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주바호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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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talha_de_Aljubarrota_02.jpg

1. 개요
2. 배경 및 진행
3. 영향
4. 여담



1. 개요[편집]


1385년 8월 14일포르투갈 중부 알주바호타(Aljubarrota)에서 벌어진 전투. 포르투갈 왕국주앙 1세카스티야 왕국후안 1세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포르투갈은 잉글랜드 왕국의 도움을 받아 카스티야 침공군을 격파하고 독립을 재확인 했다.


2. 배경 및 진행[편집]


1385년 포르투갈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싸움이다. 페르난두 1세가 1383년 사망하며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즉위하지만, 페르난두 1세가 사망 몇개월 전 포르투갈 왕위를 베아트리스의 후손이 잇도록 카스티야와 조약을 체결한 탓에 포르투갈, 특히 카스티야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상인계급의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들은 이를 무시하고 포르투갈 왕으로 주앙 1세[1]를 추대하고, 이에 후안 1세[2]가 포르투갈로 진공하여 싸움이 1385년까지 계속되었다.

후안 1세는 이 반란세력을 처단하고자 프랑스 기사 2천 여명을 포함해 카스티야, 아라곤, 프랑스 연합 총 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리스본으로 진격하는 도중 알주바호타에서 포르투갈군과 백년전쟁으로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던 잉글랜드 장궁병 6백 명을 포함한 잉포 연합군 6천 여명과 마주쳤다. 이미 잉포 연합군이 고지를 선점한 가운데, 후한 1세의 서투른 지휘와 큰 규모에 따른 굼뜬 움직임으로 카스티야 연합군은 잉글랜드 장궁병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퇴주했다.

잉포 연합군도 비록 천명 가량의 병력을 잃었지만, 도망가는 카스티야 연합군을 뒤쫓아 현장에서 5천명의 피해를 입히고, 카스티야 연합군은 퇴각 과정에서도 퇴각로 인근 주민들에게 공격받아 추가로 5천 명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3. 영향[편집]


이 전투로 인해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주앙 1세는 이 승리를 기념하고자 승리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을 알주바호타 인근에 지어 이를 기념하는데, 이 수도원이 오늘날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탈랴[3] 수도원이다.

이듬해 포르투갈, 잉글랜드 양국은 페르난두 1세 시기인 1373년 체결한 잉글랜드-포르투갈 조약[4]을 새롭게 윈저 조약(1386년)으로 갱신해 현존 가장 오래된 잉포 동맹을 재확인했다. 주앙 1세는 리처드 2세의 사촌이자 선대왕 에드워드 3세의 손녀 랭커스터의 필리파를 주앙 1세의 왕비로 맞아 들였다.

4. 여담[편집]


이 전투의 삽화가 주호민 닮은꼴로 나온적이 있다.아래 링크 17분 쯤 재생.

https://www.youtube.com/watch?v=NOhS0HpAU9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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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르고냐 왕조의 적통이 아닌 사생아였다.[2] 베아트리스의 남편이자 카스티야의 왕으로 페르난두 1세의 사위에 해당한다.[3] Batalha, 포르투갈어로 전투를 뜻한다.[4] 이 조약은 나중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이 포르투갈 군사기지 이용을 요청하면서 다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