 총리에 비해서는 옅은 편.
- 왕양: 정치협상회의 당조서기(당직),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공직)
- 왕후닝: 중앙서기처 제1서기(당직)
- 자오러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당직)
- 한정: 국무원 당조부서기(당직), 국무원 수석부총리(공직)
4.2.3.3. 중앙위원회 서기처[편집]
약칭은 중앙서기처. 중앙위원회의 일상 사무 처리가 주된 업무로, 정치국 상무위원회보다는 격이 떨어지지만 주요 권력기관으로 여겨진다. 서기국이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과거 소련만큼은 아니고 정치국원이면서 서기처 소속은 아닌 최고 요직 상하이시 서기 같은 자리도 있지만, 서기처 소속이면 같은 정치국원들 중에서도 권한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봐도 된다. 서기는 제1서기를 포함해 총 7명이다. 대체로 조직부장, 선전부장, 중앙판공청 주임, 기율검사위 부서기[51] 는 서기처의 단골 멤버지만 나머지 두 자리는 정법위 서기, 통일전선부장, 국무원 부총리 또는 비서장, 중앙군사위 부주석, 정협 비서장 등으로 일정하지 않아 매 기수마다 당내 역학관계에 따라 꽤나 변화가 있는 편이다.[52] 대체로 서기처에 속하는 업무는 총서기와 제1서기가 좀 더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업무라고 봐도 된다. [53]
한국으로 치면 이 곳의 제1서기는 당의 부당수이면서 원내대표 겸 당 사무총장 보직. 나머지 여섯 명은 중앙조직부장, 중앙선전부장, 중앙판공청 주임, 기율검사위원회 부서기, 정법위 서기, 통일전선부장[54] 으로 정치국원급에 해당하는 당내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모여 부서간 입장을 조율하고 실무를 협의하는 기관이다. 국무회의 아래 국무조정실장이 주관하는 차관회의가 있는 것과 비슷한 셈.
4.2.3.4. 중앙군사위원회[편집]

중국 인민해방군의 통수기관으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보통 1중전회)에서 주석과 부주석을 선출한다.
4.2.3.5. 기타 하위 조직[편집]
5. 중앙기율검사위원회[편집]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당원의 부정부패, 비위행위를 감찰하는 기구[59] 로서 서기(1인), 부서기(8인), 상무위원 19인(서기와 부서기를 포함)으로 구성된다.
6. 역대 영도집체[편집]
중국공산당의 역대 지도부이다.
6.1. 역대 당수[편집]
중국에서는 중공중앙주요부책인(中共中央主要负责人)[60] 이라고 한다.

6.1.1.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편집]
- 중앙국 서기(제1차 전국대표대회)
- 제1대: 천두슈 (1921. 7. 31. ~ 1922. 7. 23.)
-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제2~3차 전국대표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총서기(제4차 전국대표대회)
- 제1대: 천두슈 (1922. 7. 23. ~ 1925. 1. 11.)
- 중앙위원회 총서기(제5~6차 전국대표대회)
6.1.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편집]

- 중앙정치국 주석[62]
- 제5대: 마오쩌둥(1943~1956)
- 중앙위원회 주석[63][64] (1956-1982)
-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현재)
- 제7대: 후야오방 (1981.06.29. ~ 1987.01.16.)(제11-12차 전국대표대회)[덩]
- 대리: 자오쯔양 (1987.01.16. ~ 1987.11.01.)(제12차 전국대표대회)[덩]
- 제8대: 자오쯔양 (1987.11.02. ~ 1989.06.23.)(제13차 전국대표대회)[덩][65]
- 제9대: 장쩌민 (1989.06.24. ~ 2002.11.14.)(제13-15차 전국대표대회)
- 제10대: 후진타오 (2002.11.15. ~ 2012.11.14.)(제16-17차 전국대표대회)
- 제11대: 시진핑(2012.11.15. ~ 현재)(제18-20차 전국대표대회)
- 제7대: 후야오방 (1981.06.29. ~ 1987.01.16.)(제11-12차 전국대표대회)[덩]
6.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영도집체[편집]
- 천두슈(1921년 7월 31일~1927년 7월 12일)
- 장궈타오(1927년 7월 12일~1927년 8월 7일)
- 취추바이(1927년 8월 7일~1928년 7월 19일)
- 차이허썬(1928년 7월 19일~1929년 1월)
- 리리싼(1929년 1월~1929년 11월)
- 저우언라이(1929년 11월~1930년 3월)
- 리리싼(1930년 6월~1930년 9월)
- 취추바이(1930년 9월~1931년 1월)
- 왕밍(1931년 1월~1931년 9월 15일)
- 보구(1931년 9월 15일~1935년 2월 5일)
- 장원톈(1935년 1월 15일~1943년 3월 20일)
- 마오쩌둥(1943년 3월 20일~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3. 5대 서기(1945년~1966년)[편집]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중앙서기처가 최고의사결정기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서기처 주석이 당의 영도자가 되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중앙서기처 주석으로 실권을 행사하던 마오쩌둥을 위한 조치였다. 서기처 구성원은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런비스 5인에 천윈, 펑전 2인의 후보위원이었다. 1950년 런비스의 사망으로 천원이 자리를 채웠다. 1956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부활하면서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 주석에 나머지 4인은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이때 덩샤오핑이 중앙서기처 총서기가 되었고 1958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 5중전회에서 린뱌오가 중앙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런비스 → 천윈
