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오바르자네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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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제13대 국왕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
Ἀριοβαρζάνης Γ΄


파일:아리오바르자네스 3세.jpg

출생
생년 미상
사망
기원전 42년 (향년 ?세)
재위기간
카파도키아 국왕
기원전 51년 ~ 기원전 42년
(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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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
어머니 아테네 필로스토고스 2세
배우자
없음
자녀
없음
형제자매
아리아라테스 10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카파도키아 왕국 13대 국왕.


2. 생애[편집]


카파도키아 왕국 제12대 국왕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폰토스 왕국 제8대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딸 아테네 필로스토고스 2세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아리아라테스 10세가 있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뇌물을 주고 보호받아야 할 정도로 무능했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51년, 반로마 세력이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를 암살했다. 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콤마나의 대제사장 아르켈라오스가 정권을 뒤엎으려 들었다. 이때 킬리키아 총독으로 부임한 키케로가 개입하여 그의 왕위를 공인했다. 그 과정에서 그를 폐위하고 아리아라테스 10세를 옹립하려는 음모에 어머니 아테나이스까지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어머니를 국외로 추방했지만 동생은 건드리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다. 그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편을 들었지만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패한 뒤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살해당하자 카이사르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 후 파르나케스 2세가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 시대의 영토를 탈환하고자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소 아르메니아를 잇따라 공격해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이에 소아시아 총독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칼비누스는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며 위태로운 지경에 몰려있던 카이사르의 구원 요청에 따라 2개 군단을 보내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당장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시간을 끌기로 하고, 파르나케스 2세에게 "당장 빼앗은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 후 제36군단을 이끌고 코마나로 이동하여 최근에 현지인들로부터 징집한 1개 군단, 갈라티아 2개 군단을 집결시켰다.

그는 카파도키아 보병 10,000명, 그리고 기병 1,000명을 이끌고 로마군과 합세한 뒤 칼비누스와 함께 폰토스로 진격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했고, 파르나케스 2세는 카파도키아로 재차 쳐들어가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로마 시민들을 학살하고 소년들을 거세했으며, 국고를 약탈했다. 그러나 보스포로스 왕국에서 사위 아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르나케스 2세는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않고 흑해를 건너 크림 반도에 있는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진군했다.

얼마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마무리하고 소아시아로 이동하자, 그는 카이사르를 찾아가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걸 용서해달라고 청했다. 카이사르는 그를 용서하면서 폰토스를 물리치는 데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요구에 충실히 따랐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보스포로스로 도주했다가 그곳의 지도자 아산드로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소 아르메니아를 카파도키아에 편입시키면서, 그의 동생인 아리아라테스 10세를 그곳의 왕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발발했다. 그 후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친 카이사르 인사인 그를 경계해 제거해버리기로 했다. 결국 기원전 42년 카시우스가 보낸 로마군에게 처형당했고, 동생 아리아라테스 10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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