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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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의 현재 집권여당.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천두슈,[10] 리다자오의 주도하에 창당됐다. 1949년부터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중국 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집권정당인 독재정당이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에는 공산당 말고도 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8개의 민주당파 정당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정치활동만 하고 있으며 정권 교체는 실질적으로 할 수도 없고 시도 자체도 하지 않는다.
중국공산당을 그나마 옹호하는 이들은 현재 중국이 일당독재 체제이긴 하지만 일인독재는 아니며, 엄연히 당내 파벌간 견제 장치가 작동하고 정년과 임기제가 정착되어 있어, 제도화된 파벌간의 권력 교대가 타 국가의 정권교체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2022년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3기 연임을 확정해 반대 계파를 지도부에서 일소하고 정년과 임기 제한을 사문화시키며 사실상 일인독재 시대를 열게 되어 이들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약칭은 중공(中共).[11] 중국 현지에서는 더 줄여서 그냥 "당"(党)이라고도 부른다. 일당제인 중국에서는 중국 정부가 곧 중국공산당이기 때문에,[12][13] 다른 나라에서 자국 중앙 및 지방 정부를 단순히 "중앙 정부 혹은 지방 정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국 대륙내에서 중국인들이 "당"이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 이 곳을 가리킨다. 당원은 9천만명 이상이다.[14]
전국대표대회라는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가 있다. 공산당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데 여기서의 결정이 다음 회의 때까지의 중국 정책방향을 결정한다.[출처]
2021년 11월, 공산당은 19기 6중전회를 개최한다. 중앙정치위 및 중앙정치국의 성과 총결산을 통해 제 2022년 20차 당대회의 전열 정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현 당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인 시진핑이다.
2. 역사[편집]
2.1. 창당[편집]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영향을 받고 5.4 운동의 시류를 탄 천두슈 등의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이전에 학계에서는 1920년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라는 단체에서 출발했다고 해석되고 있다.
제1차 당대회는 1921년 7월에 있었는데, 이때 50여 명의 당원을 대표해 13명의 중국인과 2명의 외국인(코민테른에서 파견)이 참가하였다.[15] 초기에는 1921년 노동조합서기처를 설립,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를 조직, 후원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처음에는 광동군벌 천중밍, 직예군벌 우페이푸 등과의 합작을 도모했으나 천중밍과는 영풍함 사건으로, 우페이푸와는 2.7 사건으로 결렬했으며 쑨원과 연합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식으로 1차 국공합작에 나서게 된다. 이어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혁명군의 건설을 도왔으며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객군 반란 진압, 국민당의 2차 동정과 남정에 적극 참여하여 대중운동을 선동하여 군사작전을 도왔고 공산당을 선전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며 국민당을 잠식하려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공간의 갈등이 끓어올랐고, 이런 갈등은 쑨원이 사망한 후에 폭발했다. 1925년 8월 20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와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은 이를 구실로 후한민, 쉬충즈, 린썬, 쩌우루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을 대거 숙청했다. 장제스는 이 숙청에 가담하면서 국민당의 2인자로 자리잡았지만 북벌 문제를 놓고 공산당과 갈등을 빚었고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중산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한다. 하지만 국공 갈등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영왕운동, 천도논쟁, 난징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보로딘은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급기야 4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시켰다. 결국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장제스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27년 5월, 하두인을 비롯한 우파 장령들이 마일사변을 일으키며 분공을 요구했고 펑위샹도 분공을 요구, 거기에 코민테른의 5월 지시가 내려오게 되면서 1927년 7월에는 우한 국민정부와 공산당도 결별하게 되었고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시작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 때문에 8.7 긴급회의를 통해 천두슈가 실각하고 취추바이가 집권하여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주도했으나 역시나 실패했다. 12월 광저우 폭동의 실패의 결과로 6만에 달하던 당원이 1만명으로 급감하는 등 공산당의 피해는 심각했다.
2.2.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과 대장정[편집]
하지만 마오쩌둥과 주더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중국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했으며 특히 강서성에 건설된 강서 소비에트는 계속 확장,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되었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상하이의 임시 당중앙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마오쩌둥은 실각했고 오토 브라운과 28인의 볼셰비키라 불리는 소련 유학파들이 군사 노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 중앙 소비에트를 비롯한 여러 소비에트 지구들이 분쇄되었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멸망했다.
1934년 공산당은 대장정에 올랐으며, 1935년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복귀했다. 이후 당 권력을 두고 장궈타오와 마오쩌둥의 분쟁이 있었으나 마오쩌둥 당적까지 박탈한 장궈타오가 그의 4방면군과 함께 사천성에서 해방구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다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당하면서(...) 마오쩌둥의 우위가 확실해졌고, 마오쩌둥은 섬서성 연안에 정착하였다. 2차 양광사변을 즈음해서 반장항일에서 핍장항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장제스에게 항일을 위해 화해하자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어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장쉐량은 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체포하고 국공합작을 강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여 중일전쟁 당시에는 어쨌든 느슨하게나마 연합해 있었다.
