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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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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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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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밥 딜런
BOB DYLAN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8년
후보자격 연도
1988년
후보선정 연도
1988년




파일:songwriters-hall-of-fame-logo_770_441_90_s.jpg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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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밥 딜런
BOB DYLA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2년 출처 참조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주제가상 수상자
제72회
(2000년)


제73회
(2001년)


제74회
(2002년)

You'll Be in My Heart
필 콜린스
(타잔)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
(원더 보이즈)


If I Didn't Have You
랜디 뉴먼
(몬스터 주식회사)


역대 골든 글러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주제가상 수상자
제51회
(2000년)


제52회
(2001년)


제53회
(2002년)

You'll Be in My Heart
필 콜린스
(타잔)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
(원더 보이즈)


Untill...
스팅
(케이트 앤 레오폴드)

































밥 딜런[1]
Bob Dylan

파일:F34A5AD2-A7F8-49FC-BB8D-70617875D62B.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문학상|{{{#fff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원명[2]
로버트 앨런 짐머맨
Robert Allen Zimmerman
שבתאי זיסל בן אברהם (Shabtai Zisl ben Avraham)
출생
1941년 5월 24일 (82세)
미네소타 주 덜루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작가, 화가, 사업가[3]
장르
포크, 포크 록, 블루스, 블루스 록, 가스펠,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악기
보컬, 기타, 건반 악기, 하모니카
서명
파일:밥 딜런 서명.png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참조]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참조]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기타 정보 펼치기 · 접기 ]
거주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말리부
고향
미국 미네소타주 히빙
민족
유대계 미국인
신체
171cm
학력
미네소타 히빙 고등학교 (졸업, ?~1959)
파일:미네소타 대학교 트윈 시티 캠퍼스 아이콘.png 미네소타 대학교 (중퇴, 1959~60)
재산
$200 Million (한화 약 2266억원) #
데뷔
1962년 3월 19일, 앨범 'Bob Dylan'
활동
1959년 ~ 현재
레이블
컬럼비아 레코드
종교
유대교개신교(오순절교회) (1979~)
로고
파일:B19775E8-4A07-4E80-BA54-09B487A1CC9C.png

[ 가족 관계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아브람 짐머맨 (1911~1968)
어머니 베아트리체 러트만 (1915~2000)
배우자
사라 딜런 (1965년 ~ 1977년, 이혼)
캐롤린 데니스 (1986년 ~ 1992년, 이혼)
자녀
양녀 마리아 딜런 (1961년생)
장남 제스 딜런[1] (1966년생)
장녀 안나 딜런 (1967년생)
차남 사무엘 딜런 (1968년생)
삼남 제이콥 딜런[2] (1969년생)
차녀 데지레 가브리엘 데니스 딜런 (1986년생)

[ 언어별 명칭 펼치기 · 접기 ]
한국어
밥 딜런
일본어
ボブ・ディラン
중국어
鲍勃·迪伦
그리스어
Μπομπ Ντίλαν
라틴어
Robertus Dylan
러시아어
Боб Дилан
아랍어
بوب ديلن
힌디어
बॉब डिलन
조지아어
ბობ დილანი
페르시아어
باب دیلن
아르메니아어
Բոբ Դիլանը
히브리어
בוב דילן


1. 개요
3. 평가와 영향력
3.1. 밥 딜런에 대한 말들
4. 여담
4.1. 종교
4.2. 사용 기타들
4.3. 화가
4.4. 호칭
5. 관련 인물
6. 앨범
6.1. 정규 앨범
6.2. 라이브 앨범
6.3. 부틀렉 시리즈
6.4. 컴필레이션 앨범
7. 그 외 작품
7.1. 저서
7.2. 미술 작품
7.3. 필모그래피
8. 수상 및 기타 내역
9. 투어
10.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으로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 만큼 거대한 거인은 없다."

버락 오바마[4]


밥 딜런은 미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 화가, 배우다.

2016년에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로 가수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 외에도 그래미상, 오스카상, 퓰리쳐상 (공로상), 골든글로브상, 폴라음악상, 대통령 자유 훈장, 국가 예술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로큰롤 명예의 전당 등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2.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밥 딜런/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와 영향력[편집]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8a82faf7af5984f37be71335ac479ba.jpg

에스콰이어 1965년 9월호 표지[5]


"밥 딜런이 대중 음악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작곡가로서, 그는 대중 음악 작곡의 여러 다른 학파들을 개척했다. 보컬리스트로서, 그는 가수가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무너뜨렸고, 대중 음악에서 보컬리스트의 역할을 재정의했다.

음악가로서, 그는 일렉트릭 포크 록과 컨트리 록을 포함한 여러 가지 대중 음악의 장르들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성취의 일부분이다. 딜런의 힘은 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동안 분명했다.

60년대 중반 비틀즈의 자기성찰적인 작곡으로의 전환은 그가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며, 또 그의 영향력은 그의 많은 노래들은 대중적인 음악의 최고의 기준이 되었고 그의 최고의 앨범들은 의심할 여지 없는 록앤롤 경전의 고전이 되면서 몇 세대에 걸쳐 반향을 일으킨다.

포크 전반에 걸친 딜런의 영향력은 똑같이 강력했으며, 20세기 진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또 포크라는 장르가 전통적인 노래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작곡으로 옮겨갔을 때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했다. 또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판매량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딜런의 존재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90년대 후반, 2000년대에는 상업적 그리고 음악적으로 다시 부활하며 그의 저력이 증명됐다."

올뮤직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데이비드 보위 등과 함께 대중음악사 최정상에 위치하며 대중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포크를 현대 예술로 탈바꿈시킨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롤링 스톤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 2위에 꼽았고 2015년에는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송라이터 위대한 송라이터 1위로 꼽기도 했다. 음악 통계 사이트인 어클레임드 뮤직에서는 비틀즈에 이어 역대 아티스트 랭킹 2위, 2006년 미국 음악 잡지 페이스트 선정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 100인 중 1위, 2014년 LA위클리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 20인중 1위, VH1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5위를 기록, 2007년 Q 매거진 편집자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인'에, 1999년 타임지에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말론 브란도,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비틀즈 등과 함께 선정되었고, 스미스소니언 잡지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0명의 미국인들 중 밥 딜런을 포함시켰다.

밥 딜런은 1962년 데뷔 이후 모든 년대에 지속적으로 명반을 만들어냈고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생산력과 창작력 그리고 발전을 보여주면서 영향력과 인기를 유지했다.[6]

이 정도로 긴 시간동안 꾸준하게 쉬지 않고 다작을 하면서 명반을 만들어낸 아티스트는 대중음악계에서 거의 없다.[7] 왜냐하면 모든 레전드급 대중음악 아티스트들은 음악적으로 전성기가 지나고 침체기가 오는데 이를 극복하고 다시 음악성이 부활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레전드급 대중음악 아티스트들은 갑작스레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그런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엘비스 프레슬리는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요절하였고, 존 레논마크 채프먼에 의해 암살로 요절하였으며, 마이클 잭슨은 아동 성추행 누명을 벗은 후 다시 일어서려던 찰나에 급성 프로포폴과 벤조디아 제핀 중독으로 요절하였다.

밥 딜런도 예외없이 80년대 중반의 침체기에 들어섰지만 80년대 후반의 ‘Oh Mercy’라는 명반을 내며 재기를 시도했고 90년대 후반의 ‘Time Out of Mind’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고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까지 수상하며 다시 커리어가 부활했다. 이때부터 낸 앨범들은 크리스마스 앨범을 제외하면 모두 수작 내지 명반이라는 평을 듣는다.

무려 60년에 가까운 본인의 어마어마하게 긴 커리어 동안 최고의 음악성을 보여주고 있고 본인의 침체기를 극복하고 고령임에도 연달아 명반들을 쏟아내며 최고의 아티스트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밥 딜런의 독보적인 위대함과 경이로운 창작성을 보여 준다.

딜런의 앨범들은 수많은 매체에서 명반으로 등재되어 있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는 그의 앨범이 10장이나 등재됐고 어클레임드 뮤직이 산정한 3,000위내 가장 많은 명반을 보유한 아티스트 중 하나이며 또 이들의 통계에 의하면 밥 딜런은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훌륭한 앨범을 내놓은 아티스트다.

음악 참고서인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에서는 7개가 등재, NME 선정 500대 명반에는 7개가 등재, 피치포크가 선정한 연대별 최고의 음반 리스트에는 60년대 4개[8], 70년대 1개[9], 90년대 1개[10] 총 6장의 앨범이 명반으로 등재되어 있다. 음악 리뷰 사이트 Rate Your Music의 1위부터 1000위까지의 모든 앨범 중 6개가 밥 딜런의 앨범이다.

