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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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상으로 중세 후기인 14-15세기, 공간상으로 주요 참전국인 잉글랜드 왕국프랑스 왕국과 그들의 동맹국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권장함.
  • 입문자에게 도움이 되는 키워드를 나열하는 느낌으로 간략하게 서술할 것을 권장함.
  •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언급되지 않은 경우 대략 백년전쟁 1기, 잉글랜드 남부와 프랑스 북부를 기준으로 한다.

1. 일상생활
1.1. 시간 개념
1.2. 화폐 단위
1.3. 민간 수입
1.4. 의복
1.5. 경칭
1.6. 예법과 신체언어
2. 생애 주기
2.1. 미성년기
2.2. 성년기
3. 일년 주기
3.1. 1분기 (11월~1월)
3.2. 2분기 (2월~4월)
3.3. 3분기 (5월~6월)
3.4. 4분기 (7월~10월)
4. 중앙 정치
4.1. 정부 부서
4.2. 대의기구
4.3. 정부 수입
5. 지방 정치
5.1. 지방 행정기구와 공동체
6. 군사
6.1. 전비
6.2. 군사 모집
6.3. 보급
6.4. 무장
6.5. 첩보
7. 기타



1. 일상생활[편집]



1.1. 시간 개념[편집]


법정 기록이나 연대기에서 가장 흔한 표현으로, 라틴어 사용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었다. 예를 들어 "주님의 해 1321년 9월 26일".

  • 국왕의 해 regnal year
가장 대중적인 표현. 예를 들어 1388년은 "리처드 2세 즉위 11년"이다.

  • 성무일도 8정시과 officium divinum
조과(matins) 오전 2시경
찬과(lauds) 오전 5-6시경
1시과(prime) 오전 7시경 (해 뜨기 직전)
3시과(terce) 오전 9시경
6시과(sext) 정오
9시과(nones) 오후 2-3시경
만과(vespers) 오후 5-6시경
종과(compline) 오후 7시경.

  • 시계의 시간
24시간. 14세기에 기계식 시계가 도입되면서 대중화되었다.

  • ○○(分)
15세기 중반에 기계식 시계가 더 정교해지면서 대중화되었다.

  • ○○마일을 걸어갈 시간
가장 대중적인 표현.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방식.

  • 주기도문을 ○○번 외울 시간
주로 교양인들이 쓰는 품위 있는 표현.

1.2. 화폐 단위[편집]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파운드 pound sterling
1파운드는 잉글랜드 페니 은화 240개의 가치이며, 순은 1파운드와 동일한 가치다.
하지만 1489년 헨리 7세가 발행한 소버린 금화 이전에 실제 1파운드 가치의 화폐는 없었다.
프랑스와 비교하면 대략 투르 리브르나 프랑 금화의 5-6배, 파리 리브르의 4배 가치다. 에퀴 금화는 1337년 처음 주조되었을 때는 약 4/5투르리브르이자 잉글랜드 페니 은화 48개, 즉 1/5파운드 가치였으나 장 왕 치세에는 34페니, 즉 1/7파운드까지 떨어졌다.

  • 마르크 mark
13실링 4펜스. 즉 잉글랜드 페니 은화 160개의 가치이며, 파운드의 2/3 가치다.

  • 노블 noble
6실링 8펜스. 즉 잉글랜드 페니 은화 80개의 가치이며, 1/3파운드이자 1/2마르크다.
잉글랜드의 금화로 1351년 에드워드 3세가 발행했다. 이후에 '하프노블'(40펜스)과 '쿼터노블'(20펜스) 금화도 만들어진다.

  • 플로린 florin
6실링. 즉 페니 은화 72개 가치였다.
1344년 에드워드 3세가 피렌체 피오리노 금화를 모방해 만든 금화. 가치 조정에 실패하고 노블 금화로 빠르게 대체된다.
더블레오파드라고도 불린다. '하프플로린(레오파드)'과 '쿼터플로린(헬름)' 금화도 있었다.

  • 실링 shilling
페니 은화 12개의 가치. 실제 실링 은화는 없다.

  • 그로트 groat
4펜스 가치의 은화.

  • 페니 penny
가장 기본적인 은화.

  • 하프페니 halfpenny
1/2페니 은화.

  • 파딩 farthing
1/4페니 은화.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프랑 franc
1투르 리브르. 즉 20수이자 240드니에. 대략 잉글랜드 페니 은화 48개 또는 1/5파운드 가치다.
1360년에서 1380년 사이 발행된 금화.

  • 에퀴 ecu
1337년 처음 주조되었을 때는 약 4/5투르리브르로 대략 1/5파운드 가치였으나 장 왕 치세에는 1/7파운드까지 떨어졌다.
백년전쟁 시작과 동시에 도입된 금화.

  • 그로 gros
1수이자 12드니에이자 잉글랜드 페니 은화 2개 가치.

  • 드니에 denier
가장 기본적인 은화. 대략 잉글랜드 페니 은화의 1/5 가치


1.3. 민간 수입[편집]


  • 잉글랜드 기사
연수입 40파운드(200리브르) 이상.
잉글랜드에서 연수입 40파운드 이상의 모든 지주들은 기사 작위를 받거나 국왕에게 벌금을 내야 한다.

  • 향사 / 교구사제
대부분 연수입 5-20파운드. 평균 10파운드(50리브르).

  • 의사 / 변호사 / 장인 석공 / 장인 목수
연수입 10-17파운드(50-85리브르).

  • 석공 / 타일공
연수입 7파운드(35리브르). 평균 일당 5펜스. 휴일에는 쉰다.
흑사병 이전 기준이고, 이후 임금이 1.2배 정도 올랐다.

  • 목수 / 이엉장이
연수입 4파운드(20리브르). 보통 석공 임금의 1/2 정도, 많으면 2/3를 받는다.

  • 대리사제
연수입 4파운드(20리브르) 이하.

