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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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제12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
足利義晴

파일:Yosiharu_asikaga.jpg
생몰년도
1511년 4월 2일 ~ 1550년 5월 20일
재임기간
제12대 정이대장군
1522년 1월 22일 ~ 1547년 1월 11일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무로마치 막부의 제12대 쇼군. 제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의 아들이고 아시카가 요시테루,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아버지.


2. 생애[편집]


태어나기 전에 오우치 요시오키가 요시하루의 아버지인 11대 요시즈미를 쫓아내고, 그 전에 쫓겨나(메이오 정변) 지방에서 떠돌던 10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다시 옹립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요시하루도 막부가 있는 교토 무로마치가 아닌 동쪽 오오미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태어난지 얼마 안 지나서 아버지 요시즈미가 사망한다.

2살 때인 1513년 교토를 차지한 요시타네파와 양 세력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요시타네의 쇼군 복위가 확정되자, 하리마로 가서 아카마츠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1521년 요시타네가 간레이 호소카와 다카쿠니와의 갈등으로 인해 교토를 떠나버리고, 이로 인해 천황의 즉위식에 불참하여 천황의 신임을 잃자, 다카쿠니에 의해 쇼군으로 발탁되어 교토에 복귀했다. 이미 쫓겨나길 여러 번인 요시타네는 지방에서 다시 한 번 재기를 노렸으나 1523년 사망했다.

1526년 호소카와 가 내부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요시하루는 자신을 쇼군에 오를 수 있게 해 준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1527년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교토를 점령하자 요시하루는 다카쿠니와 함께 오오미로 다시 도망쳤다. 이후 1531년 패배한 다카쿠니가 자결하고 하루모토와 중신인 미요시 가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1532년 막부를 아예 교토 무로마치에서 오오미에 있는 구와노미데라로 옮겨버린다.

1534년 롯카쿠 사다요리, 롯카쿠 요시카타 부자의 도움으로 하루모토와 화해하고 겨우 다시 교토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뒤 또 갈라서서 1541년부터 1543년까지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다.

결국 1547년의 패배 이후 쇼군 직을 어린 아들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후견인으로 물러난다. 그 뒤 하루모토와 화해하고 다시 교토로 돌아오지만 1549년 하루모토와 미요시 나가요시의 싸움에서 하루모토가 지자 또 도망쳐서 이듬해 피난처에서 죽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교토 탈환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억지로 죽을 먹어가며 일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왔다 갔다만 반복한 무능한 쇼군 같고 실제로 오닌의 난 이후 떨어진 쇼군의 위세가 이렇게 왔다갔다 하면서 바닥을 쳤지만, 이미 요시하루 이전 쇼군들 때부터 위세는 떨어져 있었고 요시하루 본인은 나름대로 무로마치 막부와 쇼군의 권위 회복에 힘쓰긴 했다. 측근 집단을 재편성하여 정권 중추에 두는 것으로 쇼군 친정권의 강화를 꾀하고,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이래 지속되어 온 히노 가문과의 혼인 관계를 청산하고 조정의 명문가 고노에 가문 출신을 정실로 맞이하여 조정과의 관계 강화를 꾀했다.[1] 또 여러 대다이묘들에게 이름 한 글자를 주기도 했다.[2] 하지만 결국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으로 발발한 대규모의 쟁란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3. 여담[편집]


  • 일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안경이 이 사람의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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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부인이 요시테루, 요시아키 두 쇼군을 낳았고, 요시테루 쇼군의 대에 아들인 요시테루를 도와 우에스기 겐신의 상경을 요청하는 등 많은 도움이 되었다.[2] 대표적인 사람이 다케다 하루노부아마고 하루히사.[3] 다만 최초로 일본에서 안경을 사용한 사람은 오우치 요시타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