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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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의의
4. 관련 문서
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北學議. 조선시대 실학자 박제가가 1778년~1798년에 저술한 책.

말 그대로 북학(北學), 즉 북쪽에 있는 나라인 청나라를 배우자는 의미에서 저술한 책이다.

1778년 절친인 이덕무와 함께 중국 청나라의 문화를 견문한 후 1차로 북학의를 저술하고, 이후 수년간 내용을 보완하여 북학의 내편, 북학의 외편을 만들었다. 그러다 십수년이 지난 1798년, 정조가 백성들을 위한 농업 서적을 구하러 다니자 기존 북학의에서 농업 관련 내용을 추가한 진소본 북학의를 만들어 바쳤다. 때문에 북학의는 '내편', '외편', '진소본' 의 세 종류가 있다.

2023년 2월, 박제가의 친필본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판본이 공개되었다.#

2. 내용[편집]


전체적으로 보면 무작정 조선을 까고 청나라를 치켜세우는 글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1] 물론 잘 읽어 보면 그런 식의 책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식의 악의가 있었다면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책에 제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낙후된 원인에 대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2]

책의 서문에서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당대의 조선이 낙후되었다고 진단을 내린다. 대놓고 현재 국가의 큰 폐단은 한 마디로 궁핍과 가난이라고 결론내리고, 재물을 사용할 기술을 알지 못하고 수공업에 종사하던 장인과 목축과 도공의 기술이 형편없으며 사농공상 네 부류의 백성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곤궁하게 살기 때문에 서로를 구제할 방도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걸로 무작정 헬조선, 청나라는 높은 산봉우리 비하하는게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에 대해 깊이 고찰한다. 그리고 위기극복의 대안으로 중국 청나라와 통상하는 길밖에 없음을 결론내린다. 물론 무조건 "청나라 너무 좋아~"라고 한 것은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3][4]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는 해로 통상이 차단당한 상태고, 일본과는 극히 제한적인 외교 및 통상관계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서양 제국에 대해서는 조선 스스로가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하며 문을 걸어잠근 상태였다. 박제가는 조선의 문호를 점진적으로 개방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여겼다. 북학의에서 박제가는 국토가 가장 작았던 신라가 부국강병을 이뤄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은 외국과 해로통상을 한 데 있었다고 주장하며, 외국과의 통상은 단순히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는 데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기술과 예능을 배우고 저들의 풍속을 질문함으로써, 1차적으로 교역의 이익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2차적으로 기술과 문화를 학습하여 선진화되며, 3차적으로 외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알고 들으면서 국격이 높아지고 높은 대우를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서양과 일본은 여러가지로 지금 당장 통상을 여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육로 통상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청나라와는 지금 당장 문호를 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대부들에 대한 비판이 많다. 사대부들이 기득권을 위해 폐쇄적으로 농업 위주의 조선 사회를 만들어놓고 상업은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라며 그동안 억제해왔다고 비판했다.[5] 박제가는 책에서 통상을 통해 상업을 진흥시키자는 주장을 하면서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온갖 혜택을 누리는 유생이야말로 나라의 좀벌레라고 혹평하였다. 도덕적 이상만으로는 사회를 진보시킬 수 없으며, 근면한 농업경작만으로는 산업을 진작하고 기술을 진보시킬 수 없다고 여긴 것.[6] 또한 현재 국내의 선비들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사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가 가득한데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북벌론과 같은 정신승리법으로는 구국과 구빈(救貧)의 길을 걸을 수 없다며 이러한 상황은 고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수요억제, 근검절약, 절검이 민중의 삶에 도움이 된다는 성리학적 통념을 버리고 생산 확충에 따른 충분한 공급이 유통 질서를 원활하게 한다는 경제관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조선판 총수요정책 아나바다 의문의 1패

전체적으로 효율성 추구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책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에서 한 가지라도 갖추어지지 않을 때에는 정덕을 따지는 것이 허울 좋은 이상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는데, 한 마디로 의식주 문제도 해결 못하는데 도덕이고 윤리고 간에 무슨 소용이냐는 뜻. 조선판 매슬로 모형 도덕 우위의 학문이 권위를 가지고 있던 조국의 임금에게 바치기도 했던 책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과격한 느낌이다.

이 책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청을 배우자 정도인데 이걸 가지고 조선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박제가는 당대에 한 획을 그은 실학자는 맞으나, 그가 말한 것처럼 청나라 사람들이라고 다 잘 살았다고 보긴 어렵다. 애초에 박제가는 청나라 곳곳을 십여년쯤 걸려 견문한 것이 아니라 베이징 쪽에 잠깐 다녀온 것일 뿐이다. 이런 점 때문인지 아니면 이를 빌미로 조선을 폄하하는 일각의 시선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역덕들 중에선 박제가를 현대로 따지면 미국병에 걸린 스노브에 비유하여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7]

3. 의의[편집]


지나치게 조선의 상황을 깎아내린 게 아닌가 하는 평[8]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중국과 한국의 실생활과 생활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 작품으로 그 시대 일반인들의 생활 모습과 수레, 배, 성, 벽돌, 기와, 자기, 주택, 도로, 교량, 말 등에 대한 것들을 명확히 알아볼 수 있다. 밭, 거름, 뽕나무, 과실 등의 농사와 관련된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의 시대 풍조상 청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과단성 있고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병자호란 이후부터 북벌론이 한때 조선 사대부의 정신을 지배하는 등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는 정말 엄청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실제로는 박제가가 중국에 지나치게 빠져들었다기보다 조선에서 중국의 발전상과 사회에 대해 이해는커녕 제대로 보려 하지도 않는 국수주의적인 폐쇄성과 청나라에 대한 배타적인 적대감이 도가 지나쳤던 것이다. 그로인해 조선이 인식하고 생각하는 마음속의 중국실제 중국의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박제가가 꼬집은건 이러한 조선의 심각한 모순이였다.[9]

