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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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송주헌.jpg
성명
송주헌(宋柱憲)
자/호
윤장(允章)/삼호재(三乎齋)
본관
여산 송씨
생몰
1872년 9월 10일 ~ 1950년 9월 10일(음력)
출생지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
사망지
전라남도 고흥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송주헌은 1872년 9월 10일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에서 송윤호(宋潤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천(寒泉) 송력(宋櫟)의 8세손으로, 고흥군에서 명망이 높은 유학자였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그는 1896년 1월 호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복한의 부대에 백관형(白觀亨)·유준근(柳濬根) 등과 함께 가담했지만 홍주관찰사 이승우(李勝宇)의 변심으로 주요간부들이 해산되면서 의병대는 곧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그는 수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국권회복을 도모하려 했다. 그 뒤 1915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의하는 서한을 조선 총독부에 발송했으며, 1919년에는 파리 강화 회의에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천명하는 내용의 독립청원서를 보내기 위해 호서, 호남지방의 김복한, 백관형, 유준근, 안병찬, 고석진 등과 논의했다.

이때 영남에서도 곽종석을 중심으로 동일한 취지의 청원서를 작성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자, 두 지역 유림이 합동으로 독립청원서를 작성, 연명하기로 결정하여 파리독립청원서 서명자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연명하였다. 이후 3.1 운동이 전국에 확산되자, 송주헌은 순종 황제를 복위시켜 민심을 회복시키고 독립을 달성시키기로 결심했다. 이에 그는 백관형, 고석진, 유준근, 조재학(曺在學) 등 13명의 유림과 함께 극비리에 순종에게 복위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8개월간 수감되었다가 무죄 방면되었다. 출옥 후에는 조선고사연구회(朝鮮古史硏究會)를 조직하고 조선역사를 간행하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해서 유생의 충군애국정신을 선양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시문집 <삼호재집(三乎齋集)>을 집필했으며, 1950년 9월 10일(음력)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송주헌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