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아인슈타인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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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Quantum Mechan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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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고전 양자역학에서
3. 1차 사고 실험
4. 2차 사고 실험
5. 3차 사고 실험 : EPR 역설


1. 개요[편집]


보어-아인슈타인 논쟁(Bohr-Einstein Debate)양자역학의 여러 쟁점에 관하여 닐스 보어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벌인 일련의 논쟁이다. 아인슈타인이 날카롭고 정교한 사고실험을 내놓으면, 보어가 그것을 다시 기발한 방법으로 논파해내면서 초창기의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빠르게 성숙화되는 데에 기여하였다.

2. 고전 양자역학에서[편집]


어떤 물리적 양을 불연속적으로 파악하는 양자 역학의 시작은 복사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는데, 1900년 막스 플랑크는 흑체 복사의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빛이 흑체의 벽을 구성하는 원자와 상호작용하면서 양자적 단위의 에너지만을 교환한다는 양자 가설을 내놓았다. 이 가설을 발전시키고 물리학의 여러 영역에 적용시키려 한 것은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1905년 광전 효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양자 가설을 도입하고, 이어서 1907년 고체의 비열 문제(아인슈타인 고체 모델)를 통해 복사 이외의 영역에서 양자 역학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였다. 한편, 닐스 보어는 1913년 전자의 에너지 준위를 양자화한 보어 모델(Bohr model)을 도입하면서 양자 역학에 거대한 기여를 하였고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원자 모델을 적용하여 플랑크의 흑체 복사 공식을 보다 나은 방식으로 유도하고, 유도 방출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고전 역학의 프레임 안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기여들은 고전적 양자 역학(Classical quantum mechanics)을 이룬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견해 대립은 이미 이 고전 양자역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의 대립은 사실상 광양자 가설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문제의 경우 구도로 봤을 때는 사실 아인슈타인과 나머지 물리학계 전체의 대립으로 보아야 합당하다. 하지만 보어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마지막까지 광양자 개념을 반대하던 물리학자였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인슈타인은 광양자가 물리적 실재(physical reality)를 잘 반영한다고 본 반면, 보어를 포함한 나머지 물리학자들은 "실험적으로 옳더라도" 본질적인 해석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10여년 동안 거의 조롱에 가까운 비판을 받았는데, 일단 당시 물리학의 기준에서 입자성과 파동성은 당연히 구분되는 것이라 생각했고(아인슈타인은 두 성질이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복사 문제를 제외한 빛의 성질, 즉 간섭과 회절은 모두 파동성을 명확하게 입증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빛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맥스웰의 전자기파 모델만한 것이 없었다[1].

이후 1914년 밀리컨(Millikan)의 광전효과 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광전효과 공식(플랑크 상수를 비례 상수로 빛의 진동수에 비례함 -> [math(E_k = hf - W)])이 입증되었으나, 광양자 가설은 여전히 물리학자들이 보기에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밀리컨은 "무모하다까지는 아니라도 과감하다"(bold, not to say reckless)라고 평가했고, 여전히 광양자 가설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1922년 컴프턴이 수행한 산란 실험으로 빛이 운동량을 가진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광양자 가설은 점차 학계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어는 빛의 파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크래머스, 슬레이터와 함께 1924년 BKS(Bohr-Kramers-Slater theory)를 주창하여,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법칙을 "통계적인 법칙"으로 재해석했다. 그러나 BKS 이론은 1924년 개선된 콤프턴 실험에 의해 실험적으로 틀리다는 것이 증명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BKS 이론의 실패에 대해서도 보어는 광양자가 입증되었다고 믿지 않았으며, 고전적인 시공간 모델이 양자 현상을 서술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다고 해석하였다. 실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BKS 이론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 더 나아가 불확정성 원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고전 양자역학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석된다.

이렇게 양자 세계에서는 파동성과 입자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 슈뢰딩거의 파동 함수 및 파동 역학 등 획기적인 기여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리고 양자 역학은 1925년 이후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막스 보른(Born)이 파동 함수에 관한 확률적 해석을 내놓고(1926), 베르너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불확정성 원리를 제안(1927)하는 등 양자계의 물리과정에 대해 비결정적(indeterministic) 해석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때까지 양자역학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하던 물리학자 중 한 명이었으나, 물리학계의 이런 움직임에 반감을 표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물론, 아인슈타인 뿐 아니라 플랑크, 슈뢰딩거 등 적지 않은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의 이러한 해석/방향성에 반대하였는데, 아인슈타인은 보다 적극적으로 여러 사고실험을 제안하면서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이 내놓은 비결정적 해석의 허점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슈뢰딩거 역시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하다.) 한편, 보어는 이들이 내놓은 새로운 해석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인물 중 하나로서(이미, BKS 이론을 통해 결이 통하는 주장을 했다), 둘의 학문적 견해에 다시금 차이가 발생하였다.

3. 1차 사고 실험[편집]


첫번째 논쟁은 1927년 5차 솔베이 회의에서 일어났다. 아인슈타인은 틈틈이 보어와 그 동료들에게 자신의 사고실험을 제시하면서 불확정성 원리를 논파하려고 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하고 눈여겨볼만한 것은 다음 슬릿 실험이다.