  • 부유한 소작농
경작지 30에이커(상위 20%) 농노의 연수입은 약 4-6파운드(20-30리브르).
자유소작농은 같은 조건에서 지대를 연 1파운드 정도 덜 낸다.
잉글랜드의 부유한 자유소작농은 프랭클린이라 불린다. 법정 기록에 향사라고 표기되었던 사람이 몇 년 뒤에는 프랭클린으로 표기되었다가 다시 십수년 뒤에는 아들이 기사가 되어있는 등, 부유한 프랭클린을 가난한 젠트리와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15세기에는 하급 젠트리인 젠틀맨과 부유한 소작농인 요먼으로 분화된다.

  • 보통 소작농
경작지 15에이커(상위 60%) 농노의 연수입은 약 2-3파운드(10-15리브르).
평년에 5인 가족이 매일 밀과 보리를 1:2 비율로 섞은 빵과 많은 에일과 약간의 치즈와 고기로 풍성한 식사를 해서 권장 열량을 채울 수 있는 최소한의 경작지.

  • 삯일꾼
흑사병 이전 일당 1.5-2펜스. 이후 3.5펜스.
수확기 농촌에서는 2배.
인구수가 한계에 이르렀던 흑사병 직전 시기에는 평년에 5인 가족이 먹을 보리빵을 구입하려면 적어도 130일은 일해서 16실링에서 1파운드를 벌어야 했다.


1.4. 의복[편집]


  • 프랑스 왕실이 서유럽 패션을 선도했다. 왕실의 유행은 도시 상류층에 빠르게 도입되었고 농촌 지주계급을 거쳐 하층 계급까지 전파되었다.


파일:Codex Manesse, c1320 2.jpg파일:Codex Manesse.jpg

Codex Manesse. 1320년경

  • 14세기 초 남성복과 여성복은 구조적으로 거의 동일했다. 튜닉 위에 긴 가운을 입는다.
이전 시대에 비해 소매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전 시대와 달리 기혼 여성이 머리를 땋지 않고 풀어두는 것은 상스럽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파일:Taymouth Hours c.1330.jpg
'테이머스 기도서' 필사본 삽화. 1330년경
파일:Jacques de Longuyon, Vows of the Peacock c.1350.jpg
'공작새의 맹세' 필사본 삽화. 1350년경
파일:Orde_van_de_Ster.jpg
장 2세의 별 기사단 창설식. 1370년경

  • 1350년대 전후로 남성복 가운의 밑단을 무릎 위로 짧게 줄여서 타이트한 쇼스를 입은 다리를 드러내는 패션이 유행했다. 하지만 엄숙한 예식에서는 여전히 긴 가운을 입는 것이 권장되었다.
여성복 가운은 어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옆이 트인 가운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파일:월터 맵 '아서의 죽음' 삽화. 1390년경.jpg 파일:성 아녜스의 순교. 1390년경.jpg

'아서 왕의 죽음' 필사본 삽화 / 성 아녜스의 순교. 1390년경
파일:월터 맵 '아서의 죽음' 삽화. 1390년경2.jpg
승마 중인 기네비어 왕비
파일:14세기 여성 의복.jpg
탈부착 소매

  • 14세기 후반이 되면 남성복과 여성복 모두 몸매를 드러내는 타이트한 가운이 유행한다.
팔에 밀착시킬 수 있는 탈부착식 소매가 유행했다.
사이드섀들은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고 귀족 여성들도 남자들처럼 말을 탔다.



파일: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아페르 작품집 삽화. 1407년경.jpg 파일:Latin 9333 Tacuinum sanitatis 1400-1425.jpg

리리파이프 후드를 쓴 도시 여성 / 탈곡 중인 농민들. 1405년경
파일:보카치오 '이름난 여성들에 대하여' 삽화. 1403년경.jpg 파일:BL Harley 4431 The Book of the Queen c.1415.jpg
'이름난 여성들에 대하여' 필사본 삽화 / 샤를 6세와 고관들과 크리스틴 드 피장. 1410년경
파일:이자보 왕비와 크리스틴 드 피장 1414년경.jpg
이자보 왕비와 공주와 시녀들과 크리스틴 드 피장. 1410년경

  • 1400년 전후로 왕족이나 제후 등 최상류층에서는 목을 덮고 귓볼까지 닿는 목깃에 바닥까지 늘어지는 긴 소매를 가진 우플랑드 스타일 가운이 유행했다. 옆트임 가운은 유행이 지났다.
리리파이프 후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땋는 유행이 한 세기 동안 발전한 끝에 뿔 같은 형태가 등장했다. 하지만 다음 세대부터는 다시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1.5. 경칭[편집]


  • 로드 lord
엄밀한 기준으로는 영주권을 가진 귀족이나 젠트리만 해당. 실제로는 그냥 일반적인 경칭으로 쓰였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도 기사가 평민이 포함된 군중을 'Lordynges'라고 부른다.

  • 사이어 / 서 sire / sir
로드와 비슷하다.

  • 마스터 master
길드의 장인 또는 대학을 졸업한 신학이나 법학 박사의 칭호. 실제로는 대성당 부속 학교만 다닌 교구사제도 마스터라고 불렸고 계급이나 학식과는 무관하게 일반적인 경칭으로도 쓰였다.


1.6. 예법과 신체언어[편집]


  • 양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이기
완전한 예속을 의미. 예를 들어 죄인이나 포로가 자비를 구할 때.

  • 한쪽 무릎을 세 번 꿇기
국왕 알현시. 방에 들어갈 때 왼쪽 무릎을 꿇는다. 일어나서 중간 거리에 다시 무릎을 꿇는다. 국왕이 손짓하면 가까이 다가가서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는다.

  • 한쪽 무릎을 꿇기
왕이나 귀족 등 높은 신분의 상급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

  • 모자 벗기
15세기 부르고뉴 궁정에서 시작된 예법.

  •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 숙이기
상급자에게 존경을 보이는 행위.

  • 가슴에 손을 얹고 가볍게 고개 숙이기
동급자에게 존중을 보이는 인사.

  • 가볍게 고개 숙이기
동급자나 하급자에게 가볍게 인사.

  • 눈 마주치기
국왕을 포함해 상급자와 대화할 때도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 등 보이지 않기
상급자 앞에서 등을 돌리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다.

  • 벽에 기대지 않기

  • 허락 없이 앉지 않기

  • 악수
계약 체결을 상징하는 행위. 일상적인 예의는 아니다.