6.4. 4인방(1966년~1976년)[편집]
문화대혁명으로 5대 서기가 무력화되고 마오쩌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마오쩌둥의 측근에 있던 4명이 권력을 행사한다. 마오의 부인이자 정치국 위원이었던 장칭(江青),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 왕훙원(王洪文),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张春桥), 문예비평가 겸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의 4인으로 문화대혁명의 피로감과 저우언라이의 사망으로 촉발된 제1차 천안문 사태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6.5. 중공 8대 원로 체제(1978년~1990년대 중반)[편집]
1976년 화궈펑이 권력을 잡으나 2년만에 덩샤오핑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고 1978년부터 덩샤오핑의 주도로 당 원로들의 집단 지도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정식 당직이 없었지만 원로로써 큰 권력을 행사하였고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다.
견해1: 덩샤오핑, 양상쿤, 천윈, 펑전, 보이보, 리셴녠, 덩잉차오, 왕전
견해2: 덩샤오핑, 양상쿤, 천윈, 펑전, 보이보, 시중쉰, 완리, 쑹런충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제12차 전국대표대회(1982년~1987년)
주임: 덩샤오핑
위원: 172명(1982년), 185명(1985년)
제13차 전국대표대회(1987년~1992년)
주임: 천윈
위원: 200명
6.6. 장-리-주 체제[편집]
6.6.1. 리펑 정부(제7, 8차 국무원)[편집]
6.6.2. 주룽지 정부(제9차 국무원)[편집]
6.7. 후-원 체제[편집]
6.7.1. 제1기 원자바오 내각(제10차 국무원)[편집]
6.7.2. 제2기 원자바오 내각(제11차 국무원)[편집]
6.8. 시-리커창 체제[편집]
6.8.1. 제1기 리커창 내각(제12차 국무원)[편집]
6.8.2. 제2기 리커창 내각(제13차 국무원)[편집]
6.9. 시-리창 체제[편집]
6.9.1. 시진핑 핵심 당 중앙위원회[편집]
7. 비판[편집]

8. 관영언론[편집]
- 인민일보 (런민르바오)
- 환구시보 (환추스바오) - 인민일보에서 출자해서 만들었지만, 반(半)관영이다. 꼭 인민일보나 중국공산당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적는 인민일보가 점잖은 논조를 표방한다면 환구시보는 그와 정반대로 상당히 국수적인 논조를 나타낸다.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신문은 아니지만 중국공산당 내 극성파들의 속내가 어떠한지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유용한 편. 환구시보는 영문명인 글로벌타임스라고도 한다. 환구시보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66]
9. 여담[편집]
- 2009년 한나라당 (현 국민의힘)은 중국 공산당과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하기로 합의하고, 교류 협력 강화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67] 했다. 2022년 멸콩 사건과 관련하여 김재원은 "중국은 우리 우방국이에요. 적대국가 적성국가인 북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특히 우리 국민의힘이 중국공산당과 자매결연을 맺어서 20년 동안 지금 우당으로 지내고 있어요."라고 발언 하였다. [68]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100주년 기념식을 크게 치렀는데, 학생대표 4인 중 1명으로 선발되어 충성맹세를 선창한 펑린(馮琳)이라는 21세의 여대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9년 10월 저장성 자싱시에서 태어난 펑린(현재 24세)은 2018년 중국전매대학 아나운서ㆍ앵커 전공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충성맹세를 선창했다. 또한 동년 9월의 전매대학 입학식에서는 재학생 대표로 연단에 올라 “나는 천안문광장 근거리에서 시진핑 주석의 연설을 학습하고 경청할 수 있었고, 무한한 영광을 느꼈습니다.”, “나는 중국 인민의 아나운서, 중국공산당의 아나운서입니다. 나는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승리를 향해 행진하는 중국 인민의 목소리, 중국공산당의 정정당당한 진리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라고 연설했다. 펑린의 사진과 영상은 그녀의 미모로 인해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화제를 모았고, 그녀의 개인 웨이보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중국인들, 특히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부쩍 심해진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중화사상과 애국주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창당일은 7월 23일이지만, 창당기념일은 1938년 부터 7월 1일에 기념하고 있다. 국민당과 다른 군벌들과의 충돌로 초기 기록들을 망실하여 아무도 정확한 창당일을 모르게 된 탓에 모택동이 7월 1일을 기념하는 날로 정했다. 나중에 학자들이 실제 창당일을 밝혀낸 이후에도 창당기념일로 유지하고 있다.#[69]
