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프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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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f VI (벨프 6세)
파일:벨프 6세.jpg
가문
벨프 가문
생몰년도
1115년 ~ 1191년 12월 15일 (76세)
출생지
바이에른
사망지
메밍겐
재위
기간
토스카나 후작
(1152년 - 1173년)
스폴레토 공작
(1152년 - 1160년, 1167년 - 1173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토스카나 후작령 20대 후작, 스폴레토 공국 55, 57대 공작.


2. 행적[편집]


1115년경 바이에른에서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와 작센 공작 마그누스의 딸 볼프힐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콘라트, 하인리히 오만공, 유디트, 소피, 마틸데, 볼프힐트가 있었다. 112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벨프가의 우두머리가 된 형 하인리히 오만공의 주선으로 1131년 이전에 칼프 백작 고드프리트의 딸 우타와 결혼했다. 1131년 2월 장인 고드프리트가 사망한 뒤, 그는 고드프리트의 조카 아달베르트 4세를 상대로 바인스베르크 성을 포함한 칼프 일대의 상속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그 후 상슈바벤 일대의 관리를 맡던 그는 113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가 하인리히 오만공을 반역자로 규탄하고 바이에른 공국과 작센 공국, 그리고 슈바벤 일대를 다른 귀족들에게 넘기겠다고 통보하자 하인리히의 편에 서서 콘라트 3세에 맞섰다. 하인리히 오만공은 작센 공작으로 부임하려던 브란덴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를 가볍게 격파한 뒤 바이에른을 빼앗아간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1139년 10월 20일 크베들린부르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아들 하인리히 사자공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당시 하인리히 사자공은 13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해서 군대를 통솔해 레오폴트 3세와 맞섰다. 1140년 망폴강 계곡에서 레오폴트 3세를 격파했지만, 그 직후 바인스베르크 성 인근에서 벌어진 하일브론 전투에서 콘라트 3세에게 패하고 바인스베르크를 상실했다. 하지만 콘라트 3세 지지자들의 작센을 향한 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114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레오폴트 3세가 바이에른을 가지는 것을 인정하되 하인리히 사자공이 작센 공작에 선임되는 것을 콘라트 3세가 인정한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147년 콘라트 3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에 뛰어들었을 때 동행했지만 1147년 10월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룸 술탄국 군대에게 참패했다. 1148년 여름 아크레에 도착한 뒤 누르 앗 딘 마흐무드에 대항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다마스쿠스를 공격한다는 계획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마스쿠스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하인리히 사자공과 함께 바이에른을 되찾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지만, 1150년 플로크베르크 전투에서 콘라트 3세와 그의 아들 하인리히 베렝거에게 패배했다. 1151년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프리드리히의 중재에 따라 콘라트 3세와 화해하고 메르팅겐을 수여받았다.

1152년 콘라트 3세가 사망한 뒤 신성 로마 황제 후보에 거론되었지만 슈바벤 공자 프리드리히가 그를 대신해 프리드리히 1세로 등극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그를 달래고자 토스카나 후작 겸 스폴레토 공작 직위를 수여했다. 여기에 1156년 바이에른을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돌려줬다. 이리하여 중부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확대한 그는 1160년 아들 벨프 7세에게 스폴레토 공작위를 물려줬다. 이렇듯 슈바벤 가문과 벨프 가문의 사이는 초기에 원만했지만, 1164년 튀빙겐 분쟁이 발발하면서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보다 앞서, 튀빙겐 궁정백 휴고가 강도 짓을 일삼던 노상 강도를 체포했다. 이 강도들 중에는 벨프 가문에 속한 이가 있었는데, 휴고는 다른 2명은 풀어주면서도 그 강도를 교수형에 처했다.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1164년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슈파이어 백작, 보름스 백작, 자링엔 백작, 바덴과 보부르크 후작, 칼프 백작 등을 포함해 벨프 가문에 속한 수많은 백작과 귀족들을 소집한 뒤 아들 벨프 7세에게 총 2,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튀링겐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휴고는 이에 맞서 1,500명의 병력을 소집했고, 1164년 9월 6일 데렝딩겐에 도착하여 휴식을 막 취하려던 벨프군을 기습했다. 먼 길을 행군하느라 지쳐있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라 붕괴되었고, 벨프 7세는 3명의 추종자들만 거느린 채 아칼름 성으로 피신했다.

아들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1165년 군대를 재소집한 뒤 친히 튀링겐으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힐드리즈하우젠, 팔츠그라펜바일러, 켈민츠 등 여러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휴고는 슈바벤 가주인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에 응해 1166년 초 상 슈바벤 일대를 파괴하여 벨프군이 라벤스부르크 성으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이리하여 슈바벤 가문과 벨프 가문간의 전면전이 벌어지려 하자, 프리드리히 1세가 개입했다. 1166년 3월 울름 법정을 소집한 황제는 휴고가 이 모든 분쟁의 근원이라고 성토하고 벨프 7세 앞에서 3번 엎드려 잘못을 빌게 한 뒤 추레티엔(Churrätien) 성에서 억류될 것을 명령했다.

1167년, 프리드리히 1세의 구엘프파를 응징하기 위한 북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던 벨프 7세가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깊은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정치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탈리아의 영지를 프리드리히 1세에게 상당한 금액에 팔았다. 다만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 직위는 그대로 맡다가 1173년 정식으로 물러났고, 마인츠 대주교 크리스티안 1세 폰 부흐가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토스카나 후작령의 대리인으로 부임했다. 그 후 슈바벤에서 교회를 후원할 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1176년 하인리히 사자공은 프리드리히 1세의 이탈리아 원정을 돕기를 거부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로 출정했다가 레나노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큰 부상을 입으며 간신히 목숨을 구하여 돌아온 뒤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는 자신에게 동조하는 제후들을 포섭한 후 1180년 제후들로 구성된 법정을 소집한 후 사자공에게 황제에게 불복종한 죄를 물어 법의 보호를 박탈하고 영지를 모두 몰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사자공은 이에 맞서기 위해 슈바벤에서 은거중이던 벨프 6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하인리히 사자공은 1182년 프리리히 1세의 군대에게 축출된 뒤 노르망디로 망명했다. 그 후 프리드리히 1세는 바이에른 공국을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토 1세에게 넘겼고, 작센 공국을 여러 개로 분할하여 제후들에게 재분배했다. 오직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 일대만이 벨프 6세에게 사유지로 넘겨졌다.[1]

1191년 12월 15일, 향년 76세의 나이로 메밍겐에서 사망했다. 사후 자신이 생전에 세웠던 스타인가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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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벨프 가문은 이 땅을 바탕으로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