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시어터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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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영화 제작사이자 배급사. 약칭은 ATG.
1960년대~1970년대 당시, 기존의 일본 영화와는 차별화된 예술 영화들을 제작해 일본 영화사의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제작사다.
2. 역사[편집]
ATG는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의 네오레알리스모(Neorealismo), 미국의 뉴 할리우드 등 세계적인 영화 조류를 배경으로 다른 영화사와 차별화되는 비상업주의적 예술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해, 작가주의 영화를 옹호하기 위한 운동체 역할을 했다. ATG는 당시 일본의 아방가르드 흐름에 영감을 주고 얽히게 한 원동력이자 원심력이었으며, 일본 독립영화 운동의 시초격에 해당하는 제작사다. ATG 영화의 특징은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작품이나 야심찬 청춘영화를 중심으로 불온함과 음울함이 가득했으며, 그리고 성과 사랑, 정치를 과격하게 묘사하는 작품도 많아 젊은이들과 시네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ATG 설립의 역사적 배경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영향이 강하다. 60년대의 일본의 젊은이들의 관심은 진지한 아트 계열 영화나 실험적인 연극 등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불어 1950년대에 예술 영화나 전위적인 실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만드는 아트 시어터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1960년대에는 안제이 바이다 등 폴란드파, 장뤽 고다르 등 누벨바그의 영향으로 예술영화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 아래 도와 영화의 부사장 카와키타 카시코(川喜多かしこ)[1] 와 도호의 부사장 모리 이와오(森岩雄)가 협력해 아트 시어터 길드 설립에 나섰다.
카와키타는 일본 ‘미니 시어터’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와나미홀’과도 연관이 깊어 예술영화 전용관이 활성화되는 데에도 크게 기여 했다. 산와 흥행의 이세키 다네오(井関種雄)를 사장으로 삼아 필름 라이브러리의 내실화, 자금 모으기, 상영관 확보 등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투자 유치에 성공해 1961년 11월 15일에 정식적으로 ATG가 설립됐다. 1961년부터 1967년까지를 이른바 '제1기 ATG'라고 부른다. 제1기 시절의 ATG는 주로 해외의 예술 영화 배급을 담당했고, 영화 제작은 하지 않았다. ATG는 자체적으로 '영화예술위원회(映画芸術委員会)'를 설립해 위원회 회원들이 선정한 영화만을 개봉시켰다.[2] 위원회의 회원들은 영화 평론가들과 작가, 영화인들로 구성됐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평론가였기 때문에, 상업적인 고려 대신 예술적인 고려를 염두에 두고 선택되었다.
ATG의 메인 극장은 도쿄 신주쿠에 있는 '아트시어터 신주쿠'였는데, 총지배인 쿠즈이 긴시로(葛井欣士郎)가 자신의 계획에 따라 극장을 재해석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영화관을 만들었다. 영화관 전체가 어두운 색조의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청구서와 포스터가 있었다. 또 다른 종류의 화려한 상업 광고는 추방되었고, 오후에만 영화관이 오픈했다.[3] 좌석은 넓고 편안했으며, 관객들은 다른 영화관에서 했던 것처럼, 관람 중에 단순히 왔다갔다 할 수 없었다. 또 로비는 유명한 화가들과 삽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역할을 했다. 1967년 8월에는 지하에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라이브 공연을 위한 전시 공간인 '극장 스콜피오'를 오픈했다. 이 극장은 일본 최초의 지하 극장이었다. '스콜피오'라는 이름은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제안했다.#
ATG의 첫 배급 작품은 폴란드 감독 예지 카발레로비치(Jerzy Kawalerowicz) [4] 의 '천사들의 수녀 요안나'였다. 이후 장 콕토, 테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宏), 비토리오 데 시카, 잉마르 베리만, 존 포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프랑수아 트뤼포.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루이스 부뉴엘, 알랭 레네 등의 작품들을 배급했다. 1966년에는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원작, 감독, 각본, 제작, 주연을 맡은 단편영화 '우국(憂国)'이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뒀으며, 1967년 개봉한 이마무라 쇼헤이의 다큐멘터리 영화 '인간 증발(人間蒸発)'의 기획을 ATG가 갖고옴으로써 영화 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 ATG는 본격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제2기 ATG'라고 부른다. 60년대 중반부터 일반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대형 영화사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상업 영화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풍조에 반발해 오시마 나기사나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요시다 요시시게(吉田喜重)[5] 처럼 대형 영화사(쇼치쿠)를 떠나는 감독들이 나타났다. ATG는 이러한 감독들이 설립한 독립 프로덕션을 지원하여 저예산 영화[6] 를 제작했다. 