- 공산당에 의해 중국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최초로 참전한 전쟁이 6.25 전쟁이다. 신생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인민해방군이 아닌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실질적인 한반도 반 통일 세력이다. 다만 이때 중공의 참전은 유엔군 정확히는 유엔군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당시 미군 사령부의 오판도 있었는데, 당시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공 수뇌부는 38선 남쪽의 유엔군 활동은 보장해주지만, 북쪽으로 넘어오는 순간[70] 개입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는데 이 때 중공의 전력을 우습게 본 맥아더를 비롯한 수뇌부는 진격을 계속했고 결과는 알다시피. 사실 당시 남측 수뇌부의 더 핵심적인 문제는 중공 전력의 과소평가에 따른 전세 역전 후 대안 전략 부재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때 최강 미군을 막았다는 사실 때문에 청 말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취급받던 중국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올라간 측면은 있다. 그래서 중공도 미국과 마찰이 있을 때면 이 사건을 거론하며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띄우고 있는 것.
- 2010년대 들어 공자를 부쩍 띄우고 있다.# 캐나다 출신으로 칭화대학 교수를 역임한 대니얼 A. 벨 같은 친중공 정치학자는 심지어 중국공산당의 독재가 공자의 사상에 입각한 '동아시아판 철인정치'라며, 서구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규모 공동체라면 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나 중국처럼 수억 명이 사는 대국에선 이른바 신유가식 현능정치가 최선이라는 것[71] . 그는 20세기엔 서구식 민주주의의 경쟁자가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공산주의여서 가장 덜 나쁜 제도라고 볼 수 있었지만 21세기에도 이 제도가 여전히 그런지는 회의감을 느낀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알아서 판단하자. 좋은 제도가 맞는지에 대한 반론은 이 문서에도 많은데다가 원류 파시즘도 덮어놓고 민족만 외치는 이념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면 이론이 어떻든간에 실전에 적용될 때가 문제. 다 떠나서 이 양반은 그래도 나름 현 인류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자기 딴엔 고심하는 것일 테지만 현 중공이 이런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것 같지 않다. 자기들 집권에 유리한 주장은 뽑아먹고 아니다 싶은 주장을 하면 가차 없이 토사구팽시킨다.
- 도올 김용옥은 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당독재 개념과는 좀 다르고, 워낙 크고 체계, 토론 제도가 잘 되어 있고, 각 계파별로 서로 견제를 해서, 오히려 다당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고 했다.[72][73] 그러나 후진타오의 퇴임시 부정부패가 문제라는 발언, 중국에서 원로한테 훈수 받는 제도,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등 호랑이 4인방 같은 사례를 들면서 비리가 많다는 걸 말하기는 한다.
- 약간 옥시덴탈리즘이 있는 것 같다. 서구의 마돈나나 엠마 왓슨 같은 페미니즘, 기타 인권 운동 활동가들이 중국을 비난하자 반 관영 언론사 환구시보를 통해 "중국 여성에 비해 금방 늙고 아줌마 되는 백인 여성들이 한물 가자 뒤늦게 히스테리 한풀이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다만 상기되어있듯 환구시보는 완전히 중공과 일치하는 견해만 보이는 신문사는 아니긴 하다. 중공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인종주의, 성차별을 배척한다. 중공의 위선자적 면모 혹은 환구시보가 얼마나 저질스러운지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 한족이 주류를 이루는 중국이지만, 많은 소수민족을 품어야 하는 중공의 특성상 대한족주의는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론 일단 내세우고 싶어도 내세울 수가 없다. 당장 마오쩌둥도 집권 당시 당내에 퍼져있던 대한족주의를 경계하며 프롤레타리아 민족정책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덕분인지 그 엄혹한 시절에도 의외로 소수민족들은 한족에 비해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독립/분리운동하던 세력한테는 가차없었지만.
