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 간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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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jpg
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1696~1781년 5월 14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의 군사 공학자, 장군, 귀족. 아프리카 노예 출신으로 표트르 1세의 후원을 받아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본인이 1742년 2월에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에게 문장 수여를 신청할 때 서신에 기술한 내용에 따르면, 그는 아프리카의 고귀한 귀족 출신이며 "라고네(Lagone)"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이브라힘이라고 한다. 증손자 푸시킨은 그가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고, 19세기 후반의 전기 작가 아누신(Anuchin)은 그의 출생지가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의 경계에 있는 Logon-Chuan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차드 호 주변의 라고나 또는 카메룬의 고대 왕국 로고네-비르니가 그의 출신지일 것이라 추정한다. 푸시킨이 에티오피아를 제시한 것은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 중 기독교 세계에 가장 알려진 나라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1]

7살이던 1703년에 형제자매와 함께 무슬림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혀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갔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누나 라간은 지중해를 항해하던 도중에 투신 자살했다고 한다. 그는 파디샤 아흐메트 3세의 궁정에서 다른 흑인 노예들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으로 일했다. 그러던 1704년, 코스탄티니예에 주재하던 러시아 대사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톨스토이 백작[2]표트르 1세로부터 총명한 흑인 아이를 찾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인 소년을 궁정에 데려와서 허드렛일을 시키는 게 유행이었기 때문에, 이는 특별할 것 없는 지령이었다. 톨스토이 백작은 지시에 따라 적당한 대상을 물색하다가 아브람을 찾아냈다.

그가 어떻게 파디샤의 궁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이브라힘이 1704년 겨울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표트르 1세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는 1705년 7월 하반기에 성 파라스케바 성당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고, 러시아식 이름 Abram을 받았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그를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인으로만 쓸 생각이 없었다. 러시아를 개혁과 개방의 길로 인도하여 서방 열강에 뒤지지 않는 강대국으로 육성하고 싶었던 계몽군주 표트르 1세는 "미개한 흑인 노예"로 취급받는 아브람을 계몽시켜, 현명한 사람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지극히 보수적인 러시아 사회에 경종을 울리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표트르는 그에게 다방면의 고급 교육을 시켜줬다.

그는 개인 비서로서 여러 전장을 전전하는 차르와 동행하면서 여러 언어를 배웠다. 그의 어학 실력은 실로 훌륭해 러시아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어를 빠르게 습득했다고 한다. 차르는 자신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어 지식을 훌륭히 습득하는 그를 무척 총애했고, 나중에는 양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는 '표트르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페트로비치를 추가했다. 1714년 이후 여러 비밀 임무를 맡았고, 1716년 해외로 순방하는 차르를 따라갔다. 아브람은 프랑스에서 공부를 계속해 공과 대학에서 1년 반을 보낸 뒤 군사 지식을 넓히기 위해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피레네 산맥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여 포병 장교로서 활약했다. 도중에 스페인군에 의해 부상을 입고 투옥되었지만, 1722년 석방되었고 프랑스 군부로부터 대위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우수한 지식을 습득하고 많은 계몽주의자들과 교류했다고 전해지며, 볼테르는 그를 "계몽주의의 검은 별"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에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를 따서 한니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는 이를 이름에 추가하기로 했다. 1723년 훈련 기간이 끝나자 차르에게 러시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때 그는 해로가 아닌 육로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아마도 어렸을 때 배를 타고 이스탄불로 끌려간 아픈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르의 허락을 받고 육로를 통해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포격 중대의 공병 중위로 배속되었다. 이 중대의 지휘관은 바로 표트르 1세였다.

이렇듯 표트르 1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출세를 거듭했지만, 1725년 2월 표트르 1세가 사망하고 예카테리나 1세가 새 차리나로 등극한 뒤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녀를 황위에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하여 강력한 권력을 얻게 된 알렉산드르 다닐로비치 멘시코프는 그를 이방인으로 멸시하여 한직만 떠돌게 했다.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1727년 시베리아로 망명했다. 그러다 멘시코프가 1729년 사망하면서 운명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1730년 1월 토볼스크 수비대에서 복무했고, 9월에 공병대 대위로 승진해 1733년까지 그곳에 있으면서 요새 건설을 지휘하고 장교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1733년 은퇴 후 자택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740년 옐리자베타 여제의 부름으로 재입대했고, 1742년 레벨의 총독으로 부임했고 카리아쿨라 영지를 수여받았다. 또한 같은 해에 파스코프 지방의 보로네츠 지역에 있는 황실 소유 토지를 수여받았으며, 농노 수백 명을 거느렸다. 1745년 스웨덴과의 국경 경계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752년 러시아 제국군 공병 책임자로 임명되어 토볼로-이심 전선의 요새 건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크론슈타트, 리가 등의 요새 건설을 감독했다. 1755년 크론슈타트 운하의 건설 및 유지 관리를 도맡는 동시에 운하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으며, 노동자의 자녀를 위한 학교도 설립했다.

한편, 그는 옐리자베타 여제로부터 코끼리와 'FVMMO'가 새겨진 문장을 수여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문장이 그의 출생지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라 여기지만, 다른 학자들은 "Fortuna Vitam Meam Mutavit Oppido"(운명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의 약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762년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한 뒤 은퇴하여 옐리자베타 여제가 수여한 영지에서 조용히 지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에 따라 감자를 재배해 농민들에게 감자를 구황작물로 사용하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20년이 지난 1781년 5월 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가족[편집]


아브람과 함께 러시아로 온 형제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에서 오보에 연주자로 활동했다고 하며, 골리친 공작의 농노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 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731년 초, 아브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갤리선 함대 장교의 딸인 그리스 여성 에브도키아 안드리브나 디오페르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심각한 가정 불화를 벌였다. 에브도키아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것에 불만을 품고 남편을 멸시했다. 그 역시 아내가 불륜을 일삼고 있다고 의심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아내가 피부가 희고 금발의 소녀를 낳은 걸 보고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가정불화는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에브도키아가 시시코프라는 장교의 도움으로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까지 했다가 발각되었다. 시시코프는 곧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고, 그녀는 간통 혐의로 체포되어 11년간 끔찍한 환경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1736년, 그는 에브도키아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크리스티나 레지나 폰 쇠베르그와 만나 자녀를 낳았다. 1743년 보석으로 풀려난 에브도키아는 자신이 간통을 저질렀다는 걸 인정하고 남편과 이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청원서 수리는 1753년 9월 9일에서야 완료되었고, 1754년 에브도키아는 브베덴스키 수도원의 티흐번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여성과 만나 아이를 낳은 혐의로 고발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아브람에게는 11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아들 4명과 세 딸만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 중 아들 이반은 예카테리나 2세 시절에 해군 장교로서 활약하고 1779년 헤르손 시 건설을 수행했다. 아브람의 또다른 아들 오시프의 손녀인 나데즈다 오시포브나 간니발이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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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슬람이나 토착신앙을 믿었기 때문에 이전부터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로써 유럽 국가들과 교류를 해왔다.[2] 레프 톨스토이의 증조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