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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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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涅槃方等敎 열반의 평등한 가르침은

傳授自吾師 우리 스승께서 전수하신 것

兩聖橫經日 두 성인[1]

이 책 펼쳐 배우던 날

高僧獨步時 고승께선 홀로 앞서 걷고 계셨지

從緣任南北 인연 따라 남북으로 다니셨을 뿐

在道絶迎隨 도를 맞이하고 따라줌에 연연치 않으셨네

可惜飛房後 슬프게도 승방 날려 이곳에 오신 뒤

東明故國危 동명성왕의 고국이 위태로웠다네

- 대각국사 의천,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의 보덕성사의 진영에 예배하다>


고구려 말기의 고승. 5교종의 하나인 열반종(涅槃宗)의 개조(開祖)로 꼽힌다. 당대 한반도에서 상당히 유명했던 고승이기 때문에 존칭이 붙어 보덕화상(和尙)[2]이라고 표기된 경우가 많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승전이라는 문헌에 따르면 자는 지법(智法)으로 고구려[3] 용강현(龍岡縣) 출신으로 되어 있다.

출가해 평양성에서 살았는데 산골의 노승이 찾아와서 불경을 강론해 주기를 부탁했고 굳이 사양하면서 받지 않다가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 40여 권을 강론해 주었고, 강론을 마친 뒤에 평양 서쪽 대보산 동굴에서 참선하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 보덕에게 이곳에 머물러 주기를 청하면서 지팡이로 "이 아래를 파보면 팔면칠층 석탑이 있을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보덕이 그곳을 파보니 신인의 말대로 팔면 칠층 석탑이 나왔고, 그곳에 절을 지어 영탑사라 하고 머물렀다고 한다.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도교를 중시하면서 불교를 견제하는 정책을 펴자, 삿된 가르침인[4] 도교가 바른 가르침인 불교와 충돌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며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제자들을 데리고 백제로 망명했다. 고구려를 떠나기 전에 보덕은 반룡산 연복사[5]에 있었다고 하며, 신통력으로 자신이 머물던 방장(方丈, 처소)를 반룡산이 있는 함흥에서부터 통째로 허공으로 날려서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6]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문 닫고 하루 지나 보니 다음날 절이 다른 곳에 옮겨져 있었다나...

삼국사기에는 보덕이 고구려를 떠나 백제로 간 것을 고구려 보장왕 9년(650년) 여름 6월, 삼국유사는 최치원이 지은 보덕의 전기를 따라 당 고종 건봉 2년 정묘(667년) 3월 3일이라고 적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자는 고구려를 떠난 시점이고 후자는 고구려를 떠나서 전주 고대산에 도착한 시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지적이 있다.[7]

전주 고대산에 온 뒤 백제가 멸망하면서 통일신라에서 그대로 종교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신라 승려 원효의상에게 <열반경>과 <방등경>, <유마경> 등을 가르쳤다고 하며, 보덕을 따라 온 11명의 제자들인 무상(無上), 적멸(寂滅), 의융(義融), 지수(智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 수정(水淨), 사대(四大), 개원(開原), 명덕(明德)도 지금의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 등 전국 각지로 흩어져 절을 세웠다.

보덕이 고구려에서 날려서 왔다는 그의 처소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라 불리며 전주 고대산 경복사(景福寺)에 고려 시대까지 남아 있었고 보덕의 영정이 걸려 있었으며, 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김부식이 보덕의 전기를 지었고 대각국사 의천, 이자연, 이규보 등이 모두 이곳을 방문해 기록을 남겼지만 지금은 웬만한 한국의 옛 절들이 그러하듯 경복사 자체가 절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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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효와 의상. 시에서 "원효와 의상이 보덕에게서 배웠다"고 적고 있다.[2]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키는 말.[3] 삼국유사 원문에는 '전고려(前高麗)'라고 되어 있는데,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한 고려 왕조의 입장에서 고구려(고려)를 '전(前)' 자를 앞에 붙여 전고려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치 중국의 한나라왕망을 기점으로 전한, 후한 이렇게 나누듯이.[4] 삼국유사의 표현이다. 애초에 삼국유사의 텍스트 자체가 "불교를 믿어야 잘 된다"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 도교 진흥책을 폈던 연개소문은 아예 작정하고 고구려를 망치려고 하는 역적 비스무리하게 삼국유사 속에 그려져 있다.[5] 반룡산은 <동국이상국집>에서 함흥에 있는 지명으로 지목하고 있다.[6] 지금의 전주 고덕산이다.[7] 보덕이 고구려를 떠나 망명할 곳으로 완주 고덕산을 고른 것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명덕(明德)의 의견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막상 명덕은 도착해서 고덕산이 지세는 좋은데 물이 별로 없다며 이럴 줄 알았으면 반룡산에서 절을 옮겨올 때 계곡물도 같이 옮겨올 걸 그랬다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