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야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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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사샤이 2세 벤 우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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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키 2세 벤 사샤이

제6대

솀베트 벤 북키

제7대

샬롬 1세 벤 솀베트

제8대

히즈키야 1세 벤 샬롬

제9대

요나단 1세 벤 에비아달

제10대

야이르 1세 벤 요나단

제11대

달리야 1세

제12대

야이르 2세 벤 달리야

제13대

요나단 2세 벤 야이르

제14대

이스마엘 벤 요나단

제15대

타비야 1세

제16대

시드키야 1세

제17대

아히드

제18대

야이르 3세

제19대

여호사닥

제20대

사독

제21대

아므람 1세

제22대

힐키야 또는 히즈키야 2세

제23대

아므람 2세

제24대

아쿱

제25대

아쿠비야 1세

제26대

힐렐 1세

제27대

세리야

제28대

레위 1세

제29대

네타니엘 1세

제30대

아자리야

제31대

아베드엘 1세

제32대

히즈키야 3세

제33대

하나니야

제34대

아므람 3세

제35대

힐렐 2세 또는 하난

제36대

히즈키야 4세

제37대

달리야 2세

제38대

아쿱 2세

제39대

아쿠비야 2세

제40대

레위 2세

제41대

엘르아잘 2세

제42대

므나쎄

제43대

야이르 4세

제44대

네타니엘 2세

제45대

요아킴

제46대

요나단 3세

제47대

엘리사마


아히툽

아히야

아히멜렉

에비아달

사독

아히마스

아자리야 1세

요아스

여호야립

여호사밧

여호야다

브디야

시드키야

요엘

요담

우리야

네리아

호사야

살룸

힐키야

아자리야 2세

스라야

예수아

요야킴

엘랴십

요야다

요하난

야뚜아

오니아스 1세

시몬 1세

엘르아잘

므나쎄

오니아스 2세

시몬 2세

오니아스 3세

이아손

메넬라오스

오니아스 4세

알키모스

요나단 아푸스

시몬 타시

히르카노스 1세

아리스토불로스 1세

알렉산드로스 야나이

히르카노스 2세

아리스토불로스 2세

안티고노스

아나넬로스

아리스토불로스 3세


파부스의 아들 예수

시몬 벤 보에투스

마티아스 벤 테오필로스

요아잘 벤 보에투스

엘르아잘 벤 보에투스

요슈아 벤 시에

안나스

이스마엘 벤 파부스

엘르아잘 벤 아나누스

시몬 벤 카미투스

가야파

요나단 벤 아나누스

테오필루스 벤 아나누스

시몬 칸타테라스 벤 보에투스

마티아스 벤 아나누스

엘리오네우스 벤 시몬 칸타테라스

요세푸스 벤 캄브두스

네데베우스의 아들 아나니아스

요나단

이스마엘 벤 파부스

요세프 카비 벤 시몬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요슈아 벤 가믈라

마타티아스 벤 테오필루스

판니아스 벤 사무엘


직위 단절
사마리아인
제47대
엘리사마

제48대

스마야

제49대

타비야 2세

제50대

아므람 4세

제51대

아카본 1세

제52대

비느하스 2세

제53대

레위 3세

제54대

엘르아잘 3세

제55대

바바 1세

제56대

엘르아잘 4세

제57대

아카본 2세

제58대

네타니엘 3세

제59대

바바 2세 랍바

제60대

아카본 3세

제61대

네타니엘 4세

제62대

아카본 4세

제63대

엘르아잘 5세

제64대

아카본 5세

제65대

엘르아잘 6세

제66대

아카본 6세

제67대

엘르아잘 7세

제68대

네타니엘 5세

제69대

엘르아잘 8세

제70대

네타니엘 6세

제71대

엘르아잘 9세

제72대

아카본 7세

제73대

엘르아잘 10세

제74대

아카본 8세

제7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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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대

아카본 9세

제77대

엘르아잘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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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

제79대

레위 4세

제80대

비느하스 3세

제8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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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대