  • 양팔을 높이 들어올리기
신에 대한 감사 또는 안도감을 표현. 절망한 것이 아니다.


2. 생애 주기[편집]



2.1. 미성년기[편집]




  • 7세
교회법상 약혼 가능 연령.

  • 12세
잉글랜드의 남성이 십호반(frankpledge)에 소속되는 연령. 교회법상 여성의 혼인 가능 연령. 여러 신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분별력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시작해야 하는 나이.

  • 14세
로마법상 후견인으로부터 독립하는 나이.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에 따르면 직업훈련을 시작하는 나이. 교회법상 남성의 혼인 가능 연령.

  • 21세
로마법과 잉글랜드 관습법상 영구적인 계약이 가능한 완전한 성인.


2.2. 성년기[편집]


  • 혼인성사
교회법상 혼인 가능 연령은 남성14세 여성 12세였다. 하지만 알프스와 피레네 이북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 평균적으로 20대 초중반에 초혼을 했다. 왕족들과 대귀족들도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결혼했다.
반대로 12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사실상 부부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교회법상 남성과 여성은 7살부터 약혼에 동의할 수 있었는데, 한번 동의한 약혼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부모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음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회 법정의 고위 성직자들에게까지 정치적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대귀족이나 왕실 가문의 정략혼에서는 가주와 집안 어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약혼이 무효화될 일은 없었다.
○결혼식 절차 [ 펼치기 · 접기 ]
신랑과 신부네 교구 교회에서 일요일 미사의 설교 시간마다 결혼 예고(banns) 발표. 이걸 3회 반복. 즉 최소 3주는 기다려야 한다.
→ 결혼식 장소는 (주로 신부측) 교구 교회나 예배당. 개인 예배당은 주교의 허가가 필요하다.
→ 결혼 예복과 장신구 등을 준비하거나 빌린다. 많은 교구 교회가 결혼식 대여용으로 신부의 베일이나 장신구를 보관하고 있다.
→ 결혼식 직전 신랑과 신부가 교구 사제에게 고해를 한다.
→ 결혼식의 마지막 절차가 주일 미사라서 하객들 모두 금식하고 와야 한다. 미사가 오전에 끝나야 해서 늦어도 오전 8-9시에 결혼식 시작.
→ 신랑과 신부가 교회 문 앞에 선다. 보통 신랑은 오른쪽, 신부는 왼쪽.
→ 사제가 하객들에게 결혼의 영적인 의미 설명.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 사제가 하객들 중에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 있냐고 질문. 영어로.
→ 사제가 신랑에게 아내를 사랑하고 흠모하고 평생 함께할 거냐고 질문. 영어로.
→ 사제가 신부에게 남편에게 순종하고 평생 함께할 거냐고 질문. 영어로.
→ 신부의 아버지나 가까운 남자 친척이 신부의 오른손을 신랑에게 건낸다. 신부는 초혼이면 맨손, 재혼이면 장갑을 낀다.
→ 신랑이 신부의 오른손을 잡고 혼인 서약. 대충 사랑하고 흠모하고 평생 함께할 거라는 내용. 신부가 서약을 받아준다.
→ 신랑이 금반지나 은반지를 성서 위에 올려놓음. 사제가 이것은 과부산(dower)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의식의 의미 설명. 영어로.
→ 사제가 반지에 성수 뿌려서 축복하고 신랑의 왼손에 올려준다. 신랑이 오른손으로 반지를 집어들고 성호경을 읊으면서(또는 사제가 먼저 읆는 걸 따라하면서) 신부의 오른손가락(16세기부터 왼손으로 바뀐다)에 반지를 갖다 댄다: "In nomine Patris" 엄지, "et Filii" 검지, "et Spiritus Sancti" 중지, "Amen." 마지막으로 약지에 반지를 끼운다. 약지에는 심장으로 이어지는 정맥이 있다고 믿어졌다.
→ 신랑이 신부에게 과부산을 양도하겠다고 맹세.
→ 사제가 신랑 신부를 교회 안으로 안내한다. 신랑 신부가 교회 동쪽 끝 중앙 제단 앞에 엎드리고 복사들이 그 위에 천을 덮는다.
→ 신랑 신부가 일어서서 성단소 남쪽 가장자리에 서서 대기한다. 이번에는 신부가 오른쪽, 신랑이 왼쪽에 선다. 그대로 주일 미사 진행.
→ 삼성창("Sanctus, Sanctus, Sanctus Dominus Deus Sabaoth")이 끝나면 신랑 신부가 다시 중앙 제단 앞에 엎드리고 복사들이 천으로 덮는다.
→ 성찬식이 끝나면 천을 걷어내고 신랑 신부가 일어선다. 신랑이 사제에게 성상패 건내받고 거기에 키스한 다음 신부의 입에 키스하고 신부에게 성상패를 건낸다. 신부는 이 성상패에 키스하지 않는다.
→ 미사가 끝나고 사제가 준비된 빵과 와인을 축복하면 신부-신랑-하객 순으로 나눠 마신다.
→ 신부에게 밀짚 왕관을 씌우고 곡물 낱알을 머리 위로 뿌리며 연회장으로 행진한다. 장소는 집, 교회에 준비된 별채, 술집 등.
→ 오후 내내 놀다가 밤이 되면 사제가 신혼 침대를 성수로 축복하고 나간다.


  • 성품성사

  • 종부성사


3. 일년 주기[편집]



3.1. 1분기 (11월~1월)[편집]



파일:중세 11월 도축.jpg 파일:중세 1월 장작.jpg

11월 11일 성 마르티노 축일의 도축 / 1월의 장작패기

월동 준비를 끝내고 초겨울에 풍성한 식사를 하는 기간. 밭일은 하지 않지만 장작이나 토탄을 구하러 밖에 나가야 했다. 검시관 기록에 따르면 노인들이 가장 많이 사고를 당하는 기간이다.


  • 만성절 All Saints' Day
11월 1일. 모든 성일에 대한 축일로 그리스도교 신자의 죽은 자들을 기념하는 날로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별도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다.

