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우(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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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신상우(申商雨)
자 / 호성도(聖禱) / 후송(後松)
본관고령 신씨[1]
생몰1892년[2] 12월 25일 ~ 1981년 4월 14일
출생지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3]
사망지전라남도 장성군
매장지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신상호는 1892년 12월 25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서 아버지 신석휴(申錫休)와 어머니 장택 고씨 고응순(高應淳)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3일 저녁 신경식(申耕植)과 고용석·유상순(柳相淳)·유상설·정병모 등이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시국담을 나누는 자리에 참석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다가 귀가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사가리 헌병주재소에서 일본 헌병이 고용석·유상설·유상학·신진식(申鎭植)을 연행해 가자, 이날 밤 신경식·정병모·신태식·신국호 등과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오상구(吳相九)·박광우(朴光又)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헌병들이 장성읍 헌병 분대를 불러들여 합세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현장에서 체포된 신상우는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 후 장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1년 4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신상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귀래정공파 24세 우(雨) 항렬.[2]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88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독립유공자 신국호·신태식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