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탐라국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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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초반
2.2. 중반
2.3. 종결
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신라탐라국의 관계를 나타낸 문서이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초반[편집]


자체적으로 존재하다가 476년 백제 문주왕 때 이미 탐라국에서 조공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백제에 속하게되다가 672년 신라에 스스로 복속되었다. 황룡사 9층목탑에 탁라로 신라세계관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1]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삼국시대 신라 문무왕 때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형제가 원래 복속하였던 백제의 멸망 이후 신라에 탐라국을 대표해 입조할 때 전라남도 강진군의 옛 지명인 '탐진'의 탐(둥그렇다는 뜻으로 추정된다)과 '라'를 합쳐서 붙여준 것이란 설이 있다. 그러나 정사인 삼국사기에도 그보다 한참 오래 전부터 탐라라는 국호가 이미 등장하기 때문에 나중에 생긴 설화로 이해되고 있다.


2.2. 중반[편집]


통일신라대에는 신라 출신 이주민도 있었는지, 통일신라대에 만들어진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때 신라는 견탐라사를 보내기도 한다.


2.3. 종결[편집]


후삼국시대 신라가 호족들에 의해 통제력을 잃어갈때 우산국과 함께 신라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서라벌 기습으로 인하여 신라가 크게 기울자 930년대에 신라에서 자체독립하게 된다. 이후 후삼국이 끝나며 신라와의 관계가 종료되고 나고 937년 고려에 의해 탐라국은 망하고 성주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국가가 아예 해체된 건 아니었고 탐라인은 고려에서 외국인(내번)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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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 진흥왕 대에 황룡사를 제작할 당시, 여러 나라들의 이름을 각 층에 올릴 때 백제에 복속되어 있던 탐라국은 이때 이미 '탁라'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