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장기 휴전 (1389-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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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 협상 (1389~1396)
1.1. 룰랭장 조약 (1389)
1.2. 룰랭장 협상 (1390)
1.3. 알렉산드리아 전투 (1391)
1.4. 샤를 6세의 정신 질환 (1392)
1.5. 룰랭장 회담 (1393)
1.6. 십자군 계획 (1394)
1.7. 아비뇽 회담 (1395)
1.8. 파리 조약 (1396)
2. 잉글랜드의 내전 (1397~1403)
2.1. 브레스트 할양 (1397)
2.2. 볼링브로크 추방 (1398)
2.3. 볼링브로크의 역습 (1399)
2.4. 웨일즈 반란 (1400)
2.5. 오를레앙의 역습 (1401)
2.6. 브린글라스 전투 (1402)
2.7. 슈루즈베리 전투 (1403)
3. 돌아온 해적 시대 (1403~1407)
3.1. 플리머스 습격 (1403)
3.2. 다트머스 전투 (1404)
4. 프랑스의 내전 (1407~1415)



1. 평화 협상 (1389~1396)[편집]


파일:Richard and Isabella on their wedding day in 1396.jpg

"이 왕의 옥좌, 이 홀을 쥔 섬, 이 장엄한 땅,

이 군신의 자리, 이 두 번째 에덴, 이 절반의 낙원,

이 자연이 오염과 전쟁을 막기 위해 스스로 만든 요새,

이 행복한 사람들의 무리, 이 작은 세상,

이 덜 행복한 땅의 질투를 막는 해자 역할을 하는 은빛 바다에 놓인 보석,

이 축복받은 장소, 이 땅, 이 왕국, 잉글랜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1.1. 룰랭장 조약 (1389)[편집]


1389년 6월, 약 반 년 간의 협상 끝에 종전 협상을 전제로 3년 기한의 휴전이 체결됐다.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2세는 처음에는 휴전에 동참하길 거부했지만 8월이 되자 프랑스의 지원 없이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휴전에 동의한다.


1.2. 룰랭장 협상 (1390)[편집]


그러나 종전 협상은 주권 문제 때문에 시작부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잉글랜드측은 가스코뉴를 잉글랜드 왕의 영토로 두는 대신 곤트의 존이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프랑스측은 거부했다.

게다가 잉글랜드 내부에서는 프랑스 왕에 대한 신서 자체를 거부하는 여론이 강했다. 리처드 2세 자신이나 곤트의 존은 잉글랜드 왕국의 주권과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조건이 잘 합의되면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의회의 남작들과 평민 대표들 모두 그런 어중간한 타협이 실제로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한편 샤를 6세는 이탈리아의 영토 확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협력해 대규모 이탈리아 군사 원정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잔 갈레아초의 딸 발렌티나와 결혼한다. 잉글랜드와 전쟁을 계속하면서 이탈리아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샤를 6세는 종전 협상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1.3. 알렉산드리아 전투 (1391)[편집]


협상의 빠른 진행을 위해 양국의 외교 사절단이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 간의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유럽의 세력 균형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리처드 2세와 고문들은 이탈리아 원정의 중단을 요구하며 정상회담을 무기한 연기한다. 게다가 프랑스 내부에서도 잔 갈레아초의 정적인 부르고뉴 공작과 아르마냑 백작이 원정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내에서도 뛰어난 정치가인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활약하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밀라노에 대항하는 연합이 등장하는 등 악조건이 겹치면서 샤를 6세의 이탈리아 원정 계획은 사실상 취소된다.

7월 25일, 프랑스군의 지원 없이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가 피에몬테주 알렉산드리아에서 피렌체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아르마냑 백작은 이 전투에 연합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1.4. 샤를 6세의 정신 질환 (1392)[편집]


1392년 6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올리비에 드 클리송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샤를 6세가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하면서 휴전이 다시 연장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샤를 6세가 발작으로 미쳐버렸다. 왕이 부재한 사이 정부를 장악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전쟁 준비를 중단하고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숙청하는 대가로 브르타뉴가 잉글랜드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브르타뉴 공작과 합의한다.


1.5. 룰랭장 회담 (1393)[편집]


1393년 4월, 양국의 고위급 대표들이 회담을 시작했지만 주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휴전만 4년 연장된다.


