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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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년 7월 12일~ 1920년 1월 24일)

오른쪽은 마지막까지 같이 한 아내 잔 에뷔테른.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1884년 7월 21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유태인 상인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필라미니오 모딜리아니는 오래전, 이탈리아로 이민와서 성을 바꾼 유태인 집안 태생이었고 어머니인 에우지니에 가르신 역시 18세기에 이탈리아에 정착한 솔로몬 가신이라는 유태인 증조부를 둔 유태인이었다. 아버지가 광산 사업가로 큰 번영을 누려 어릴적에 모딜리아니의 삶은 꽤 부유했었다. 그러나, 10대 초반에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해서 아버지가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으면서 가난이 찾아온다.
모딜리아니는 태어날때부터 몸이 약해 잔병에 시달려야 했다. 아주 어릴적에 의사들이 자칫하면 어린 나이로 죽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그땐 아버지가 부유해서 온갖 고급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지면서 10대때부터 역시 온갖 병에 시달려야 했다. 어린 모딜리아니와 형제 남매들은 외할아버지인 이사코 가르신이 돌봤는데, 이사코는 예술에 흥미를 가져서 어린 모딜리아니가 그림을 배우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13살에 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겨야 했다.
14세에 리보르노 미술학교에 입학해 풍경화가 미켈리에게 데셍과 회화를 배웠다. 17세에 폐결핵에 걸려 요양을 위해 어머니와 카프리, 나폴리, 로마, 피렌체 등 관광지를 여행했다. 이때 티노 디 카마이노의 조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18세 되던 해 피렌체 미술학교에 들어가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그곳에서 1년만 배우고 19세에 베네치아 미술학교에 입학해 현대미술에 대한 흐름을 접했다. 1906년 22세 되던 해에 파리로 떠났고 콜라로시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때, 폴란드 출신 유태인이자 미국 국적을 가진 조각가 야곱 엡스타인(1880~1959)과 친구가 되었는데 당시 이름없던 조각가이던 엡스타인과 친하게 지냈다. 엡스타인은 모딜리아니가 죽은 뒤,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며 영국에서 경 작위를 받았고, 가난한 젊은 시절, 모딜리아니에 대해 회고하기도 했다.
23세 되던 해에 후원자인 폴 알렉산드르 박사의 권유로 앙데팡당 회원으로 가입했고 모리스 위트릴로(1883~1956)와 친교를 맺었다. 24세 되던 나이에 『앙데팡당전』에 유화 여섯점을 출품했고 한동안 조각에 전념했다. 29세 되던 해에 프랑스에 온 러시아 화가 카임 수틴(Chaïm Soutine, 1893. 1. 13~1943.8. 9)과 친구가 되었다.
30세에 몽파르나스로 거처를 옮겨 영국 여류시인 베아트릭스 헤이스팅스(1879~1943)와 사귀었고, 1916년까지 동거했다. 33세 되던 해 그의 전속화상이던 친구 즈보르프스키의 집에서 머물며 작품활동을 했다. 이 때 19세의 미술학도인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1898.4.6~1920.1.26)을 만난다. 1917년 3월 모딜리아니와 잔느는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베르트 바이유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출품한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경찰이 압수했고 전시기간도 단축되었다.
하지만, 그림은 싸구려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고 가난에 허덕이며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모딜리아니는 술과 마약으로 버티는 신세가 되었고 당연히 건강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1918년 건강이 약화되어 니스로 갔고 11월 29일 그곳에서 딸 잔이 태어났고 폴 기욤이 주최한 『젊은 작가전』에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 1919년 파리로 돌아왔고 잔이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다. 1919년 7월 7일, 잔과 공식적으로 결혼했지만 생활고로 인해 잔은 친정으로 가게 되었다. 잔의 부모는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통제했다. 1월 22일 결핵성 수막염 및 알콜 및 마약 중독으로 인해 파리 자선병원에 입원했고 1월 24일 사망해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잔은 장례식에서 그야말로 울다 미칠 정도로 슬퍼했다. 잔이 죽기 얼마전에 다 그린 유작인 그림 <자살>을 봐도 그림 속 칼로 자살하는 여인이 잔 에뷔테른 그녀 임을 알 수 있다.그녀가 자살할까봐 식구들은 밤새 곁을 지켰지만 끝내.....오빠인 앙드레가 곁에서 지켜봤지만 앙드레가 잠을 자던 1월 26일 새벽. 잠을 깬 잔은 남편을 따라 4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만 21세 나이로 자살했는데 태어나지도 않은 둘째아이도 덩달아 죽고 만다.
살아 생전, 그림값으로 식당에 그림을 대신 줬다가 욕설과 같이 그림이 거리에 내던지는 굴욕을 당했던 모딜리아니였는데 그가 죽고 아내도 비극적으로 죽은 뒤 15년도 안돼 엄청난 재평가와 같이 그림값이 1000배가 넘게 올랐기에 지인들이나 친척들은 무척 안타까워했다. 아내 잔의 부모는 남편따라 자살하지 말고 그대로 둘째 아이 낳고 살았더라면......라고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모딜리아니의 외동딸인 잔(어머니 잔 에뷔테른의 이름을 따서 붙였음) 모딜리아니(1918~1984)는 아메데오의 누나인 마르가리타가 양육했다. 화가가 되어 고생만 하다 죽은 남동생의 인생이 싫었던 마르가리타는 조카딸에게 부모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태인이라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시달림을 받던 잔은 프랑스로 피신하기도 했다. 커서 부모에 대해 안 잔은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서 아버지 모딜리아니에 대한 자료를 모아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1959)을 펴냈다.
그는 대부분 인물화를 그렸다. 그의 화풍은 1914년을 기준으로 전후로 나뉘는데, 초기의 작품은 다소 조화롭고 고전적인 느낌을 가진다면 후기의 작품들은 인물의 표현이 다소 비정상적이며 형태도 단순화되었다.[1] 그 이유로는 그가 회화를 잠깐 접고 조각을 했을 때 고대 에투르스크 조각과 아프리카 원시조각의 형태를 접했고 거기에 흥미를 느껴 인물을 세밀하게 그리기보단 내면적인 특징을 그리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주요작품으로 《첼로 연주자 The Cellist》(1909), 《여인의 두상 Head of a Woman》(1911), 《섕 수틴의 초상 Portrait of Chaim Soutine》(1916), 《붉은 누드 Red Nude》(1917), 《잔 에뷔테른의 초상 Portrait of Jeanne Hébuterne》(1918)등이 있다.

[1] 가령 목을 길게 그린다든지, 눈동자를 그리지 않는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