- 2022년 1월부터 중국공산당 해산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10. 관련 문서[편집]
- 동방홍
-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
- 우마오당
-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 중국공산당 규약
- 중국공산당의 파벌
- 중국 마오쩌둥주의 공산당
- 죽의 장막
- 초한전
- 흑묘백묘론
- 화웨이, ZTE - 사실상 중국공산당 산하기업이다.
- 중국 인민해방군: 형식상 중국의 국군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군대이다.
- 파이브 아이즈 -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10.1. 민국 시기[편집]
- 신청년(1921~1927)[74]
- 1차 국공합작(1924)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1925)
- 중산함 사건(1926)
-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1927)
- 난징사건(1927)
- 4.12 상하이 쿠데타(1927)
- 4.15 광저우 쿠데타(1927)
- 마일사변(1927)
- 국공결렬(1927)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1927)
- 난창 폭동(1927)
- 8.7 긴급회의(1927)
- 추수폭동(1927)
- 정강산 투쟁(1927~1929)
- 창사 폭동(1930)
- 부전사변(1930~1932)
- 초공작전
- 만주사변(1931)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
- 열하사변(1933)
- 복건사변(1933)
- 대장정(1934~1936)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
- 서안 사건(1936)
- 2차 국공합작(1936)
- 중일전쟁(1937~1945)
- 쌍십협정
- 국공내전(1946~1949)
10.2. 건국 이후[편집]

[1] 중국 현지에서 쓰이는 명칭. 다른 당이 사실상 없으며, 중국 = 중국 공산당이라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민주당파 정당들이 존재해서 법정 야당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반우파 투쟁 이후 세력을 크게 잃어 제대로 된 야당의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다. 이렇게 불리우는 또 다른 정당으로는 북한의 조선로동당이 있다.[2] 창당 기념은 7월 1일에 한다. 여담 문단 참조.[3] 중국어 服务의 한국어 발음은 복무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복무'는 주로 '힘쓴다'는 의미가 있어 '군 복무'와 같이 군생활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는 반면, 중국어의 服务는 일하다, 서비스, 봉사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북한의 조선인민군에서는 이 슬로건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를 직역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을 공식 행사 시 경례구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북한은 복무를 서비스의 의미로 쓰지는 않고(봉사라고 한다), 복무가 쓰이는 군이기에 임무에 힘쓴다는 뜻에서 저런 표현을 쓴다.[4] 개혁개방 이후로는 일당 독재 하의 집단지도체제, 즉 과두정 독재였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경쟁자들을 대부분 숙청한 뒤로는 사실상 1인 독재가 시작되었다.[5] 현 중공에선 자신들은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에둘러 부정하고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에 희토류 제한 조치를 거는 등의 행태는 사실상 패권주의다. 이러다 보니 국수주의적 행태도 종종 보인다.[6] 주석에 따라 달랐다. 대표적으로 장쩌민, 후진타오 시절에는 서방 및 주변국들과 원만하게 지내려는 노력도 했다. 사실 이는 시진핑도 이론적으론 일부 추구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중국 패권주의가 노골화되며 이상과 현실에선 차이가 커지고 있다.[7] 사실 엄밀히 말해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라고 선언한 적이 한번도 없다. 중국 공산당의 혁명이론에 따르면 중국은 공산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 여정에 있으며, 공산당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이다. 소련과는 다르다.[8] 일명 시진핑 사상이라 불리기도 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주의, 덩샤오핑 이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자칭한다. 사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실체가 두루뭉술하다.[9] 개혁개방 이후 사실상 마오주의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하는 기운도 있지만 강령에는 공식적으로 명시하고 있다.