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히르카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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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제4대
사샤이 2세 벤 우찌

제5대

북키 2세 벤 사샤이

제6대

솀베트 벤 북키

제7대

샬롬 1세 벤 솀베트

제8대

히즈키야 1세 벤 샬롬

제9대

요나단 1세 벤 에비아달

제10대

야이르 1세 벤 요나단

제11대

달리야 1세

제12대

야이르 2세 벤 달리야

제13대

요나단 2세 벤 야이르

제14대

이스마엘 벤 요나단

제15대

타비야 1세

제16대

시드키야 1세

제17대

아히드

제18대

야이르 3세

제19대

여호사닥

제20대

사독

제21대

아므람 1세

제22대

힐키야 또는 히즈키야 2세

제23대

아므람 2세

제24대

아쿱

제25대

아쿠비야 1세

제26대

힐렐 1세

제27대

세리야

제28대

레위 1세

제29대

네타니엘 1세

제30대

아자리야

제31대

아베드엘 1세

제32대

히즈키야 3세

제33대

하나니야

제34대

아므람 3세

제35대

힐렐 2세 또는 하난

제36대

히즈키야 4세

제37대

달리야 2세

제38대

아쿱 2세

제39대

아쿠비야 2세

제40대

레위 2세

제41대

엘르아잘 2세

제42대

므나쎄

제43대

야이르 4세

제44대

네타니엘 2세

제45대

요아킴

제46대

요나단 3세

제47대

엘리사마


아히툽

아히야

아히멜렉

에비아달

사독

아히마스

아자리야 1세

요아스

여호야립

여호사밧

여호야다

브디야

시드키야

요엘

요담

우리야

네리아

호사야

살룸

힐키야

아자리야 2세

스라야

예수아

요야킴

엘랴십

요야다

요하난

야뚜아

오니아스 1세

시몬 1세

엘르아잘

므나쎄

오니아스 2세

시몬 2세

오니아스 3세

이아손

메넬라오스

오니아스 4세

알키모스

요나단 아푸스

시몬 타시

히르카노스 1세

아리스토불로스 1세

알렉산드로스 야나이

히르카노스 2세

아리스토불로스 2세

안티고노스

아나넬로스

아리스토불로스 3세


파부스의 아들 예수

시몬 벤 보에투스

마티아스 벤 테오필로스

요아잘 벤 보에투스

엘르아잘 벤 보에투스

요슈아 벤 시에

안나스

이스마엘 벤 파부스

엘르아잘 벤 아나누스

시몬 벤 카미투스

가야파

요나단 벤 아나누스

테오필루스 벤 아나누스

시몬 칸타테라스 벤 보에투스

마티아스 벤 아나누스

엘리오네우스 벤 시몬 칸타테라스

요세푸스 벤 캄브두스

네데베우스의 아들 아나니아스

요나단

이스마엘 벤 파부스

요세프 카비 벤 시몬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

요슈아 벤 가믈라

마타티아스 벤 테오필루스

판니아스 벤 사무엘


직위 단절
사마리아인
제47대
엘리사마

제48대

스마야

제49대

타비야 2세

제50대

아므람 4세

제51대

아카본 1세

제52대

비느하스 2세

제53대

레위 3세

제54대

엘르아잘 3세

제55대

바바 1세

제56대

엘르아잘 4세

제57대

아카본 2세

제58대

네타니엘 3세

제59대

바바 2세 랍바

제60대

아카본 3세

제61대

네타니엘 4세

제62대

아카본 4세

제63대

엘르아잘 5세

제64대

아카본 5세

제65대

엘르아잘 6세

제66대

아카본 6세

제67대

엘르아잘 7세

제68대

네타니엘 5세

제69대

엘르아잘 8세

제70대

네타니엘 6세

제71대

엘르아잘 9세

제72대

아카본 7세

제73대

엘르아잘 10세

제74대

아카본 8세

제75대

엘르아잘 11세

제76대

아카본 9세

제77대

엘르아잘 12세

제78대

시므온

제79대

레위 4세

제80대

비느하스 3세

제81대

네타니엘 7세

제82대

바바 3세

제8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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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대

네타니엘 8세

제85대

엘르아잘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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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느하스 4세

제87대

네타니엘 9세

제88대

아베드엘 2세

제89대

엘르아잘 15세

제90대

아베드엘 3세

제91대

엘르아잘 16세

제92대

아베드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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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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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대

아므람 5세

제97대

아론 3세

제9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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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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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대

