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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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위국공
서휘조
(1388~1402)

서흠
(1407~1421)
(1424(복위))

서현종
(1425~1448)



徐欽
(? ~ 1424년 12월 19일[1])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명나라의 귀족으로, 명나라의 개국공신 서달의 손자이자 서휘조의 장남이다. 서휘조와 남매사이인 인효문황후는 그의 고모이다. 건국 이후에 출생하였으므로 명나라의 첫 수도였던 남경(南京)에서 태어났다.


2. 생애[편집]


1407년(영락(永樂) 5년)에 아버지 서휘조가 죽자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그해 9월 1일[2]에 아버지의 위국공(魏國公) 작위를 이어받았으며, 식록(食祿)은 5천 석(石)으로 정해졌다. 서흠은 공신의 후예였지만 성격이 교만하고 종자(縱恣)하였기에 1411년(영락 9년)에 언관(言官)들에게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영락제는 그런 서흠을 저택으로 돌려보냈고, 책을 읽으면서 근신하도록 하였다.

1421년(영락 19년)에 서흠은 북경(北京)에서 영락제를 알현하였지만, 제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여 영락제의 조령(詔令)을 받지도 않고 저택으로 돌아가버렸다. 영락제가 마침내 크게 분노하여 서흠의 위국공 작위를 빼앗고 그를 봉양(鳳陽)으로 귀양보냈다.

1424년(영락 22년)에 영락제가 죽고 홍희제가 황제로 즉위하자 복권되어 위국공의 작위를 돌려받았지만 얼마 못 가서 사망하였다. 위국공의 자리는 장남인 서현종(徐顯宗)이 계승하였다.

할아버지 서달은 물론이고 아버지 서휘조도 능력이 출중한 명신(名臣)이었지만 서흠은 행실이 좋지 못했다는 기록만 남았기에 전형적인 호부견자로 볼 수 있다. 다만 서휘조가 영락제를 끝까지 적대하였고 영락제가 황제로 있는 내내 저택에 유폐되다가 죽었기 때문에 서흠이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영락제에 대한 반항심을 가져서 고의적으로 분노를 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1] 음력으로는 11월 29일[2] 음력으로는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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