2.3. 국공내전[편집]
중일전쟁 말기인 1945년 초에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자, 공산당의 중심지였던 산시 및 화북일대가 무주공산이 되었고 더욱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동남부해안에 집결해있는 일본군과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틈을 노려 화북지역을 공산당이 재빠르게 장악하였다. 이후 공산당군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무려 120만 명의 군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본의 실수가 중국공산당에게 하늘의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소련은 8월 폭풍작전으로 만주지역을 발빠르게 장악하여 만주지역에 주둔한 관동군을 조선반도로 몰아내었다. 소련이 전후 만주를 중국공산당에게 양도한다는 약속을 하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어쨌든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며 중일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마무리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세력경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중재로 두 당 사이에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공산당 토벌을 목표로 선공을 가하면서 2차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중국공산당은 내전 초기 연전연패하면서 본거지인 옌안까지 함락당할 정도로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거느린 대군이 게릴라전으로 중원에서 국민당의 본거지인 난징-상하이 부근에서 북부로 가는 보급을 방해하면서 1947년 겨울에 만주에서 국민당의 50만 대군에게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여기에 장제스가 내전에 승리하기 위해 군비에 몰빵하는 재정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이 독이 되어 난징-상하이 지역의 경제가 붕괴하면서 이후 공산당은 기세를 몰아서 국민당을 몰아붙여서 1949년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대륙본토를 대부분 장악한다.[16]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공산당 창립 초창기에 있었던 코민테른 제1차 대회의 중국공산당 소속 참가자 13명 중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2명이었고, 4명은 혁명 활동 중 전사하고, 나머지 7명은 중국 국민당 혹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향하였다. 다만 2명은 중공 정부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복당이 허용되어 이후 대륙에서 관리로 일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중국국민당과 더불어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본토와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보내주었고, 좌우합작을 모색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부분적으로 협력관계를 맺기도 했다. 조선의용대처럼 이념과 상관없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은 경우도 많이 있었다.[17]
2.4. 1949년 이후[편집]
마오쩌둥 집권 당시에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의 대형 실책을 저질렀지만, 마오쩌둥 사망 이후 4인방을 제거하고 화궈펑까지 밀어내며 권력을 쥔 후임자 덩샤오핑 시대부턴 개방개혁 정책이 효과를 봐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18][19]
빈부격차, 부정부패, 환경오염 문제도 상당히 크고, 중국인들도 1당 독재를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등 정치에 관한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통치의 경직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그 불만을 교묘히 컨트롤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낮추고 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 시기에는 정부 비판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지만,[20] 그 이후부터는 언론의 비판은 눈감아주는 추세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어떠한 경우의 정부 비판도 금지되었지만, 후진타오-원자바오 시대 들어 점점 완화되기 시작해 현재는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하급 공무원 비리, 환경오염, 행정 부조리 등은 보도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배합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게다가 상기에 언급된 지방행정의 비리나 부조리, 환경오염 등은 중앙정치에 있어서도 손해가 되고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런 지방 부정의 불만이 쌓이다 보면 결국 각 지방에서 동시적으로 터지는 불만을 막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중앙 입장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문제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국이 이렇게 좀 유연해진 건 원자바오 등 나름 온건한 그 시절 중국 지배자들의 스타일 덕분도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시진핑 정권이 출범하면서 다시 악화되고 있다. 사실 악화라는 것도 좀 웃긴 게 마오쩌둥 심지어는 국부천대 이전 장제스 정권 시절에도 중국은 사실상 독재 시기로, 국민(인민)이 참정권을 가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이야 대만이 중화권에선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평가받지만,[21] 그건 장제스 독재 시절에 대항한 민주파들의 공이 크고, 국공내전 당시만 해도 사실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 놈이 그 놈으로 보일 여지는 다분했다.[22] 게다가 먼저 집권한 집권당의 특성상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부패정당이란 낙인이 찍혀버렸고, 당시만 해도 약자를 위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택동의 공산당은 일반인들이 혹할만한 정당이었다.
사실 중국공산당의 당내 역할만 보면 후진타오 집권 시기까지는 일본 자민당과 상당히 비슷한 1당 우위 속[23] 계파투쟁 측면도 있었다. 최고 지도자 1인 결정보다는 계파들 간의 합의나 원로 영향력이 더 큰 편이었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부터는 사실상 북한의 조선로동당과 유사하게 이 파벌 통치가 아닌 최고지도자 1인 중심 체제가 되었다. 즉, 2018년 3월 시진핑이 사실상 종신 독재를 선언하면서 저 돌아가면서 하는 파벌 통치는 끝났다는 것이다.