스스로 메이저 스튜디오를 걸어나오거나, 혹은 애초에 메이저 스튜디오의 문 앞에 설 생각이 없었던 감독들은 ATG가 보유한 전국 10여개의 독립영화 상영관을 통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다.[7] 당시 ATG는 예술성이 높은 영화도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예술영화의 안정적 제작 시스템 구축과 지원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제작 작품들도 독립적인 영화 평론가들로 구성된 기획 위원회에 의해 선정되었다. 오카모토 키하치(岡本喜八)의 '육탄'(1968), 쿠마이 케이(熊井啓)의 '땅의 무리'(1971), 와카마츠 코지의 '천사의 황홀'(1972) 등은, 이러한 결정속에서 만들어졌다. 또 ATG는 짓소지 아키오, 타하라 소이치로 등 TV계, 테라야마 슈지, 카라 주로(唐十郎), 시미즈 쿠니오(清水邦夫) 등 연극계, 마츠모토 토시오, 쿠로키 카즈오(黒木和雄), 히가시 요이치(東陽一) 등 다큐멘터리계의 다양한 인재들이 장편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도 만들었다. 아다치 마사오(足立正生)[8] , 사이토 코이치(斎藤耕一), 마스무라 야스조(増村保造), 신도 가네토(新藤兼人), 스즈키 세이준 등의 감독들도 이 제작사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연출한 영화들은 평론지 키네마 준보가 선정하는 '베스트 텐'에 단골로 선정되는 등 평론가들에게 찬사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ATG가 제작을 지원한 예술 영화 중에는 흥행에 실패하는 것도 많이 있어서, 경영은 점차 어려워졌다. 결국 1979년에 이세키 다네오 사장이 사직하고, 사사키 시로(佐々木史朗)가 사장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제3기 ATG'라고 부른다. 사사키 사장이 이끄는 ATG는 거장 감독들보다 오오모리 카즈키(大森一樹),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 등 젊은 감독과 하세가와 카즈히코(長谷川和彦),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 등 로망 포르노 영화 출신의 감독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제3기 시기에는 기존의 난해하고 실험적인 영화들보다는, 좀 더 대중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히트작으로 모리타 요시미츠의 '가족게임(1983)'과 이타미 주조의 '장례식(1984)'이 있다. ATG가 배급한 '장례식'은 소규모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흥행 수익 10억엔을 넘기는 대박을 기록했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도 이 시기의 ATG 작품을 연출했다. 또한 젊은 영화인들을 기용해 후일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중요한 인재들을 육성했지만 [9] , ATG의 경영 자체는 계속해서 약화돼 1992년 신도 가네토의 '훈동기담'을 끝으로 역사의 막을 내렸다. 2018년 11월 11일, 도호와 흡수합병했다. #
3. 작품 목록[편집]
ATG가 배급하거나 제작한 일본 영화들만 기재했다.
3.1. 1960년대[편집]
3.2. 1970년대[편집]
3.3. 1980년대[편집]
3.4. 1990년대[편집]
4. 여담[편집]
- ATG의 영화 제작은 독립 프로덕션과 제작비를 절반으로 줄여 '일천만엔 영화(一千万円映画)'라고 불리는 저예산이었다. 1,000만엔라는 예산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당시 일반 영화 예산의 몇 분의 1이었기 때문에 제작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랐다.
- ATG의 로고는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가 디자인했다.
영화가 개봉할때마다 영화 잡지 '아트 시어터'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영화의 시나리오와 영화평론으로 구성되었고, 상영관에서만 배포하였다. 이 잡지의 타이틀 문자와 표지의 디자인도 이타미 주조가 담당했다.
- ||<width=485><tablealign=left><tablewidth=500> ||<width=515>||
ATG 영화들의 포스터는 지금봐도 상당히 독특하다. 대부분의 포스터가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나 아티스트들에 의해 디자인됐다.
- 2004년, 2008년 한국에서 ATG의 영화들을 주목하는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 2013년, 파리와 뉴욕에서 ATG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
5. 외부 링크[편집]
[1] 일본 영화 산업의 큰 발전을 끼친 인물이라 '일본 영화의 대모'라고 불리기도 한다.[2] 최소 한달 이상 개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3] 대부분의 영화관들이 아침에 문을 열었기 때문에 차별화를 한것이다.[4] 안제이 바이다와 함께 폴란드 학파의 거두로 꼽히는 감독으로, '야간 열차'와 '파라오'가 대표작으로 꼽힌다.[5] 요시다 기주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6] 당시 제작비는 대략 1,000만엔 정도였다.[7] ATG가 감독 절대주의라는 신념으로 감독들의 개성과 작가성을 존중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8] 각본가로 활동했다.[9] 하세가와 카즈히코 사단 감독들이 이 3기 시절에 거쳐간 경력이 있다. 소마이 신지, 구로사와 기요시, 스오 마사유키 등.[10] 최초로 ATG가 자금으로 제작한 영화[11] ATG가 독립 프로덕션에게 제작비를 지원하는 '일천만엔 영화'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이다.[12] 각본은 테라야마 슈지가 담당.[13] 서양권에서 컬트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는 실험 영화 작품.[14] ATG 창립 10주년 기념작[15] 록 밴드 캐롤의 다큐멘터리 영화[16] 각본은 테라야마 슈지가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