  • 성 마르티노 축일
11월 11일. 겨울을 날 수 없는 가축을 도축해서 고기를 보존한다.

  • 재림절 일요일 Advent Sunday
11월 30일경. 이날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금식이 권장되었다. 참회 기간이므로 사순절과 마찬가지로 결혼식이 금지된다.

  • 성 니콜라오 축일
12월 6일. 소년 주교를 선출해서 예배를 주관하게 했다. 신도석에서도 아이들이 어른의 자리에 앉는다.

  • 크리스마스 Christmas
12월 25일. 봄의 부활절과 초여름의 오순절과 함께 3대 축일. 사제 한 명이 하루에 미사를 세 번 집전하는 것이 특별히 허용된다. 암양이 새끼를 낳을 시기.

  • 무고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Holy Innocents' Day
12월 28일. 이날에도 소년 주교 의식을 한다.

  • 공현 대축일 Epiphany
1월 6일.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기념한다. 선물을 교환하고 연극을 관람한다. 다음 월요일에 사제가 농민들의 쟁기를 축복하고 자선금을 모금한다.


3.2. 2분기 (2월~4월)[편집]


파일:중세 2월 성촉절.jpg
2월 2일 성촉절 미사
파일:중세 2월 쟁기질.jpg
2월의 봄갈이


파일:중세 3월 포도밭.jpg 파일:중세 4월 방목.jpg

3월의 포도밭 준비 / 4월의 양떼 방목

파일:중세 4월 꽃밭.jpg
4월의 연인들

봄까지 금식하며 한해의 농업과 목축을 준비하고 시작하는 기간. 거름을 만들고 이회토 구덩이를 파고 봄갈이를 한다. 한겨울에 비해 수레 관련 사고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 성촉절 Candlemas
2월 2일. 성모 마리아의 결례를 기념하며 촛불을 들고 교회에 간다.

  • 칠순절 Septuagesima
2월 22일 이전. 이때부터 사순절을 준비한다. 참회 기간이므로 결혼이 금지된다.

  •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3월 8일 이전.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노약자를 제외하고 고기, 달걀, 치즈 식용이 금지된다. 재의 수요일 직전의 3일은 금식 기간을 앞두고 마지막 축제를 벌이는 시기이자 의무적인 고해성사 기간인 속죄절(shrovetide)이었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연 1회의 의무적인 고해성사를 규정했는데 보통은 속죄절과 이후 몇 주 동안 몰아서 했다.

  • 검은 월요일 Black Monday
3월 13일 이전. 교회의 중앙 제단 앞에 사순절 장막을 거는 날.

  • 성모 영보일 Annunciation
3월 25일. 대천사 가브리엘이 그리스도의 잉태를 성모에게 알린 날.

  • 종려주일 Palm Sunday
4월 19일 이전. 종려주일 행진 의식을 한다.

  • 테니브리 수요일 Tenebrae
4월 22일 이전. 새벽기도와 아침기도를 전야로 앞당긴다.

  • 세족식 목요일 Maundy
4월 23일 이전. 미사에서 종 대신 방울을 울린다. 부활절을 대비해 교회를 청소한다. 몇몇 대성당에서는 선임 사제들이 하급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의식을 한다.

  • 성 금요일 Good Fryday
4월 24일 이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날. 미사를 하지 않는다. 축성된 포도주와 빵을 부활절 성묘에 봉헌하고 분향한다.

  • 안식일 토요일 Sabbath
4월 25일 이전.

  • 부활절 Easter
4월 26일 이전. 사순절 장막이 제거되고 금식이 끝난다. 12세 이상의 모든 교구민은 이날 영성체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이날도 사제 한 명이 미사를 여러 번 집전하는 것이 특별히 허용되었다. 포도주는 빵보다 흘리기 쉽다는 이유로 성별되지 않은 일반 포도주를 썼다. 연 1회의 영성체는 모든 기독교도들의 권리이므로 원칙적으로 사제는 대가를 받아서는 안 되었다.

  • 혹축절 Hocktide
5월 3일 이전.


3.3. 3분기 (5월~6월)[편집]



파일:중세 5월 오월제.jpg 파일:중세 5월 양털깎기.jpg

5월 1일 오월제 / 5월의 양털 깎기


파일:중세 5월 토너먼트.jpg 파일:중세 6월 건초수확.jpg

5월의 토너먼트 / 6월 25일 건초 수확

집중 노동 기간이 끝나고 쾌적한 날씨에 정기시에서 축산물을 거래하거나 축제에서 놀거나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기간. 6월 24일 세례자 요한 축일을 기점으로 건초 수확을 시작하면서 휴식이 끝난다.


  • 오월제
5월 1일. 이날 이후 밭에서 잡초를 뽑고 배수로를 수리하고 휴한지를 갈고 에일을 양조하고 새끼양을 거세하고 암양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고 양털을 다 깎으면 전반기의 집중 노동 기간이 끝난다.

  • 그리스도 승천일 Ascension Day
6월 16일 이전. 직전의 월요일부터 교구민들의 단체 행진 의식을 한다. 오전 미사를 끝낸 뒤 교회에서 출발해서 교구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복음서를 낭독한다. 사실상 야외에서 먹고 노는 소풍이었다.

  • 오순절 Pentecost
6월 23일 이전. 곡물 가격이 오르고 빈민들은 설익은 치즈와 완두콩으로 연명하는 시기. 날씨가 쾌적해서 여행하기 좋으며 정기시나 축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농민 봉기가 일어날 위험이 가장 높은 시기다.

  • 세례자 요한 축일
6월 24일. 전야에 큰 모닥불을 피우고 다음 날 건초 수확을 시작한다. 건초는 최고의 겨울 사료이며 더 많은 가축의 월동과 신선한 고기를 보장했지만 건초 수확은 중노동이라 농노의 부역 중 가장 기피되었다.

  • 성체축일 Corpus Christi
7월 6일 이전.