3. 중국공산당의 특징[편집]
3.1.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편집]
중국공산당을 단순한 중국의 집권여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데, 민주국가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집권여당이라 해도 단순히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을 넘어 야당과 구별되는 지위가 부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비유하면 중국 전역의 정치를 담당하는 기관으로[24] ,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 학계, 문화예술체육계, 종교계 등 민간의 영역을 포함한 모든 “법인”에 침투해 있다. 대학이나 기업 등에도 당 조직이 설치되어 있고 공산당원이 우대받는다. 공산당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직에 해당하는 성장이나 시장 등이 그 행정구역의 1인자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당직을 맡고 있는 성위원회나 시위원회의 당서기가 1인자고 성장이나 시장은 2인자에 불과하다. 성장이나 시장도 당내에서는 부서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를 들면 원칙적으로 광둥성 성장은 시정부의 책임자인 광저우 시장에게는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시당의 책임자로 법적으로 민간인인 광저우 시위서기와는 직접적으로 업무상 상하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광둥성 성위서기는 둘 모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25]
마찬가지로 국영기업이나 대학에서도 그 기업이나 학교의 당서기가 총경리(CEO)나 총장보다 상급자다. 물론 국무원처럼 공직을 맡고 있는 총리나 각 부의 부장이 당조서기를 겸임하는 경우 공직을 맡은 사람이 그 조직의 1인자가 되기도 하지만, 가끔씩 국무원 부장 등 몇몇 공직이 구색정당 출신 인사에게 할당될 때는 실질적 권한은 당조서기로 임명된 부부장이 장악하게 된다. 민간기업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기업 내 공산당원들의 조직인 당위원회가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거기다 공산당과의 관계가 출세나 사업확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 경영진은 당원일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당의 규율과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엽관제가 생산수단과 지식인 집단으로 확장되었다고 보면 될 듯.[26]
3.2. 파벌 경쟁[편집]
자세한 내용은 중국공산당의 파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능력주의와 꽌시의 공존[편집]
[27]
중국공산당의 당원 선발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다. 먼저 무신론자여야 하고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약칭 공청단)이라는 예비 조직에 들어간 뒤에 약 3년이 걸리는 능력 검증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거꾸로 실력있는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서 체제를 유지하고 당 내의 세대 교체를 하려고 하는 기능도 있다고. 실제 사례로 중국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등 점점 입당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다. 심지어 처음엔 차단되었던 자본가들도 많이 입당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는 '꽌시', 즉 인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정경유착도 상당히 심각하다. 더군다나 정부와 기업, 민간이 힘을 합쳐 그것을 덮기 위해 사실상 통제한다고 보면 된다.
공산당 최상층부에는 태자당이라 불리는 개국공신의 2세, 3세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공청단에서 제도적으로 고급 당료가 끊임없이 수혈되고 있기 때문에 태자당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자당과 공청단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상호견제 하기도 하고, 그 드넓은 중국의 모든 지역을 커버하고, 당이 모든 것을 지도한다는 방대한 공산당 당조직의 전부를[28] 특정 파벌이 전부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 일례로 현 시진핑 국가주석은 정통 태자당이고, 후진타오 전 주석은 공청단 출신이다.[29]
여기에 지방조직[30] 에서 실력을 검증받지 못하면, 최고위직까지 오르기가 힘들다. 아무리 부모 덕을 보더라도 20대 중반부터 시작하는 당조직 말단에서 30년 안에 4-5 단계의 직위를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고속 승진해야 정치국 상무위원(정원 7명)의 후보자로 들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정원 205명)에 진입할 수 있다. 실력을 입증하더라도 비리에 연루되는 등 구설에 오른다면 그것을 덮어줄 수 있는 최고위층 인맥의 적극적 비호가 있지 않는 이상 낙마할 수 있다. 장쩌민도 80년대 상하이에서 부정부패 문제로 날아갈 뻔 했다가 보이보[31] 의 구원으로 살아남았고 시진핑도 푸젠 시절 밀수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 등의 위기를 겪었다. 물론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 인사들이 출세에서 부모 덕을 본 것은 맞지만, 신중국 수립 초기부터 부총리급 이상의 직위를 지낸 인사의 자녀들은 수백 명에 달했으니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대단한 경쟁을 뚫어낸 것이 맞다. 결국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 덩샤오핑의 9자녀들 가운데서도 장관급까지 오른 자는 전국 정협 부주석 덩푸팡 뿐이며, 이 자리도 거의 장애인 할당으로 얻은 자리다.[32]
4. 구조[편집]
4.1.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비상설)[편집]
자세한 내용은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국공산당의 전당대회이다. 전 공산당원 중 3,000명 정도를 대표로 뽑아 5년에 1번 개최하고, 중앙위원회의 요청이나 전국 성급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때는 임시로 개최할 수 있다. 아래 위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차관급으로 예우한다.
4.2.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설)[편집]
자세한 내용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3.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편집]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당원의 부정부패, 비위행위를 감찰하는 기구[33] 로서 서기(1인), 부서기(8인), 상무위원 19인(서기와 부서기를 포함)으로 구성된다. 1993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감찰위원회와 동일 조직이다.