딜런은 많은 음악 장르의 정수로 여겨진다. USA 투데이 저널리스트 에드나 건더슨은 "딜런의 음악적 DNA는 1962년부터 거의 모든 대중 음악의 변화를 알려왔다."라고 말했다. 펑크 음악가인 더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는 딜런이 "서정, 멜로디, 진지함, 영적, 록 음악의 깊이를 위한 견본을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호주의 비평가 잭 막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딜런이 믹 재거부터 에미넴까지 모든 사람들이 딜런 핸드북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록에서 지배적인 스타일이었던 오만한 스타일을 발명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딜런이 록 스타의 성격을 바꾼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록 뿐만 아니라 힙합에도 영향을 줬는데 많은 사람들은 딜런의 음악, 특히 딜런이 작곡한 "Subterranean Homesick Blues"을 의 초기 연결고리로 본다.[11]

대중 음악사 최정상의 아티스트답게 그에게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매우 많다. 2017년 음악 최대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올뮤직의 카탈로그를 연구한 결과, 밥 딜런은 데이터베이스에서 솔로 뮤지션으로서 가장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12]

그에게 영향을 받은 굵직한 아티스트만 말하자면 비틀즈 존 레논은 “밥 딜런이 비틀즈의 음악을 통째로 변화시켰다”고 고백한 바 있고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스, 조니 캐쉬, 더 클래시, 그레이트풀 데드의 제리 가르시아[13], 더 후피트 타운젠드[14], 닐 영[15], 루 리드, 브루스 스프링스틴, 데이빗 보위, 사이먼 앤 가펑클, 레너드 코헨, 록시 뮤직의 브라이언 페리, 패티 스미스, 닉 케이브, 핑크 플로이드시드 바렛, 톰 웨이츠, 조니 미첼, 톰 페티, 더 밴드, 버즈, U2 등이 밥 딜런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음악적 영향력을 <뉴스위크>는 70년대의 가수들 이를테면 폴 사이먼,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글스, 닐 영, 도노반, 돈 매클레인[16], 조니 미첼[17] 등을 팝 역사는 다른 말도 아닌 '딜런의 자식들'로 분류했다. R.E.M., 에서부터 징징거리는 기타 소리의 헤비 메탈 밴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뮤지션들을 '딜런의 후예'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밥 딜런이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노랫말 때문이다. 그는 낱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자유롭게 써내려가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를 쾌척했다. 대중 가요에 부재했던 철학이 있었고 그런 만큼 난해하기도 했다.

그의 가사에 담긴 정확한 의중을 어떻게 알아내느냐에 대한 어려움은 더욱 그를 전설로 만들었다. 대중 음악가들은 밥 딜런의 경이로운 언어 세계를 접하면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 못지 않게 가사가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깨달았다.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밥 딜런에 대한 가사를 감상하고 분석하는 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 특정 대중음악인이 대학의 커리큘럼으로 등장한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로 인해 대중 음악의 가사는 롤링 스톤 평론가의 말대로 '하루살이에서 성경으로' 그 수준이 도약했다. 그것은 팝과 록이 전에 없던 '품위와 격조'를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미 카터 대통령과 체코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영문학계에서는 그의 노랫말을 텍스트로 하는 학위 논문이 제출되기 시작했고, 강의가 개설됐다. 예를 들어, 다트머스 대학교의 루 렌자 영어학 교수는 1970년대 중반부터 딜런에 관한 수업을 가르치며 그의 음악을 시로 인정하며 분석하고 있었고 또 문학계 일부에서도 시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현재는 대학 강의에서 밥 딜런의 노랫말이 문학 텍스트로 활용됨은 물론, 다른 문학가들과 동등하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며 털사 대학교에서는 그의 인생, 음악, 영향력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소까지 나왔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밥 딜런을 수상자로 결정한 이유 역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로, 그들도 시인으로서 밥 딜런의 공로를 인정했다.

또한 영문학 분야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선집으로 알려진 『노튼 앤솔러지』에도 딜런의 가사가 실려 있다. 〈스페인산 가죽 부츠(Boots of Spanish Leather)〉가 『노튼 시선집(The Norton Anthology of Poetry)』(2005)에,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이 『노튼 문학 입문집(Norton Introduction to Literature)』(2010)에 수록됐다.

1998년에 밥 딜런의 가사는 스탠퍼드 대학교가 후원하고 개최한 '밥 딜런에 관한 최초의 국제 학술회의'에서 학계와 시인들에게 상세히 연구되기 시작했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고전 문학 교수 리처드 토마스는 "딜런"이라는 제목의 1년생 세미나를 만들어 개설한 강의는 딜런의 예술세계를 탐구하면서 고대문학을 함께 다뤘다.

그가 딜런의 음악에서 고전 시 코드를 읽어낸 건 2001년부터다. 당시 딜런이 발표한 신곡 ‘론섬 데이 블루스’를 들으며 고대 로마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대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떠올린 것이다. 2006년에 나온 앨범 ‘모던 타임스’에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시 구절이 18구절이나 인용돼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토머스 교수는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딜런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가사를 보면 라틴어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04년 토머스 교수가 딜런의 영상과 노래를 교재로 고전 시를 가르친다고 했을 때 동료 교수들은 “가수 딜런 노래로 고전문학을 가르친다고?”라며 비웃었다. 심지어 학교위원회는 강좌 개설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는 “딜런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다. 그는 문학과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영역을 통섭한 문화 현상 그 자체”라며 교수들을 설득했고 결국 세미나가 만들어젔다.

토머스 교수의 수업은 한 학기 동안 딜런의 생애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교재는 딜런의 앨범과 영상이다. 강의계획안에는 “그의 가사를 통해 생명력이 긴 문학과 음악 문화를 배우며 베르길리우스와 호메로스 등 고대 작가의 작품을 다룬다”고 안내돼 있다. 학생들은 발표와 함께 토론에 적극 참여해야 하고 학기 말에는 2,500단어 분량의 리포트를 내야 한다.

2007년 영국의 계관시인[18] 앤드류 모션은 그의 가사가 학교에서 공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2009년 캘리포니아 대학교/샌디에이고 캠퍼스의 문학 학자이자 독일 비교 문학 교수인 윌리엄 아칸더 오브라이언은 '딜런'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강의를 개설하고 세계 문학에 기여한 딜런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미적, 문화적 중요성"을 기념했다.

제레미 유드킨 보스턴 대학교 음악학 교수와 케빈 베렌츠 문학 교수는 보스턴 대학교에서 "밥 딜런: 음악과 단어"라는 새로운 강의를 만들어 가르친다. 문학 평론계 최고의 평론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 크리스토퍼 릭스는 밥 딜런의 작품을 분석하고 500페이지 분량의 책 'Dylan's Visions of Sin'를 공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딜런을 언어적으로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딜런에 관한 책을 존 밀턴, 존 키츠, 앨프리드 테니슨,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에 관한 서적과 함께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학자들까지 그의 가사를 논문에 인용을 많이 해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19][20]

그는 어렸을 때 시인 랭보를 좋아했고 지금의 이름도 영국 시인인 딜런 토머스에게서 따올 정도로 시와 가까이 있었다. 때로는 가사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저항정신을 담으면서도 사회와 인간,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함을 잊지 않았다.

시대와 주류에 맞서는 저항성에 예술성이 더해지면서 그의 노래의 진정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창법도 때로는 음정과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읊조리듯 불러 아티스트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존 레논 역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얘기밖에 몰랐는데 그의 음악을 듣고 나서 인생, 사회, 종교에 대한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 보헤미안들의 성지였던 그리니치 빌리지에 정착한 그는 우디 거스리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포크 커뮤니티의 정치적 성향에 자극받아 저항적, 사회 비판적 성격을 띤 포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본인은 그리니치 빌리지에 안 갔더라면 이런 노래들을 결코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1962년 밥 딜런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존 해먼드에 의해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데뷔 앨범을 낸 후, 1963년 《프리휠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에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비롯한 〈전쟁의 지배자들(Masters of War)〉[21] , 〈궂은 비가[22] 쏟아지네(A Hard Rain’s A―Gonna Fall)〉 등 지금까지 불리는 수많은 곡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으로 밥 딜런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1960년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가 맞붙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세계는 동서로 분할되고,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의 각축장이 된 세계는 미국소련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제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제국 어디에도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저항이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시기 미국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노래한 사람이 바로 밥 딜런이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준 ‘Blowin‘ in the Wind’(바람만이 아는 대답)과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노래들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이러한 가사들로 한국에선 밥 딜런은 저항의 아이콘, 반전가수로 인식되었다.

또 딜런은 장르적으로 포크, 록, 컨트리, 블루스에 걸쳐 있으며, 포크록을 창시해 1960년대 청춘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포크록의 전형을 보여준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 앨범은 포크의 저항성과 록의 마이너(하위문화)를 결합한 것이다.

