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의 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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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칠리아의 만종.jpg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작, <시칠리아의 만종>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1282년 3월 30일 또는 31일에 팔레르모에서 프랑스 군인들이 유부녀를 추행하다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전역에서 앙주 왕조의 가혹한 착취에 반감을 품던 민중들이 대거 봉기하여 수많은 프랑스인을 학살한 사건. 지중해에 앙주 제국을 세우려던 카를루 1세의 야망은 이 사건으로 무너졌고,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이 이를 계기로 분열되었다.


2. 배경[편집]


1250년,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호엔슈타우펜 왕조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했다. 교황청과 심한 갈등을 벌였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악감정을 품고있던 인노첸시오 4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남부 이탈리아 귀족들을 부추겨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이며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지키는 과업을 부여받은 만프레디가 곧바로 왕실군을 이끌고 토벌에 착수해 나폴리를 제외한 수많은 반란시들을 제압했다. 이후 나폴리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면서 인노첸시오 4세와 화해를 시도했지만, 교황이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러던 1252년, 홀란트 백작이자 대립왕 빌럼과 라인강 동맹을 무찌르면서 독일 제후들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은 뒤 남부 이탈리아로 찾아온 콘라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모든 권한을 도로 가져가고 만프레디는 타란토 공국만 다스리게 했다. 이후 나폴리 공방전을 마저 이어가 1253년 10월 항복을 받아내 남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평정했다. 그러나 교황을 따르는 구엘프파의 준동을 완전히 꺾지 못했고, 1254년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뒤 이탈리아 바질리카타의 라벨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콘라트 4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어린 아들 콘라딘을 시칠리아 왕으로 선임하고, 교황에게 콘라딘을 보필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콘라딘의 섭정으로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 후작을 임명했다. 그러나 만프레디는 인노첸시오 4세에게 시칠리아를 넘겨주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가 섭정을 맡는 것 역시 거부하고 자신이 섭정을 맡았다. 이에 인노첸시오 4세는 그해 7월 만프레디를 파문했다. 만프레디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면서, 교황의 특사가 남부 아틸리아에서 교황을 대신해서 교회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교황 수행원들이 오만하게 굴자 반감을 품고 루체라에 거주하는 아랍인들과 손을 잡고 교황청에 대항했다. 1254년 11월 인노첸시오 4세가 나폴리에 입성하여 전쟁을 선도하자, 그는 포자로 진군해 12월 2일 교황의 조카 굴리에모 피에스키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을 섬멸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은 큰 충격을 받고 1254년 12월 7일 나폴리에서 선종했다.

이후 만프레디는 투스카니 지방, 특히 시에나의 기벨린(친 황제파) 파벌에 독일 기사단을 지원해, 그들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구엘프(친 교황파) 파벌이 지배하는 피렌체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인노첸시오 4세의 뒤를 이어 새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4세가 만프레디를 또다시 파문하자, 남부 이탈리아 각지에서 친 교황 세력이 준동했다. 하지만 1257년에 모든 반란이 제압되었고, 알렉산데르 4세는 만프레디의 후원을 받은 기벨린 세력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로마에서 비테르보로 피신했다.