5. 역대 영도집체[편집]
중국공산당의 역대 지도부이다.
5.1. 역대 당수[편집]
중국에서는 중공중앙주요부책인(中共中央主要负责人)[34] 이라고 한다.
관련 문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5.1.1.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편집]
- 중앙국 서기(제1차 전국대표대회)
- 제1대: 천두슈 (1921. 7. 31. ~ 1922. 7. 23.)
-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제2~3차 전국대표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총서기(제4차 전국대표대회)
- 제1대: 천두슈 (1922. 7. 23. ~ 1925. 1. 11.)
- 중앙위원회 총서기(제5~6차 전국대표대회)
5.1.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편집]
관련 문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 중앙정치국 주석[36]
- 제5대: 마오쩌둥(1943~1956)
- 중앙위원회 주석[37][38] (1956-1982)
-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현재)
- 제7대: 후야오방 (1981.06.29. ~ 1987.01.16.)(제11-12차 전국대표대회)[덩]
- 대리: 자오쯔양 (1987.01.16. ~ 1987.11.01.)(제12차 전국대표대회)[덩]
- 제8대: 자오쯔양 (1987.11.02. ~ 1989.06.23.)(제13차 전국대표대회)[덩][39]
- 제9대: 장쩌민 (1989.06.24. ~ 2002.11.14.)(제13-15차 전국대표대회)
- 제10대: 후진타오 (2002.11.15. ~ 2012.11.14.)(제16-17차 전국대표대회)
- 제11대: 시진핑(2012.11.15. ~ 현재)(제18-20차 전국대표대회)
- 제7대: 후야오방 (1981.06.29. ~ 1987.01.16.)(제11-12차 전국대표대회)[덩]
5.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영도집체[편집]
- 천두슈(1921년 7월 31일~1927년 7월 12일)
- 장궈타오(1927년 7월 12일~1927년 8월 7일)
- 취추바이(1927년 8월 7일~1928년 7월 19일)
- 차이허썬(1928년 7월 19일~1929년 1월)
- 리리싼(1929년 1월~1929년 11월)
- 저우언라이(1929년 11월~1930년 3월)
- 리리싼(1930년 6월~1930년 9월)
- 취추바이(1930년 9월~1931년 1월)
- 왕밍(1931년 1월~1931년 9월 15일)
- 보구(1931년 9월 15일~1935년 2월 5일)
- 장원톈(1935년 1월 15일~1943년 3월 20일)
- 마오쩌둥(1943년 3월 20일~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3. 5대 서기(1945년~1966년)[편집]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중앙서기처가 최고의사결정기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서기처 주석이 당의 영도자가 되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중앙서기처 주석으로 실권을 행사하던 마오쩌둥을 위한 조치였다. 서기처 구성원은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런비스 5인에 천윈, 펑전 2인의 후보위원이었다. 1950년 런비스의 사망으로 천원이 자리를 채웠다. 1956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부활하면서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 주석에 나머지 4인은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이때 덩샤오핑이 중앙서기처 총서기가 되었고 1958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 5중전회에서 린뱌오가 중앙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런비스 → 천윈
5.4. 4인방(1966년~1976년)[편집]
문화대혁명으로 5대 서기가 무력화되고 마오쩌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마오쩌둥의 측근에 있던 4명이 권력을 행사한다. 마오의 부인이자 정치국 위원이었던 장칭(江青),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 왕훙원(王洪文),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张春桥), 문예비평가 겸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의 4인으로 문화대혁명의 피로감과 저우언라이의 사망으로 촉발된 제1차 천안문 사태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5.5. 중공 8대 원로 체제(1978년~1990년대 중반)[편집]
1976년 화궈펑이 권력을 잡으나 2년만에 덩샤오핑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고 1978년부터 덩샤오핑의 주도로 당 원로들의 집단 지도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정식 당직이 없었지만 원로로써 큰 권력을 행사하였고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40] 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다.
