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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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백동으로 만든 동전
2. 대한제국의 화폐


1. 백동으로 만든 동전[편집]


대한민국 원 중에는 백원 주화오백원 주화가 여기에 속한다.

2. 대한제국의 화폐[편집]


파일:20170830_두돈오푼.jpg
1892년부터 1901년까지 발행한, 구한말백동으로 만든 흰색 동전이자 조선 최후의 화폐.[1] 1번 항목의 백동화에도 속한다. 한글로 '두돈 오푼'이라고 쓰여 있으며, 엽전 25개의 가치를 가지고 전환국에서 제조되었다.

대한 제국은 은본위제를 받아들여서 일본돈 1원의 가치를 5냥으로 삼고, 1냥 = 10전(돈) = 100푼이라는 체계를 잡았다. 1냥(한량)과 5량(닷량)은 은화, 2전5푼은 백동화, 5푼은 적동화, 1푼은 황동화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2전 5푼 백동화만 유명한 것은 25배의 가치에 비해 제조 비용이 낮아 정부가 재정 보충을 위해 마구 발행하게 되었으며, 광범위한 위조를 불러와 흥선대원군 시대의 악명 높았던 당백전 못지않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백동화는 근대 화폐였기 때문에 기존 상평통보 위조 기술 정도로는 밀조가 불가능했으며 조선 정부도 마찬가지. 그러나 전환국의 주조 기술은 일본에서 왔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밀조가 가능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밀조된 백동화와 제조 기계가 조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밀조 기계만 적어도 150대가 한반도로 밀수되었고, 수입된 백동화의 양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일본의 백동화 밀조는 국제적 문제로까지 불거져서, 1902년 일본에는 '한국의 백동화 위변 조범 처벌령'까지 제정된다. 실제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광무 2년(1898년) 2전 5푼 백동화인데, 이 시기 즈음에는 일본과 대한제국의 사이가 끝장나게 안 좋았기 때문에 백동화 위조를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저 일본이 시행한 처벌령은 1년 이하의 징역이라는 형식적인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위조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 당시 통계를 보면, 서울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25%가량, 그리고 제2 도시였던 평양에서는 80% 가량이 불량 혹은 위조된 백동화였다. 이로 인해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정부는 브라운 대신 탁지부 재정 고문으로 고빙된 러시아 인 알렉시에프(K. Alexieff)의 영향하에 1898년 2월 22일자로 각인 은화 통용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금지령은 일본과 영국의 외교적 압력으로 5개월 만인 7월 11일에 해제되었다.

이후 대한 제국은 1901년부터 금본위제로 전환하고, 그에 따른 화폐를 발행하게 된다. 20원, 10원, 5원은 금화로 제작되었고, 반원, 20전, 10전은 은화, 5전은 백동화, 1전과 반전이 청동화였다.

문제는 기존에 너무 많이 풀린 동전들이 회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평통보는 화폐 정리 사업 시행 이후까지 남아있었고, 2전 5푼 백동화의 사주전도 금본위제 시행 이후에도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수입된 밀주전 기계가 적어도 150여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이 화폐정리사업을 진행하고, 전환국은 없애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조치들로 인해 대한제국은 일제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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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조선 - 구한말에 만들어진 신종화폐 신뢰도는 당백전, 그리고 본 항목이 거하게 말아먹은 이래 당연히 상평통보보다 훨씬 낮았다. 상평통보가 얼마나 끈질겼냐면 일제강점기에서조차 일부 도서 지역에서는 조선 엔에 이은 보조 화폐 정도의 신뢰도를 가지고 유통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