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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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0년 8월 5일
평안도 선천군 신미면 삼봉리[1]
(현 평안북도 선천군 삼봉리)
사망
1956년 12월 9일
서울특별시
본관
죽산 박씨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치조는 1890년 8월 5일 평안북도 선천군 신미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선천군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19년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1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 일행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관전현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을 암살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제1대는 서울, 제2대는 평양,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방면으로 파견되었으며, 제3대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 일행은 박치의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선천경찰서 등의 폭파계획을 세웠다. 이때 박치조도 계획에 동참했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결사대원들이 다시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사람은 선천군청으로 가서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투탄하였으나 불발하였고, 박치의는 9월 1일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로 가서 이학필은 밖에서 망을 보게 하고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수종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였던 그를 비롯하여 20여명의 동지들이 동년 9월 7일까지 속속 체포되었으며, 그는 1921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56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치조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죽산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병익·박천규·박치의·박만채도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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