1.6. 십자군 계획 (1394)[편집]


1394년 4월, 가스코뉴에서는 곤트의 존이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곤트의 존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당했다. 한편 리처드 2세는 지지부진한 협상에서 관심을 돌리고 아일랜드 원정을 계획한다.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공작이 투르크족에 맞서 헝가리를 구원할 십자군 원정을 주도한다. 곤트의 존 역시 이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십자군 원정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화해를 이끌어낼 계기로 떠오른다.


1.7. 아비뇽 회담 (1395)[편집]


1395년 5월, 리처드 2세는 샤를 6세의 어린 딸 이자벨과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종전 대신 장기 휴전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프랑스 정부는 교회의 분열을 끝내기 위해 두 교황이 모두 퇴위하도록 설득한 뒤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새 교황을 선출한다는 정책을 세웠다. 그러나 베네딕토 13세는 이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프랑스측은 베리 공작, 부르고뉴 공작, 오를레앙 공작을 포함한 프랑스의 대귀족들을 아비뇽에 사절로 보냈지만 끝내 설득하지 못했다.

한편 로마 교황과 이탈리아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정책이 무력에 의한 정복에서 타협으로 전환되면서 밀라노 공작의 사위인 오를레앙 공작은 프랑스 중앙 정계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1.8. 파리 조약 (1396)[편집]


1396년 3월, 파리에서 리처드 2세와 이자벨의 약혼과 28년의 장기 휴전이 체결되었다. 10월에는 결국 칼레 시 인근의 국경지대에서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이자벨 공주가 약혼자의 손에 인도되었다.

그러나 주권 문제를 비롯해 그동안 여러 차례의 회담에서 논의되어 온 중대한 문제들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심지어 잉글랜드측에서는 조약 자체가 의회나 추밀원과도 상의하지 않고 비밀리에 추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을 비롯한 반프랑스파는 당분간 침묵을 지켰다.


2. 잉글랜드의 내전 (1397~1403)[편집]


파일:Battle of Shrewsbury 1403.jpg

"부탁이니, 바닥에 앉아서

왕들의 죽음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자.

어떤 왕은 폐위되고 어떤 왕은 전장에서 죽었지,

어떤 왕은 자신이 짓밟은 이들의 유령에 홀렸고

어떤 왕은 아내에게 독살당하고 어떤 왕은 자다가 질식했지

모두 살해당했다. 인간인 바에야 죽을 수밖에 없는 왕.

그 왕의 이마를 두르고 있는 이 텅 빈 왕관 속에는

죽음의 신이 거느리는 궁정이 있기 때문이야.

거기 광대 하나가 죽음의 왕좌에 앉아, 막간극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왕으로 군림하며 나라를 주무르고 온갖

영화를 누리지. 눈빛 하나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고, 세상이

경외하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하고, 생명을 지탱하는 자기

육신이 놋쇠나 구리라도 되는 듯한 착각과 끝없는 자만심에

사로잡히기도 하지. 그러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죽음의 신이 그

철옹성의 벽을 작은 바늘 하나로 살짝 찌르는 거야. 그러면,

왕이여 안녕! 모자를 벗지 마시오. 그런 허례 허식으로

살과 피를 조롱하지 마시오. 존경과 예의, 전통과 격식 따위는

내던져버리시오. 당신들은 그동안 나를 착각했을 뿐입니다.

나는 당신들처럼 빵을 먹고 살고, 결핍을 느끼고,

슬픔을 맛보고, 친구가 필요하오."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2.1. 브레스트 할양 (1397)[편집]


1396년 12월 니코폴리스 전투의 결과가 북부 프랑스와 잉글랜드까지 전해졌다. 동방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이 공고해지면서 종전을 주장하는 여론의 주된 명분 중 하나였던 '십자군 원정을 위해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화해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가 사라졌다.

1397년 1월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하원 의원들은 리처드 왕이 장인인 프랑스 왕의 이탈리아 원정에 군대를 지원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듣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의원들의 반응을 전해 들은 리처드 2세도 격노하며 그들 앞에 직접 나서서 이탈리아 원정 참전이 잉글랜드 왕국에 이득이 되는 이유들을 구구절절히 설명했다.

3월, 리처드 2세는 2만 파운드를 배상금으로 받고 브레스트 시를 브르타뉴 공작에게 양도했다. 그러자 다음에는 칼레를 양도할 계획이라는 뜬소문이 돌았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브레스트 주둔군이 런던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글로스터 공작 등 반프랑스파 귀족들은 시위대를 지지하며 국왕을 모욕하는 발언을 조심성 없이 쏟아냈다.

