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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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파일:Albrecht_Dürer_-_1500_self-portrait_(High_resolution_and_detail).jpg
[1]

출생
1471년 5월 21일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사망
1528년 4월 6일 (향년 56세)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국적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
직업
화가, 판화가
배우자
아그네스 뒤러 (1494년 결혼)
종교
논쟁중[2]

1. 개요
2. 생애
3. 작품
4. 여담
5.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르네상스 시기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로 "독일 미술의 아버지", "북유럽의 레오나르도"로 존경을 받는 인물로 특히 그의 자화상과 판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만큼 독일의 낭만주의 미술은 뒤러의 화풍을 모방하며 등장하였다.


2. 생애[편집]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알브레히트 뒤러와 금세공사의 딸인 바바라 뒤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 뉘른베르크는 당시 북유럽과 남유럽을 잇는 중요한 교역도시였다. 아버지 밑에서 금세공기술과 그림을 배우고 관습에 따라 미하엘 볼케무트에서 수년간 견습생으로 있었다. 1490년에서 1494년 사이 라인강 지역을 여행했는데, 거기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과 그 모사본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결혼 후 다시 배움에 대한 욕구에 가득차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3] 이후 명성을 쌓아 이탈리아처럼 '귀족과 동등한 예술가'라는 개념을 최초로 독일에 퍼뜨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네덜란드를 여행할 무렵 카를 5세가 모은 신대륙의 보물들을 보고 기적보다 아름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건너온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평생동안 그 병으로 고통받다가 1528년 사망했다.


3. 작품[편집]


파일:Albrecht_Dürer_Betende_Hände.jpg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기도하는 손이다. 이 작품은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난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뒤러와 그의 친구 한스 나이스타인은 왕립 미술학교 입학금을 사기꾼에서 사기 당해서 입학금을 내기 위해 일과 그림을 병행하여야 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먼저 그림을 공부하고 그 후 남은 사람이 그 후를 미술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뒤러가 먼저 그림을 배우고 한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묵묵히 뒤러에게 지원금을 보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채석장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그의 손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널리 명성이 알려진 뒤러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스를 찾아간다. 거기서 자신이 온 지 모른 체 기도하는 한스를 보았다. 한스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의 손은 노동으로 인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지만, 내 친구 뒤러가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를 본 뒤러는 눈물을 흘리고 감명을 받아 그의 손을 그린 작품이 이 기도하는 손이다.


물론 이는 완전히 거짓이다. 실제로는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상인의 의뢰한, 교회를 장식할 그림[4]을 그리기 위한 습작이며, 손의 모델 역시 뒤러의 친구가 아닌 형제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파일:Albrecht_Dürer_-_1500_self-portrait_(High_resolution_and_detail).jpg
뒤러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위의 프로필에도 올라온 자화상이 있다. 1500년에 그린 이 작품은 유럽 역사상 최초의 독립적인 자화상으로[5], 인물의 정면상을 예수를 그린 성화에만 그리는 당대의 관행을 깨고 자신의 모습을 정면상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도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받아서 밝게 보이는 식으로 묘사해서,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자신을 대놓고 예수의 성화와 유사하게 그렸다.


4. 여담[편집]


그의 사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뒤러의 고향에서 개최하게 되는 데 후베르트 란칭어는 뒤러의 작품 기사, 죽음, 악마를 모티브로 해서 히틀러를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로 만들었고 그는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독일 정신의 정신적 지주라는 평을 더욱더 확산 시키게 되었다.

나치 이미지가 많이 박힌 뉘른베르크는 히틀러 대신 뒤러라는 캠페인을 벌여서 나치의 도시가 아닌 뒤러의 도시로 기억되기를 원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소재 기업인 파버카스텔의 고급 수성 색연필이 알브레히트 뒤러의 이름을 따서 팔리고 있다.


5. 매체에서[편집]



5.1. 게임[편집]



5.1.1. 도미네이션즈[편집]


알브레이트 뒤러의 시계가 유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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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00년에 그린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으로 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유. 여담으로 원래 당대에 정면을 향한 초상화는 거의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2] 뒤러의 종교관은 끝이 나지 않는 미술사학계 만년떡밥 중 하나다. 말년에 루터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했던 것은 분명하나, 가톨릭 교회와 공식적으로 단절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루터 외에 에라스무스 등의 가톨릭 내 개혁파와의 교류도 활발했다. 그리고 이후 루터파 운동이 과격화되면서 루터와 다소 거리를 두는 모습도 보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뒤러의 생전에만 해도 루터의 지지자들 중 여전히 스스로를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파를 만드는게 아니라 체제 내 개혁파로 인식한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Dürer and the Reformation", smu.edu, http://justus.anglican.org/resources/bio/148.html, Wolf, Norbert. Albrecht Dürer. Taschen, 2010.[3] 뒤러는 당시 르네상스 이탈리아 미술을 접한 최초의 독일 예술가 중 한명이다.[4] 불행히도 해당 그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모사본만 남아있다.[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이 최후의 심판 등의 작품에다 본인의 얼굴을 이스터 에그격으로 그려넣은 경우는 이전에도 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