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조(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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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찬조.jpg
출생
1895년 4월 24일
평안도 평양부 융흥면 관후동
(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종로동)
사망
1973년 12월 2일
서울특별시
이명
정찬도(鄭燦道)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정찬조는 1895년 4월 24일 평안도 평양부 융흥면 관후동(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3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유하현 대황구(大荒溝)[1]에서 이상룡이 조직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였으며, 1920년 1월 의용군 경리원 겸 소모원에 임명되어 국내에 특파되었다.

이후 평양으로 잠입한 그는 비밀결사 모험단(冒險團)을 조직하고 평남도청, 평양부청, 경찰서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이근수(李根洙)·강성리·백기환·이학근(李學根)·김기욱(金基旭)·최일명(崔日明) 등과 함께 거사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거사 전일인 동년 5월 9일 새벽에 일경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평양서에서 취조를 받던 중 2층에서 격투 끝에 뛰어내려 시가지로 피신하였으나, 수백명이 동원된 포위망 속에서 결국 하수도 안에서 다시 잡히고 말았다. 당시의 신문에서는 '상해 임시정부 특파원 정비장(鄭飛將)체포'라고 대서특필로 보도하였다.

이후 1920년 10월 2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10년 언도를 받고 평양 감옥에서 1년간 복역한 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1921년 1월 29일 옥중에서 3.1절 기념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로 인해 무수한 매를 맞고 고문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출옥 후 서울에서 지내던 그는 1944년 11월 백기환, 박정찬 등과 함께 일본 군사시설과 신사(神社)에 방화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8.15 광복 후 서울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3년 12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찬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74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通化)시 류허(柳河)현 따황거우(大荒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