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찬(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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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정찬
朴貞贊, 朴貞燦
출생1891년 12월 9일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입리
사망1973년 5월 5일
전라북도 익산시
묘소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직업독립운동가
상훈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정찬은 1891년 12월 9일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입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6일 평원군 한천시장에서 최한신(崔漢信)·계재곤(桂在坤)·서형묵 등과 함께 군중들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펴다가 붙잡혀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한 그는 고향에서 한천청년단(漢川靑年團)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붙잡혔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후 청년단은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특파된 김석황·임승업(林承業) 등을 영입하여 의용단(義勇團)의 국내 지부로 조직을 개편하였는데 그는 동단의 군무대리(軍務代理)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20년 6월 한천면의 자산가 최윤복(崔允福)으로부터 거액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자금 모연에 힘썼으며 의용단원들의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폭파의거를 도왔다.

그러던 중 1920년 9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로를 치렀다. 그후 그는 1926년 6월 조창준(趙昌俊)·김문수(金文洙)·허상옥(許相玉)[1]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28년 3월에는 함북 웅기 기독교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국가의 흥망은 단결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붙잡혀 1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1944년 11월에는 백기환·정찬조 등과 함께 일본 군사시설과 신사(神社)에 방화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8.15 광복 후 익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3년 5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정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허상옥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