1258년 콘라딘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자, 만프레디는 그해 8월 10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나중에 콘라딘이 파견한 사절들이 콘라딘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했지만, 만프레디는 강력한 왕이 시칠리아를 다스려야 한다는 민중의 호소를 빌미삼아 퇴위를 거부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아랍인들과 손잡은 만프레디를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주변 국가들에 십자군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만프레디는 입지를 강화하고자 마침 기벨린 파벌의 지도자 에셀리노 3세 다 로마노가 사망하자 대리자의 자격으로 토스카나, 스폴레토, 마르체, 로마냐, 롬바르디의 시장을 지명했으며,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토스카나의 수호자이자 로마인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262년에는 자신의 딸 쿠스탄차를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1261년 선종한 알렉산데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를 세번째로 파문한 뒤 1263년 영국의 헨리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의 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만프레디를 토벌해달라고 청했다. 이중 샤를이 교황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프레디는 로마에 선언서를 보내 자신이 왕국을 통치할 권한이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권리도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샤를에 맞서기 위해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1265년 하반기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수많은 기벨린 요새들을 공략한 샤를은 1266년 1월 로마에 입성하여 기벨린파를 몰아낸 뒤 1월 20일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인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1266년 2월 26일, 샤를의 프랑스군과 만프레디의 시칠리아군이 베네벤토에서 격돌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들은 일단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적에게 돌진하다가 전사했다. 콘라딘은 만프레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야말로 시칠리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슈바벤 공국을 담보로 삼아 군자금을 마련한 뒤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카를루 1세로 즉위한 앙주의 샤를에게 참패한 뒤 생포된 후 10월 29일 반역죄로 재판을 받은 뒤 나폴리에서 참수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유일한 군주가 된 카를루 1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들과 추종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시칠리아 백성들에게 이전보다 30배에 달하는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도시들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또한 시칠리아 정부에 자신과 함께 남하한 프랑스 관료들로 채웠고, 프랑스 군인들을 시칠리아 각지에 배치해 시칠리아 귀족 및 백성들을 엄중히 감시하게 했다.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를 공략한 여세를 몰아 지중해 각지에 세력을 뻗쳐 '앙주 제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즉위 직후부터 대외 원정을 잇따라 감행했다. 1277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을 칭했으며, 1278년에 라틴 제국의 최후의 황제 보두앵 2세로부터 아카이아 공국의 주권을 양도받았다. 그는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발칸 반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1281년 교황 마르티노 4세로부터 "이단정교회를 신봉하는 미하일 8세를 타도하고 가톨릭 국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재건하라"는 교령을 접수받고 십자군을 선포해, 동로마 제국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이렇듯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벌이면서, 이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카를루 1세에 대한 시칠리아 민중의 분노는 갈수록 불거졌고, 프랑스인들이 요직을 장악하는 바람에 정치에 참여할 길이 막혀버린 귀족들 역시 반감을 품었다.

일전에 만프레디의 딸 쿠스탄차와 결혼했던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에서 앙주 왕조에 대한 반감이 극렬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고, 아내의 설득을 받아들여 시칠리아에서 망명 온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 및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며 장차 카를루 1세를 시칠리아에서 타도하고 왕위를 가로챌 기회를 노렸다. 여기에 카를루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도모하려 드는 것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도 아라곤 왕국에 군자금을 지원해 함대를 조직하게 하고, 시칠리아에 공작원들을 잠입시켜 귀족과 민중을 선동했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부추김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던 1282년 3월 말,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소요로 인해 대규모 봉기가 촉발되었다.


3. 경과[편집]


파일:팔레르모 봉기.jpg
미켈레 라피사르디(Michele Rapisardi) 작, 여인을 추행한 프랑스 병사를 살해한 시칠리아 민중.

바르톨로메오 디 네오카스트로(Bartolomeo di Neocastro)의 <시칠리아의 역사(Historia Sicula)>에 따르면, 팔레르모 시민들이 성벽 밖에 있는 성령의 교회까지 순례하러 가던 중에 프랑스 병사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들은 무기를 소지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시민들의 몸을 수색했다. 그러던 중 드로헷(Drohet)이라는 프랑스 군인이 팔에 갑옷을 착용했는지를 확인한다는 구실로 어느 귀족 여인의 가슴을 만졌다. 그러자 한 청년이 분노해 그 군인을 살해했고, 시민들은 "프랑스인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프랑스 병사들에게 달려들어 때려 죽였다.

그 후 그들은 루지에로 마스트랑겔로(Ruggiero Mastrangelo)라는 귀족의 지휘 아래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르고 앙주 왕조를 위해 일하던 관료, 병사 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프랑스인들을 학살했다. 이날 2,000명의 프랑스인이 하룻밤 사이에 살해되었고, 앙주 왕조의 재상 장 드 생 레미(Jean de Saint-Rémy)는 야밤에 비카리 성으로 도망쳤다가 끝내 체포된 후 온 몸이 갈기갈기 잘려서 짐승에게 먹혔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 사건을 다룬 13~14세기 연대기가 여럿 존재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한 연대기에서는 프랑스 병사가 여인을 추행하자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병사가 아이를 잡으려 하자 민중이 분노해 병사를 때려죽이고 봉기를 일으켰다고 기술했으며, 또다른 연대기에서는 병사가 한 여인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키스하려 하자, 그 여인의 오빠가 분노해 병사를 단검으로 찔러 죽였다고 기술되었다.