바바 3세

제83대

엘르아잘 13세

제84대

네타니엘 8세

제85대

엘르아잘 14세

제86대

비느하스 4세

제87대

네타니엘 9세

제88대

아베드엘 2세

제89대

엘르아잘 15세

제90대

아베드엘 3세

제91대

엘르아잘 16세

제92대

아베드엘 4세

제93대

아론 2세

제95대

체다카 1세

제96대

아므람 5세

제97대

아론 3세

제98대

아므람 6세

제99대

우찌 2세

제100대

요셉 1세

제101대

비느하스 5세

제102대

엘르아잘 17세

제103대

비느하스 6세

제104대

아비수아 2세

제105대

엘르아잘 18세

제106대

이다말

제107대

아므람 7세

제108대

우찌 3세

제109대

비느하스 7세

제110대

엘르아잘 19세

제111대

비느하스 8세

제112대

샬마 1세 벤 비느하스

제113대

체다카 2세 벤 타비야 하압타이

제114대

이사악 1세 벤 체다카

제115대

아브람 벤 이사악

제116대

레위 5세 벤 아브람

제117대

타비야 3세 벤 이사악 벤 아브람

제118대

샬마 2세 벤 타비야

제119대

아므람 8세 벤 샬마

제120대

야곱 1세 벤 아론 벤 샬마

제121대

이사악 2세 벤 아므람 벤 샬마 벤 타비야

제122대

마츨리악 벤 비느하스 벤 이사악 벤 샬마

제123대

아비샤 3세 벤 비느하스 벤 이사악 벤 샬마

제124대

아므람 9세 벤 이사악 벤 아므람 벤 샬마

제125대

아셀 벤 마츨리악 벤 비느하스

제126대

비느하스 10세 벤 마츨리악 벤 비느하스

제127대

야곱 2세 벤 우찌 벤 야곱 벤 아론

제128대

요셉 2세 벤 압히스다 벤 야곱 벤 아론

제129대

레위 6세 벤 아비샤 벤 비느하스 벤 이사악

제130대

샬롬 2세 벤 아므람 벤 이사악

제131대

엘르아잘 20세 벤 체다카 벤 이사악

제132대

아론 4세 벤 압히스다 벤 야곱

제133대

아베드엘 5세 벤 아셀 벤 마츨리악






하스몬 왕조 7대 군주
Ἀλέξανδρος Ἰανναῖος | 알렉산드로스 야나이

파일:알렉산드로스 야나이.jpg

제호
한국어
알렉산드로스 야나이
히브리어
יַנַּאי
그리스어
Ἀλέξανδρος Ἰανναῖος
라틴어
Alexander Jannaeus
출생명
요나단(יהונתן)
존호
코헨(כֹּהֵן , 제사장)이자 국왕
생몰 년도
기원전 127년 ~ 기원전 76년
재위 기간
기원전 103년 ~ 기원전 76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하스몬 왕조 7대 군주.

2. 행적[편집]


하스몬 왕조 5대 군주 요한 히르카노스 1세가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얻은 세번째 아들이다. 기원전 104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복형 아리스토불로스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정적으로 여긴 이복형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 기원전 103년 아리스토볼로스 1세가 복통에 시달리다 사망한 후, 아리스토볼로스 1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그를 석방시켰다. 이후 13살 연상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개인적으로 사두가이파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바리사이파 집안 출신이었던 살로메 알렉산드라를 고려하여 선왕이 전개하던 바리사이파 탄압을 중단했다. 그 후 시리아 해안 도시인 프톨레마이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도라의 조일로스가 이를 막으려 했으나 격파당했고, 프톨레마이스는 유대군에 포위되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이집트 왕위를 놓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클레오파트라 3세와 대립했다가 패배하여 키프로스로 이동한 그는 프톨레마이스를 구원한 뒤 시리아의 패권을 확보한 후 이집트로 돌아갈 발판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함대를 이끌고 프톨레마이스로 진군하자, 야나이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싸울 마음이 없어서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스는 자기들이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클레오파트라 3세-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적이 되어버렸다는 걸 깨닫고, 그들과 화해하고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도시 입성을 거부했다.

야나이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400달란트를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지만, 곧 마음을 바꿔 클레오파트라 3세와 동맹을 협상하고 해안 도시인 도라와 스트라톤을 공략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도움을 요청해놓고 도시 입성을 거부하는 프톨레마이스에 분노해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야나이의 행위를 전해듣자 부하들에게 별동대를 맡겨 도시 공격을 이어가도록 한 뒤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갈릴리로 쳐들어가 여러 마을을 황폐화하고 안식일에 아소키스를 공략하고 1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세포리스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기원전 103년 가을,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야나이는 요르단 강 인근의 아소폰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승리했고, 유대군 3만에서 5만 명이 전사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별동대도 프톨레마이스를 공략하고 철저하게 약탈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유대 왕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유대 북부 지역과 해안 지역, 요르단 강 동쪽 지역을 제패하고 그 일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상황을 전해들은 클레오파트라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유대를 발판삼아 이집트를 침공할 걸 우려하여 유대로 군대를 파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군대는 바다를 통해 페니키아를 침공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그들이 병력을 다른 데 보낸 틈을 타 이집트로 곧장 밀어붙이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급히 돌아와 이를 막았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가자에서 겨울을 보낸 뒤 기원전 102년 초 키프로스로 돌아갔다. 야나이는 클레오파트라 3세에게 찾아가 엎드려 절하며 자신이 유대의 왕으로서 통치를 유지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의 부하들은 유대 지방을 이집트에 합병시키라고 요구했지만, "이집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여왕님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걸 고려해주십시오"라는 말에 넘어간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가 유대에서 계속 군림할 수 있게 해주고 이집트로 돌아갔다.