신하들의 반란을 편집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던 리처드 2세는 반프랑스파이자 전 청원파인 글로스터 공작, 아룬델 백작, 워릭 백작을 즉시 체포했다. 문제는 그래놓고도 역모의 증거를 결국 찾지 못했다. 이대로 사과하고 풀어주는 것은 최악의 수였고 남은 방법은 이미 타협하고 지나간 과거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뿐이었다.

우선 글로스터 공작은 달변가이며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왕실 집사장으로서 의회 재판을 주재하는 곤트의 존이 자신의 동생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계획에 동의하리라는 확신도 없었으므로 노퍽 백작을 시켜서 살해했다. 그런 다음 9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1388년 청원파 귀족들에게 내린 사면을 취소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아룬델 백작은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날 처형되었고 워릭 백작은 맨 섬으로 유배되었다.


2.2. 볼링브로크 추방 (1398)[편집]


합의된 거래를 명분도 없이 뒤집고 까다로운 정적은 그냥 암살해버리는 무자비함으로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의 유력자들 사이에서 신용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강압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곤트의 존과 그의 아들인 헨리 볼링브로크를 체포해서 똑같이 사형에 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이미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던 노퍽 공작은 왕의 음모를 랭커스터 부자에게 폭로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곤트의 존은 역모에 동참하는 대신 왕에게 직접 해명을 요구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결과 1398년 9월 16일 노퍽 공작과 헨리 볼링브로크는 결투 재판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결투가 시작되기 직전 리처드 2세는 왕명으로 결투 재판을 취소하고 두 사람을 왕국에서 추방했다. 이 재판은 전 유럽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노퍽 공작이 승리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 글로스터 공작 살해 문제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헨리 볼링브로크가 승리하면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정적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2.3. 볼링브로크의 역습 (1399)[편집]


1399년 2월 곤트의 존이 노환으로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헨리 볼링브로크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형을 무기한으로 연장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6월,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난 사이 볼링브로크는 맨앳암즈 200명만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노섬벌랜드의 변경 영주인 퍼시 가문은 리처드 2세의 화평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한 귀족 사냥의 다음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반란에 동참하라는 볼링브로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반란군은 하루아침에 3000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리처드 2세는 반란 소식을 듣고도 8월 초에나 겨우 웨일즈에 도착했다. 아일랜드에서 모든 군대를 대동한 채 돌아가는 것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소집령에 따라 집결 장소에 모인 국왕군은 모두 흩어졌고 리처드 왕이 이미 죽었거나 국외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왕이 직접 돌아다니며 병력을 모으기에는 이미 늦었다. 리처드 2세는 항복하고 9월 29일 퇴위 문서에 도장을 찍었으며 볼링브로크가 10월 1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리 4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왕은 이듬해 1월 초 폰트프랙트 성으로 끌려갔고, 도착한 지 며칠도 안 돼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에 의해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정신병에 걸린 형 샤를 6세를 정성스럽게 간호하는 등 권력을 얻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고, 1399년 2월 흑사병이 파리 시를 휩쓸었을 때 다른 왕족들처럼 교외로 피난을 가지 않고 도시에 남은 일을 계기로 드디어 삼촌에 대한 반격의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정적인 부르고뉴 공작이 대체로 잉글랜드와의 평화 노선을 추구했으므로 오를레앙 공작은 자연스럽게 철저한 반잉글랜드파가 되었다.


2.4. 웨일즈 반란 (1400)[편집]


한편 반란의 전후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프랑스인들은 리처드 2세가 그저 프랑스와의 화평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호전적인 신하들에게 폐위되었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의 염려와 달리 헨리 4세는 프랑스의 외교 사절단을 공손히 환영했다. 그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여유가 전혀 없었다. 1400년 8월 스코틀랜드의 침공이 시작됐고 9월에는 웨일즈에서 오와인 글린두어가 웨일즈의 군주로 즉위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 2세의 폭정에 대한 대중의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이 모든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지 못하면 파멸은 확정이었다.