견해1: 덩샤오핑, 양상쿤, 천윈, 펑전, 보이보, 리셴녠, 덩잉차오, 왕전
견해2: 덩샤오핑, 양상쿤, 천윈, 펑전, 보이보, 시중쉰, 완리, 쑹런충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제12차 전국대표대회(1982년~1987년)
주임: 덩샤오핑
위원: 172명(1982년), 185명(1985년)
제13차 전국대표대회(1987년~1992년)
주임: 천윈
위원: 200명
5.6. 장-리-주 체제[편집]
5.6.1. 리펑 정부(제7, 8차 국무원)[편집]
5.6.2. 주룽지 정부(제9차 국무원)[편집]
5.7. 후-원 체제[편집]
5.7.1. 제1기 원자바오 내각(제10차 국무원)[편집]
5.7.2. 제2기 원자바오 내각(제11차 국무원)[편집]
5.8. 시-리커창 체제[편집]
5.8.1. 제1기 리커창 내각(제12차 국무원)[편집]
5.8.2. 제2기 리커창 내각(제13차 국무원)[편집]
5.9. 시-리창 체제[편집]
5.9.1. 시진핑 핵심 당 중앙위원회[편집]
6. 문제점[편집]
자세한 내용은 중국공산당/문제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관영언론[편집]
- 인민일보 (人民日报)
- 환구시보 (环球时报) / 글로벌타임스(Global Times)영문판 - 인민일보에서 출자해서 만들었지만, 반(半)관영이다. 꼭 인민일보나 중국공산당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적는 인민일보가 점잖은 논조를 표방한다면 환구시보는 그와 정반대로 상당히 국수적인 논조를 나타낸다.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신문은 아니지만 중국공산당 내 극성파들의 속내가 어떠한지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유용한 편.환구시보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41]
8. 여담[편집]
- 실제 창당일은 7월 23일이지만, 창당기념일은 1938년부터 7월 1일에 기념하고 있다. 국민당과 다른 군벌들과의 충돌로 초기 기록들을 망실하여 아무도 정확한 창당일을 모르게 된 탓에 마오쩌둥이 7월 1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나중에 학자들이 실제 창당일을 밝혀낸 이후에도 7월 1일을 창당기념일로 유지하고 있다.#[42]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100주년 기념식을 크게 치렀는데, 학생대표 4인 중 1명으로 선발되어 충성맹세를 선창한 펑린(馮琳)이라는 21세의 여대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9년 10월 저장성 자싱시에서 태어난 펑린(현재 25세)은 2018년 중국전매대학 아나운서ㆍ앵커 전공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충성맹세를 선창했다. 또한 동년 9월의 전매대학 입학식에서는 재학생 대표로 연단에 올라 “나는 천안문광장 근거리에서 시진핑 주석의 연설을 학습하고 경청할 수 있었고, 무한한 영광을 느꼈습니다.”, “나는 중국 인민의 아나운서, 중국공산당의 아나운서입니다. 나는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승리를 향해 행진하는 중국 인민의 목소리, 중국공산당의 정정당당한 진리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라고 연설했다. 펑린의 사진과 영상은 그녀의 미모로 인해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화제를 모았고, 그녀의 개인 웨이보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중국인들, 특히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부쩍 심해진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중화사상과 애국주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 공산당에 의해 중국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최초로 참전한 전쟁이 6.25 전쟁이다. 신생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아닌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실질적인 한반도 반 통일 세력이다. 다만 이때 중공의 참전은 유엔군 정확히는 유엔군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당시 미군 사령부의 오판도 있었는데, 당시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공 수뇌부는 38선 남쪽의 유엔군 활동은 보장해주지만, 북쪽으로 넘어오는 순간[43] 개입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는데, 이 때 중공의 전력을 우습게 본 맥아더를 비롯한 수뇌부는 진격을 계속했고 결과는 알다시피. 사실 당시 남측 수뇌부의 더 핵심적인 문제는 중공 전력의 과소평가에 따른 전세 역전 후 대안 전략 부재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때 최강 미군을 막았다는 사실 때문에 청 말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취급받던 중국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올라간 측면은 있다. 그래서 중공도 미국과 마찰이 있을 때면 이 사건을 거론하며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띄우고 있는 것.
- 2010년대 들어 공자를 부쩍 띄우고 있다.# 캐나다 출신으로 칭화대학 교수를 역임한 대니얼 A. 벨 같은 친중공 정치학자는 심지어 중국공산당의 독재가 공자의 사상에 입각한 '동아시아판 철인정치'라며, 서구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규모 공동체라면 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나 중국처럼 수억 명이 사는 대국에선 이른바 신유가식 현능정치가 최선이라는 것.[44] 그는 20세기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경쟁자가 나치 독일의 나치즘,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소련의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였기 때문에 중국식 공산주의가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제도라고 볼 수 있었지만 21세기에도 이 제도가 여전히 그런지는 회의감을 느낀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알아서 판단하자. 좋은 제도가 맞는지에 대한 반론은 이 문서에도 많은데다가 원류 파시즘도 덮어놓고 민족만 외치는 이념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면 이론이 어떻든간에 실전에 적용될 때가 문제. 다 떠나서 이 양반은 그래도 나름 현 인류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자기 딴엔 고심하는 것일 테지만 현 중공이 이런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것 같진 않다. 자기들 집권에 유리한 주장은 뽑아먹고 아니다 싶은 주장을 하면 가차없이 토사구팽시킬 게 뻔하니 말이다.
- 도올 김용옥은 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당독재 개념과는 좀 다르고, 워낙 크고 체계, 토론 제도가 잘 되어 있고, 각 계파별로 서로 견제를 해서, 오히려 다당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고 했다.[45][46] 그러나 후진타오의 퇴임시 부정부패가 문제라는 발언, 중국에서 원로한테 훈수 받는 제도,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등 호랑이 4인방 같은 사례를 들면서 비리가 많다는 걸 말하기는 했다.