이집트군이 물러난 뒤 야나이는 곧 팔레스타인 북동부를 향한 새로운 원정을 기획했다. 그는 가다라와 요단강의 견고한 요새 아마투스를 공략했다. 그러나 아마투스의 통치자 테오도로스의 매복에 걸려드는 바람에 후위대 10,000명이 전사했다. 이후 블레셋에 대한 원정에 착수해 라피아, 안테돈을 공략했고, 기원전 96년에 고대 도시 가자를 함락했다. 그는 가자 시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려 했지만 병사들이 거부하자 포기했다. 이렇듯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어가고 있었지만, 유대 왕국 내부에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 파간의 알력다툼이 심해지면서 내란의 조짐이 일었다.

그는 사두가이파와의 친밀감을 나타내기 위해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초막절에 규정된 물을 제공하면서, 발에 물이 흐르도록 해 바리사이파의 '물 해방 의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했다. 그러자 왕의 행위에 분노한 사람들은 초막절 축제 관습에 따라 들고 다니던 유자나뭇가지로 야나이를 공격했다. 그러면서 그를 "포로의 아들"이라고 욕했고, 사독의 후예도 아닌 하스몬 왕조 일가가 대제사장을 역임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비난했다. 이에 야나이는 피시디아와 킬리키아 용병들을 불러들어 폭도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리하여 바리사이파를 지지하던 6,000명의 군중이 피살당했다.

이 일로 민심을 잃은 그는 설상가상으로 가자를 잃으면서 로마와 다마스쿠스로 통하는 무역로를 잃은 것에 분노한 나바테아 왕국의 습격에 직면했다. 기원전 93년, 그는 이들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지만, 나바테아 왕 오보다스 1세가 가다라의 가파른 계곡에 매복했다가 덮치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바리사이파의 선동응 받은 유대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점거하고 그를 도시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벌어진 내전은 6년간 지속되면서 50,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좀처럼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자 바리사이파에 평화 협약을 맺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의 신성한 경내에서 무방비 상태의 군중을 집단 학살한 그의 행위를 문제삼으며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영원한 평화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조건은 당신이 죽는 것이오."


바리사이파는 그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데메트리오스 3세와 동맹을 맺었다. 데메트리오스 3세가 유대 왕국으로 쳐들어오자, 야나이는 이를 막으려 출진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야나이의 용병들이 자신과 같은 그리스인인 점을 이용해 회유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양측이 격전을 벌인 끝에 데메트리오스 3세가 승리했고, 야나이는 에브라힘 산으로 피신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를 따르던 유대 반군 6,000명이 동포가 무참히 살육되는 걸 가엾게 여겨 야나이와 합류했고 데메트리오스 3세에게 유대에서 철수하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마침 데메트리오스 3세는 형 필리포스 1세와 왕위를 놓고 분쟁 중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시리아로 돌아갔다.

바리사이파의 귀순으로 내전이 종식되었지만, 그는 자신을 적대시한 그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디오게네스라는 이름의 사두가이파 신봉자의 조언에 따라 하루 만에 800명의 바리사이파 신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전설에 따르면,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은 자신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눈앞에서 목베이는 걸 지켜봐야 했으며, 야나이는 큰 연회를 열어 신하들과 창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피비린내나는 처형 장면을 즐겨봤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살아남은 바리사이파들은 유대를 떠났는데, 이중 8,000명 가량은 시리아와 이집트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렇듯 잔인한 행보로 인해 민심을 잃어버리면서 유대에서 병력을 모으기가 곤란하게 되자, 그는 외국인들을 용병으로 끌여들어서 군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나바테아의 명군 오보다스 1세의 군대가 위협해왔을 때 이를 막기에는 확보한 전력이 너무 약했기에, 에돔과 모압의 영토를 그에게 할양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자신의 불명에를 급복하고자 기원전 85년부터 82년까지 요단 강 동쪽 지역을 공격하여 팔라, 디움, 게라사, 살리아나, 셀레우키아, 가말라를 잇따라 공략했다.

기원전 82년. 안티오코스 12세나바테아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지중해 해안기를 따라 이동하다가 유대 왕국의 영역을 통과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야나이는 안티오코스 12세가 유대를 정복하려고 쳐들어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야나이 방어선'을 건설했다고 한다. 방어선은 카파사바에서 요파 인근까지 28km에 달했다고 하지만, 안티오코스 12세는 방어선을 뚫고 계속 행진했다고 한다.

말년에 열병에 시달렸지만 전장에서 계속 활동한 그는 기원전 76년 라가바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중 진영 내에서 사망했다. 사후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대제사장이 되었고,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여왕으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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