노랫말과 록 사운드를 공유한 포크 록은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젊은이들의 주요 음악 문법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이 일레트릭 기타를 연주한 사건이 1999년 <뉴스위크>에 의해 '금세기의 사건'으로 꼽힌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적으로 그는 비단 포크록을 퍼뜨린 것뿐 아니라 록과 컨트리 음악을 융합한 '컨트리 록'을 시도해 후배들이 뒤따르게 했다. 이 부문의 뮤지션들, 이를테면 이글스, 잭슨 브라운, 린다 론스태드, 포코 등도 엄밀히 따지면 딜런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유명한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그의 앨범을 연구한 저서 <보이지 않는 공화국>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음악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대중음악의 정신혁명과 관계한다. 그의 음악은 20세기 모더니즘의 가장 강렬한 분출이다. 이 점을 빼놓고는 왜 그의 음악과 앨범이 명작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임진모의 평을 읽어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중략)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임진모, 1999년



3.1. 밥 딜런에 대한 말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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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중음악의 발전에 대한 가수 겸 작곡가로서의 밥 딜런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업적은 50년 넘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의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혁신을 보이는 동시에 미국의 음악 전통에 확고히 뿌리를 두고 있다."

폴라음악상[1]



"And now Dylan has entered that pantheon, shoving against the boundaries of the definition of ‘literature’ just as he pushed past so many borders in music."

"밥 딜런은 이제 만신전에 올랐다. 음악에서 수많은 경계를 밀어냈듯이 '문학'의 정의라는 경계를 힘차게 밀어내면서."

LA 타임스, 2016년



"그의 시대의 셰익스피어로 추앙 받는, 딜런... (중략) 작사의 표준을 정하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2]



"고대 그리스음유시인들 옆, 오비디우스의 옆, 낭만주의 공상가들 옆에 위치하는 가수."

― 호러스 엔그달 / 문학 사학자, 전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 노벨 위원회 멤버[3]



"20세기 말 가장 위대한 시인."

― 앨런 긴즈버그, 시인[4]



"오르페우스부터 시인 파이즈 아마드 파이즈까지, 노래와 시는 항상 가까이 연결돼 있었다. 밥 딜런은 옛 음유시인의 후계자다."

살만 루시디, 악마의 시 저자[5]



"아마도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시인일 것이다."

― 펫 와스트버그, 작가 /스웨덴 한림원 회원[6]



"밥 딜런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학 예술가이다. 그의 언어 사용은 특별하고, 그는 다른 어떤 것과 달리 상당한 시적 작품을 창조했다. 비록 그의 주된 매체는 음악과 공연이지만, 그의 필사된 작품은 정교한 시적 감수성과 기술을 보여준다. 그의 시는 주로 말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말, 운, 어법, 그리고 언어의 인식 그 자체로 표현과 사물의 형태로써의 언어 그 자체이다."

(중략)

"밥 딜런의 작품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20대에 썼던 곡들 중 몇 곡만이 아니라 그의 반복적인 주제와 스타일들을 따라 그의 작품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의 2012년 앨범 'Tempest'는 1963년의 'The Freewheelin' Bob Dylan'과 현저하게 다른데, 이 앨범에는 여전히 초기 앨범의 메아리가 담겨 있다. 밥 딜런은 1960년대에 여러 개의 영향력 있는 노래를 작곡한 '시대의 목소리'라기 보다는 영문학의 주요 작가이다. 딜런은 이 시기의 노래들로 항상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노래들은 미국 역사에서 매우 강력하고 중요한 시기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혁명적인 행동은 시를 재창조하고 그것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50년이 넘는 그의 글쓰기 경력 동안, 우리는 1960년대의 멋진 노래들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또한 1997년부터 현재까지 그의 가장 최근의 작품들은 거의 틀림없는 가장 강력한 작품들로 고려해야 한다. 이 후기 작품들은 시인의 눈과 기술을 가진 뛰어난 장인의 작품들이다. (중략) 밥 딜런은 시대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는 1960년대 초의 스타로서의 지위를 넘어서, 일렉트릭과 어쿠스틱 모두를 아우르는 작업을 한 오늘날까지 그의 작품이 울려 퍼진 시인이다."

― 글로브 앤 메일[7]



"문학과 대중음악의 개척자인 그는 유럽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리듬을 처음으로 융합시켰고, 이후 세대의 음악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혁명을 일으켰다."

아스투리아스 공상[8]


"현대 미국 문화의 진정한 상징"

― 2009년 미국 국가 예술 훈장 수훈 이유[9]



"밥 딜런의 절충적이고 다차원적인 작곡은 미국 대중음악의 모든 장르에서 널리 찬양되고 존경 받아왔다. 그의 가사와 음악은 포크, 컨트리, 블루스, R&B, 스탠다드 팝 및 재즈 등 모든 장르의 영향을 줬다. (중략) 미국 음악의 가장 위대한 아이콘 중 하나인 밥 딜런은 진정한 시인이자 작곡가이다."

―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10]



"딜런의 음악에 대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는 라디오의 녹음된 시간은 3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뒤집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곡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수십 년 전에 녹음했을 때만큼 오늘날에도 그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공정하게 말하면, 여전히 현 시대의 관련있는 몇몇 송라이터가 있지만, 여기 오직 하나만이 있습니다. - 딜런 - 그의 시는 때때로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습니다."

CNN[11]



"그의 창조적인 전체 작품들은 전 세계의 그것뿐만 아니라 미국의 문화에 진정으로 깊고 지속적인 방법으로 기여했다."

레코딩 아카데미 회장 닐 포트노우[12]



"밥 딜런의 상호 문맥에서, 그는 베르길리우스오비디우스와 같습니다: 전통에서 충분히 늦게 왔고 그 뒤에 충분한 전통을 가진 사람. 그것을 통제할 수 있고, 그 일부가 될 수 있고, 그것을 다시 만들고,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카툴루스[13]

나 베르길리우스같은 시인과 밥 딜런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고 봅니다. 나는 그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언어의 통제, 가사와 멜로디를 연결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 리처드 F. 토마스, 하버드 대학교 고전 문학 교수[14]



"그는 작곡가가 항상 중요한 힘의 문화인 지난 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작곡가입니다. (중략) 60년대는 내 나이에 사람들에게 모든 문화에 부담이나 무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큰 무언가로 변형되었습니다. 그것은 혁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많은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1960년대 후반, 온갖 종류의 일이 전 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딜런은 그 부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그 중 일부 였습니다. 표현하고자하는 것을 표현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고있는 것, 생각하고있는 것의 표현으로 그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중략) 그는 1960년대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들에 의해 음악, 시, 글쓰기에 의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흐름에서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일하고, 쓰고, 반성하고,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1969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일해 왔습니다. 그래서 딜런의 작품을 더 긴 안목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 숀 윌렌츠, 프린스턴 대학교 역사학 교수[15]



"그의 캐논에 있는 모든 작품들이 서정적인 걸작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전체 작품에서의 세부사항과 넓은 주제와 감정의 추가는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만큼 충격적이다. 그가 동시에 훌륭한 음악가라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가장 광범위하고 결과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되는것을 가능하게 했다."

― 제레미 유드킨, 보스턴 대학교 음악학 교수 & 케빈 베렌츠 보스턴 대학교 문학 교수[16]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음악가 중 한 사람."

― 숀 래섬, 털사 대학교 핸리 켄달 문리과학대학 교수[17]



"거장 시인, 신랄한 사회 평론가, 용감무쌍한, 반문화 세대의 정신을 지도한 인물."

타임지, 밥 딜런을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하며[18]



"자신의 영웅성을 한사코 부인하는 대중적 영웅, 자신의 문화에 너무나 웅변적으로 도전해서 결국 반문화의 토대를 놓았으면서도 나중에는 자신이 낳은 것의 과도함에 등을 돌린 한 반항아."

― 로버트 셸턴, 뉴욕 타임즈 전속 작가



"그의 세대의 다른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의 창조력에 가까워 지려고 애 쓰고 있었지만, 5,60대의 딜런은 새로운 힘과 영감을 얻었다: ‘Time Out Of Mind’(1997), ‘Love and Theft’(2001), ‘Modern Times’(2006) 트릴로지는 그의 20대 시절 1960년대 일렉트릭 트릴로지 이후 가장 지속적인 예술적 재능을 발한 시기다."

인디펜던트[19]



"네,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 작곡가는 단어와 이야기를 음악에 맞추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미국 구어체의 거장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20]



"작가 밥 딜런, 진정한 미국의 목소리."

뉴욕 타임스, 2016년[21]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 그는 존 밀턴윌리엄 블레이크에서 이어지는 영어권 전통 속에서 위대한 시인이며, 항상 자신을 쇄신하고 새로운 신원을 창조하고 있다."

― 사라 다니우스, 현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22]



"언제나 그는 제 영웅입니다. 그를 흠모하는 마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젔어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모르겠습니다."[23]

"내 롤 모델 중 하나는 밥 딜런이다. 난 그의 가사를 통해 인생을 배웠으며, 그가 늘 안주하지 않는 걸 지켜봤다. 예술가들이 정말로 뛰어나다면, 남은 생애 동안 그 재능으로 잘 살 수 있고,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선 성공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순간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들은 진정한 아티스트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늘 실패의 위험을 안고 살았다. 애플이 나에게 그런 대상이었다. 난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실패할 때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못 했다. 픽사와 내 가족, 명성을 위해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이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한다면, 어쨌거나 최선을 다한 것이다."[24]

"나의 롤 모델은 밥 딜런 입니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죠. 누군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는 여전히 예술가입니다. 저 역시 실패 할까봐 혹은 실패했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춘 적은 없습니다."[25]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입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합니다."[26]

"그의 방 바깥의 테라스에 함께 앉아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는 제 영웅이에요. 그래서 굉장히 긴장했지요. 한편으로는 그가 명석함을 잃지는 않았을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 나이가 들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기쁘게도 그는 여전히 송곳처럼 날카로웠어요. 정말 개방적이고 솔직했지요."