3.4. 4분기 (7월~10월)[편집]



파일:중세 8월 수확.jpg 파일:중세 9월 포도주.jpg

8월의 곡물 수확 / 9월의 포도 수확


파일:중세 9월 사냥.jpg 파일:중세 10월 가을갈이.jpg

9월의 암사슴 사냥 / 10월의 가을갈이

건초와 농작물을 가능한 빨리 수확해야 하는 두 번째 집중 노동 기간. 9월 29일 성 미카엘 축일 이후 관료 선출과 수익 정산과 가을갈이와 겨울밀 파종과 돼지 방목으로 한해를 마무리한다.


  • 성 야고보 축일
7월 25일.

  • 성 베드로 축일
8월 1일. 추수를 시작하고 사제가 첫 번째 빵을 축복한다.

  • 성모 승천 대축일 Assumption Day
8월 15일. 교회를 백합과 장미꽃으로 장식한다.

  • 성 미카엘 축일
9월 29일. 장원의 관료를 선출하고 한해의 수확을 정산한다. 이후 곡물시장에서 수확물을 팔고 영주에게 지대를 납부하고 가을갈이를 하고 겨울밀과 호밀을 파종하고 사과주를 만들고 숲에서 야생 과일과 견과류를 채집하고 돼지를 방목한다.


4. 중앙 정치[편집]



4.1. 정부 부서[편집]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왕실 가신단 royal household
    • 궁내부chamber
에드워드 2세와 3세 시대부터 가신단의 상급 기관으로서 3개의 의상실을 감독했다. 신하들의 탄원서를 수령해서 국왕에게 제출하고, 국왕의 명령을 시종장(chamberlain)이 서명한 뒤 서기들에게 옥새영장(privy seal writ) 형식으로 작성하게 해서 상서성이나 재무부에 전달한다.
  • 국왕의상실 king's wardrobe
왕의 옷과 갑주 등을 보관하고 이를 관리하는 부처 이름. 존 왕때부터 정기적인 재정 수입 이외에 왕의 행차와 같이 불시에 예산이 필요할 때를 위한 재정 업무를 맡기 시작했고, 헨리 3세 이후 최고 행정부 겸 회계 업무를 겸했다.
  • 대의상실 great wardrobe
섬유, 모피, 향신료 등에 대한 재정 및 지출 담당
  • 추밀의상실 privy wardrobe
갑옷, 무기 등 갑주들에 대한 관리 및 기타 업무 담당

  • 상서성 chancery
국왕의 명령을 헌장, 영장, 특허서한 등 공문서 형식으로 작성해서 각 지방으로 발송했다. 그러한 공문서들의 사본을 모아서 명부로 만들어 보관했다. 셰리프 등 지방 관료들이 올린 보고서나 민간인들이 보낸 비공식적인 서신을 모두 검토해서 국왕에게 보고했다. 양심법과 관련되어 일반 법정보다 더 넓은 범위를 담당했고 권한도 더 큰 법원이었다.

  • 재무부 exchequer
14세기까지는 위의 국왕의상실에 눌려서 기를 제대로 못폈으나 15세기 이후 위의 3개 의상실들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급부상. 크게 순수 재정적인 것만을 담당하는 행정재무부와 또 하나는 밑에 나오는 재무부 법정으로 나뉘었다.


  • 웨스트민스터 국왕 법정
1220년대부터 국왕 법정 제도가 정립되었다. 1292년 에드워드 1세의 칙령으로 법정변호사(barrister)와 사무변호사(solicitor)의 구분이 공식화되었다. 1402년 의회 하원의 청원으로 변호사 조합원 자격과 자격시험이 제도화되었다.
  • 왕좌부 법정 court of the king's bench
항소법원이자 중범죄 형사사건 담당.
  • 재무부 법정 court of the exchequer
왕실이 관련된 재산 관련 사건을 담당.
  • 민사소송 법정 court of common pleas
항소법원이자 민사소송 담당.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왕실 가신단 royal household

  • 상서성 chancery
카페 왕조의 국왕들은 상서(chancellor)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꺼렸으나, 14세기초의 위기를 겪으며 왕권의 안전성이 검증된 발루아 왕조부터 상서는 행정부 전체와 파리고등법원의 수장이 되었다.

  • 재무부 exchequer
상인 출신도 있어서 법률가나 신학자가 행정을 맡는 상서성에 비해 관료들의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

  • 추밀원 council
국왕의 정치자문 회의였던 왕정청(curia regis)이 카페 왕조 말기부터 자문기구인 추밀원, 사법기관인 고등법원, 재무기구인 회계감사청으로 분화되었다.

항소법원이자 추밀원에서 결정된 정책의 시행과 해석과 개선을 담당하는 기관. 1250년대에 파리의 시테궁에 정착했다.
  • 대법정 grand chambre
다른 법정들을 감독하고 모든 소송의 최종 판결을 내린다. 국왕이나 제후 또는 고위성직자 등이 관련된 중대한 사건은 직접 심리한다.
  • 청원법정 chambre des requetes
항소를 심리하고 중대성과 근거를 평가한다. 합리적이고 중요한 항소는 위원들을 파견해서 증거를 수집하게 한다.
  • 조사법정 chambre des enquetes
청원법정의 위원들이 조사하고 대법정에서 조사 절차의 합법성을 검토받은 다양한 증거들을 해석해서 논리적이고 일관된 결론을 도출한다. 대법정이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결론을 보고서로 만들어 제출한다.

  • 샤틀레 chatelet
파리 프레보의 법정. 유명한 샤틀레 감옥이 있다. 파리의 프레보는 실제로는 바이이로 분류되며 파리 인근 지방의 프레보들의 상급자였다.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 왕실 가신단 royal household
    • 궁내부chamber

  • 상서성 chancery

  • 추밀원 council


4.2. 대의기구[편집]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의회 parliament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 의회 parliament


4.3. 정부 수입[편집]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왕령지 지대 수입
법정 수입 등과 합쳐서 1330년대 기준 연 2만 파운드.

  • 잉글랜드 양모 관세 수입
평시에는 자루당 1/3파운드로 연 1만 3천 파운드.
전시에는 의회의 승인을 받고 5배에서 최대 8배까지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었다. 6-10만 파운드.
전시 정부 수입의 60%를 차지했다.

  • 보르도 와인 관세 수입
연 1만 5천 파운드.
대륙에 붙어있어서 전시에 군대의 약탈과 파괴로 피해를 입기 쉬웠다. 최대 1/5까지 감소. 약 3천 파운드.