비느하스 5세

제10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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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대

비느하스 6세

제104대

아비수아 2세

제105대

엘르아잘 18세

제106대

이다말

제107대

아므람 7세

제108대

우찌 3세

제109대

비느하스 7세

제110대

엘르아잘 19세

제111대

비느하스 8세

제112대

샬마 1세 벤 비느하스

제113대

체다카 2세 벤 타비야 하압타이

제114대

이사악 1세 벤 체다카

제115대

아브람 벤 이사악

제116대

레위 5세 벤 아브람

제117대

타비야 3세 벤 이사악 벤 아브람

제118대

샬마 2세 벤 타비야

제119대

아므람 8세 벤 샬마

제120대

야곱 1세 벤 아론 벤 샬마

제121대

이사악 2세 벤 아므람 벤 샬마 벤 타비야

제122대

마츨리악 벤 비느하스 벤 이사악 벤 샬마

제123대

아비샤 3세 벤 비느하스 벤 이사악 벤 샬마

제124대

아므람 9세 벤 이사악 벤 아므람 벤 샬마

제125대

아셀 벤 마츨리악 벤 비느하스

제126대

비느하스 10세 벤 마츨리악 벤 비느하스

제127대

야곱 2세 벤 우찌 벤 야곱 벤 아론

제128대

요셉 2세 벤 압히스다 벤 야곱 벤 아론

제129대

레위 6세 벤 아비샤 벤 비느하스 벤 이사악

제130대

샬롬 2세 벤 아므람 벤 이사악

제131대

엘르아잘 20세 벤 체다카 벤 이사악

제132대

아론 4세 벤 압히스다 벤 야곱

제133대

아베드엘 5세 벤 아셀 벤 마츨리악






하스몬 왕조 5대 군주
יוחנן הרקנוס | 요한 히르카노스 1세


파일:요한 히르카노스 1세.jpg

제호
한국어
요한 히르카노스 1세
히브리어
יוחנן הרקנוס
그리스어
Ἰωάννης Ὑρκανός
라틴어
Ioannes Hyrcanus
존호
코헨(כֹּהֵן , 제사장)이자 국왕
생몰 년도
기원전 164년 ~ 기원전 104년
재위 기간
기원전 134년 ~ 기원전 104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하스몬 왕조 5대 군주.

2. 행적[편집]


하스몬 왕조 4대 군주 시몬의 셋째 아들이다. 형으로 예후다, 마티야후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치세 동안 유대군 사령관으로서 게셀에서 활동했다. 그는 기원전 137년 가을에서 기원전 136년 봄 사이에 아조토스 인근에서 켄테바이오스 휘하의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격파했다. 그렇지만 두 형이 있는 만큼 후계자가 될 가망은 없었고, 본인 역시 자기가 지도자가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던 시몬은 기원전 135년 1~2월,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예리코를 방문했다. 예리코에는 아부보스의 아들이자 그의 사위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사령관으로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장인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정성껏 대접했으나,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에 갑자기 병사들을 시켜 시몬과 두 아들 예후다, 마티야후를 살해했다. 일각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7세의 사주를 받았다고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해서 불확실하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마저 죽이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사전에 경고를 받았던 그는 이들을 물리친 뒤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그들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후 다곤 요새에 숨은 프톨레마이오스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남편과 두 아들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한 뒤 지금까지 붙잡혀 있었던 그의 어머니를 끌어내 잔인한 고문을 가하면서 물러나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문을 견디면서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원수를 갚으라고 격려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요새를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고,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 뒤 랍바스 암몬으로 도주했다. 그 후 기원전 134년 백성의 추대를 받아 유대의 제사장이자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는 곧 셀레우코스 제국의 침략에 직면했다. 안티오코스 7세는 마카베오 가문의 내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134년 여름에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셀레우코스군은 예루살렘 주위에 7개의 진영을 쳐서 맹공을 퍼부었다고 한다. 포위된 사람들은 식량과 물 부족에 시달렸다. 그러자 그는 전투를 치를 수 없는 자들을 도시에서 내쫓았다. 안티오코스 7세도 그들을 수용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 성과 적진 사이에 갇혀 굶어죽어갔다.