스티브 잡스



"이게 바로 내가 딜런을 좋아하는 이유에요. 그는 정확히 내가 예상한 대로였어요. 그는 리허설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모든 재능 있는 사람들은 공연 전에 나와 미셸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는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을 연주했습니다. 아름다운 연주였죠. 그는 이 일에 너무 몰두해서 새로운 편곡을 세웠고 노래는 완전히 다르게 들렸죠. 노래를 끝내고, 무대를 내려온 그는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더니 머리를 갸웃하고, 그저 가볍게 씨익 웃어 보인 후 떠났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밥 딜런에게 원하는 모습이 아닌가?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비위를 맞추는 건 바라지 않잖아. 이런 행사들에 관해 좀 회의적이었으면 하지.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대로 해준 거야."[27]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으로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 만큼 거대한 거인은 없다."[28]

버락 오바마



"평화와 인권에 관한 그의 말은 미국의 어떤 대통령보다도 훨씬 통찰력 있고 훨씬 더 영구적이다."

지미 카터[29]



"그는 아마 다른 어떤 창조적인 아티스트들보다 내 세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와 가사가 항상 귀에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경력 동안 밥 딜런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평화를 어지럽힌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빌 클린턴, 1997년 백악관에서[30]



"그는 연주자로서, 작가로서, 작사가로서 미국의 우상이다... 그는 영원히 로큰롤을 바꿨다. 그는 팝송이 Like a Rolling Stone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확장시켰다."

프랭크 시나트라[31]



"밥 딜런만큼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한 사람은 없다. 그는 우리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시적 목소리, 시대의 음유시인, 우리의 락앤롤 셰익스피어이다. 인기 있는 작곡가가 문학의 고상한 영역과 동일하다는 개념에 비웃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의 서정적인 언어에 밥 딜런만큼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략) 그는 현재 75세이며 여전히 팬들을 황홀경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평가들과 그의 동료들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중략) 딜런의 작품의 전부는 대중가요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다른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는 밥 딜런을 듣고 영원히 그들을 변화시켰다. 언제나 훌륭한 싱어송라이터 레너드 코헨, 닐 영, 그리고 폴 사이먼은 모두 그를 존경했다. 마커스 멈퍼드, 에드 시런, 테일러 스위프트, 아델 같은 차세대 스타들도 그렇다. 당신은 심지어 힙합에서 그의 생도들을 들을 수 있다. 그는 JAY-Z부터 켄드릭 라마까지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이름이 확인되는 가장 존경받는 백인 작곡가이다. 소설가, 시인 및 영화 제작자는 정기적으로 그를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전 세계를 만져 버렸고 그런 숨 막히게 피할 수 없는 형태로 엄청난 도달 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 닐 맥코믹 텔레그래프 수석 음악평론가[32]



"60년 이상 비극, 배신, 죽음, 삶의 가장 큰 비극에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노래의 도덕적 인 신실함 등을 엿볼 수있는 시적인 가사로 그는 음악에 신화적인 힘을 유지해왔다."

더 가디언[33]



"딜런은 우리 시대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지적인 목소리이다... 아무도 그처럼 명확하고 지적인 작품들을 20년이상 만들어내지 못했다."

― 헌터 S. 톰슨 (저널리스트, 곤조 저널리즘 창시자)[34]



"밥 딜런은 음악 그 자체와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한다. 밥 딜런이 없었다면 세상의 음악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일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35]



"그의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내 의식에 깊게 있다. 그의 음악은 나로 하여금 사물을 좀 더 심오하고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한다."

마틴 스콜세지[36]



"노래의 피카소"[37]

"그는 아마도 우리가 한 세대 동안 가졌던 가수 중 가장 세련된 가수일 것이다. 어떠한 유명 가수도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와 같은 독자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딜런은 피카소다. 그 풍부함, 범위, 그리고 모든 음악 역사의 동화다."[38]

레너드 코헨



"그는 금세기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매우 높은 수준에서 음악신에 나타났고, 그리고 나서 (여기에 약간의 결함이 있는) 자신을 꾸준히 확장시킨다. 그는 보통 청중들 앞에서 한 발짝 더 서 있다. 그의 가사의 집중과 놀라움, 그의 멜로디의 아름다움, 말과 음악의 극적인 공감, 그의 욕망의 범위, 그의 신앙의 범위, 자기 갱생의 힘, 그의 재치, 그의 초현실주의, 경험의 진실..."

― 앤드류 모션 경 (영국의 계관시인)[39]



"그는 아마도 록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 자신의 노래를 쓰고, 음악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비틀즈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존 레논에 대한 그의 지배력 때문이다; 그의 가사와 그의 우울함. 또 그는 롤링스톤스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음, 그는 롤링 스톤즈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존 퀴난 (문화 비평가, 저널리스트)[40]



"밥의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밥의 가사를 읽어봐야 한다. 그것들은 삶의 기쁨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다. 밥이 되어 노래를 하면 어느 누구도 평범하게 노래할 수 없다. 가끔 난 내가 곡을 만든 것처럼, 나인 것처럼 그의 곡을 노래한다. 난 밥과 같이 가사를 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날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지미 헨드릭스[41]



"전 결코 밥 딜런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거장입니다. 내가 누군가가 되고 싶다면 그건 그 사람(밥 딜런)입니다."

닐 영, 2005년[42]



"그는 우리 세대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사람이다. 그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폴 사이먼[43]


"오늘, 저는 이번 발표를 시작하기에 앞서 시인이자 가수인 딜런, 밥 딜런의 가사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스티브 잡스, 오늘날의 컴퓨터의 토대가 된 1984년Macintosh 128K의 발표장에서


"노벨 문학상은 밥 딜런의 불멸을 향한 또 다른 발걸음이다. 반항적이고 은둔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예술가/작곡가는 정확히 노벨 문학상이 있어야 할 곳이다. 그의 말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60년 동안 나의 레퍼토리 중 밥의 곡보다 더 감동적이고 깊이, 어둠, 분노, 미스터리, 아름다움, 유머가 더 가치 있는 곡은 없었다."

조안 바에즈, 2016년[44]



"밥 딜런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칭찬할 방법은 없다. 그는 우리 시대의 호메로스다. 제 2의 밥 딜런은 앞으로 몇 천년 동안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 T 본 버넷 (프로듀서, 2001년/2008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 수상)[45]



"그는 비범한 시적 힘을 가진 서정적인 작곡으로 대중음악과 미국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퓰리쳐상, 2008년[46]



"밥은 엘비스가 여러분의 몸을 해방시킨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 그는 음악이 선천적으로 육체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지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위대한 록 음악이 만들어지는 곳이라면, 밥 딜런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밥 딜런은 나의 조국의 아버지다."[47]

브루스 스프링스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나의 영웅은 여전히 밥 딜런이다."

가즈오 이시구로[48]



"저는 밥 딜런을 사랑합니다. 누구인들 싫어하겠어요? 그는 어떤 종류의 정맥을 건드렸고 그것은 계속 이어지고 있죠. 그와 같은 사람은 없어요."

데이비드 린치[49]



"이것은 1953년 윈스턴 처칠에게 수여된 이후 가장 특이한 노벨문학상이다. 아니면 가장 대담한 상이겠다. 나는 밥 딜런을 못 마땅해 하지는 않는다. 그 남자는 천재야."

― 블레이크 모리슨, 작가[50]



"작가로서 나는 어떤 작가를 존경하고 영감을 주는지 정기적으로 질문을 받는다. 나는 항상 밥 딜런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에게 먼저 펜을 종이에 쓰라고 자극한 사람이었다. 시와 노래는 딜런의 모든 작품에서 교환이 가능하며 그리고 스웨덴 한림원이 그의 진정한 천재성과 문학 세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을 때 그것은 거의 감정적으로 나에게 매우 큰 기쁨을 줬다. (중략) 밥 딜런은 진정한 창조적인 카멜레온이자 문화적 아이콘이다. 그의 노래는 사회 논평 발라드와 살아있는 신문 문서에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랑 노래와 네 마디의 컨트리 노래까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가 오늘날 서정시의 조각이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압축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의 특성을 확대한다."

― 브라이언 코나한, 작가[51]



"밥 딜런은 셰익스피어처럼,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어디에 살든,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있든 간에, 지금 우리의 뼈 속에 있습니다."

― 빌리 로체, 극작가[52]



"나는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싱어송라이터



"그가 시인일까요? 혹은 송라이터일까요? 같은 대답이 적용됩니다: 그는 밥 딜런입니다."

― 프랜신 프로스, 소설가[53]



"지난 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변동을 구현한 음유시인인 딜런을 학계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팝시인을 기릴 최고의 기회를 낭비할 것이다."