  • 잉글랜드 전쟁 보조금
평신도세의 경우 농촌은 잉여생산의 1/15, 도시는 1/10. 1회당 약 3만 7천 파운드.
성직세는 1회당 약 1만 8천 파운드.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왕령지 지대 수입
잉글랜드 왕실의 3-4배. 연 35만 리브르.

  • 화폐 가치 조작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에 미치지 못하도록 화폐를 주조하고 시뇨리지를 얻는다. 화폐 가치가 낮아지면 주로 채권자 역할을 하는 지주 귀족과 도시 상류층 등 기득권층에게 불리했기 때문에 삼부회의 저항이 가장 심했다.

  • 신민소집령 arriere-ban
프랑스 국왕은 이론상 왕국의 주권자이자 '왕국 내 황제'였으며 프랑스에서 18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신체 건강한 남자들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군복무를 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있었다. 신민소집에 의한 자유민 동원은 13세기에도 종종 있었지만 필리프 4세 시대부터 명시적인 제도가 되었다. 충분한 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귀족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1360년부터 화로세가 도입되면서 신민소집령은 전쟁세 징수 수단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병력 소집 수단으로서도 넓은 전선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푸아티에 전투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신민소집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샤를 5세는 그 대신 화로세와 상품세를 걷어서 용병대를 고용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을 모병해 상비군에 가까운 군대를 만들었다.

  • 상품세 aides
도시에서 판매되는 다양한 상품에 부과된 간접세. 전시에 삼부회의 승인을 받고 징수되었다. 필리프 4세 시대에 처음 도입되었고 백년전쟁 초기에는 화폐개주 다음으로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 소금세 gabelle
소금에 부과된 간접세. 1341년부터 정기적인 세금이 되었지만 정부의 위기 때마다 민심을 얻기 위해 삼부회의 승인을 받고 비정기적으로 징수하거나 전비가 부족해서 다시 정기적인 세금으로 바꾸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1436년 상품세와 함께 정기적인 세금으로 정착되었다.

  • 화로세 fouage
용병 도적단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1360년 11월부터 도입된 가구세. 극빈층은 면제되고 소득에 따라 가구당 1~9프랑을 부과받았다. 가구당 평균 3프랑. 귀족들도 참전을 대가로 이 세금을 면제받았다. 1380년대 도시의 중하층민들이 세금에 저항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뒤 타이유(taille)라는 이름의 비정기적인 세금으로 대체되었다. 이 타이유세는 1439년부터 다시 정기적인 조세가 되었다.

  • 성직자 보조세
왕국의 방어를 위해 아비뇽의 교황의 허가를 받고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


5. 지방 정치[편집]



5.1. 지방 행정기구와 공동체[편집]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샤이어 shire
잉글랜드 전체에 약 40개의 샤이어가 있었다.
  • 카운티 법정 county court
살인, 강간, 반역 등 중범죄(felony)의 형사재판과 중대한 재산권 침해 관련 민사재판.
순회판사가 주재하고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배심원을 맡는다. 13세기부터 잉글랜드에서 기사 숫자가 급격히 감소한 원인 중 하나.
상서성에 서신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서 국왕 영장(writ) 발급 → 셰리프가 영장을 수령하고 배심원 선정 → 기소배심 → 셰리프가 피의자와 피고인을 법정에 소환 → 순회판사가 국왕 영장 낭독 → 증거 조사와 신문 → 배심원 평결 → 순회판사가 판결 → 셰리프가 집행.
  • 셰리프 sheriff
  • 카운티 베일리프 county bailiff
  • 치안관 constable
셰리프의 치안 업무를 보조한다.
  • 검시관 coroner
  • 치안판사 keeper of the peace
셰리프의 다양한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현지 유력자들 중에서 임명된 임시직이었으나 갈수록 권한이 커지다가 1361년 공식적인 관직이 되었다.

  • 헌드레드 hundred
잉글랜드 전체에 약 630개의 헌드레드가 있었다. 즉 샤이어당 평균 15개.
전시에는 각 헌드레드 공동체가 1회당 평균 50파운드의 전쟁세를 내야 한다. 상황에 따라 추가 비용을 거두기도 한다. 부유한 노퍽 주의 런디치 헌드레드의 전쟁세 평가액은 242파운드였지만 징집병 187명의 장비 지원과 소집 장소까지의 여비 등으로 추가 비용 52파운드를 징수했다.
  • 헌드레드 법정 hundred court
불량식품 판매나 매점매석 등 가벼운 형사범죄 재판. 장원 등 자치권을 가진 공동체들 간의 분쟁과 2파운드 이하의 채무 관련 민사소송.
셰리프(연 2회)나 카운티 베일리프(3주 당 1회)가 주재하고 부유한 자유소작농(프랭클린. 15세기에는 요먼)들이 배심원을 맡는다. 기사 계급 이하의 노르만인 지주들이 앵글로색슨족과 교류하면서 빠르게 동화된 원인 중 하나.

  • 자치도시 burgh
    • 자치도시 법정 burgh court

보통 경작지 600-2000에이커. 그중 영주직영지 100-400에이커. 거주인구 25-100가구 100-500명. 지대+시설물+법정+직영지 수입 10-40파운드.
  • 장원 법정 manor court
영주나 청지기나 베일리프가 주재하고 부유한 소작농들이 배심원을 맡음.
  • 영주 lord
  • 청지기 steward
영주의 대리인. 장원이 여러 개인 경우 베일리프들을 감독한다.
  • 베일리프 bailiff
장원을 여러 개 가진 영주가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장원을 관리하기 위해 임명한 대리인.
  • 배심원단 jury
장원의 부유한 소작농들 중에서 선출됨.
  • 리브 reeve
청지기나 베일리프의 행정과 회계를 돕는 현지 소작농. 주로 장원의 부유한 농노들 중에서 임명됨. 농노의 모든 부역이 면제되고 봉급을 받으며 영주의 식탁에서 식사를 대접받는 등의 특권을 누렸지만 일이 고되서 인기가 없었다.
  • 울타리 관리인 hayward
리브의 부하이자 영주 직영지의 노동 감독관.
  • 나무 관리인 woodward
리브의 부하이자 장원의 삼림 관리인.
  • 에일 감정가 ale tester
리브의 부하이자 장원 내의 불량식품 거래 단속관.