박제가가 일방적인 스노브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조선과 청을 비교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 조선의 궁핍함과 모순을 지적하는 것에서 국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교만 하고 끝나면 흔히 보이는 스노브이다. 그러나 박제가는 더 나아가 "조선과 청은 왜 다른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이에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10]

북학의는‘경제적 이익’을 중요시 여겨야만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가가 경제적 이익을 매우 중요시여겨야 하는건 너무나도 당연한 기본상식이지만 당시 조선은 이익 추구를 억누르고 성리학적인 도덕과 정의를 중요시 여기는 주자의 나라였다. 이런 환경에서 북학의는 조선의 문제는 경제 문제, 즉 근본적으로 조선이 가난하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익에 신경쓰고, 상업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수레의 필요성은 강하게 주장했는데 놀랍게도 19세기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들도 수레의 필요성을 주장한 걸 보면[11] 박제가의 혜안이 보인다.[12] 하지만 산지가 많은 당시의 도로 사정에서는 고개를 통해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는데 능선을 아무리 낮게 잡는다고 해도 산은 산인지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오는 고개의 특성상 수레를 끌고 다니기 어려웠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도로망이 촘촘해진 시기는 경부고속도로 설치 시점 이후였다.

4. 관련 문서[편집]




5.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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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현대 대한민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선진국의 사례를 운운하며 한국을 비판하는 사대주의아님 성향을 지닌 점을 감안한다면,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이라고 해서 그런 식의 비판적 시각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2] 북학의의 각 부분부분의 구성은 "조선에는 ...한 문제가 있다. 그런데 중국(때로는 일본도 넣는다.)에는 ...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잘 산다." 라고 되어 있다. 단 하나 과거제도 부분은 비교적 중국과 비교하는 부분이 적다.[3] 가령 해로 통상에서 일본, 베트남 등이 탈락인 이유로는, 일본은 약삭빠르고 이웃나라 정탐이나 꾀한다고, 베트남 등은 너무 멀어서 탈락감이라고 서술했다. 사실 일본이 15~16세기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교류한 것을 보면 당대 기술력으로 불가능한건 아니나 북학의에서 나오는 조선의 선박 기술을 보면 조선 한정으로는 박제가가 한 말이 맞아떨어진다.[4] 하지만 조선시대의 사료들이 계속 발췌되어 연구되는 과정에서 박제가의 주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부분이 드러났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조선의 배가 물이 차올라 곡식을 싣지 못하는 형편없는 것이라며 혹평했으나 18세기 조선의 경강상인들은 무려 2천석 이상의 곡식을 실어나를 수 있는 대형선박을 잘만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 그러면서 양반은 일을 안하려고 하며 먹고 살기 궁핍하면 구걸을 하거나 권세가에 빌붙는다고 비판했다. 때문에 이게 상업보다 나은게 뭐냐며 상인들도 이 짓은 안 한다고 비판한다. 금난전권을 보면 좀 다르긴 하지만[6] 또한 상업도 이 모양이지만 농업도 바꿔야 할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현 지배층은 상업이고 농업이고 도움 되는 곳이 없다고 깐 것[7] 실제로 중국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도 폈으니 박제가가 좀 중빠 기질이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박제가가 처한 상황을 보면 이해도 될 만한데 박제가는 서자라서 자기가 태어난 조선에서는 크게 출세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박제가의 진가를 알아준 곳은 중국인 청나라로 박제가가 청나라에만 오면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줄을 이루고 북경의 유리창 서점가에서는 그의 글씨와 그림이 위조품까지 돌아다닐 지경이며 심지어 조선에 사신으로 온 사람이 다음엔 박제가를 사신으로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청을 하는 등 분명 태어난 곳은 조선인데 고국보다 외국에서 더 대우를 받는 희한한 상황이었다. 이러니 중국에 호감을 가질 수 밖에.[8] 현재 역사학계의 흐름은 16세기 이후의 조선에 대한 재평가이다. 실제로 최근엔 16세기 이후 조선의 경제나 토지 제도가 오히려 발전했다는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9] 조선의 엘리트들, 식자층들도 조선을 지배한 집권세력처럼 머리가 무조건 굳은건 아니라서 이러한 모순에 대해 어느정도는 눈치는 챘고 중국의 실제 모습을 알고자 하는 움직임이 상당했다. 대표적인게 박제가의 스승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대한 열풍.[10] 소비가 중요하다고 한게 그래서 그런 것이다. 상업이 활성화 되려면 검소하기만한게 아니라 소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소비가 이루어져야 사람들이 팔려고 좋은 상품을 만들고 팔려면 자연히 수레등 유통이 개선돼야 한다. 서로가 맞물린 문제인 셈[11] 이영석, '영국제국의 초상', 푸른역사. 2009, p311[12] 단 조선이 수레를 안 쓴 건 아니다. 오히려 함경도-경기-평안도 지역에서는 수레를 잘만 썼으며 평안도에서는 마차까지도 썼다. 박제가, 박지원 등이 말하는 것은 수레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 의미가 강하다. 실제로 실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관철하기 위해 조선의 문제점을 더욱 과장해서 표현하기도 했는데 열하일기와 같은 서적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온다. 단 조선이 이용하던 수레는 대부분 운송용 수레지 이동용(자가용 같은 거) 수레는 아닌 것에 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