― 빌 와이먼, NPR 전 예술 편집자[54]



"그는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가졌지만, 또한 위대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의 배경음악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세대간 사고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세대간의 연대가 존재하는 가장 낮은 형태의 연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0년마다, 모든 세대에는 특별한 목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확실히 내 운명에 있어서, 그것은 그였다."

크리스토퍼 히친스[55]



"그는 물론 내 송라이팅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그는 모든 사람의 송라이팅에 영향을 주었죠. 아무도 사랑 노래의 가사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가사에 다른 것에 대해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톰 페티 (싱어송라이터,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56]



"밥 딜런은 락앤롤이 자라서 살아남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언어와 사상의 힘을 음악에 불어넣었다."

― 지미 이오바인 (인터스코프 레코드의 공동 창립자)[57]



"밥 딜런은 그 어느 예술가보다도 영향력이 있다."

로비 로버트슨[58]



"밥 딜런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밴 모리슨[59]



"밥 딜런의 발명은, 그의 기타로 호메로스의 노래처럼 들려주는 어떤 의미의 전통과 같은 종류의 음악에 속한다."

― 로버트 피츠제럴드 (시인, 비평가, 고전 문학 번역가)[60]



"밥이 우리 일을 발명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힘든 싸움을 했다."

― 스티브 얼 (싱어송라이터)[61]



"당신이 딜런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아. 그는 불꽃과도 같다. 그를 손에 쥐려고 하면 화상을 입을 것이다. 딜런의 변화와 끊임없는 실종과 끊임없는 변혁은 그를 붙잡고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의 팬 층은 너무 집착하고, 그래서 그에게 진실과 완벽함, 그리고 답을 찾는 것을 열망한다. 딜런은 절대로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좌절만 할 뿐이다. … 딜런은 까다롭고 신비롭고 회피적이며 좌절감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토드 헤인즈[62]



"밥 딜런은 락앤롤의 찰리 채플린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관객 모두에게 천재로 여겨진다. 둘 다 초기 작품으로 혁명가로 선언되었고 이후 작품들이 열등하다고 여겨졌을 때 동료들에게 철저한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동료들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의 예술을 발전시켰다."

"밥 딜런은 60년대 대중음악의 예측불가능성의 원천이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음반 판매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의 중요성은 미학과 사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향력이었다."

― 존 랜도, 프로듀서[63]



"아마도 밥 딜런은 시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 그레일 마커스, 문화 비평가[64]



"딜런은 정말 똑똑하다. 나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빌리 조엘처럼 보이게 만든다."

조지 해리슨[65]



"딜런은 탐험 할 수있는 행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작곡가의 경우, 딜런은 목수에게 망치와 못과 톱이 필수적인 것 만큼 중요하다. 작곡가로써의 그의 여정은 신화의 소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노래의 다른 부분 안에 살기 때문이다."

톰 웨이츠[66]



"밥 딜런은 파동이다. 그는 내가 태어난 해부터 세계를 휩쓸고 있는 멜로디, 단어, 리듬, 아이디어, 태도의 움직이는 힘이다."

― 앤서니 키디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리드보컬[67]



"우리들의 셰익스피어는 땡땡이 무늬 셔츠를 입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뒤에 있는 모든 작곡가들은 그의 짐을 운반하고, 이 초라한 아일랜드식 음유시인이 자랑스럽게 그의 짐을 나르는 것이다. 아무 때나."

보노, 밥 딜런을 세익스피어로 비유하며 한 말[68]



"밥 딜런과 같은 커리어를 가진 아티스트는 없다. 그것은 50년 이상 지속되며 다른 아티스트들보다 더 많은 걸작 앨범을 포함하고 있다."

― Ultimate Classic Rock[69]




"사실 밥딜런에게 노벨상은 부수적인 타이틀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대중음악과 문학의 경계를 허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딜런의 미국 대중 음악에 대한 비전은 변혁적이었다. 그 누구도 밥 딜런만큼 더 높고 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015년)

롤링 스톤



"무심한 천재, 눈을 가늘게 뜨고 경멸하는 눈초리, 건조한, 직설적인 유머. 점점 커지는 슈퍼히어로 지위의 완전한 무관심. 그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소년이다. 그러나 모두가 갈망하는 그 소년이다. 성배. 마지막 미국의 영웅이다."

피치포크, 2006년



"밥 딜런처럼 그들 시대의 음악과 문화에 영향을 동시에 준 음악가는 거의 없다. 딜런은 자기 세대에게 최소한 두 가지 존재였다. 자유분방한 포크 가수가 "Master of war"를 비난하며 대중을 이끈 가수와 포크를 바로크 예술로 만든 음악가였다. 하지만 딜런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딜런은 신화이다. 아마도 유일한 진정한 락의 역사일 것이다. 그의 음악은 전설적이다. (중략) 딜런은 이례적으로 세련된 가사를 썼다. 그는 포크 가수라기 보다는 초현실적인 시인이었다; 그의 가사는 그의 세대의 갈망과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형이상학과 잔인한 사회정치적 현실 사이에 문학적 다리를 건설했다. 새로운 웅변 형식을 유행시키기 위해 딜런은 두 개의 오래된 역사적 모델인 월트 휘트먼과 성경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들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정교한 국어로 만들었다."

피에로 스카루피 (이탈리아 비평가)



"나는 밥 딜런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지금은 그를 좋아하지 않아요' 말하면 그리고 나는 '아니, 밥 딜런이야'이라고 말했다. 나에게 그것은 피카소와 같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피카소처럼, 피카소의 다양한 시기에 대해 사람들이 토론하는것처럼, '이것이 이것보다 더 나았고, 이것보다 더 나았습니다.' 하지만 난 말한다. '아니. 피카소야. 다 괜찮아."

폴 매카트니, 2007년



"난 밥 딜런을 정말 좋아한다. 그의 초기 작품도 좋아하고, 일렉트릭 기타를 쓴 작품도 좋아하고, 기독교 앨범도 좋고, 그가 낸 다른 앨범도 좋아한다."

조니 캐쉬



"그들은 밥 딜런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물어봤어요. 그건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물어보는 것과 같죠."

피트 타운젠드, Flanagan, (1990), Written In My Soul, p. 88.



"밥 딜런은 가장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중의 한 명이다. (중략) 음악가로서 그는 비틀즈에 영감을 불어 넣었고 또 포크 락을 주류로 끌어 들여 일렉트릭 기타가 음향적인 것 만큼 혁명적 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등 무수한 방법으로 대중 음악을 형성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대중 음악이 가지고있는 최고의 작사가인 딜런은 진정한 위대한 존재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노래에 성격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그가 실험해 본 다양한 장르와 그의 작품에서 절충적인 성격은 놀랍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존경 받을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것은 대단한 위업이지만, 그가 그의 경력 45년 동안 여전히 그렇게 높은 품질의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딜런을 재능있고 특별하게 만들 뿐 아니라 비틀즈와 함께 대중음악의 정점으로 만든다."

Rate Your Music[70]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쟁을 비웃듯 미국에서의 밥 딜런 연구는 이제 하나의 학문, “딜런학(Dylanology)”이 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수많은 딜런 연구서들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깨알 같은 글씨의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밥 딜런 백과사전』까지 나와 있다. 딜런은 대중문화를 자본과 지배이데올로기의 ‘시녀’라는 오명으로부터 구해냈고, 대중문화에 숭고성(崇高性)을 부여한 예외적 예술가이다. 딜런 덕분에 대중은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흥얼거리고 건들거리면서도 얼마든지 인생의 의미와 전쟁의 광기와 신의 존재에 대해 묵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밥 딜런의 음악을 처음 듣고 깊이 매혹당했던 이유는, 잘 들리지 않던 가사 때문도, 멜로디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어떤 ‘자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그것은 규범을 넘어서는 힘이었으며, 통념을 조롱하는 해방의 팡파르였다. 그의 목소리는 가짜 권위, 위선과 거짓을 단번에 교란시키면서 모두가 꿈꾸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을 호출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가 불러내는 ‘저 너머’의 세계는,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유토피아 욕망을 자극한다. 그에게 있어서 노래는 “개인교사였고, 현실에 대한 변화된 의식으로 인도하는 가이드였으며, 어떤 다른 공화국, 즉 해방된 공화국이었다.”(밥 딜런)

60년대에 (포크음악을 통해) 저항의 아이콘으로 추앙을 받던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을 집어 들었을 때 수많은 포크 애호가들이 그의 ‘배신’에 분노했다. 그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가스펠 음악을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예수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이제 70후반이 된 그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길거리의 평론가’였고, 예수쟁이라 비판을 받기 훨씬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단 한 번도 신에 대한 사유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는 ‘거리의 이데올로기’를 포크라는 단일한 형식에 가두기를 원치 않았을 뿐이며, 모든 사유의 끝장은 결국 신에 대한 사유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61년부터 2012년까지 발표된 그의 노래 가사를 모은 『밥 딜런 가사집』은 거의 700페이지에 이른다. 그는 이 모든 노래의 가사를 썼을 뿐만 아니라 곡을 붙였고 음반으로 제작했으며, 최근까지 연평균 100회에 이르는 월드 투어 콘서트에서 그것들을 불러왔다. 양적 성취만으로도 그의 생산력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음악 창고는 성경을 위시하여 니콜라이 고골, 오노레 드 발자크, 기 드 모파상, 빅토르 위고, 찰스 디킨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단테, 장 자크 루소, 오비디우스, 조지 고든 바이런, 퍼시 비시 셸리, 윌리엄 블레이크,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에드거 앨런 포, 지그문트 프로이트, 존 밀턴, 알렉산드르 푸시킨,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크 쇼트, 쥘 베른, 허버트 조지 웰즈, 로버트 그레이브스, 알렌 긴즈버그, 잭 케루악, 잭 런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사상과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 무수한 사상과 언어의 창고에서 자신의 철학과 노래와 가사들을 끌어올린다. 그는 이 모든 과거의 언어들을 다시 뜨개질했으며, 그것들을 자기 시대, 자신의 언어로 변형시켰다.