슬릿 실험 [2]

아인슈타인 : 이 실험에서, 첫 번째 슬릿 S1은 고정되어 있지만 입자가 통과하면서 충격량을 받아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입자는 S1을 통과하면서 위 또는 아래로 방향이 꺾이고 다시 S2의 두 슬릿 중 하나를 통과하면서 스크린 F에 도달하게 된다. 이 때, 입자들은 슬릿 S1을 통과하면서 슬릿과 상호작용하면서 운동량을 주고받으며, 운동량은 보존되므로 슬릿 S1은 입자에 대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슬릿 S1의 움직임을 통해 입자의 이동 경로(운동량)를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F를 통해 간섭 무늬(입자의 위치) 또한 정확하게 알 수 있으므로 이는 불확정성 원리에 위배된다.

보어 : 첫번째 슬릿이 완전히 정지해있다는 가정이 잘못되었다. 이 경우 슬릿의 위치와 운동량이 모두 정해져 있다고 가정한 셈이므로 불확정성 원리를 처음부터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오류이다. 다시 말해, S1의 위치가 정확할수록(입자의 위치가 정확할수록) S1은 고정시킬 수 없으며(입자의 운동량은 부정확하며), 반대로 S1이 고정되어 있을수록 S1의 위치를 정확하게 할 수 없다.

4. 2차 사고 실험[편집]


1930년 6차 솔베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더욱 정교화된 사고실험을 보어에게 제안한다. 광자 상자 항목 참고.


아인슈타인 상자 [3]

아인슈타인 : 상자 안에 빛을 채우고, 상자의 무게를 잰다. 광자 하나가 빠져나올만큼의 짧은 시간동안 셔터를 열고 닫는다. 그 다음 상자의 무게를 재면, [math(E=mc^2)]로부터 광자에 의해 방출된 에너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math(\Delta E = 0)]) 한편 셔터를 열고 닫은 시간의 불확정성([math(\Delta t)])은 유한하므로, [math(\Delta E \Delta t)]가 특정 값보다 커질 순 없다.

보어 : 광자가 방출되어 상자의 질량이 감소하면 높이가 상승하면서 (지구에 대한) 중력장이 변화한다. 이 때 상자에 질량을 추가하여 다시 상자를 원래의 높이로 돌려놓는다고 하자. 이 작업에 걸리는 시간은 용수철이 얼마나 뻑뻑한지에 의해 결정되는데, 용수철이 뻑뻑할수록 평형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감소한다. 한편 높이를 오랜 시간동안 맞출수록 상자의 위치는 점점 평형을 찾게 된다. 적절하게 평형이 맞춰진 순간에 이 과정을 종료하면 높이에 일정한 오차가 생기는데, 이에 따라 질량의 오차도 발생하게 된다. 이 질량의 오차는 중력장의 변화로 중력 시간 지연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에 따라 발생한 시간의 불확정성([math(\Delta t)])이 [math(\Delta E)]와 함께 불확정성 원리를 충족시키게 된다.

이 사고 실험은 상당히 정교해져서 1차 때와 달리 보어는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문제를 풀기 위해 씨름해야 했고 심지어 주변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아인슈타인이 맞다면 물리가 끝장난다"며 열변을 토하고 다녔다는 뒷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다음날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갖고 오면서 논파에 성공하였다. 아인슈타인도 지쳤는지 이후로 불확정성 원리 자체를 반박하는 것은 포기하였다.

5. 3차 사고 실험 : EPR 역설[편집]


아인슈타인은 논쟁에서 패배했으나 그냥 넘어갈수는 없었는지 이후 양자역학에 대한 실질적 기여를 잠정적으로 거의 중단하고 철학적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학문적으로는 주로 양자역학보다는 통일장이나 일반 상대론 관련 문제에 기여한다. 대표적으로 N체 문제의 근사해(1937), 아인슈타인-로젠 다리(1937) 등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마지막으로 기를 모아 EPR 역설(1935)을 발표하였는데, EPR 역설은 양자역학의 완전성에 대해 물리학의 보다 본질적인 원리들, 즉 실재성과 국소성에 기반하여 논의한 사고 실험으로, 이 논문을 통해 그는 양자 얽힘(entanglement) 현상을 발견함으로써 다시금 (본의는 아니지만) 양자역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EPR 역설의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보어는 "실재"의 의미가 불분명하다고 반박했지만, 실질적으로 EPR 역설이 논파된 건(정확히는, 양자 얽힘이 실재함이 증명된 건) 벨의 부등식(1964)과 그 실험에 의해서이다.

아인슈타인은 기본적으로 양자역학의 비결정적 해석에는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는데, 양자역학이 틀렸다는 것보다는 태생적으로 완전한 예측을 하지 못해 궁극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는(언젠가 결정론적 해석이 나올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숨은 변수 해석(Hidden variable interpretation)에서 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은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경계에서, 아인슈타인이 제공한 광범위하고 심도 높은 학문적 기여는 물리학을 현대화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가 최후의 고전 물리학자로 간간히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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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랑크의 경우 다른 업적은 다 긍정하면서도 광양자 가설은 유일하게 아인슈타인의 엇나간 흠이라고 생각했다.[2] 저작자 : Stannered #[3] 저작자 : Prokaryotic Caspase Homolo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