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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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신국호(申國浩)
이명신경호(申景浩)·신국홍(申國洪)
본관고령 신씨[1]
생몰1900년 12월 10일 ~ 1924년 10월 10일
출생지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2]
사망지전라남도 장성군
매장지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신태식의 5촌 조카(당질)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신국호는 1900년 12월 10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서 아버지 신병식(申昞植)과 어머니 장택 고씨 고제원(高濟元)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3] 이후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 신경식(申耕植)에게 입양되었다.[4] 일찍이 광주군의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5]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9년 4월 3일 저녁, 그는 아버지 신경식과 고용석·유상순(柳相淳)·유상설·정병모 등이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시국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다가 귀가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사가리 헌병주재소에서 일본 헌병이 고용석·유상설·유상학·신진식(申鎭植)을 연행해 가자, 이날 밤 신경식·정병모·신태식·신상우 등과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오상구(吳相九)·박광우(朴光又)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니,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헌병들이 장성읍 헌병 분대를 불러들여 합세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현장에서 체포된 신국호는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4년 10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신국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귀래정공파 26세 호(浩) 항렬.[2] 독립유공자 신상우·신태식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생부 신병식은 1914년 생모 장택 고씨가 별세하자 곧 전주 이씨 이문례(李文禮)의 딸을 재취로 들여 두 아들을 두었다.[4] 입양된 후 1930년 양부 신경식과 양모 울산 김씨 김요석(金堯碩)의 딸 사이에 늦둥이 아들 신방호(申邦浩)가 태어나긴 한다.[5] 1869 ~ 1918. 자 평중(平仲). 기대승의 후손으로 전라도 광주목 광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의 행주 기씨 집성촌에서 기창현(奇昌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식년시 생원시에 3등 84위로 급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