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의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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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 위치한 박상진 의사 생가
송정 박상진의사 생가
松亭朴尙鎭義士生家 | Songjeong Park Sangjin Brithplace


주소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355
개원연도2007년
분류역사공원
개방 기간매주 수요일~일요일
개방 시간09:30-17:30
이용료무료
소유자울산광역시 북구
링크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오는 길
3.1. 주차장
3.2. 버스
4. 안내도 및 시설
4.1. 송애정사(松厓精舍)
4.2. 봉산정(鳳山亭)
4.3. 양정재(養正齋)
4.4. 기념동상마당
4.5. 고헌메모리얼언덕
4.6. 박상진의사 생가 내부
4.7. 화장실
5. 박상진의사생가 전시관
6. 기타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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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박상진 의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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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박상진 의사 생가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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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박상진 의사 생가 내의 박상진의사 생가 전시관

송정 박상진 의사 생가 소개 영상
박상진 의사 생가(朴尙鎭義士生家)는 울산광역시 북구에 있는 독립유공자(독립 운동가)로 활약하던 고헌 박상진(1884∼1921)이 태어나고 자란 고택이다.


2. 상세[편집]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 의사가 살았던 곳이다. 대지주였던 박상진 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이 몰락하고 이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 정비 사업을 완료하였다.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이다.

박상진 의사는 1902년 허위에게 한학을 배운 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했다. 그 후 독립운동에 참여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섰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8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오는 길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921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국권 회복과 항일투쟁에 앞장선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상진 의사 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밀양박씨 송정문중의 소유였던 서당건물 봉산정사, 송애정사, 양정재를 이전 복원하였으며 박상진의사 생가 전시관을 세웠다. 독립투사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방문하기에 뜻깊은 곳이다.


3. 오는 길[편집]



3.1. 주차장[편집]


파일:박상진의사생가 주차장.jpg
송정 박상진 의사 생가 주차장
모든 주차장은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3.2. 버스[편집]


  • 박상진의사 송정 역사공원
(40383), (40360)


4. 안내도 및 시설[편집]



4.1. 송애정사(松厓精舍)[편집]


파일:송애정사..jpg
송애정사

송애정사는 1928년 인재 양성을 위해 사재로 지은 서당이다. 고헌 박상진 의사의 종증조부인 박사은이 짓고, 그의 종제 박사렴이 경리하였다.
처음 2간을 정침으로 삼았다가 1간 방의 동쪽에 남쪽으로 방과 마루 1간씩을 이어 학생들이 공부하고 북쪽 방 1간은 수직소로 삼았다.
윗방 동쪽이 협소해 다시 연목을 이어 중형(中形)을 비우니 집 전체가 마치 정(丁)자와 같은 아담한 규모가 되었다.
1간[1] 부엌에 아궁이가 3개인 독특한 구조이다. 이곳에서 1926년 농소보통학교가 개교했다. 처음에는 2학급 규모였다. 그이전 경신강습소라는 미인가 학교가 먼저 개설되었지만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농소보통학교는 처음 4년제였으나 1928년에 6년제가 되었다. 박상진 의사 유족이 1931년 5월 고향으로 돌아와 봉산정에서 살다가 1935년 농소보통학교가 호계로 옮긴 후 이곳에서 1957년 부산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4.2. 봉산정(鳳山亭)[편집]


파일:봉산정.jpg
봉산정

송정마을은 1600년대부터 기록에 보인다. 이곳에 세거하던 세칭 송정박씨는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 송정문중이다.
입향조 박창우는 1664년 영천에서 신답으로 이사했다. 1666년 소과에 합격한 후 서울에서 성균생원으로 지내다가 1684년 돌아와 화산에 괴천정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구강서원 원장을 지낸 세현(世衒)이 장남이다. 차남 성균생원 세도는 차일과 신답에서 살았다.
박씨들이 송정에 자리 잡은 것은 1700년대 말이나 1800년대 초로 추정된다. 박세도의 증손 중 성창과 사은, 사유 3부자가 송정으로 이거 했다. 백여 년이 지나 후손들이 선조(세도)의 강학지소이던 봉산정사(鳳山精舍)가 퇴락해 없어졌음을 안타깝게 여겨 1906년에 다시 지었다.
원주에 팔작지붕을 얹은 5간 겹집의 건물은 구 한국군 해체 당시 병영에 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동헌의 목재로 지었다고 전한다. 이때 허방산이 상량문을 지었다. 또 후손으로 유학자인 규진이 짓고 고헌 박상진 의사의 생부인 규장각 부제학 박시규가 쓴 상량문도 현전한다.


