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에이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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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에이코트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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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앨런 에이코트
Alan A'Court
출생
1934년 9월 30일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레인힐
사망
2009년 12월 14일 (향년 75세)
잉글랜드 체셔 주 난트위치
국적
[[영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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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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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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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축구선수 (윙어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리버풀 FC (1952~1964)
트랜미어 로버스 (1964~1966)
노리치 시티 FC (1966~1967)
감독
스토크 시티 FC (1978)
난트위치 타운 FC (1983~1984)
국가대표
5경기 1골(잉글랜드 / 1957~1958)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여담



1. 개요[편집]


잉글랜드 국적의 前 축구 선수. 리버풀 FC에서 활약하였으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 출전한 바 있다.


2. 클럽 경력[편집]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에서 태어난 에이코트는 일찍이 프레스콧 케이블에서 아마추어 신분으로 축구를 시작했으며, 이후 윙어로서의 특출난 실력을 인정받아 에버튼볼튼 원더러스의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리버풀의 감독 돈 웰시의 스카웃 제안을 받아들여 1952년 안필드에 입성하게 되었다. 처음엔 유소년 팀에 입단 이후 1953년 2월 7일 에이코트는 리그 경기에서 1군 데뷔전을 치렀고, 한달 뒤인 3월 14일 선덜랜드 AFC를 상대로한 안필드 리그 홈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트렸다.

이후 에이코트는 빠르게 주전 멤버로 자리를 잡아 팀을 이끄는 핵심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웰시가 이끌던 당시 리버풀은 좋지 못한 모습으로 2부 리그로 강등을 경험하게 되었고 에이코트는 수렁에 빠진 팀을 지탱하며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팀의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에이코트는 천재적인 재능을 뽐냈고, 24세 89일의 나이에 200번의 리그 경기 출전을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여전히 리버풀 선수 중 리그 200경기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있다. 에이코트는 어린 시절 럭비 선수로도 뛰었던 만큼 강하고 뛰어난 피지컬과 페이스를 자랑했으며 특별한 재능에 의해 2부 리그에 있었음에도 톰 피니의 대체자를 찾던 잉글랜드 대표팀에 소집될 정도로 특출난 활약을 선보이기도 했다.

에이코트는 2부 리그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지자 1부 리그의 팀들로 이적할 수도 있었으나, 빌 샹클리 감독이 부임하며 리버풀과 함께 영광의 승격을 결심하게 되었고, 결국 1961-62 시즌에 샹클리와 함께 1부 리그로 승격, 이후 이어진 황금기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에이코트는 승격 첫 시즌에 걸출한 활약을 펼치며 1부 리그를 지배했고, 리버풀이 안정적으로 전력을 다잡는데에 거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리버풀이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으로 올라서게 되는 이후의 시즌들에 있어서는 불행하게도 부상이 에이코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1963-64 시즌 영광의 리그 우승 시즌을 부상으로 놓쳤고, 이후 리버풀은 에이코트의 대체자를 찾기 시작했다. 샹클리는 에이코트를 대체하기 위해 피터 톰슨을 영입했고 1964년 10월, 에이코트는 4,500 파운드의 이적료로 트랜미어 로버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리버풀의 붉은 유니폼을 입은 에이코트의 마지막 경기는 리버풀에게 역사적인 풍경으로 기록되었다. 해당 경기는 리버풀이 안필드에서 치른 첫 유럽 대항전 경기였던 1964년 9월 14월의 유러피언컵 예선 2차전 경기였으며, 리버풀은 이 경기에서 5-0으로 승리하며 전설적인 에이코트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에이코트는 리버풀에서 총 381경기 63골을 기록했다.

이후에는 노리치 시티에서 선수 겸 코치 생활을 이어갔고, 잠비아와 뉴질랜드 대표팀을 비롯 다양한 곳에서 코치 커리어를 쌓았다. 이후 스토크 시티에서 수석 코치를 맡은 뒤 임시 감독직을 잠시 맡았고, 이후에는 난트위치 타운 감독직에 잠깐 머물렀다. 난트위치를 마지막으로 축구계에서 은퇴했으며, 머지사이드 근교에서 담배회사 및 신문 가게를 운영했다. 이후 2009년 12월 14일 암으로 타계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2부 리그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1957년 11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북아일랜드와의 브리티시 챔피언십 경기에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여 득점까지 올렸다. 이후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도 차출되어 당시 리버풀 선수로는 유일하게 출전했으며, 브라질, 오스트리아, 소련과의 경기에 출장했다.


4. 여담[편집]


  • 로니 모란과 함께 강등된 팀을 이끌며 끝까지 충성심을 발휘해 침체기를 지탱하여 빌 샹클리 시대를 개막한 역사적인 선수로 꼽힌다.

  • 2부 리그에 있던 당시 아스날 FC가 12,000파운드를 제시하며 그를 영입하고자 했으나, 리버풀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며 팀을 떠나지 않았던 일화가 유명하다.

  • 1963년 미스 아일랜드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한 특이한 경력이 있다.

  • 그의 커리어 말년을 지도한 빌 샹클리는 에이코트가 경기장에서 중요한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경기장의 영감을 주는 선수였다고 표현하며, 에이코트는 재치있는 농담을 던질 수 있으며 라커룸에서 무게감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고 회상한 바 있다.

  • 1963-64 시즌, 긴 침체기를 끝내고 리버풀이 영광스러운 리그 우승을 달성한 시즌에 팀 멤버였으나, 부상으로 경기에 출장한 바가 없어 아쉽게도 우승 커리어를 올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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