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 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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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월시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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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06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Walsh Ed Plaque_NBL.png
에드 월시
헌액 연도
1946년
헌액 방식
베테랑 위원회






파일:Walsh-Ed-2083-89.jpg

에드워드 어거스틴 "빅 에드" 윌시
Edward Augustine "Big Ed" Walsh

출생
1881년 5월 14일
펜실베이니아 주 플레인스타운십
사망
1959년 5월 26일 (향년 78세)
플로리다 폼파노 비치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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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85cm, 87kg
프로 입단
1903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입단
소속팀
시카고 화이트삭스(1904~1916)
보스턴 브레이브스(1917)
지도자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1924)

1. 개요
2. 유년 시절
3. 선수 시절
4. 연도별 성적
5. 여담



1. 개요[편집]


"빅(Big) 에드 월시. 덩치 크고 힘세고 잘생긴 녀석. 스핏볼을 던졌지. 마치 공이 둘로 갈라져서 날아오다가 포수가 다시 하나로 붙이는 듯 했어."

샘 크로포드의 증언[1]

데드볼 시대가 끝날 무렵에 활약했던 투수이자 1.82의 통산 평균자책점로 메이저리그 역대 평균자책점 최저 1위라는 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2] 불같은 강속구와 결정구인 스핏볼로도[3] 유명했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커리어 초창기에는 완급조절을 하는 스타일이었으나,[4] 연차가 쌓이고 자신감이 붙자 상대하는 모든 타자에게 전력투구를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전성기가 시작되었다.[5] 매년 당대 기준으로도 무식하게 많은 이닝을, 그것도 전력투구로 던졌고,[6] 그 결과로 전성기의 마지막 해였던 31세 시즌에는 (1912년) 어깨가 정상이 아닌 상태에 이르렀다. 상태가 너무 심해서 1912년 시즌 후 구단에 공식적으로 1년 휴가를 요청했으나, 1913년 스프링캠프가 열리자 구단의 요청에 응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7][8] 그 결과 밤잠을 설칠 정도로 극심한 어깨통증에 시달리고 시즌 100이닝도 못채웠다.[9] 그리고 4년동안 재기 하려다가 실패하고 은퇴.

엄청난 승부욕으로 유명했고, 번트가 난무하는 데드볼 시절에 성난 짐승처럼 내야를 뛰어다니며 수비를 했다고 한다. 언젠가 주자 2루 상황에서 3루쪽으로 가는 번트가 나오자 몸을 날려 공을 잡았는데, 3루를 비운 3루수 때문에 주자를 놓치자 분노하여 "한 번만 더 그러면 죽여버릴거야"라며 경고했다고 한다.

데드볼 시대의 황제 타이 콥은 은퇴 후 먼 훗날인 1941년, 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본 야구 선배들 중에 최고의 투수는 에드 월시[10]였다는 말을 남겼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투수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신인타자로 처음 그를 만났을때 분명히 월시의 공을 지켜보고 있는 데도, 공이 오다가 사라지는거 같아서 당황했다고 한다. 아웃당한 뒤,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새가 눈뜨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듯한 상태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2. 유년 시절[편집]


1881년 5월 14일 펜실베이니아의 플레인스타운십에서 마이클 월시와 제인 월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탄광에서 일을 하며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03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750달러로 입단했다.

3. 선수 시절[편집]


1904년과 1905년에 각각 6승, 8승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낸 그는 1906년에 17승 1.88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화이트삭스의 에이스가 되었다. 그렇게 선수생활하던 그에게 1908년 전설과도 같은 시즌이 왔다. 그해 그가 기록한 성적은 40승 15패 1.42의 평균자책점, 464이닝을 던지며 호투했다. 특히 464이닝이 백미인데 이 해에 66경기를 나왔으니 평균적으로 한 경기당 7이닝씩은 던졌단 소리다. 그리고 1911년과 1912년에 27승씩 거두며 호투한 그는 혹사로 인하여 1913~1915년까지 꼴랑 13승에 그치고 성적부진으로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건너갔으나 아무런 활약도 못하고 1917년 은퇴한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연도
소속팀
경기



ERA
이닝
피안타
볼넷
탈삼진
1904년
CHW
18
6
3
1
2.60
110.2
90
32
57
1905년
CHW
22
8
3
0
2.17
136.2
121
29
71
1906년
CHW
41
17
13
2
1.88
278.1
215
58
171
1907년
CHW
56
24
18
4
1.60
422.1
341
87
206
1908년
CHW
66
40
15
6
1.42
464.0
343
56
269
1909년
CHW
31
15
11
2
1.41
230.1
166
50
127
1910년
CHW
45
18
20
5
1.27
369.2
242
61
258
1911년
CHW
56
27
18
4
2.22
368.2
327
72
255
1912년
CHW
62
27
17
10
2.15
393.0
332
94
254
1913년
CHW
16
8
3
1
2.58
97.2
91
39
34
1914년
CHW
8
2
3
0
2.82
44.2
33
20
15
1915년
CHW
3
3
0
0
1.33
27
19
7
12
1916년
CHW
2
0
1
0
2.70
3.1
4
3
3
1917년
BSN
4
0
1
0
3.50
18
22
9
4
통산 성적
14시즌
430
195
126
35
1.82
2964.1
2346
617
1736


5. 여담[편집]


  • 무려 13남매의 늦둥이로, 어머니와의 나이 차가 38세였다. 물론 피임이 없는 시절이어서 매우 흔한 사례였다.
  • 루키 시절에 한살 연상의 야구장 아이스크림 판매원과 사랑에 빠져 1904년에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 두 아들이 있었다. 이후 아내가 1949년에 사망할때까지 해로했다.
  • 장남 에드 월시 주니어[11] 겨우 32세에 사망하는 참척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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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2] 2위는 에디 조스의 1.89. 1위와 2위의 격차가 많이 나지는 않는다.[3] 월시가 현역이었을 때는 반칙이 아니었다.[4] 경기 초반에는 힘을 빼고 던졌다고 한다.[5] https://sabr.org/bioproj/person/big-ed-walsh/ [6] 전성기 6년 중 자그마치 4년이 리그 최대 이닝[7] 그의 회고: "화이트 삭스가 나를 필요로 했고, 돌아오라고 간청해서 그렇게 했다 ("The White Sox needed me—implored me to return—so I did").[8] 승부욕 넘치는 그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그가 애시당초 1년 휴식을 요청했을 정도라면 어깨가 이미 한계였던 것은 분명하다.[9] 공을 던질때마다 팔도 함께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10] 그 다음으로 꼽은 투수 선배는 크리스티 매튜슨이었다. 다만 그는 내셔널리그 선수였기에 타이 콥과 공식경기를 해본 적은 없다. 대신 같이 군복무를 했을때 어느 정도 친해졌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로 공식 경기 대결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스크류볼을 보고 구위와 무브먼트에 놀라서 리스펙했다고 한다.[11] 아버지처럼 메이저리그 투수였지만 활약은 매우 미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