내가 밥 딜런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사회 비판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자성(自省)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밖을 향한 그의 예리한 칼날은 항상 같은 강도로 그의 내면을 향해 있다. ‘나는 꿈속에서 성 오거스틴을 보았네’라는 노래에서 그는 “그 잘난 세상의 왕과 여왕들에게” “슬픈 불평”을 날리지만, 동시에 자신을 “성 오거스틴을 죽인 자들 중의 한 명”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에게 분노하여 잠에서 깨어나며 “외로이 고개를 숙이고 운다.” 비판은 아픈 자성을 동반할 때 진정성을 얻는다.

― 오민석 단국대학교 영문학 교수 / 문학평론가, 내가 밥 딜런을 좋아하는 이유



"그의 음악은 하나의 현대사상 저서나 같다. 마이클 잭슨이 음악을 영상처럼 보게 했다면, 밥 딜런은 음악을 책처럼 읽게 했다고 할까. 어쩌면 1960년대 이후 서구 대중음악은 밥 딜런에 대한 경배를 통해 힘과 품격을 늘렸는지도 모른다."

임진모



"밥 딜런의 음악이 미국, 나아가서 세계 대중음악사에 끼친 결정적인 공로는, 대중음악이 문학적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통속적이고 동어반복적인 사랑 타령에서 벗어나서 대중음악이 인간인식의 내면, 나아가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을 담을 수 있었다."

―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4. 여담[편집]


  • 2021년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밥 딜런 센터와 아카이브가 세워진다. 딜런의 작곡/작사 노트, 노래 초안, 음반, 사진, 영화 아웃테이크, 공연 기록 등으로 구성된 10만개가 넘는 자료를 보관한 딜런의 아카이브는 오클라호마 털사에 세워질 예정이다. ‘BOK Financial Corporation’의 회장인 재벌 조지 카이저는 딜런의 관한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딜런에게 약 2,000만 달러를 주고 그의 관련된 거의 모든 물품들을 사들여서 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2017년 조지 카이저 패밀리 재단은 털사 예술 지구에 있는 밥 딜런 센터를 위한 디자인 공모전을 발표했다. 이 재단은 2018년 ‘Olson Kundig Architects’에서 건축가를 선정해 건물을 설계했다고 발표했고 2021년에 문을 열 예정이며 딜런은 이 프로젝트에 대해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밥 딜런 팬들을 위한 메카’라고 평했다.[23]
    • 2018년 나온 간단한 계획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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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청난 워커홀릭이다. 1962년 앨범 발매 이후 최소 2~3년안에 무조건 앨범을 냈다. 이렇게 앨범을 자주 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작품의 퀄리티를 계속 유지했다. 가장 오래된 공백기는 2001년 'Love and Theft' 발매 후 5년만에 'Modern Times' 앨범을 낸것이다. 2015년, 2016년, 2017년엔 3년 연속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또 1988년부터 2018년까지 한해도 빠지지 않고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의 이름은 ‘Never Ending Tour’.

  • 워낙 명곡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커버한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많이 커버 된 아티스트 중의 한 명이다.[24]

  • 스티브 잡스가 가장 존경한 인물중의 한명이다.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말했다. 딜런이 녹음한 773곡 전곡이 담긴 디지털 패키지 세트를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판매하기로 했는데 상품의 출시를 알리면서 잡스는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영화 ‘스티브 잡스’의 대니 보일 감독은 “그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반골로 부르며 우상화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딜런이 잡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애플 초창기 잡스는 100시간 분량이 넘는 1960년대 딜런 음악 해적판을 수집했다. 월터 아이잭슨이 저술한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와 애플 초기의 스티브 워즈니악은 딜런 팬으로서 마음이 맞았다. “딜런의 노래책을 구입해 가사를 해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워즈니악은 말했다. “딜런의 가사들은 창조적 사고를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그 뒤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밥 딜런의 곡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딜런과 상봉했다. 잡스의 전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딜런의 방 앞쪽 테라스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잡스는 긴장했지만 그의 우상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정말로 허심탄회하고 솔직했다.” 잡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온 적은 오직 밥 딜런을 만났을 때(2004년 10월)뿐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1984년 매킨토시를 공식 발표할 때 스티브 잡스는 연설 첫머리에 딜런의 ‘세상이 변하고 있네(The Times They Are a-Changin’)’ 중 둘째 행을 인용했다.

  • 힙합을 좋아하는듯 하며 퍼블릭 에너미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본인이 진행했던 라디오에서 LL 쿨 J의 ‘Momma Said Knock You Out’을 틀기도 했다. LL 쿨 J는 딜런이 본인의 노래를 틀었다고 들었을때 너무 좋아 흥분했다고 한다.

  • 대중 음악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력,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 잘 모르지만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아티스트이디. 빌보드가 2015년 발표한 올타임 앨범 아티스트 랭킹에서 2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 2021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의하면 밥 딜런의 음악 저작권 가치는 3억 2500만 달러로, 역대 뮤지션 중에서 4위로 조사되었다.

  • 1960년대 당시 인터뷰, 기사들

시카고 데일리 뉴스: 당신은 이른바 포크록 음악을 부를 생각이 있나요?

밥 딜런: 아니요, 그건 포크록이 아닙니다. 그냥 악기들이요... 나는 그걸 기계 음향이라고 불러요. 뭐랄까 독립음악 같은 거죠. 정말이지 설명을 못 하겠는데... 나는 열세 살인가 열네 살때부터 열 다섯 살 때까지 로큰롤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열여섯 살인가 열일곱 살때 그만두고 말았죠. 그냥 그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시: 포크 사운드는 왜 그만뒀습니까?

밥: 그것만 줄창 하기에는 여기저기 너무 많이 가본 거죠. 진정한 포크는 절대로 42번가를 보지 않죠. 비행기를 타는 법이 없어요.

시: 마치 사람들로부터 끔찍하게 유리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밥: 어떤 압력 때문에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습관이죠. 내가 원래 그런 식이에요.. 모르겠어요, 연결되는 것보다 단절되는게 더 쉬운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엄청나게 존경해요.. 관련이 너무 많았죠, 상황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아서, 자신을 깨트리는 것보다는 그냥 관련되지 않았죠..

시: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는걸 피하시나요?

밥: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요. 나 같은, 역시 단절된 사람들이요. 단절된 사람들이 많죠. 나는 소외되었다거나 단절되었다거나 두렵다는 느낌이 없어요. 단절된 사람들 간의 어떤 종류의 조직화는 별로예요. 나는 그냥 어떤 조직과도 함께 갈 수 없어요. 언젠가는 어떤 지하철에서 자선이 완전히 혼자 있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르죠. 전기도 나가서, 오도가도 못 하고, 40명의 사람과 함께. 그러면 저는 그들을 알아야 했죠. 그때는 그냥 해야 하는 일을 할 거예요.

― 1965년 11월, 시카고 데일리 뉴스


내가 그의 셋째 음반을 건네고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자 그는 자기 사진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그리고 서명했다. 나는 그에게 블루스를 정의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블루스는 주머니가 텅 빈 바지입니다. 마음에 들어요? 블루스는 주머니가 텅 빈 찢어진 바지라고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블루스(blues)는 색이에요. 그게 다에요.” 그리고 나는 “미국 포크 음악에서 본인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포크 가수면 개나 소나 포크 가수일걸요.”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그리고 앞으로 올 세대가 그들 자신의 지도자를 발견할까요?” 그는 약간 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새 세대를 믿어요. 곧 새 세대가 내게 맞서 반항할겁니다. 내가 더 예전 세대에 반항했듯이요. 변화만큼 안정적인 건 없지요. 나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 데일리 헬럴드, 스튜어트 크럼프[25]


딜런은 그가 자신을 의식하는 동안 모든 이가 자신을 의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탬버린 맨을 들을 수 있는 그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동시대인들의 야심의 핵을 건드렸습니다. 오크와 팩스턴과 팀 하딘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에너지를 느끼고 에너지를 전달받았습니다. 일부, 엔더슨교 블루와 나머지, 리처나 파리나 같은 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영웅이었고 마지막 위대한 소포모어인 폴 사이먼은 딜런에게 충격을 받았지만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 마이클 토머스, 1968년 8월


KQED 방송국: 자신이 기본적으로 가수라 생각합니까, 시인이라 생각합니까?

