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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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코튼
Elizabeth Cotten


본명
엘리자베스 네빌
Elizabeth Nevills
이명
리바
Libba
출생
1893년 1월 5일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 카보로
사망
1987년 6월 29일 (향년 94세)
미국 뉴욕 주 시러큐스
직업
가수, 기타리스트
장르
피드몬트 블루스, 아메리칸 포크 뮤직]]

1. 개요
2. 생애
3. 재발견
4. 재발견 그 이후
5. 스타일
6. 여담
7. 대표곡



1. 개요[편집]


블루스 가수 및 기타리스트. 블루스 음악계의 몇 안되는 여성 기타리스트이며 오른손잡이 기타를 왼손으로 연주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주법을 고안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편집]


1893년 1월 5일, 노스 캐롤라이나주 채플힐 부근[1]에서 아버지 조지 네빌과 어머니 루이자 프라이스 네빌[2]의 5명의 자식중 태어났다. 그녀는 그 중 가장 막내였다. 또한 그녀의 집안은 음악과 연이 깊은 집안이었다.

8살 때부터 이미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9살이 되던 해엔 강제적으로 학교를 그만둔 후 가정부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12살 때는 채플힐에서 기숙하며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얻었고 달에 1달러씩 받으며 일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녀의 어머니가 코튼에게 기타를 사주기 위하여 그 돈을 저금하였다. 그렇게 그녀에게 3.75 달러[3] 상당의 기타를 사주었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Freight Train"[4]도 이 때 즈음 작곡했다.


3. 재발견[편집]


코튼은 13살 때부터 메이드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17살이 되던 해 결혼도 하였기에 가정과 종교활동에 집중하기 위하여 기타 연주를 그만 둔 상태였다.[5] 그렇게 그녀가 60대가 될 때까지 대중들 앞에서 연주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녹음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가정부로서 일을 하던 음악가 집안인 시거 가족들[6]에게 발견되었다.

이 발견의 계기는 그녀가 간간히 일을 하던 백화점에서 길을 잃고 돌아다니던 아이를 출구까지 데려다 준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아이가 바로 페기 시거였다.[7] 그로 인하여 그녀는 페기 시거의 부모인 루스 크로포드 시거와 찰스 시거의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그들의 아이들 또한 돌보아 주었는데, 아이들이 너무 어렸던지라 "엘리자베스"를 발음하지 못해 그녀를 "리바 (Libba)"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에 그녀의 별명이 된다.

시거 패밀리가 음악가 집안이었던지라 그녀 또한 자신이 기타를 쳤었던 때를 기억하며 약 40년만에 다시 기타를 잡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하였다.


4. 재발견 그 이후[편집]


1957년, 마이크 시거는 그녀의 집에서 릴투릴 녹음기를 이용하여 코튼의 곡들을 녹음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녹음된 곡들은 이후에 그녀의 첫 정규 앨범인 "Folksongs and Instrumentals With Guitar"에 수록되게 된다. 이 앨범에 처음 수록된 그녀의 곡인 "Freight Train"은 이후 그녀의 대표곡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Peter, Paul And Mary,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닥 왓슨, 타지 마할 등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악가들이 커버를 하게 된다.

페기 시거는 그녀의 "Freight Train"을 영국에 퍼뜨리기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영국의 수 많은 포크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스키플 음악가인 채스 맥데빗이 본 곡을 녹음하였고 그의 녹음은 차트에 진입할 정도로 히트를 쳤다. 이후에 수 많은 스키플 그룹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력은 존 레논비틀즈이전에 결성했던 그룹인 쿼리멘에게도 닿았다. [8]

그녀의 첫 정규 앨범이 발매된 이후, 1960년을 기점으로 마이크 시거와 함께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얼마 가지 않아 당시 급성장하던 포크 리바이벌로 인하여 공연을 하던 블루스 거장들인 미시시피 존 허트, 존 리 후커, 머디 워터스 등과 함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등지에서 함께 연주를 하게 된다.

이후 1967년엔 그녀의 증손녀와 함께 2집인 "Vol. 2 : Shake Sugaree"를 내기도 하였다.

공연과 저작권등으로 수입을 얻기 시작하여 그녀는 마침내 가족들과 워싱턴 D.C.를 떠나 뉴욕 주의 시러큐스에 집을 사게 되고 그곳에서 살게 된다. 이후 80년대까지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으며 1984년에는 그래미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9]

코튼은 1987년 6월 뉴욕 주 시러큐스에 위치한 크라우스-어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나이 94세.


5. 스타일[편집]


그녀의 기타 연주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녀의 피킹 스타일이다. 그녀는 왼손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잡이 기타를 뒤집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주 스타일을 고안해내었다. 일명 "Cotten Picking".

보통 블루스 핑거피킹은 엄지로 베이스 줄을, 검지와 중지로 멜로디 라인을 피킹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그녀는 기타를 반대로 쳤듯이, 무려 검지로 베이스 줄을, 그리고 엄지로 멜로디 라인을 연주했다. 심지어 정석적인 쓰리 핑커 주법이 아닌 투 핑거 주법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두 손가락의 역할이 반대가 되었으니...


6. 여담[편집]


* 놀랍게도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이전까지 모두가 그녀를 "Li'l Sis"[10]정도로만 불렀고, 그 때문에 그녀가 처음 학교에 간 날에 선생님이 이름을 묻자 답할 수가 없었고 즉석에서 자신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7. 대표곡[편집]


  • Freight Train (1958)
  • Wilson Rag (1958)
  • Vastopol (1958)
  • Spanish Flang Dang (1958)
  • Shake Sugaree (1967)
  • I'm Going Away (1967)
  • Washington Blues (1967)
  • Fox Chase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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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세한 위치는 모르나 이후 카보로로 통합되는 곳이다.[2] 때로는 Nevills로 표기되기도 한다.[3] 이는 2021년 기준 113달러 정도의 가격이다.[4] 그녀의 어렸을 적 집 근처에서 들을 수 있었던 기차 소리를 기억하고자 쓴 곡이라고 한다.[5] 단, 가끔 교회에서 연주할 때를 제외하고[6] 미국 포크의 거장 피트 시거 또한 시거 패밀리에 속한다.[7] 피트 시거의 이복여동생이다.[8] 채스 맥데빗이 녹음할 당시는 1956년 9월로, 코튼의 정규 앨범이 발매되기 2년 전이었다. 이 때문에 수 많은 음악가들이 Freight Train을 자신이 쓴 곡이라며 저작권 등록을 하는 경우가 발생했지만 시거 패밀리의 도움으로 저작권은 그녀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크레딧 표기는 이후에도 존재했다고 한다.[9] 로스 앤젤레스에서 수상을 하던 당시 그녀는 "감사합니다. 여러분들께 연주라도 해드릴 수 있도록 지금 기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10] Little S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