- 독재 국가지만, 의외라면 의외로 중국에서도 시위는 한다. 특히 중공을 지지하던 상당수 젊은 세대들이 코로나 시국을 거치며 봉쇄 정책 등에 꽤나 불만이 쌓인 것으로 보이는데, 때문에 중공 당국도 고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 한족이 주류를 이루는 중국이지만, 많은 소수민족을 품어야 하는 중공의 특성상 대한족주의는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론 일단 내세우고 싶어도 내세울 수가 없다. 당장 마오쩌둥도 집권 당시 당내에 퍼져있던 대한족주의를 경계하며 프롤레타리아 민족정책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덕분인지 그 엄혹한 시절에도 의외로 소수민족들은 한족에 비해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독립/분리운동하던 세력한테는 가차없었지만.
- 2022년 1월부터 중국공산당 해산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9. 관련 문서[편집]
- 동방홍
-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
- 우마오당
-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 중국공산당 규약
- 중국공산당의 파벌
- 중국 마오쩌둥주의 공산당
- 죽의 장막
- 초한전
- 흑묘백묘론
- 화웨이, ZTE - 사실상 중국공산당 산하기업이다.
- 중국 인민해방군: 형식상 중국의 국군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군대이다.
- 파이브 아이즈 -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9.1. 민국 시기[편집]
- 신청년(1921~1927)[48]
- 1차 국공합작(1924)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1925)
- 중산함 사건(1926)
-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1927)
- 난징사건(1927)
- 4.12 상하이 쿠데타(1927)
- 4.15 광저우 쿠데타(1927)
- 마일사변(1927)
- 국공결렬(1927)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1927)
- 난창 폭동(1927)
- 8.7 긴급회의(1927)
- 추수폭동(1927)
- 정강산 투쟁(1927~1929)
- 창사 폭동(1930)
- 부전사변(1930~1932)
- 초공작전
- 만주사변(1931)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
- 열하사변(1933)
- 복건사변(1933)
- 대장정(1934~1936)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
- 서안 사건(1936)
- 2차 국공합작(1936)
- 중일전쟁(1937~1945)
- 쌍십협정
- 국공내전(1946~1949)
9.2. 건국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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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공산당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이다.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보는 좌파 단체들에서도 CPC를 주로 사용하는 편. 다만 전 세계적으론 CCP가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CPC를 선호하는 쪽은 국제주의에 따라 중국공산당을 중국의 공산당(Chinese Communist Party)이 아니라 중국에 있는 공산당(Communist Party of China)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딧 r/socialism에서 CCP라고 쓰면 친절하게 CPC로 수정하도록 권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2] 중국 현지에서 쓰이는 명칭. 다른 당이 사실상 없으며 중화인민공화국 = 중국공산당이라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민주당파 정당들이 존재해서 법정 야당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반우파 투쟁 이후 세력을 크게 잃어 제대로 된 야당의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다. 이렇게 불리우는 또 다른 정당으로는 북한의 조선로동당이 있다.[3] 창당 기념은 7월 1일에 한다. 여담 문단 참조.[4] 중국공산당, 중국 정부 및 중국 인민해방군의 표어로, 마오쩌둥의 기고에서 유래하여 슬로건으로 널리 쓰인다. / (번역 인용) 시진핑, "당이 인재를 관리하는 원칙을 견지하고 로동을 존중하고 지식을 존중하며 인재를 존중하고 창조를 존중하는 방침을 견지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효과적인 인재정책을 실행하여 광범한 인재들이 당을 사랑하고 조국에 보답하고 헌신적으로 맡은 바 사업에 최선을 다하며 인민을 위해 복무하도록 인도하여야 합니다."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의 보고 한국어판」. 2022년 10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5] 일명 시진핑 사상이라 불리기도 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자칭한다. 실체가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6] 다만 중국공산당의 혁명 이론에 따르면 중국은 공산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 여정에 있으며, 실제로 공산주의에 도달했다고 선포한 적은 없다. 이는 소련 공산당과는 다른 부분이다.[7] 개혁개방 이후 사실상 마오주의를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계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강령에는 공식적으로 명시하고 있다.[8] 공식적으로는 극좌 정당으로 분류하나 현재 중국공산당이 타국의 공산당과 비슷한 극좌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애초에 현 중국은 자본주의 체제에 많이 물든 상태이며(물론 사회, 정치, 제도에서 사회주의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상태다.), 마오쩌둥 시기 실시되었던 대학 무료 교육이나 노동자 무상 아파트 지급 등도 실시하지 않고 있다. (참고로 이때 무상 아파트를 지급받은 이른바 따마(아줌마) 세대는 개방개혁 이후 부동산 폭등의 영향으로 졸부가 된 경우도 상당했다. 이는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좌절감과 불만을 주기도 한다. 젊은 세대의 극단적 애국주의도 이런 좌절감의 발로로 보기도 한다.) 