[10] 사회혁명을 통해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국유 경제체제가 수립된 중국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중국공산당은 "권위주의적 국가 관료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가 국유화된 체제"의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현재 중국공산당의 정책 방향은 현상유지를 전제로 국력 강화에 주력한다는 것으로, 자신들도 이 체제가 더 우월하답시고 해외로 수출하거나 현 상태에서 더 사회혁명을 진전시키고자 하지는 않는다. 이건 겉으로 내세우는 말일 뿐이며, 중국 내부에선 은근히 자신들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식의 어필을 하고 있다. 거기서 노리는 것은 당연히 현 권력층의 권력 유지.[11] 공식적으로는 극좌 정당으로 분류하나 현재 중국공산당이 타국의 공산당과 비슷한 극좌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공산당을 단지 권위적인 국가사회주의 정당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회, 정치, 제도에서 사회주의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상태.) 굳이 따져보자면 실용주의 노선은 다른 나라 좌우 정당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니, 결국은 전체주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이 문제. 또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정권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사회주의적 소유 제도나 법률, 정책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 경제는 자본주의라고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12] 총서기로 취임하였다.[13] 1988년 이전까지 한국에선 중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일개 중국 공산당 당국 혹은 정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당시 수교 중이던 중화민국 때문이었다. 한국-대만 관계 문서 참조.[14]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 정부와 중국공산당은 별개의 조직이다. 중국 국내법상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라고 불리며, 이 국무원이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받는다. 즉, 당이 국가기관보다 상위 기관이며, 법의 서열도 헌법보다 당헌이 우선된다. 그래서 공산당이 정부의 역할도 하는 이중정부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체제를 당국가 체제라고 한다.[15] 중국 인구의 약 6.4%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정당이다. 1위는 당원 수가 무려 100,000,000명 이상인 인도의 인도 인민당. 다만 중국공산당은 일당 독재로 가입수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음에도 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 부질없는 비교긴 하다. 참고로 당원 규모 세계 3위와 4위는 미국 민주당과 미국 공화당이다.[출처] 서성, <한 권으로 읽는 중국 문화>, 넥서스, 2005, p38-40[16] 이 중 저우포하이, 천궁보 등은 탈당하여 국민당에 합류했다.[17] 윈난성 등 일부 지역의 국민당군은 계속 저항했지만, 외부에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1950년대 초반에 대부분 공산당군에 토벌된다.[18]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그렇게 적극적인 후원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국공내전이후 사실상 적이었고, 중국국민당의 중화민국 정부가 오히려 후원자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중국이 한국을 도왔다고 나오지만 사실 그 중국은 지금의 중화민국(대만)이다. 오히려 중공은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상대로 조선인민군과 같이 싸운 실질적 적군이다. 냉전 이후 지금도 한중관계는 긴장 속에 있다.[19] 김구, 김규식 선생은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내 온건파와 사적인 친분은 있었으나 장제스, 장징궈 등 중국 국민당의 주요 인사들과 더 친분이 있었다.[20] 실제로 바이두에 "왜 중국이 일당제여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공산당이 모든 걸 다 해주는데 다당제가 왜 필요하냐"는 답변이 올라온 사례가 있다. 이런 댓글만 조직적으로 다는 공산당 관련자들도 있다.[21] 그래서인지 미국의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020년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같은 당 출신 전직 대통령 닉슨의 정책이, 변화하지 않는 중공의 집권만 강화시켜줬다"며 비판하기도 했다.#[22] 쌍백운동 시절에 잠깐 허용해준 적은 있었다.[23] 게다가 당시 국민당 당 조직도 소련 공산당의 그것과 비슷하여 중공과 큰 차이도 없었다.