4.3. 양정재(養正齋)[편집]


파일:양정재.jpg
양정재

양정재는 박시준의 강학지소이자 그가 만년에 거처했던 곳이다. 박시준은 자가 운경이고 호는 양정재다.
따라서 양정재는 당호(堂號)이자 박시준의 아호(雅號)이기도 하다. 그는 고헌 박상진 의사의 종숙이고, 그의 아들이 마지막 세대 유학자인 창릉 박용진이다. 1920년대에 지어진 이 정자는 세련되고 격식을 갖춘 정(丁)자형 건물인데, 영남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기 때문에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당시 박시준이 서울에 사람을 보내 모본(模本)을 그려 와서 지었다고 전한다. 정자 앞에 있는 연당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품고 본체와 서로 조화를 이루며 격조 높은 양반 문화를 말해 준다.


4.4. 기념동상마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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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박상진의사 생가 내의 박상진의사 생가 공원내의 박상진의사 동상

이 공원은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공간이며 지역 주민들의 지역사회 참여를 독려하며 역사와 문화, 물화재에 대한 애호의식을 고취하는 문화심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광복회에 대한 설명을 비롯해 광복회 포고문, 전별시, 사형판결문, 사형집행 신문보도, 절명시[2], 유시, 순국지, 묘지 등의 박상진 의사와 관련된 기록과 사진들이 박제된 돌담전시가 이루어져 있다.
박상진의사 동상 양쪽으로 세금마차 탈취사건과 광복회, 압송되는 장면에 대한 그림들을 금판에 입체감 있게 그려놓았으며 광복회는 어떤 조직인가를 나타내는 광복회 조직, 강령과 연혁 그리고 광복회원들을 새겨놓은 기념비들도 대칭을 이루고 있다.


4.5. 고헌메모리얼언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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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메모리얼언덕에는 박상진 의사의 업적 및 박상진 의사와 관련된 광복회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4.6. 박상진의사 생가 내부[편집]




4.7. 화장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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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은 박상진의사생가 바로 옆에 있으며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이용가능하다


5. 박상진의사생가 전시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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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전시관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박상진의사 연표이다.

박상진의사는 조선 말기인 1884년 12월 7일 울산군 농소면 송정리(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승지 박시규와 여강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0여 일 만에 백부의 양자가 되고, 1898년 그의 나이 15세에 월성최씨 영백과 혼인했다.

14세 당시 학덕이 높은 왕산 허위(애국계몽 사상가, 의병장)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1902년 상경하여 정치와 병학을 배우며, 명사, 문객들과 교제하며 국제 정세를 습득하였다. 1906년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었다.

1908년 신돌석이 일제의 교활한 농간에 빠져 순국하고, 스승 허위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이를 지켜본 박상진은 스승의 시긴을 수습한 후, 홍성에서 상경한 김좌진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는다. 이는 뒷날 김좌진이 광복회 부사령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1909년 '양정의숙 법률경제과'를 졸업한 박상진은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10년 판사 등용 시험에 합격해 평양 지원에 발령까지 받았으나 결국 부임하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 상해등지로 여행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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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 박상진 의사가 추구했던 독립운동의 방향은 단순한 의혈 투쟁이나 해외 독립 단체의 지원에 머물고자 한 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오히려 신민회에서 추진하다 중단됐던 독립준비론의 실질적인 실천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숙적 일본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독립전쟁론이었다.
다만 현실적인 대안으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끼리 역할 분담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독립 전쟁을 위한 과정이였기에 그는 목숨을 걸어가며, 독립운동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국내 자금 조달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는 마치 방탄과도 같았던 계몽주의 노선과 무력 투쟁 노선의 결합을 이룰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1915년 광복회 결성은 숙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담보했던 목숨까지도 결국은
바쳐야 했던 성스러운 운명이었고, 필연이었다.


6. 기타[편집]



북울산역(박상진 생가)
https://namu.wiki/w/%EB%B6%81%EC%9A%B8%EC%82%B0%EC%97%AD

박상진 의사의 호는 고헌이다.
박상진 의사의 호를 따서 송정중학교에서 고헌중학교로 바뀌었다.
https://namu.wiki/w/%EA%B3%A0%ED%97%8C%EC%A4%91%ED%95%99%EA%B5%90

사실 박상진의사의 생가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다. 현재의 박상진의사 생가는 자신의 큰 아버지인 박시룡의 집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박시규가 자신의 형인 박시룡에게 박상진의사를 입양 시킴으로써 박상진의사가 자라온 집이 현재의 박상진의사생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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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間)은 동아시아의 도량형인 척근법에서 쓰는 단위이다. 보(步)로도 쓴다. 일본제국 및 대한제국에서 제정한 도량형에 따라 미터법으로 환산할 수 있다. 간이 길이로 쓰이면, 1간은 여섯 자이며, 이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60/33 미터로서 약 1.82 미터 또는 약 181.82 센티미터이다. 또한 360보(步)는 1리(里)인데, 이때 1보가 1간이다. 간이 넓이로 쓰이면, 넓이 1간은 길이 1간(間)의 제곱, 곧 6자 평방이다. 이는 정확히 1평(坪)이다.[2] 순국하기 전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나,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 청산과 녹수가 비웃는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