2.5. 오를레앙의 역습 (1401)[편집]


1401년 7월, 헨리 4세는 오랜 지연 끝에 리처드 2세의 미망인 이자벨을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지참금 80만 프랑을 돌려주지 않아서 외교적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를 기회로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을 견제하고 과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침공 위험을 과장하면서 프랑스 내의 반잉글랜드 정서를 부추겼다. 스코틀랜드에서도 로스시 공작이 몰락하고 올버니 공작과 더글러스 백작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잉글랜드에 대해 더욱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2.6. 브린글라스 전투 (1402)[편집]


1402년 6월 22일, 브린글라스 전투에서 오와인 글린두어의 웨일스 반란군이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반란군의 사기가 오르고 잉글랜드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9월 14일, 험블턴 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더글러스 백작을 포함한 유력 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한편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원하려는 오를레앙 공작의 계획은 부르고뉴 공작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2.7. 슈루즈베리 전투 (1403)[편집]


잉글랜드 북부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퍼시 가문은 1399년 헨리 볼링브로크의 반란을 지지했지만 곧 그의 통치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가장 큰 불만은 헨리 4세가 퍼시 가문의 라이벌인 네빌 가문을 후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웨스트모얼랜드 백작 랠프 네빌은 왕의 처남으로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1402년 스코틀랜드 국경의 주요 왕실 성채인 록스버러의 수비대장직에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아들 헨리 핫스퍼를 해임하고 랠프 네빌을 임명한 것은 퍼시 가문 입장에서는 매우 부당한 처우였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침공을 방어하고 웨일스 반란을 진압하는 일을 전담했지만 잉글랜드 정부의 재정 문제로 지원금마저 끊기면서 퍼시 가문은 고작 3년 사이 2만 파운드나 되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심지어 험블턴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주력군을 전멸시키고 유력 귀족들을 포로로 잡은 뒤에도 칭찬과 명예만 돌아왔을 뿐 지원은 없었다.

결국 1403년 4월, 헨리 퍼시는 의심을 받지 않고 반란군을 집결시키기 위한 위장 전략으로 더글러스 백작의 영지인 테비엇데일을 침공한다. 그곳에서 포로로 잡아두고 있었던 더글러스 백작을 몰래 풀어줘 군사를 소집하게 한 뒤 웨일스의 오와인 글린두어와도 동맹을 맺었다.

7월 초, 오와인 글린두어가 반란군 8천을 이끌고 공세를 시작해 남부 웨일스의 행정 중심지인 카마던을 점령했다. 글린두어는 얼마 못 가서 잉글랜드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했지만 공포에 질린 지방관들은 다급히 왕실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퍼시 가문의 동향을 의심하고 있었던 헨리 4세는 웨일스 반란군을 무시하고 북부로 향했다.

한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노섬벌랜드와 요크셔와 스코틀랜드에서 군사를 소집하는 동안 그의 아들 핫스퍼는 오와인 글린두어의 웨일스 반란군과 합류하기 위해 슈루즈베리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도중 노섬벌랜드 백작의 동생 토머스 퍼시가 1000여 명의 궁수와 소수의 맨앳암즈를 이끌고 합류했다.

7월 10일, 체스터에 도착한 핫스퍼는 대중을 상대로 자신을 개혁가라고 소개하며 헨리 4세와 그의 관료들이 세금을 낭비하고 공익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리처드 2세의 지지 세력에도 따로 서신을 보내 리처드 2세가 사실 살아있으며 북부에 아버지 노섬벌랜드 백작과 함께 있다고 주장했다. 웨일즈 반란군에게는 에드워드 3세의 모계 후손이면서 삼촌이 글린두어의 사위이기도 한 에드먼드 모티머 백작을 국왕으로 지지했다. 그렇게 랭커스터 왕가의 반대 세력들을 영리하게 결집한 결과 핫스퍼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속도로 일주일 만에 14000여명의 군사를 소집했다. 아마도 예상 밖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핫스퍼는 아버지가 북부에서 주력군을 소집하고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웨일스 총독으로서 슈루즈베리에 주둔한 웨일스 공 헨리의 군대를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헨리 4세는 북부로 향하던 도중 퍼시 가문의 반란 소식을 듣고 미들랜드에서 국왕군을 소집하고 있었는데, 군대가 더 모이기를 기다리지 말고 바로 왕세자와 합류하라는 스코틀랜드 출신 망명 귀족 조지 던바의 조언을 듣고 곧장 슈루즈베리로 향했다. 핫스퍼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인 7월 20일 헨리 4세는 왕세자의 군대와 합류했고, 다음 날 인근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던 핫스퍼의 반란군을 기습했다. 핫스퍼는 진형을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요청했지만 헨리 4세는 회담을 짧게 끊고 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왕세자 헨리가 얼굴에 화살을 맞아 6인치나 관통되는 중상을 입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 끝에 국왕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핫스퍼는 더글러스 백작과 친위대와 함께 헨리 4세의 깃발을 향해 돌격했지만 국왕 호위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왕실 기사 36명이 전사하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핫스퍼는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전사했고, 더글러스 백작은 험블턴 힐 전투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또다시 포로로 잡혔다. 핫스퍼가 죽었다는 외침이 퍼지면서 반란군은 무너져내렸다.