[24] 물론 현실에서는 공직자 간 상하관계와 경력의 차이가 있으니 그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25] 이런 당의 영도 매커니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글. #[26] 중국공산당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27] 장관급 공직자만 400명에 달하는 나라다. 직급 인플레가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중국은 인구 수천만에 달하는 일급행정구만 31개에 당이 사법부와 입법부는 물론이고 경제와 문화 과학 등 모든 분야를 영도하기 때문에 당과 정부조직이 거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중에서도 요직과 한직이 갈리지만, 한국에서 의전서열만 높고 실제로는 명예직일 뿐인 자리들과는 달리 이런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고위관료들 사이에서 밀릴 뿐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권력자이다.[28] 후진타오는 공청단 후배인 리커창을 차기 대권후보로 밀었으나,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견제 때문에 결국 시진핑 국가주석, 리커창 국무원 총리 체제로 결론이 났다.[29] 중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르려면 지방행정 실무경험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시진핑만 하더라도 허베이, 푸젠, 저장성 등을 거쳤다. 이렇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주재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오를 수 있는 직위가 장관급이 한계이다. 학자 출신으로 당 중앙정책실에만 20년을 있었던 왕후닝이 이례적으로 상무위원 자리까지 오르긴 했지만 이런 사례는 극히 예외이며, 당중앙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방 조직을 거쳐야 한다.[30] 보시라이의 아버지[31]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보다 더 끗발좋았던 아버지를 둔 보시라이(개국공신 보이보의 아들)는 7인에 뽑히는 것이 유력했으나, 2012년에 비리로 몰락했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시진핑의 집권을 도왔는데, 태자당 내 유력 주자 한 명이 날라가면서 당 중앙위의 태자당의 표가 분산되지 않고 시진핑으로 집결된 것이다[*] 전국대표대회가 폐회중일때[예] 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선출한 중앙위원회면 19기(十九届) 중앙위원회[32] 대한민국으로 치면 장관급 서울특별시장과 부산 광주 인천광역시장겸 특 광역시 당위원장정도이다.[33] 대한민국으로 치면 경기도지사와 제주특별자치도지사겸 도당위원장이 장관급이 된 경우. 천취안궈는 21년 말 신장위구르 당서기에서 물러나 정치국원 신분은 유지하며 당 농촌공작영도소조 부조장으로 이동하여 취소선 표기[34] 대한민국으로 치면 국회 부의장(여당 소속). 우리 국회부의장처럼 의전서열은 높지만 정치국원 중에서는 무게감이 떨어지는 자리인 것은 어쩔 수 없다.[35] 암묵적으로 여성에게 할당되는 자리로, 최근 4기 동안 우이, 류옌둥, 쑨춘란 등 3명의 여성 부총리가 거쳐갔다. 아무래도 경제성장과 직접 관련되지 않다보니 권한은 크지 않은데 고생스럽기만 한 자리로 인식되는 편. 실제로 제2부총리 자리는 대부분 역임자의 마지막 공직으로, 최근 40년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한 인사는 없다. 정원 24명의 정치국 내에서 여성은 보통 1명~2명으로, 상대적으로 한직으로 인식되며 승진 가능성이 낮은 보직을 맡는다.[36] 대한민국으로 치면 감사원장[37] 최선임 제복군인으로 군 통수권자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합참의장, 국방장관(거기에 더해 인민해방군에는 당군의 특성상 국방장관, 연합참모부장(한국의 합참의장)과 동격인 정치공작부장, 기율검사위 서기가 있다.) 위에 통수권자를 보좌하는 부통수권자 2명이 더 있는 셈이다.[38] 전자는 대한민국으로 치면 청와대 인사수석 겸 여당 조직부총장, 후자는 청와대 홍보수석, 방통위원장 겸 여당 홍보위원장. 이들은 한국으로 치면 당 사무부총장 격인 중앙위원회 서기직을 겸직한다. 당이 모든 것을 지도하고 언론의 자유가 제약된 통제국가인 중국 특성상 중앙조직부장은 당직뿐만 아니라 정부의 장관급 이하 인선, 국영기업의 수장 등 민간분야까지 좌지우지하는 핵심보직이고, 마찬가지로 중앙선전부장은 전국의 모든 언론보도를 통제하는 자리다. 당연히 24명의 정치국원 중에서도 요직으로 평가받는다. 전임 조직부장이었던 자오러지는 서열 6위 상무위원인 중앙기율위 서기로 영전했다.[39]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겸 당 대표 비서실장겸 경호처장. 총서기를 정치적으로 보좌하는 것 뿐만 아니라 중국 요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한편으로는 감시하는) 핵심 요직으로, 당연히 총서기 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자리이다. 당연히 정치국원 중 상하이 당서기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이고 역사적으로 중국 정계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거쳐갔다. 전임이었던 리잔수는 이 보직을 역임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서열 3위의 전인대 상무위원장으로 영전했다.