결국 개방개혁 이후 중공의 경제 노선은 공산당내 우파(중도파) 세력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실용주의 노선은 다른 나라 좌우 정당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니, 결국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 구분되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이 문제.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현재 중국공산당의 정책 방향은 현상유지를 전제로 국력 강화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노리는 것은 당연히 현 권력층의 권력 유지.[9] 실질적으로 '중국식 신보수주의'(또는 신권위주의) 우익 또는 심지어 극우적 국수주의 정당에 가깝다는 평도 많다. 특히 장쩌민 사상(=삼개대표사상), 후진타오 사상(=과학적 발전관), 시진핑 사상을 설계하는 등 개혁개방 이후 "중국공산당의 재갈량"이라고 불리는 왕후닝은 본인 입으로 신권위주의자/신보수주의자라고 했다. 게다가 홍콩/마카오/대만에서 평균적으로 우파 정당이 좌파 정당보다 중공에 우호적이다.[10] 총서기로 취임하였다.[11] 1988년 이전까지 한국에선 중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일개 중국공산당 당국 혹은 정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당시 수교 중이던 중화민국 때문이었다. 한국-대만 관계 문서 참조.[12]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 정부와 중국공산당은 별개의 조직이다. 중국 국내법상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라고 불리며, 이 국무원이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받는다. 즉, 당이 국가기관보다 상위 기관이며, 법의 서열도 헌법보다 당헌이 우선된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이 정부의 역할도 하는 이중정부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체제를 당국가 체제라고 한다.[13] 레닌은 국가를 세금을 매기고 사람을 징집하는 착취의 수단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 이상 사회가 이뤄지면 국가도 없어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나라가 없으면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 맞설 수 없으므로, 과도기적으로 임시기구인 공산주의 국가가 필요하며 이 나라는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이것이 당국가 체제이다[14] 중국 인구의 약 6.4%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정당이다. 1위는 당원 수가 무려 1억명 이상인 인도의 인도 인민당. 다만 중국공산당은 일당 독재로 가입수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음에도 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 부질없는 비교긴 하다. 유령 당원이 아닌 진성 당원 수가 저정도 된다는 소리라.. 참고로 당원 규모 세계 3위와 4위는 미국 민주당과 미국 공화당이다.[출처] 서성, <한 권으로 읽는 중국 문화>, 넥서스, 2005, p38-40.[15] 이 중 저우포하이, 천궁보 등은 탈당하여 국민당에 합류했다.[16] 윈난성 등 일부 지역의 국민당군은 계속 저항했지만, 외부에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1950년대 초반에 대부분 공산당군에 토벌된다.[17] 다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그렇게 적극적인 후원자는 아니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정부가 주요 후원자였기에, 그와 대립하는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 이후부턴 사실상 적 비슷했다. 물론 임시정부 세력 자체가 미약하기도 하고, 일본 제국 상대하기도 바빠서 직접적으로 충돌하진 않았다.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도 저우언라이 같은 공산당내 온건파들과는 교류가 있었으나, 큰 접점까지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18] 실제로 바이두에 "왜 중국이 일당제여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공산당이 모든 걸 다 해주는데 다당제가 왜 필요하냐"는 답변이 올라온 사례가 있다. 물론 현대에도 좌우 가리지 않고 독재 추종 세력들이 자주 떠벌리는 궤변으로, 이런 댓글만 조직적으로 다는 공산당 관련자들도 있다.[19] 그래서인지 미국의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020년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같은 당 출신 전직 대통령 닉슨의 정책이, 변화하지 않는 중공의 집권만 강화시켜줬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미국의 최대 정적은 소련이었으니 그 소련의 최대 우방인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며 소련을 고립시키는건 어찌보면 닉슨 시대에는 현명한 것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후진국이었던 중국이 이후 급격히 성장하면서 오늘날엔 러시아를 제치고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20] 쌍백운동 시절에 잠깐 허용해준 적은 있었다.[21] 대만(중화민국)을 제외하면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홍콩, 마카오도 사실상 그 영향력 안에 놓여있고, 화교가 많은 싱가포르도 돈 많은 북한이라는 비아냥에서 알 수 있듯 경찰국가 성격이 강하다.[22] 게다가 당시 국민당 당 조직도 소련 공산당의 그것과 비슷하여 중공과 큰 차이도 없었다.[23] 중국도 엄연히 야당이 존재하며 현 단위에선 직접선거도 한다. 관제야당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24] 안토니오 그람시의 해석에 따르면 공산당은 현대의 군주이다.[25] 물론 현실에서는 공직자 간 상하관계와 경력의 차이가 있고 실제로는 광둥성 성장이 공산당 광둥성위 부서기를 겸임하는 만큼 그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26] 이런 당의 영도 매커니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글. # 사실 공기업의 경우 한국에서도 낙하산 인사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나타나는 등 엽관주의가 일부 반영되어 있다.[27] 중국공산당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28] 장관급 공직자만 400명에 달하는 나라다. 