밥 딜런: 아 나는 자신을 노래하고 춤추는 남자라고 생각해요.

K: 당신의 개인적 미래 희망은 뭐고 세계가 어떻게 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밥: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없고 그냥 갈아 신을 장화가 많았으면 좋겠네요

― 센프란시스코 KQED 방송국, 1965년 12월 3일


KQED: 포크 가수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오늘날 저항 가수들로 규정 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밥 딜런: 이해가 안 가는데요. 다시 질문해주시겠습니까?

K: 당신과 동일한 음악적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저항 가수인 사람들이 얼마나 되나요? 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오늘날 사는 사회적 상태에 관해 저항하는 데 음악을 이용하나요?

밥: 얼마나 많냐고요? 약 136명이요 (웃음) 136명이나 아니면 132명이요.

K: 저항이라는 단어는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나요?

밥: 노래하고 싶지 않을 때 노래를 한다는 뜻이지요. 노래하고 싶은 희망을 거스르며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K: 저항가요를 부르시나요?

밥: 아니요.

K: 무슨 노래를 부르시나요?

밥: 모든 사랑 노래요.

K: 개명을 하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다른 이름은 뭔가요?

밥: 쿠네제비치요. 친척들이 이곳저곳에서 찾아여 콘서트 표 같은걸 달라고 할까 봐 바꿨어요.

K: 밥, 오늘날 가수들은 왜 그렇게 마약을 널리 이용할까요?

밥: 몰라요. 당신은 가수인가요?

Q: 밥, 당신은 작곡을 할 때 어떤 주법을 사용하시나요, 아니면 기법이라고 부르나요?

밥: 음, 그냥 앉아서 정신 차려보면 곡이 나왔어요.

Q: 당신은 왜 우리와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면을 썼나요?

밥: 나는 그냥 당신 질문에 수준에 맞취 답변하고 있을 뿐인데요.

Q: 틀림없이 천 번은 들으셨을 질문인데요. 음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시나요? 저는 노래 한 곡이 이해가 안 가는데요.

밥: 음, 기분 나뻐하거나 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아요. 못 알아들었다면, 정말이지 고민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한테 하는 말이 아니니까.

Q: 글을 쓸 때 뭔가를 말하려고 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즐기시나요?

밥: 나는 그냥 엔터테이너예요. 그게 다에요.

Q: 당신은 글을 쓰고 노래하는게 자신에게 진정 중요하다고 느끼시나요?

밥: 당신 때문에 화가 날 것 같은데요.

Q: 아니면 그냥 잘되어가기 때문에 하고 싶은건가요? 당신이 쓰는 것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느끼나요?

밥: 느낄게 뭐가 있는데요? 몇 개만 대봐요.

Q: 기본적 감정들이요. 고통, 후회, 사랑...

밥: 나는 그런 감정이 없는데요.

Q: 당신은 작곡을 할 때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밥: 나는 내 느낌들을 설명할 필요 없어요! 여기 재판정이 아니에요!

― 센프란시스코 KQED 방송국, 1965년 12월


플레이보이: 왜 저항가요를 작곡하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셨나요?

밥 딜런: 메시지가 있는 노래들은 다들 알겠지만, 지겨워요. 내가 하려는 건 시청을 세내서 약 50명의 웨스트 유니온[26]

사람들을 데려오는거에요. 내 말은 그러면 진짜 메시지가 있을 수 있겠죠.

플: 작년에 한 인터뷰어에게 ‘나는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게 사실이라면 더 기대할게 남아 있나요?

밥: 구원이요. 그낭 순전한 구원이요.

플: 소년 시절 꿈의 정석인, 커서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나요?

밥: 아니요. 어렸을때는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었어요. 누가 트루먼이 되고 싶겠어요?

플: 음,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칩시다. 첫 1,000일 동안 무슨 성과를 달성하고 싶나요.

밥: 맨 처음 할 일은 아마도 백악관을 옮겨야죠. 나는 즉시 미국 국가를 새로 쓸 거고, 어린 학생들은 ‘아름다운 미국’을 암기하는 대신 ‘Desolation Row’를 외워야 할겁니다. 그리고 나는 마오쩌둥에게 당장 승부를 걸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싸우겠어요.

― 플레이보이, 1965년


  • 알다시피 가사 쓰는 실력을 보면 과연 보통이 아니다.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촌철살인적인 발언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잡게 했다. 다만 말 솜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사석에서 말수도 적었다고 한다. 또한 인기와 달리 그의 행동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면모가 많았다. 이런 독단적이고 개인적인 행동들 때문에 인생사가 심각하게 우여곡절이 많은 편이다. 이혼도 자주 했고, 마약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불화도 심했다.

  • 한국에서는 반전운동, 반문화운동,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을 늘 불편해 하여 음악 스타일, 대외적인 이미지를 몇년 단위로 바꾸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대 시국과 관련된 발언 자체를 하지 않고 (그를 접한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앞 뒤 연결이 힘들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이는 등[27] 대중과 언론의 기대를 아랑곳 않는 행보를 보여왔던 탓에 영미권에서는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전술한 것 못지 않게 강하다.

  • 신비주의 이미지도 강하다. 밥 딜런 본인이 언론을 굉장히 싫어하며 인터뷰도 거의 하지않는다. 시상식이나 공연을 제외하면 대중 매체에서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또 그는 수줍음이 많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공공 장소에서는 종종 후드를 쓰거나 금발 가발을 쓴다.

  • 복싱팬이고 실제로 복싱을 배웠다.사진 개인 체육관도 가지고 있다. 딜런에게 복싱을 가르쳐준 복싱 선수 레이 맨시니는 “밥은 자신만의 개인 체육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본 체육관 중 최고야.”라고 말했다. 또 무하마드 알리의 팬이었고 그와 만난적이 있다. 1975년 12월, 딜런이 감독한 영화가 개봉된 후, 알리는 루빈 카터의 부인과 딸과 함께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있는 딜런의 콘서트 롤링 썬더 리뷰에 출연하였다. 알리는 모금 콘서트에서 MSG 무대에서 카터에게 전화를 했고, 투어 초반에 감옥에 있는 카터를 방문했다. 딜런과 알리는 자선 콘서트에서 무대 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사진1, 사진2 알리가 사망하고 딜런은 “위대함의 척도는 지구 상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가장 위대했다. 모든 면에서 그는 가장 용감하고, 가장 친절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라고 그의 홈페이지에 글을 쓰며 그를 추모했다. 매니 파퀴아오와도 만난적이 있다. 파키아오의 대변인 프레드 스턴버그는 “그는 미리 전화를 걸어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지금까지 우리 체육관에서 이런 분위기가 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나는 거의 10년 동안 그 체육관에 다녔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사진 또 옥중에서 자신을 무죄를 호소하는 복서 루빈 허리케인 카터에 대한 곡을 쓰기도 했다. 딜런은 형무소로 가 카터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한다.

  • 딜런은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 외적인 이미지와 행동 양식 면에서도 동시대 및 후대의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썬글래스를 쓰고 담배를 꼬나물고 늘 티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방진 이미지와 수수께끼 같고 냉소적인 행동방식을 통해 한 락뮤지션 이미지의 원형을 만들어낸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역대 록 뮤지션들 중에 섹시한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 스타가 엘비스 프레슬리라면, '지적인'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그래서 밥 딜런은 록의 두뇌라는 비유도 있다. 또한 벨벳 언더그라운드루 리드가 밥 딜런의 이미지를 모방하며 이미지 스타일과 언행방식의 롤모델로 삼았다는 점이 꽤 유명하다.

  • 역사적으로 그는 그가 녹음한 스튜디오 밴드 멤버들과 친해지거나 대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음악가들은 보통 그 당시 프로듀서로부터 지시만 기다리곤 했고, 종종 딜런의 냉담한 행동과 녹음 후 받은 신용 부족으로 인해 좌지우지되었다. 최근에 딜런이 80년대와 90년대에 모은 투어 밴드와 함께 자신의 앨범을 제작하고 녹음하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다소 변했다고 한다.

  • 그에게는 의붓딸 마리아의 손자 네 명, 제시와 사무엘의 손자 한 명, 그리고 야콥 딜런의 손자 세 명이 있다. 그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할아버지" 범퍼 스티커를 가지고 있는데, 이 스티커는 그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차에 전시하고 있다.

  • 그는 라이브로 연주할 때 더 이상 기타를 연주하지 않고 대신 키보드로 연주하거나 하모니카로만 연주한다. 비록 이것이 허리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분명 그 밴드의 음악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이다. 그의 공백을 메우는 그의 오랜 투어 밴드에 재능 있는 기타리스트 몇 명을 모았다.


  • 60,70년대에는 앤디 워홀과 관계가 있을 정도로 패션과 스타일이 유명했지만, 2015년 20대 경관에게 노숙자 취급을 받아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기도 했다.