  • 마을 village
    • 십호반 frankpledge

  • 주교구 diocese
1300년대 세인트앤드루스 주교구에는 부주교구 2개 지방주임사제구 7개 소교구 124개가 있었다.
  • 주교 법정 bishopric court
  • 주교 bishop
  • 참사회장 dean
  • 학무관 chancellor
  • 회계관 treasurer
  • 성가대 감독 precentor

  • 부주교 관구 archdeaconry
    • 부주교 archdeacon

  • 지방 주임사제 관구 rural deanery
    • 주임사제 법정 deanery court
    • 지방 주임사제 rural dean

  • 소교구 parish
    • 교구민 친목회
    • 교구사제 rector
    • 대리사제 vicar
    • 예배당 사제 chaplain
    • 부제 deacon
부제 서품을 받지 않고 복사로 남아있다가 24세에 사제 서품을 받는 경우가 많다.
  • 복사 acolyte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바이이구bailliage
    • 바이이 bailli
북부 프랑스의 지방관. 비귀족 평민도 가능. 치안, 군사, 사법, 조세, 수익시설관리 담당. 세네샬에 비해 사법 업무가 덜 까다로운 대신 재정적 책임이 더 컸다.
  • 프레보 prevot
바이이의 관리를 받는 중급 지방관. 바이이 관할 구역 하나에 6개의 프레보 관할 구역(prevote)이 있었다.
  • 자작 viscount
노르망디 지방에서 프레보에 해당하는 중급 지방관.
  • 수취인 receiver
  • 로마법 전문가 procurator

  • 세네샬구senechaussee
    • 세네샬 senechal
남부 프랑스의 지방관. 귀족만 가능. 대부분 남부 문화와 성문법에 무지한 북부 프랑스 귀족 출신이라 현지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 대법관 juge-mage
  • 법관 local judge
  • 행정관 vignier
치안과 군사 담당.
  • 대관 baile
통행세와 하급사법권 담당.
  • 성주 castellan
  • 수취인 receiver
  • 로마법 전문가 procurator

  • 조폐국
재무부 직속기관이지만 전시에는 수취인을 통해 바이이나 세네샬에게 직접 송금.

  • 산림청
국왕 직속기관이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바이이나 세네샬의 지시에 따름.

  • 제후령

  • 자치도시

  • 장원

  • 마을

  • 주교구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 셰리프구

  • 쎄인구 thanage

  • 대법관구

  • 제후령

  • 자치도시

  • 장원

  • 마을

  • 주교구


6. 군사[편집]



6.1. 전비[편집]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잉글랜드의 대륙 원정군 (1340-1389)
맨앳암즈 3천과 승마궁수 3천의 6개월 군사작전의 전비는 6만 파운드(순은 16톤).
1346-7년 에드워드 3세의 크레시-칼레 전역은 약 20만 파운드(순은 58톤).
1356년 랭커스터 공작과 흑태자의 푸아티에 전역은 10만 파운드(순은 26톤).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프랑스 야전군과 요새 주둔군 (1340-1389)
1343년 300만 리브르(순은 61톤).
1355년 500만 리브르(순은 81톤).

  • 샤를 7세의 칙령군 (1445)
상비군 유지비 연 74만 리브르(순은 22톤).


6.2. 군사 모집[편집]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일반적으로 중장병, 즉 "갑옷으로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승마전투가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준마를 탔건 조랑말을 탔건 이동할 때는 말을 타는, 백병전 전문 전투원"을 지칭하는 용어. 백작이든 기사든 향사든 일반인이든 신분은 상관 없다. 징집병이나 민병대와 구분되는 잘 무장한 직업군인이라는 의미에서 근접전투원이 아닌 제노바 쇠뇌수 등도 맨앳암즈라고 칭할 때가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중무장 근접전투와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는 시대였으므로 어느 쪽이든 존중이 담긴 표현이다.
  • 왕실 가신단 기사
국왕에게 연금을 받고 봉사하는 왕실 기사들. 노르만 왕조와 앙주 왕조 시절부터 잉글랜드 국왕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왕실 기사의 전성기였던 에드워드 1세의 폴커크 전역에서는 중기병 1400명 중 절반 이상인 800명이 왕실 가신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참전의 대가로 봉급을 받았지만 회계 기록에서 용병 기사들과 철저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1360년 전후로 가신단 기사라는 명칭은 갑작스럽게 궁내부 기사(chamber knight)로 대체되었으며 왕실 소속으로 참전한 기사들에 대한 회계 기록이 아래의 고용계약서(indenture)로 모집된 용병 맨앳암즈들과 통합되었다.
  • 기사의 의무에 호소
잉글랜드에서 연수입 40파운드 이상의 모든 지주들은 기사 작위를 받거나 국왕에게 벌금을 내야 했다. 대부분 그냥 벌금을 냈지만 그럼에도 14세기 잉글랜드에는 대략 900명이 조금 안 되는 기사들이 있었다. 당대 기사도의 이상에 따르면 기사는 국가 공동체의 수호자 계급이자 군인들의 지휘관이므로 국왕의 소집령에 응해야 한다는,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사회적 기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은 기사들 각자에게 서신을 보내서 참전을 '요청'했다.
  • 벌금이나 채무를 면제하는 대가로 참전 요구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빚을 진 사람들 중에는 갑옷과 말을 살 정도로 부유하고 무예 실력으로 명성이 높은 이들도 있었다.
  • 고용계약 indenture
중무장 근접전투와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으며 전쟁은 돈이 되는 시대였다. 명예를 원하거나 단순히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병한다. 원정군인 잉글랜드군은 1년에서 많으면 10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맺었지만 방어하는 입장이라 행정에 여유가 있었던 프랑스군은 한달마다 계약을 갱신했다.

