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트롱 휘트워스 아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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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만들어낸 여객기. 세계 최초의 터보프롭 에어라이너가 될 뻔 했지만...

1. 미래를 내다 본 선각자
2. 차세대 리저널 여객기
3. 무리한 엔진 선정
4. 시제기 완성
5. 마지막 모습



1. 미래를 내다 본 선각자[편집]



세계를 휩쓰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장차 대영제국 민간 항공업계의 확장을 내다보고 세워진 브라바즌 위원회(Brabazon Committee)는 대양 횡단 여객기인 타입 1부터 국내선과 도버 해협 횡단 여객기인 타입 5까지 후보가 될 에어라이너의 개념 연구에 착수했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장래를 내다보고 미리 포석을 둔 위원회의 발기인 존 무어 브라바즌(John Moore-Brabazon) 남작의 혜안과 영국인들의 개척 정신만큼은 가상했지만, 당시의 영국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추축국과 싸우느라 이 원대한 계획은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브라바즌 프로젝트의 밑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전쟁에서 어느 정도 승기를 잡고 여유를 가지게 된 1944년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사실 이 계획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던 후보 기종인 브리스톨 브라바즌(Bristol Brabazon) 같은 경우는 최대이륙중량이 130톤에 달할 만큼 거인기였던 탓에 일본까지도 공습에 나설 수 있을 정도의 "100톤 폭격기"로 주목받고 있어서 가장 많은 지원을 받아서 원형기의 윤곽이 보이고 있었다.


2. 차세대 리저널 여객기[편집]



그렇지만 두 번째 프로젝트인 타입2는 기존의 피스톤 엔진과 개발 중이던 터보프롭 엔진을 각각 후보로 삼고 있어 엔진 선정의 문제와 더불어 그 관심도가 낮아 정부와 항공 당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해 개발이 늦어지게 된다. 브라바즌 타입 2는 두 가지 후보로 다시 나뉘게 되는데, 레시프로 엔진을 쓰는 타입 IIA와 터보프롭 엔진을 탑재할 타입 IIB가 그것이었다. 이 사업에는 영국의 거대 기업이던 암스트롱 휘트워스(Armstrong Whitworth) 사와 비커즈 암스트롱(Vickers Armstrong) 사가 도전장을 던졌는데, 각각 암스트롱 휘트워스는 아폴로, 그리고 비커즈는 훗날 바이카운트(Vickers Viscount)로 불리게 되는 4발 터보프롭 에어라이너를 완성시켰다.

브라바즌 위원회가 희망하고 있던 타입 2의 성능은 24명에서 30명의 승객을 태우고 1천 마일 이상의 거리를 순항 속도 시속 300 마일 이상의 스피드로 비행할 수 있는 중거리 여객기였으며, 고고도 순항을 위해 여압 캐빈이 적용된 기체였다. 이 프로젝트는 영국 공군성 요구사양서 C.16/46으로 정리되었다.

AW.55이라는 사내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이 후보기는 곧 아폴로(Armstrong Whitworth Apollo)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여졌다. 이 기체는 단면이 완전히 둥근 여압식 동체에 트라이사이클형 인입식 랜딩기어, 보통의 캔틸레버식 주날개와 수평 꼬리날개를 가진 26~31인승 여객기였다.

아폴로에는 자사가 개발중인 제품으로 이륙 출력 1,270 shp(950 kW)을 낼 것으로 예상되는 암스트롱-시들리 맘바 엔진을 장비하게끔 설계되었으나, 원형 1호기에 설치될 때만 하더라도 이 신형 엔진은 고작해야 800 shp의 적은 출력 밖에 낼 수 없었다. 이에 비해 경쟁 후보인 바이카운트는 롤스로이스 다트 엔진을 달고 있었고 초기형은 맘바와 출력이 같았지만 빠르게 성능이 안정되면서 이륙 출력 또한 2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3. 무리한 엔진 선정[편집]



그러나 자사 제품을 쓰려는 방침을 고수한 암스트롱의 개발진들은 별다른 대안이 없어 2대의 시제기에 모두 맘바 엔진을 탑재시켰다. 군수성으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은 원형기 2대는 각각 비행 테스트용과 지상 테스트용으로 쓰일 예정이었으며, 실기의 제작은 전쟁이 끝난지 3년이 지난 1948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반 연구와 설계는 상당히 진척된 상태여서 1호기 VX220은 14개월 만인 1949년 4월 10일에 배깅턴 비행장에서 30분간 처녀 비행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때 기장석에서 조종간을 잡았던 John O. Lancaster는 이 비행기가 최신형 엔진을 4개나 달고 있으면서도 심각할 정도로 파워가 부족하고 그로 인하여 안정성까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로도 8월까지 합계 9시간을 더 시험 비행을 했으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웠으며 엔진 고장으로 더 이상 비행할 수 없게 되자 일단 개수와 수리에 들어가게 된다.

2호기로 시험 비행이 재개되었지만, 시제기에 실린 맘바 엔진은 파워도 딸리는 주제에 계속 말썽을 일으켰다. 그동안 공작창으로 되돌려진 아폴로 1호기는 비행 특성 개선을 위한 개조 작업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기수와 동체 후면에 보텍스 핀(Vortex Pin)을 붙이고 꼬리날개의 면적을 늘리는 꽤 큰 작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4. 시제기 완성[편집]


아폴로는 이런 개량을 거치고 엔진도 맘바의 신형으로 바꾸고 나서 1950년 10월에 여객 수송을 인정하는 감항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51년 3월 12일에는 배깅턴 비행장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86분간 날으는 시험 비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테스트는 엔진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중단되었다.

어찌 되었건 인증을 받아낸 암스트롱 휘트워스 사는 유럽 항공사에 아폴로의 판매를 위한 홍보를 시작했지만, 이 여객기는 여전히 성능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에 아무도 구매자가 나서지 않았다. 결국 1952년 6월에 개발및 제작사인 암스트롱 휘트워스는 계획의 포기를 결정했다. 그와는 반대로, 롤스로이스 엔진을 탑재한 바이카운트는 쾌조의 비행 성능을 선보여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터보프롭 에어라이너 시장을 이끄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5. 마지막 모습[편집]



아폴로의 공식 개발 계획은 취소되었더라도, 이미 완성된 2대의 프로토타입은 군수성에 넘겨져 그중에서 한 대는 1952년 9월부터 영국의 국영 항공기 시험센터인 보스콤 다운(Boscombe Down)에서 운영하게 된다. 2호기 X224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1953년 9월에 대영제국 테스트 파일럿 학교(Empire Test Pilot's School)에서 각종 시험과 교육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게 실험기와 교보재로만 활용되던 아폴로는 1호기가 1955년에 해체되고 2호기는 왕립 항공연구소 구조부(RAE Farnborough Structures Department)에 넘겨지게 된다. 아폴로 2호기의 동체는 그 곳 판보로에서 1970년대에 폐기될 때까지 물탱크에 넣어져 구조 시험과 압축 시험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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