그렇게 공방전이 1년간 지속된 끝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안티오코스 7세 역시 동방에서 제국을 위협하는 파르티아와 조속히 맞붙고 싶었기 때문에 이를 승낙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왕의 고문들은 유대인을 전부 소탕하라고 권고했지만,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대인들이 모든 무기를 버리며 유대 밖의 도시들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세금을 내고, 예루살렘에 수비대를 두는 걸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유대인들이 수비대를 예루살렘에 두는 것에 거부감을 내비치자, 그는 수비대를 두는 걸 포기하고 대신 인질들을 인도받고 500달란트의 은화를 받기로 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다윗 왕의 능을 도굴하여 확보한 은으로 배상금을 납부했다고 한다. 이때 남은 은은 용병을 고용하는 데 썼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다윗 왕이 막대한 부와 함께 매장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그가 예루살렘의 성전 보고에서 은을 몰수한 뒤 은의 출처를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다윗 왕의 능을 언급했기에 이런 이야기가 돌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해야 했으며, 유대의 대외 무역에 중요한 항구 도시인 욥바를 포기해야 했고, 유대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봉신이 되어야 했다. 안티오코스 7세가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을 때 보조병을 보내기도 했다.

기원전 129년 2월 또는 3월, 안티오코스 7세가 엑타바나 전투에서 파르티아군과 맞서다 전사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2세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가 왕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그는 이때를 틈타 그동안 셀레우코스 제국에 바쳐야 했던 공물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을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가 응징하려 하자, 그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려 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2세가 내전에서 승리하자, 그는 동전 위에 그리스 문자 'alpha'를 새겼다. '알파'는 셀레우코스 왕의 이름의 첫 글자로, 학자들은 이 글자가 알렉산드로스 2세를 가리킨다고 여겼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가 죽은 뒤 집권한 안티오코스 8세과 이에 대항한 안티오코스 9세의 내전이 20년이나 이어지는 등 셀레우코스 왕조가 날로 쇠락해져서 유대 왕국에 간섭할 여력이 없다는 게 분명히 드러나자, 그는 '알파' 글자를 지우고 자신이 대제사장임을 내세우는 동전을 대거 주조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내전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영역 확장에 나섰다. 우선 로마에 사절을 보내 친선 관계를 굳건히 하고, 요파 항구를 자신이 돌려받는 걸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로마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유대와 공동 방위 조약을 맺고 물자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그는 이어서 알레포 등 여러 시리아 도시들을 공략하고, 요르단 강둑의 마다바 요새를 포위 공격해 6개월만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사마리아 정복에 착수해 사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인 세겜을 정복하고 게리짐 산 신전을 파괴했다. 뒤이어 유대 남부의 에돔 정복 작전에 착수하여 에돔의 요새인 아도라와 마리사를 함락하고, 에돔인들에게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그는 뒤이어 사마리아 시를 포위 공격했다. 이 도시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알렉산드로스 3세가 기원전 331년 사마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한 뒤 새로 건설하여 마케도니아 이주민들을 수용한 곳이었다. 유대군은 도시를 맹공격했지만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수비대가 거세게 저항하기도 했지만 안티오코스 9세가 포위된 이들을 구하려고 병력과 물자를 계속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간의 공방전 끝에 마침내 함락되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사마리아 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고 한다. 그는 여기에 더해 헬레니즘 도시인 스카이토폴리스와 그 주변 일대도 파괴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마리아의 26개의 헬레니즘 정착지 중 7개 만이 로마 시대에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는 정복 전쟁을 벌이는 것과 동시에 건축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안티오코스 7세가 파괴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고, 예루살렘 북쪽에 바라스와 히르카니아 요새를 건설했다. 여기에 로마와 이집트간 무역에 힘을 기울여서 국가 경제를 증진했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이 이집트에 상업 목적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이렇듯 유대 왕국을 강력하게 일궈낸 그는 어느 해 산헤드린을 소집해 바리사이파사두가이파 지도자들을 초대하고 자신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지를 물었다. 이때 바리사이파 엘리자르 벤 포에라라는 인물이 그가 왕으로서 통치에 전념하는 건 용인할 수 있지만 대제사장 자리는 사독의 후예에 넘기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또다른 바리사이파 유다 벤 게디딤은 그의 어머니가 적에게 포로로 잡혀서 더럽혀졌으니, 그는 법적으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한 바리사이 파를 쫓아내고 사두가이 파의 율법을 법 해석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기원전 104년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는 왕과 대제사장을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아내에게 통치권을 맡겼고, 아들 아리스토불로스 1세를 대제사장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왕권과 종교 지도자를 분리시킨 것에 불만을 품은 아리스토불로스가 어머니와 이복 동생들을 감옥에 가두고 왕과 제사장 직을 겸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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