'시칠리아의 만종(晩鍾)[1]'이라는 표현은 샤를 8세가 1494년부터 이탈리아를 정복하려고 전쟁을 벌였으나 실패한 후인 16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페사로 출신의 판돌포 콜레누치오(Pandolfo Collenuccio)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가 여전히 사용하는 '시칠리아 만종'이라는 표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때부터 1282년 봉기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부활절 월요일(3월 30일) 또는 화요일(31일)에 팔레르모 시민들이 저녁 기도 시간에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대대적으로 봉기해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프랑스군과 프랑스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아무튼 봉기를 일으켜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프랑스인을 살육한 팔레르모 시민들은 4명의 "사람들의 대장(capitaines du peuple)"과 5명의 "고문(conseillers)"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임시 의회를 열었다. 이후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한 코를레오네(Corleone)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인들을 처단한 후 자체적으로 의회를 세웠고, 팔레르모에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가 힘을 합쳐 결성한 롬바르디아 연맹을 따라서 시칠리아 도시 연합인 시칠리아 연합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뒤이어 바 디 노토(Val di Noto: 시칠리아 남동부), 바 데모네(Val Demone: 시칠리아 북동부) 등지에서도 봉기가 잇따라 일어났고, 4월 중순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의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4월 28일, 봉기군은 메시나를 공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던 함대를 파괴했고, 카를루 1세의 대리인으로서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오를레앙의 에르베르트를 칼라브리아로 축출했다.

파일:시칠리아 봉기군을 피해 달아나는 프랑스 여인들.jpg
도메니코 모넬리(Domenico Morelli) 작, <시칠리아 만종>

시칠리아인들은 카를루 1세의 압제를 도운 프랑스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다만 카를루 1세의 시종이자 프로방스 데 포자레 가문의 일원이었던 굴리에모 3세는 평소 의로운 일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은 채 시칠리아를 떠날 수 있었다. 한편, 시칠리아 중부의 엔나 지방에 속한 스프링가(Sperlinga) 성은 프랑스 군인들에 대한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반란군이 13개월 동안 그곳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주민들은 성을 수비하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이 병사들은 13개월 만에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한 뒤 칼라브리아로 이송된 후 카를루 1세로부터 굳건한 충성심을 보여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영지를 제공받았다.


4. 이후[편집]


시칠리아 도시들은 프랑스인들을 대량 학살한 뒤 롬바르디아 동맹을 모델로 삼아 시칠리아 도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오직 교황만이 자신들을 이끌 수 있다며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충실한 동맹자인 카를루 1세와 갈라설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그들은 카를루 1세의 보복을 두려워한 끝에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한편, 페드로 3세는 사라센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튀니스로 함대를 몰고 간 후 시칠리아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렸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그는 시칠리아로 진군해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이후 팔레르모에 입성해 9월 4일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카를루 1세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시칠리아로 진격했으나, 페드로 3세가 이미 시칠리아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폴리로 퇴각했다. 이후 교황을 부추겨서 페드로 3세를 파문에 처하게 하고, 프랑스 왕이자 자신의 조카인 필리프 3세와 연합해 "아라곤 십자군"을 단행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쟁의 주역인 카를루 1세, 페드로 3세, 교황 마르티노 4세는 공교롭게도 1285년에 모두 사망했다. 전쟁은 이후에도 지속되다가 1302년 시칠리아 왕 프리드리히 3세가 앙주 가문이 남부 이탈리아의 소유를 인정하는 대가로 시칠리아 왕위를 보장받는 칼타벨로타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20여 년만에 종결되었다. 아라곤 왕국이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은 이후에도 종종 전쟁을 벌이다가 1373년 앙주 가문이 아라곤 왕조의 시칠리아 소유를 인정한 아베르사 조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완전한 평화를 이루었다.


5. 여담[편집]


주세페 베르디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만종(Les vêpres siciliennes)>이 이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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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녁시간에 교회나 절에서 치는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