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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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에드먼드 피츠제럴드
3. 사고 당시
4. 사고 이후
5. 창작물에서

파일: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jpg


1. 개요[편집]


SS Edmund Fitzgerald sinking

1975년 11월 10일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 오대호에서 일어난 에드먼드 피츠제럴드 화물선 침몰사고.


2.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편집]


1957년, Northwestern Mutual Life Insurance 회사는 길이 222미터, 넓이 22미터에 무게 1만 3600톤이 넘는, 당시 기준으로 합법적으로 건조가 가능한 최대의 오대호 화물선을 의뢰했다. 만드는 데 든 비용은 당시 금액으로 7백만 달러, 2019년 기준 무려 4970만 달러다. 회사 사장의 이름을 따서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라 명명된 선박은 1958년 6월 7일 완공되었다. 진수식에는 무려 1만 5천 명이나 참여했다. 당시 진수식에서 늘 있던 행사대로 에드먼드 피츠제럴드 사장의 아내, 엘리자베스 피츠제럴드가 배 머리로 술병을 깨는 의식을 했는데, 이때 술병이 한 번에 안 깨져 3번 내리쳐야 했다.[1] 그리고 항구에 내려지는 순간 엄청난 파도가 일었는데, 이때 너무 놀란 나머지 한 명이 심장마비가 와 사망하는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는 같은 해 9월 24일 운용을 시작했다. 큰 선박이다보니 인기가 많아 '빅 피츠(Big Fitz)', '마이티 피츠(Mighty Fitz)', '오대호의 타이타닉(Titanic of the Great Lakes)' 등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평소 미네소타주 덜루스 부근의 철광산에서 채굴된 철광석을 디트로이트, 톨레도 등 그리고 오대호의 수많은 부두로 운반하곤 했다. 1975년까지 오대호를 748바퀴 돌았는데, 이는 지구를 약 44바퀴 돌 수 있는 거리였다.


3. 사고 당시[편집]


1975년 11월 9일,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는 철광석과 타코나이트 2만 6500 미터톤을 실은 채 위스콘신 주 슈피리어호를 떠나 디트로이트 근처의 제철소로 향했다. 당시 선장은 40년 경력의 베테랑 Ernest M. McSorley였고, 그 외에 선원 28명이 탑승했다. 화물을 재화중량톤수의 한계까지 꽉꽉 채워 화물이 배 자체의 무게보다 더 무거웠다. 오후 4시 30분, 다른 화물선 SS Arthur M.Anderson과 마주쳤고, 두 선박은 계속 통신을 교환했다. 오후 6시, 아서 앤더슨호의 선장이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 선장에 날씨가 나빠지고 있다고 경고했고, 오후 9시가 되면서 슈피리어호 남부에 강풍 경보가 발령됐다. 당시 풍속은 무려 시속 60 km. 이에 아서 앤더슨호와 에드먼드 피츠제럴드 호는 항로를 바꿔 북쪽, 캐나다로 향했다.

다음날 11월 10일 오전 1시 강풍경고는 풍속 시속 96 km에 상응하며 폭풍경고로 바뀌었다. 11m의 거대한 파도에다가 엄청난 폭우에 시야는 3km로 떨어졌다. 오전 5시가 돼서도 폭풍은 여전히 심했다. 오후 12시,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고 판단한 두 배는 다시 항로를 바꾸어 남쪽으로 향했다. 오후 2시 45분, 두 배의 거리는 약 16 km 정도 떨어졌지만, 여전히 두 배는 9 m 높이 파도와 싸우고 있었다. 이젠 아예 눈 까지 내리기 시작하고,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는 조난 신호를 보냈다. 맥솔리 선장은 가까운 항구로 최대한 가보겠다 전했다. 오후 4시 10분, 맥솔리 선장은 배의 레이더 장치가 고장났다 전했다.

4시 30분, 가까운 항구의 등대에 전기가 끊기면서 일대 레이더를 파악할 수 없게 됐다. 오후 5시, 아서 앤더슨 호의 레이더에선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가 화이트피시만(灣)에서 3마일 정도만 떨어져 있다 떴다. 자신의 위치가 어느정도 되냐는 맥솔리 선장의 물음에 아서 앤더슨호의 선장은 보이는대로 말해줬다. 오후 5시 30분, 맥솔리 선장은 주변 배에 급히 신호를 보내며 지금까지 본 폭풍 중 가장 심하다 전했다. 한편 심한 폭풍을 겪은 아서 앤더슨호는 간신히 항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오후 7시 10분, 에드먼드 피츠제럴드 호는 아서 앤더슨호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달라 전했고, 이게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로부터 마지막 신호였다. 레이더에 더 이상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가 나타나지 않았고, 배는 항구에 영원히 도달하지 못했다. 오후 9시, 미국과 캐나다에서 헬기와 배를 동원,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를 찾아보려 했다. 심한 폭풍 속에서 3일간 오대호를 샅샅이 뒤졌으나 박살난 구명정 몇척만 발견됐을 뿐이다.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는 화이트피시만으로부터 약 27 km 떨어진 곳에서, 161 m 깊이 물 아래로 두동강난 채 가라앉았다. 승무원 29명은 전원 사망했다.

생존자가 한 명도 없어서 배가 가라앉은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아직까지도 배가 가라앉은 원인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오간다. 잘 만든 배에 베테랑 선장과 훌륭한 선원들이 순식간에 물 속으로 사라져버렸으니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특히 배가 가라앉기 까지 선원이 SOS를 단 한 번도 치지 않은 것 때문에 더 논란이다. 배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설 부터, 배가 모래톱에 부딪히면서 선체에 구멍이 났다는 설, 파도가 너무 높아 선체 내로 엄청난 물이 쏟아져 들어왔으리란 설, 심지어는 UFO에 납치되었다는 황당한 설도 나왔다. 확실한 것은 당시 배에 꽉꽉 실은 철광석과 엄청나게 강했던 폭풍이 배가 침몰하는 데 영향을 한 몫 했다는 점이다.

현재로서는 거대한 파도에 배가 휩쓸려 뱃머리가 물 속에 박힌 채, 호수 바닥에 부딪혀 배가 그대로 두동강나 선원들이 조치를 취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침몰했다는게 중론이다.


4. 사고 이후[편집]


사고 이후 오대호를 지나다니는 선적에 대한 법 규정을 바뀌었다. 그중엔 구명조끼 의무화, 깊이 측정기 설치, 위치 알림 시스템 설치, 선박 검사 일정 주기로 하기 등이 들어갔다.

1995년, 배에 있던 종과 닻을 비롯해 선박의 일부가 건져 올려졌다. 이후 배에 있던 선원 29명의 이름을 말하며 이들을 기리기 위해 종을 29번 치는 장례식이 열렸다.

현재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의 흔적은 오대호 난파선 박물관에서 볼수 있다. 배에 있었던 종과 닻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같은 곳에 사고 추모비도 설치됐다.


5. 창작물에서[편집]


가수 고든 라이트풋(Gordon lightfoot)은 1975년 11월 24일, 뉴스위크지에 실린 에드먼드 피츠제럴드 호 관련 기사 "가장 잔인한 달(The cruelest month)"를 읽고 1976년 곡 "에드먼드 피트제럴드호의 침몰(The Wreck of the Edmund Fitzerald)"#를 썼다.

SCP-1174-1-6은 설정상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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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수식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선박업계에서 안 좋은 징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