슈루즈베리에서 반란군이 대패하고 핫스퍼가 죽었으며 더글러스 백작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퍼지자 북부에서 집결 중이었던 반란군도 내분에 빠졌다. 8월 초,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결국 폰트프랙트 성에서 국왕에게 항복한다. 헨리 4세는 그의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의회에 처분을 맡겼다. 하원은 노섬벌랜드 백작이 비록 반역을 저질렀지만 그동안 국경을 지킨 공로를 인정해서 사면받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핫스퍼와 토머스 퍼시의 토지는 몰수되었고 그중 일부는 반란 진압의 일등 공신인 조지 던바에게 하사되었다.


3. 돌아온 해적 시대 (1403~1407)[편집]


파일:pero nino 1405.jpg

우리 방패병들과 쇠뇌수들이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면서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 잉글랜드의 중장병들이 진군해왔다. 이 중장병들은 전열 가운데로 들어와서 페로 니뇨의 부대 앞에 이르렀다. 페로 니뇨는 이에 맞서 중장병들을 진군시켰다.

많은 강한 창 찌르기가 가해졌고 그 결과 양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일부는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창을 버리면서 중장병들은 도끼와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혼전이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면갑이 떨어져 나가거나 팔 갑옷과 다리 갑옷이 벗겨져 나갔고, 다른 이들은 도끼와 검을 손에서 놓쳤다. 어떤 이들은 서로 맞붙어 드잡이질했고, 다른 이들은 단검을 손에 쥐었다. 어떤 이들은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이들은 다시 일어섰다. 많은 곳에서 피가 넘치게 흘렀다.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의 연대기



3.1. 플리머스 습격 (1403)[편집]


헨리 4세의 찬탈과 오를레앙 파벌의 부상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관계가 냉각되면서 1402년부터 영국해협에서 사략선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영지 중에서 가장 부유한 플랑드르와 부르고뉴파의 정치적 동맹인 브르타뉴 둘 다 해상 무역이 주된 생계수단이었다. 결국 신하들과 동맹의 요구에 굴복한 부르고뉴 공작은 1402년 10월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어린 브르타뉴 공작의 섭정직에서 해임했고 이듬해인 1403년 5월에는 잉글랜드와의 휴전 협정을 재확인하고 플랑드르 백령의 중립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오를레앙 공작이 심신미약 상태인 샤를 6세를 설득해 정부를 장악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협상 이전보다도 험악해졌다. 7월부터 프랑스의 대규모 사략 함대가 잉글랜드의 상선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8월에는 플리머스 시를 습격해서 불태웠다.


3.2. 다트머스 전투 (1404)[편집]


1404년 4월 15일에는 맨앳암즈 2000명과 다수의 쇠뇌수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이 다트머스 인근 해안에 상륙했지만 습격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수비대의 반격에 참패하고 500명 이상이 전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상선 약탈과 해안 습격은 끊이지 않았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그밖에도 가스코뉴를 여러 차례 침공했지만 보르도 공략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다가 1407년 11월 암살당한다.


4. 프랑스의 내전 (1407~1415)[편집]


파일:Révolte des Cabochiens.jpg

"평화 조약. 다시 평화 조약. 하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1409년 파리 고등법원 서기의 낙서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사망한 이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각종 연금과 증여 수익을 독점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용맹공 장 1세는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었다.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의 정쟁은 결국 극단으로 치달아, 1407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1]이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터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전이 발생한 주된 원인은 샤를 5세가 지난 세대 동안 공들여 이룩한 왕권이었다. 당시 부유한 백작령이나 공작령의 연간 조세수입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2~30만 프랑 전후에 불과했던 반면에, 프랑스 왕실의 수입은 200만 프랑을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유력한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고를 전용하기 시작하면 반대 파벌과 어마어마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경쟁상대를 간단히 말려죽일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장 1세는 사촌을 암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심복들은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와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시종이 회의에서 저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하고는 영지인 플랑드르로 달아났다.

[1] 플랑드르 백작을 겸임한 호담공 필리프 2세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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