직급 인플레가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중국은 인구 수천 만에 달하는 일급행정구만 31개에 당이 사법부와 입법부는 물론이고 경제와 문화, 과학 등 모든 분야를 영도하기 때문에 당과 정부조직이 거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중에서도 요직과 한직이 갈리지만, 한국에서 의전서열만 높고 실제로는 명예직일 뿐인 자리들과는 달리 이런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고위관료들 사이에서 밀릴 뿐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권력자이다.[29] 후진타오는 공청단 후배인 리커창을 차기 대권후보로 밀었으나,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견제 때문에 결국 시진핑 국가주석, 리커창 국무원 총리 체제로 결론이 났다.[30] 중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르려면 지방행정 실무경험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시진핑만 하더라도 허베이, 푸젠, 저장성 등을 거쳤다. 이렇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주재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오를 수 있는 직위가 장관급이 한계이다. 학자 출신으로 당 중앙정책실에만 20년을 있었던 왕후닝이 이례적으로 상무위원 자리까지 오르긴 했지만 이런 사례는 극히 예외이며, 당중앙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방 조직을 거쳐야 한다.[31] 보시라이의 아버지[32]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보다 더 끗발좋았던 아버지를 둔 보시라이(개국공신 보이보의 아들)는 7인에 뽑히는 것이 유력했으나, 2012년에 비리로 몰락했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시진핑의 집권을 도왔는데, 태자당 내 유력 주자 한 명이 날라가면서 당 중앙위의 태자당의 표가 분산되지 않고 시진핑으로 집결된 것이다[33] 공무원의 부정부패 및 비위행위는 국가감찰위원회에서 감찰하며, 두 기관은 서로 인적구성이 같다.[34] 부책인은 중국어로 책임자이다. 책임(责)을 부담(负)하는 사람(人)이란 뜻.[35] 실권은 마오쩌둥이 쥐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대장정 문서의 쭌이회의 참조[36]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중앙정치국이 최고 기관이 되었고 중앙정치국 주석이 당수 역할을 함.[37] 중앙위원회가 부활하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신설되었다.[38] 당 주석이라고 했으며 국가원수 직책인 국가주석과는 다른 직책이다. 국가주석은 공직이며 본 직책은 당직이다. [덩] A B C 실권은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이자,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었다.[39] 천안문 사태로 내려온다.[40]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덩샤오핑,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덩샤오핑, 천윈이 이 위원회의 주임을 맡던 시절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 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즉 정식적인 국가주석은 따로있지만 주임을 맡던 덩샤오핑이나 천윈이 뒤에서 그 역할을 하고 당을 총관리하는 총서기도 후야오방 같이 따로 있지만 실제적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 실무 책임인 위원회의 상무부주임 보이보가 이 역할을 한 것).[41] 쉽게 말하자면,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그대로 말해준다면, 환구시보는 중국공산당이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나 국내, 국제적인 반발을 의식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비교적 자극적인 논조로 말해준다고 보면 된다.[42] 이와 유사한 게 크리스마스이다. 성탄절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념일이며, 예수의 생일이 아니다. 예수의 정확한 생일은 아무도 모른다.[43] 국군만 올라오는 건 민족 간 내전으로 보고 참전하지 않겠다고 했다. 참고로 당시 국군의 전력을 생각하면 물자 지원을 받는다 쳐도 단독으로 북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을 지는 논쟁의 대상. 인구야 당시에도 대한민국이 거의 2배 더 많긴 했지만 북한은 그런 열세를 뒤집고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려왔다. 물론 중공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고 오판하다 치명적 타격을 입은 지휘부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44] 조직만 보면 국제연합 같은 범국가적 기구와 유사하긴 하다.[45] 실제로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경찰이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의 경찰과 충돌하는 일이 번번찮게 일어나는 면모도 보인다. 물론 일당제 내 계파 간의 견제는 다당제만큼의 견제 특히 지속적인 견제는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다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 사실상 양당제 등의 문제가 있어서 계속 제도적 수정, 보완이 이뤄지는 중.[46] 실제 도올은 중공의 일당 독재를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도올은 진보 성향 학자라고 알려져있지만, 일반적인 진보 학자들과는 다르게 "민족 정기를 위해 징병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발언도 하는 등 꽤나 보수적인 견해도 비추는 학자이다.) 하지만 "시진핑 이후 1인독재가 되어버렸다"며 시진핑에 대해선 굉장히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친 바 있다.[47] 김재원: 중국은 우리 우방국이에요. 적대국가 적성국가인 북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특히 우리 국민의힘과 중국 공산당은 자매결연을 맺어서 20년 이상 지금 우당으로서 활동하고 있어요. 중국 공산당과...(진행자가 중간에 가로챔)[48] 잡지 자체는 1915년부터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