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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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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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nrad_II_Hohenstaufen_jerusalem.jpg
Konrad IV
가문
호엔슈타우펜 왕조
생몰년도
1228년 4월 25일 ~ 1254년 5월 21일 (27세)
출생지
이탈리아 왕국 안드리아
사망지
시칠리아 왕국 라벨로
매장지
시칠리아 왕국 라벨로 메시나 대성당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로마왕
1237년 5월 – 1254년 5월 21일
이탈리아 왕국 국왕
1237년 5월 – 1254년 5월 21일
시칠리아 왕국 국왕 (코라도 1세)
1250년 12월 13일 –1254년 5월 21일
예루살렘 왕국 국왕 (콩라드 2세)
1228년 4월 25일 –1254년 5월 21일
슈바벤 공작 (콘라트 3세)
1235년 2월 12일 –1254년 5월 21일
부모
프리드리히 2세, 욜랑드 드 브리엔
배우자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자녀
콘라딘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독일어: Konrad IV. (콘라트 4세)
이탈리아어: Corrado IV (코라도 4세)
시칠리아어: Curradu I (쿠라두 1세)
라틴어: Conradus IV (콘라두스 4세)

신성 로마 제국독일왕(1237~1254)이자, 슈바벤 공작(1235~1254), 이탈리아 국왕(1237~1254), 시칠리아 국왕(1250~1254), 예루살렘 국왕(1228~1254).


2. 상세[편집]


프리드리히 2세이사벨 2세 사이의 외아들.

모후의 죽음으로 태어나자마자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했다.

1228년 이탈리아 반도의 안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을 처음 방문한 1235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콘라트는 이사벨 2세의 자식 중 둘째였으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기도 했다. 예루살렘 왕국을 다스리는 동안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가 대리 섭정으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 전쟁에서 콘라트가 자립을 선언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섭정의 타당성을 잃어버렸다.

프리드리히 2세가 반항적인 장남 하인리히와 갈등하다가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하면서 쫓아냈고, 1237년 콘라트는 에서 신성 로마 제국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타이틀은 콘라트가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황제가 될 수 있는 보증수표였다.[1] 마인츠 대주교 지크프리트 3세가 1242년까지 독일 왕국 섭정으로 행세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튀링겐방백 하인리히 라스페와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1세를 선택해 대체하였다. 1240년부터 콘라트가 직접 독일의 정치를 맡았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1245년에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했고 콘라트 4세의 폐위를 멋대로 선언하자 하인리히 라스페가 교황을 지원하여 1246년 3월 22일 독일에서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라스페는 1246년 8월 니다 전투에서 콘라트 4세를 이겼으나, 불과 7달 만에 사망했다.

1246년 콘라트 4세는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 비텔스바흐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1252년에 콘라딘[2]이란 아들이 태어났다. 1250년에 콘라트 4세는 독일에서 또 다른 대립왕인 홀란트의 백작 빌럼과 그의 라인 강 동맹을 패배시켜 잠깐 상황을 안정시켰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콘라트는 시칠리아 왕국과 독일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교황과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251년 빌럼에게 패배하자 콘라트는 부유한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했다. 1252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와 함께 아풀리아를 침입하여 통치 대리인으로 있던 이복동생 만프레디가 시칠리아에서 영향력을 퍼뜨리는걸 견제했고 국가를 엄격히 통제했다. 1253년 10월 콘라트의 군대는 반란 상태에 있었던 나폴리를 정복했다.

그러나 콘라트 4세는 교황의 지원자들을 진압할 수 없어 1254년에 파문당했고, 말라리아에 걸려 이탈리아 바질리카타의 라벨로에서 죽었다.

외아들 콘라딘 1254년 5월 21일 ~ 1268년 10월 29일 (14년 5개월 8일)이 예루살렘 왕국의 뒤를 이었다.

콘라트 4세의 죽음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대공위시대로 접어들었고,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루돌프 1세가 독일왕이 됨으로서 혼란이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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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와 달리 황제로 대관하지 못했다.[2] 나중에 예루살렘 왕국,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자 슈바벤 공작이 된다. 그러나 샤를 당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처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