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첸초 1세 곤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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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토바 공국 제4대 공작
빈첸초 1세 곤차가
Vincenzo Ι Gonzaga, Duca di Mantova

파일:Vincenzo_I_Gonzaga.jpg

출생
1562년 9월 21일
만토바 공국 만토바
사망
1612년 2월 9일 (향년 49세)
만토바 공국 만토바
재위
만토바 공국의 공작
1587년 8월 14일 ~ 1612년 2월 9일
배우자
마르게리타 파르네세 (1581년 결혼 / 1583년 무효화)
엘레오노라 데 메디치 (1584년 결혼 / 1611년 사망)
자녀
프란체스코 4세 곤차가, 페르디난도 곤차가, 굴리엘모 도메니코, 마르게리타, 빈첸초 2세 곤차가, 엘레오노라
아버지
굴리엘모 곤차가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형제
마르게리타, 안나 줄리아나
1. 개요
2. 생애
2.1. 공세자 시절
2.2. 만토바 공작



1. 개요[편집]


만토바 공국과 몬페라토 공국의 공작.

2. 생애[편집]



2.1. 공세자 시절[편집]


1562년 굴리엘모 곤차가와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빈첸초는 명군인 아버지와 달리 방탕하고 사치스러워 툭하면 친구들과 놀러다니거나 밤놀이를 하러 다녔다. 20살이 됐을 때에는 아버지가 신임하는 궁정 고문 제임스 크라이튼을 질투해 그를 살해하는 대형사고를 쳤다. 굴리엘모 곤차가는 크라이튼의 죽음에 크게 분노했지만 빈첸초는 간신히 용서받을 수 있었다.

1581년 3월 2일에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딸 마르게리타 파르네세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부부는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마르게리타 파르네세의 음부에 문제가 있어 성관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수술까지 고려되었으나 결국 1583년에 신부의 신체적 기형을 사유로 결혼은 무효화되었다. 신부측에서는 원한을 가지고 사실 빈첸초의 발기부전으로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이 때문에 빈첸초는 메디치 가문 쪽과 재혼 협상을 할 때 자신의 성적 기능을 증명하기 위해 증인들 앞에서 한 처녀와 성관계를 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1584년 4월 29일, 빈첸초는 메디치 가문의 엘레오노라 데 메디치와 재혼했다. 부부는 6명의 자식을 두었다.


2.2. 만토바 공작[편집]


1587년 8월 14일에 만토바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빈첸초 1세는 아버지가 그랬듯 음악에 관심이 매우 많아 음악가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이 시기에 페테르 파울 루벤스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가 만토바 궁정에 채용되었으며 만토바에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 지어졌다.[1] 또한 빈첸초 1세는 과학에 관심이 매우 많았는데, 한번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일자리를 구하러 왔으나 연봉 협상이 결렬되어 선물을 안겨주고 떠나보냈다고 한다.

빈첸초 1세 시기의 만토바 공국은 문화적으로는 발전했으나 그의 습관적인 사치로 인해 경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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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극장은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