[40] 일반적으로 외교부 장관은 보통 정부 내 서열이 못해도 5위 안에는 들어가는 요직이지만, 중국의 외교 담당 국무위원(부총리급 대우)과 외교부장의 당내 서열은 장관급 중앙위원(205명)에 불과해 책임과 권한을 갖고 외교 교섭을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또 외교 교섭창구가 외교부(국무원)과 대외연락부(당)으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이에 따라 19기에 들어와 태스크포스 개념이었던 중앙외사공작영도소조를 격상시켜 당 중앙에 당과 정부 양쪽을 통합해 지휘하는 중앙외사공작위(조장과 부조장은 각각 국가주석과 국가부주석이 맡는다.)를 두고, 실무 책임자인 판공실 주임을 정치국원으로 승격시켜 외교 사령탑 역할을 하도록 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국가안보실장겸 외교안보특별보좌관.[41] 대한민국으로 치면 정책실장겸 경제정책특별보좌관. 외사공작위와 마찬가지로 19기에 들어와 태스크포스 개념이었던 중앙재경영도소조를 격상시켜 당 중앙의 지휘를 받도록 확대개편한 기관으로, 이를 통해 총리 영역이던 경제정책에 대한 권한을 총서기인 시진핑이 가져왔다고 평가받는다. 현재 시진핑의 최측근인 부총리 류허가 겸임중이므로 취소선으로 표시했다.[42] 대한민국으로 치면 각각 청와대 비서실장 겸 경호처장, 청와대 안보실장, 청와대 정책실장[43] 대한민국으로 치면 국무조정실장과 국회 부의장(상원)[44] 의전상 부총리, 정치국원과 동격이긴 하다. 아무튼 국가급 기관인 정협의 부주석이니 부국급(副国级)의 정의에 부합하기 때문. 물론 현실적으로는 권력투쟁에서 밀린 당 원로들을 예우하기 위한 자리에 가깝고, 이들 중 실제 정치적 역할이 있는 건 정협 비서장 정도밖에 없다. 다만 발개위 주임 허리펑처럼 실권이 있는 중앙위원급(장관급) 보직과 겸임하는 경우 중앙위원과 정치국원 사이 대우를 받는다고 봐도 무방하다.[45] 당은 발목이나 잡고 권력투쟁이나 일삼는 반면, 국무원 총리는 경제에 집중하며 실제 인민들의 생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이미지가 있다. 이는 당중앙의 사회주의 이념체계를 크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당의 지도에서 자유로운 국무원에 경제 문제를 일임한 의도적인 안배였지만, 총리의 대중적 인기와 그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존재감이 총서기를 추월할 정도가 되니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진핑이 권한을 강화하고 리커창이 많은 견제를 받는 상황에 대해서 말하자면 시진핑 개인의 권력욕과 둘 사이의 권력투쟁이라는 표면적 현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시진핑의 권력이 기존 관례와 당원들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지나치게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의 바탕에는 사회주의 가치가 무너지고 절대적이어야 할 당의 권위가 훼손됨을 우려하는 당 내부의 여론이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당 원로들과 각 파벌 간부 등 주요 구성원들의 공감대에 의거한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46] 국가직은 전인대에서 결정하지만, 겸임하는 당직의 인사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수시 임면권은 원래는 없었으나 2021년 전인대 조직법 개정을 통해 새로 생긴 권한이다. 현재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시진핑의 최측근인 리잔수인 만큼 통과 당시에는 시진핑이 국무원을 통제할 도구를 획득하며 권력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만약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총서기의 정치적 계파가 엇갈린다면 강력한 견제도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47] 당연히 이런 자리들에는 실무를 맡는 정치국원이나 중앙위원급 인사들이 위원으로 참여한다.[48] 물론 상무위원들은 본업 외에도 상무위원간 업무분장을 통해 당과 정부 내 여러 업무들을 나눠 맡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여러 소조나 위원회[47] 에 조장이나 부조장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정협 주석이라고 권한이 전무하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전임 장더장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홍콩과 마카오 업무를 맡았고, 현임 왕양 정협 주석은 신장과 티베트를 관리하고 있다.[49] 중앙당교 교장은 재교육을 위해 이 곳을 찾는 차세대 관료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며, 간부 양성을 중시하는 중국공산당의 특성상 당의 방침과 이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서 중앙당교의 역할이 작지 않다. 결국 차기 대권주자가 자기 사람을 키워낼 수 있는 자리인 셈이다. 후계자 자격으로 이 자리를 맡은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중앙군사위 부주석까지 겸임했다.[50] 당연히 서기처를 장악하게 되면 총서기의 지도력이 크게 약화되기 때문이다. 