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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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녕군 출신 독립운동가, 성태영[편집]



파일:성태영.jpg
성명
성태영(成泰永)
이명
성태영(成兌永, 成台永)
본관
창녕 성씨
생몰
1887년 12월 10일 ~ 1968년 10월 2일
출생지
경상도 창녕현
(현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효정리)[1]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성태영은 1887년 12월 10일 경상도 창녕현(현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효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건너갔고, 1914년부터 1927년까지 교민 자치 사업에 진력했으며, 항일구국 자치단체인 경학사와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 등에서 활약했다. 이후 지린성의 상의가(商儀街)에서 이기팔(李基八)과 함께 정미소 '부흥태(復興泰)'를 경영하면서 독립지사들의 연락 장소로 활용하였고, 이곳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군자금을 지원했다. 1927년 4월, 그는 교민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생활의 안정을 위한 협동산업의 실천임을 절감하고 김기풍(金基豊)·김진호(金鎭浩) 등 35명의 동지들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고 교민의 상호친선 도모 및 농장의 확장을 위한 자금융자와 생활향상 및 계몽사업을 실시했다.

1927년 11월, 성태영은 일본 헌병과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의 한인 교포 구축계획을 탐지하고, 윤화전(尹華田)·손정도 등 10여명의 동지와 함께 지린성에서 동포임시대회(同胞臨時大會)를 개최하여 한인교포의 구축방지를 위한 '한교구축문제대책강구회(韓僑驅逐問題對策講究會)'를 조직하고 이의 간사가 되어 길림성 당국에 항의하는 한편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후 1932년부터 광복 때까지 기독교 전도사로서 길림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수행했고, 지린성 신학교를 설립해 교역자를 양성했다.

8.15 광복 후 서울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8년 10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성태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김포시 출신 독립운동가, 성태영[편집]



성명
성태영(成泰永)
본관
창녕 성씨
생몰
1876년 1월 24일 ~ 1946년 1월 8일
출생지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고양리
사망지
경기도 김포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성태영은 1876년 1월 24일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고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2일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 장날을 이용해 박용희·이병철(李炳喆)·백일환(白日煥)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했다. 3월 22일 당일, 그는 군하리 장터에 나아가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부를테니 향교로 모이라고 연락했다. 이때 그는 박용희와 이병철의 도움을 받아 수수깡을 사용하여 제작한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3백명의 시위대를 인솔하여 월곶면 사무소로 행진했다.

성태영은 그곳에서 면서기 조원석(趙元錫)을 만나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그가 연단에 올라가 연설을 하려고 할 때, 군하 경찰주재소에서 일본인 순사 야마다 시게히로(山田重洋)가 출동하여 성태영을 끌어내렸다. 이에 백일환이 뛰어나오며 일경의 따귀를 때려 땅에 넘어뜨리고 그의 총을 빼앗고 모자를 짓밟았다. 이후 성태영은 계속 군중을 인솔해 경찰주재소로 가서 조선인 순사보 이성창(李聖昌)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고, 다시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 4명에게 태극기를 주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 일로 체포된 성태영은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김포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6년 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성태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모산리·석리·창산리와 함께 창녕 성씨 집성촌이다. 성낙인 전 서울대학교 총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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