  • 궁수 archer
    • 배치위임 징병 commission of array
알프레드 대왕 이후 잉글랜드의 모든 자유민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왕'에게 충성하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왕국을 방어할 의무를 가졌다는, 역사적 사실과 신화가 뒤섞인 관념이 있었다. 그러한 관념은 에드워드 1세 시대부터 명시적인 제도가 되었다.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잉글랜드인 남성에게 병역 의무가 있었다. 농노 역시 자유민으로 취급되어 전쟁세를 내거나 국왕군에 징병되었다. 전쟁세 납부금액은 자유민과 비자유민 신분이 아닌 재산을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30에이커 소작지를 가진 농노는 15에이커를 가진 자유소작농보다 마을 공동체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땅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였다.
대부분은 전쟁 보조금을 내는 대신 의무를 면제받았지만, 징병관들은 어쨌든 할당된 숫자의 병력을 소집 장소로 데려와야 했다. 1296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는 보병 6만 명이 소집되었고 1인당 약 5실링 가치의 무장을 지원받았다. 반대로 생사르도스 전쟁에서 에드워드 2세는 인당 1파운드 이상의 비용을 들여 사슬갑옷과 투구와 건틀릿으로 완전히 무장한 보병 5100명을 소집할 계획을 세웠다. 에드워드 3세는 갑옷 대신 1파운드 가치의 말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1347년 칼레 전역은 기마약탈보다는 공성전이 중심이었지만 그럼에도 잉글랜드군의 승마궁수와 보병궁수의 비율은 1:3이었다.
  • 웨일즈의 군주의 자유민 소집
고대부터 모든 웨일즈인은 자유민이자 군인이므로 웨일즈의 군주를 위해 복무해야 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잉글랜드의 배치위임 소집령보다도 역사적 근거가 미약했지만 웨일즈는 가난한 지방이었으므로 봉급과 약탈의 기회에 대한 만족도가 잉글랜드 징집병보다 높았다.
  • 고용계약 indenture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으며 전쟁은 돈이 되는 시대였다. 명예를 원하거나 단순히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병한다.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신민소집령 arriere-ban
프랑스 국왕은 이론상 왕국의 주권자이자 '왕국 내 황제'였으며 프랑스에서 18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신체 건강한 남자들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군복무를 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있었다. 대부분은 병역 대신 돈을 냈지만, 그럼에도 많은 귀족들과 평민들이 명예를 원하거나 봉급을 받으려고 국왕군에 참전했고, 필리프 6세는 최대 2만에 달하는 맨앳암즈와 그 이상의 민병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1337년 아키텐 공작위 몰수 이후부터 푸아티에 전투 이전까지 신민소집령은 최소 7번 이상 선포되었다.
하지만 신민소집은 넓은 전선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 전역에서도 기마약탈을 벌이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기 위해 항상 수많은 민병대 보병들이 해산되었다. 그래서 푸아티에 전투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신민소집령은 선포되지 않았고, 샤를 5세는 그 대신 화로세와 상품세를 걷어서 용병대를 고용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을 모병해 상비군에 가까운 군대를 만들었다.


6.3. 보급[편집]


  • 군대에 필요한 식량
3만 명의 대군세는 이론상 일주일에 약 4500-5000쿼터의 곡식을 필요로 했다. 1쿼터는 8부셸이며 290리터다. 여기에 말 1만 마리가 추가된다면 일주일에 약 4000쿼터의 귀리나 다른 곡물이 더 필요했다.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계산된 군사 4000명의 4개월치 식량: 밀 5400쿼터, 보리 8250쿼터, 콩과 완두콩 2400쿼터, 에일 60통(tuns), 베이컨 12960개, 청어 45??, 생선 32400마리, 치즈 9072스톤.

  • 보관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왕실의 지시사항: 밀을 잘 갈아서 체에 거르고, 깨끗한 통의 바닥에 개암나무 가지 세 개와 소금을 넣고, 그 위에 밀가루를 빽빽하게 눌러 담아야 한다. 잘 마르도록 정기적으로 통을 뒤집어야 한다.


6.4. 무장[편집]



파일:Miroir_historia.jpg
프랑스 연대기 삽화. 1335년경



파일:Sir Hugh Hastyngs. 1347.jpg
휴 헤이스팅스 무덤 장식. 1347년경

  • 백년전쟁 1기. 그레이트헬름이 아직 현역이다. 브리간딘과 판금 팔보호대와 다리보호대 등 트랜지셔널 아머의 형태는 이미 완성되었지만 비싸기도 하고 기마약탈과 강행군에 불편해서 부유한 기사들도 사슬갑옷만 입는 경우가 더 많다. 반대로 신분이 낮은 맨앳암즈가 안전제일주의자라서 판금 보호대와 브리간딘으로 중무장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파일:rvdmelee.jpg
연대기 삽화. 1370년경


연대기 삽화 / 흑태자 에드워드 무덤 장식. 1376년경


파일:yates-thompson-35-f51.jpg
베르트랑 뒤 게클랭. 1385년경

  • 백년전쟁 2기. 그레이트헬름은 거의 토너먼트에서나 볼 수 있고, 배서닛이 가장 표준적인 투구로 자리잡는다.



생드니 연대기 삽화 / 호크우드와 화이트컴퍼니. 1400년경

  • 장기 휴전 시기. 판금 보호대가 거의 표준으로 자리잡았고 부리처럼 튀어나온 면갑이 대중화되었다.



프랑스 대연대기의 크레시 전투 삽화 / Guiron le Courtois. 1420년경

  • 백년전쟁 3기의 시작. 넓은 판금 목가리개를 붙여서 가동성을 희생하는 대신 치명적인 급소인 목을 보호하는 그레이트배서닛이 유행한다. 판금갑옷이 맨앳암즈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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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로마노 전투'. 1440년경


  • 백년전쟁 말기. 진정한 판금 갑옷의 등장. 목가리개 등 관절부의 판금 보호장비를 인체공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해서 방어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가동성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이전처럼 값싸고 튼튼하고 단순한 형태의 보호장비도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다.


6.5. 첩보[편집]


  • 첩보 문서는 대부분 읽자마자 파기되었다. 명령이 지켜지지 않은 극소수의 문서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 1468년 에드워드 4세는 첩보 비용으로 2200파운드 이상을 썼다.

7.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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