당시 조직부장이었던 허궈창, 선전부장 류윈산, 공안부장 저우융캉까지 장쩌민과 쩡칭훙의 지시를 받는 상하이방이었으니 어찌나 견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던지 결국 쩡칭훙은 자신의 퇴진을 조건으로 후진타오의 후계자를 시진핑으로 결정하는 캐스팅보트를 행사하게 되었다.[51] 19기부터 국가감찰위 주임까지 겸임[52] 심지어 13기에서는 중앙조직부장이었던 쑹핑이 서기처에서 빠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총서기인 자오쯔양을 배제하고 당 조직업무를 직접 관장하기 위한 중앙고문위 주임 천윈의 조치였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 인사수석이 전직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현직 대통령은 배제되는 일이 일어난 셈인데. 당시 총서기가 실무 책임자에 불과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53] 예를 들면 18기의 정법위 서기 멍젠주는 서기처 멤버가 아니었지만, 19기의 궈성쿤은 서기처 소속이기 때문에 정법계통에서의 시진핑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고 봐도 무방한 것.[54] 역사적으로 정치국에 속한 적이 더 많았지만, 19기에서는 정치국원이 아니었고 20기에서 다시 정치국에 진입한다. 외부 관찰자들은 집권 2기까지는 내부 단속에 정신없던 시진핑이 대만 병합에 힘을 싣기 위해 통일전선부의 위상을 높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55] 당원의 영입과 교육, 당내 인사배치를 담당한다. 쉽게 말해서 인사관리.[56] 민주당파(위성정당), 무소속 인사, 종교계 인사, 해외 인사와의 연계를 담당하는 기구. 쉽게 말해서 중국공산당에 예속(당원은 아니지만 공직자인 사람들도 포함)되지 않은 중국인들(대만인들도 중공 입장에서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포함)과의 연계를 담당한다고 보면 된다.[57] 당 차원 외교부서이다.[58] 당내 고급 간부 교육기관이다.[59] 공무원의 부정부패 및 비위행위는 국가감찰위원회에서 감찰하며, 두 기관은 서로 인적구성이 같다.[60] 부책인은 중국어로 책임자이다. 책임(责)을 부담(负)하는 사람(人)이란 뜻.[61] 실권은 마오쩌둥이 쥐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대장정 문서의 쭌이회의 참조[62]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중앙정치국이 최고 기관이 되었고 중앙정치국 주석이 당수 역할을 함.[63] 중앙위원회가 부활하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신설되었다.[64] 당 주석이라고 했으며 국가원수 직책인 국가주석과는 다른 직책이다. 국가주석은 공직이며 본 직책은 당직이다. [덩] A B C 실권은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이자,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었다.[65] 천안문 사태로 내려온다.[66] 쉽게 말하자면,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그대로 말해준다면, 환구시보는 중국공산당이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나 국내, 국제적인 반발을 의식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비교적 자극적인 논조로 말해준다고 보면 된다.[67] 한나라당, 中 공산당과 협력강화 합의[68] [시선집중] 김재원 "멸공? 왜 논란되는지 이해 안 돼, 北 오늘도 미사일 쐈는데.. 국정원은 나를 뒷조사"[69] 이와 유사한 게 크리스마스다. 성탄절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념일이며, 예수의 생일이 아니다. 예수의 정확한 생일은 아무도 모른다.[70] 국군만 올라오는 건 민족 간 내전으로 보고 참전하지 않겠다고 했다. 참고로 당시 국군의 전력을 생각하면 물자 지원을 받는다 쳐도 단독으로 북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을 지는 논쟁의 대상. 인구야 당시에도 대한민국이 거의 2배 더 많긴 했지만 북한은 그런 열세를 뒤집고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려왔다.[71] 조직만 보면 국제연합 같은 범국가적 기구와 유사하긴 하다.[72] 실제로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경찰이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의 경찰과 충돌하는 일이 번번찮게 일어나는 면모도 보인다. 물론 일당제 내 계파 간의 견제는 다당제만큼의 견제 특히 지속적인 견제는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다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 사실상 양당제 등의 문제가 있어서 계속 제도적 수정, 보완이 이뤄지는 중.[73] 실제 도올은 중공의 일당 독재를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도올은 진보 성향 학자라고 알려져있지만, 일반적인 진보 학자들과는 다르게 "민족 정기를 위해 징병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발언도 하는 등 꽤나 보수적인 견해도 비추는 학자이다.) 하지만 "시진핑 이후 1인독재가 되어버렸다"며 시진핑에 대해선 굉장히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친 바 있다.[74] 잡지 자체는 1915년부터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