  • 90년대 번역 출판된 소설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비롯한 일본어 소설을 보면 밥 딜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편인데, 이름이 보브 딜런으로 표기되어있다. 밥 딜런을 일본어 가타가나로 풀어쓴 걸 그대로 옮겨온 듯한 이 번역은 사실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2001년 국립국어연구원의 심의를 거쳐 지금의 밥 딜런으로 고쳐졌다. 다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2001년 이후에도 여전히 보브 딜런으로 쓰는 사람도 꽤 있다.

  • 90년대 초반에는 애플 컴퓨터 제품에 이름이 딜런이라는 것 때문에 소송 제기했다가 패소했는데, 미국 언론에게도 딜런 토머스 지인들도 문제시하지 않은 일이라고 비웃음을 들었다.

  • 외국에서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동급의 본좌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번안된 "Blowin' In The Wind"가 국내에서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언어 문제와 앨범에 담긴 미국적인 향취 때문에 의외로 대한민국에서 밥 딜런 자체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다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할까. 그래도 '아임 낫 데어' 같은 영화 때문에 일반 대중의 밥 딜런에 대한 인지도가 조금씩 늘고 있다.

  • 가창력 자체보다는 웅얼웅얼 읊조리며 부르는 독특한 분위기의 창법이 유명하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If Not For You'나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Knockin' on Heaven's Door'를 들어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2012년작 "Tempest"에 수록된 "Duquesne Whistle"에선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시키는 창법으로 노래했다. 참고로 이것들은 노래와 자신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목소리다. 지인들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미성의 소유자이며, Nashville Skyline에 나오는 목소리가 진짜 목소리에 가깝다고 한다.

  • 2010년 3월 31일 잠실에서 내한공연을 열었다. 그리고 8년만인 2018년 7월 27일 다시 재내한했다.

  • 원피스 만화 연재본 572화의 제목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밥 딜런의 3집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이다. 이 노래는 잭 스나이더가 감독한 영화 왓치맨의 오프닝 곡으로도 쓰였다. 오프닝 영상은 원작에서 길게 소개되는 미닛 맨 소속의 과거의 히어로들의 역사를 20세기 미국사의 여러 장면들과 함께 시간순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이는 원작의 긴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요약해 보여줄 뿐 아니라, 노래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영욕의 세월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아가는 작중 히어로들의 상황을 잘 나타낸다.

  • 첫째 부인에서 얻은 네 번째 자식인 아들 제이컵 딜런 또한 미국의 유명 밴드 '월플라워스(The Wallflowers)'의 리더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아버지 밥 딜런 정도의 전설은 아니지만, 아버지 후광 없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 뜨고 나니 아버지가 밥 딜런이었구나 하고 알려질 정도. 1996년 앨범 Bringing down the horse, 그리고 이 앨범 최고의 히트곡 One Headlight는 상당히 유명하고 1998년 Time Out Of Mind로 아버지 밥 딜런이 그래미 앨범상을 받을 때 월플라워스 역시 락부문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앨범부터는 그만한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활동은 중단하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하는 중. 밥 딜런이 심한 바람둥이었기 때문에 부자 간 사이는 좋지 않은 듯하다. 손자인 파블로 딜런은 래퍼로 활동 중인데, 할아버지나 삼촌과는 달리 철저하게 언더 활동 중이라 정보가 매우 부족한 편.

  • 2013년 11월 13일 "Complete Album Collection Vol. 1"이 국내 정식 발매되었다. LP 미니어쳐로 제작된 정규 47개의 앨범들, 268쪽의 부클릿등 딜런의 음악을 귀로 직접 체험하고 싶다면 구입해보도록 하자.


  • 배우로도 아주 가끔씩 활동한 적이 있는 데, 가장 유명한 영화라면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이 있다. 비중있는 조역인데 연기는 그닥 좋지 않았다. 감독 영화도 있는데 망했고. 10여년 이후 영화가 재발굴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Hearts of Fire이 혹평을 들은 이후로는 영 아니다 싶었는지 출연은 없다. 장난삼아 배우를 한 건 아니고,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참고로 배우로써 데뷔를 한 건 의외로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그것도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1963년에 BBC에서 만든 단편 영드 'Madhouse on Castle Street'에서였다.

" 존 포드의 영화엔 용기와 용감한 행동과 구원 그리고 고뇌와 황홀함의 기이한 조합이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 찰리 채플린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조차 그렇다. 난 항상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 같다. "[28]


  • 허영만의 1987년 작품 <고독한 기타맨>에도 나온다. 처음에는 주인공 이강토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나("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반복해서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중에 이강토와 직접 만나게 되며, 이강토의 기타 실력에 빠져서 그의 멘토이자 프로듀서로 나선다. 이강토는 밥 딜런의 도움에 힘입어 전미를 석권한다. 실제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계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넘어 기축이 되었던 존재였다. 한국 포크록의 전설인 한대수도 밥 딜런의 창법과 스타일을 많이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든게 "행복의 나라"였다. 실제 그가 말하길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 등장에 씨앗을 뿌렸다라고 평한다.


  • 60~70년대 많은 유명곡을 뽑아내던 활동시절과 현재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음악 성향도 그렇고. 1980년대 이후 앨범들은 한국에서 그다지 잘 알려있지 않기 때문에 2010년 내한공연 때 예전 생각하고 보러 온 상당수의 관객들이 당황하기도 하였다. 사실 그에 목소리가 안 좋아진 것은 아니고 1980년 이후로 갑자기 창법을 바꾸었는데 1986년 'Oh Mercy'이후로 창법을 완전 갈아 엎은 것으로 보고 있다.

  • 2013년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모욕 및 혐오선동 건으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2012년 롤링 스톤 프랑스어판 인터뷰에서 '흑인들은 아직도 일부 백인들이 노예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노예 주인이나 KKK의 피를 갖고 있다면 흑인들이 알 수 있다는데 마치 유대인이 나치의 피를,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의 피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다.[29] 부디 하루빨리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하여 크로아티아를 나치에 비유했다는 이유. 정치적인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보내길 꺼려서 오프 더 레코드를 걸은 건데 그걸 어기고 기사에 실은데다가 그 발언조차도 특정 국가를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혐의 처리되었다.

  • 2021년 8월 13일 과거에 12세 소녀를 그루밍 성폭력했다는 주장이 나와서 뉴욕주 연방 법원에 소송이 걸린 상태이다.# 자신을 'JC'라고 밝힌 피해 여성의 주장에 따르면 1965년 4월부터 6주간 뉴욕 첼시 호텔에서 딜런이 술과 약물을 사용해서 자신에게 몰래 성폭력을 가했고, 유명 음악가의 지위를 이용해서 그것을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고소 여성이 주장하는 65년 4월부터 6월까지 밥 딜런은 투어로 인해 영국에 체류중이었던데다, 여러 동료 뮤지션들은 물론이고 다큐멘터리 'Don't Look Back' 촬영팀까지 동행하고 있었기에 남들 몰래 6주간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며 무고를 주장하는 의견도 있고, 오래 전 일이고 피해자가 어렸을 적 일이니 자잘한 기억의 오류가 있지만 성폭력 혐의는 여전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 밥 딜런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대응했다.

2022년 이 소송은 피해자측이 소송을 영구히 철회해 종결됐다. 이 소식은 딜런의 변호사들이 J.C.가 법원이 명령한 기한까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넘기지 못하자 증거를 인멸했다고 고발한 직후에 나왔다. 딜런의 변호사 측은 "우리는 원고가 변호사가 주도하는 이 가짜 사건을 취하하고 이 사건이 기각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

  • 밥 딜런의 골수팬이라면 밥 딜런하면 떠오르는 것중 하나가 바로 해적판 앨범이다. 자세한 사항은 부틀렉 시리즈 항목 참조.



  • 미셸 파이퍼 주연의 영화 '위험한 아이들'(1995) 에서는 밥 딜런의 시가 주요 소재로 쓰인다. 문제아 아이들이 밥 딜런의 시를 읽고는 시에 관한 매력을 알아간다.

4.1. 종교[편집]


밥 딜런의 종교적 회심에 대한 오해와 진실

1979년말 밥 딜런은 갑작스레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 나아가 이 때 발표한 세 장의 앨범 < Slow Train Coming >(1979), < Saved >(1980), < Shot of Love >(1981)에는 자신의 회심을 고백하고 신을 찬미하는 노래들로 채웠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전도자로 활동한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이었던 밥 딜런이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이런 충격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밥 딜런의 전기 작가인 로버트 쉘턴(Robert Shelton)에 의하면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고, 어릴 때 다른 유대인들처럼 유대교 예식 참여는 물론 히브리어도 상당 수준으로 학습했다. 일부 언론과 평단은 늘 베일에 쌓여있던 그의 신비주의 전력을 근거로 그의 회심을 의심했다.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벌인 일종의 쇼라는 것이다. 더욱이 몇 년간의 뜨거운 전도활동 후 그는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으니 이런 의심이 생길만도 하다.

1970년 전후, 미국 음악계의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왜곡된 히피 정신을 가졌던 찰스 맨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배우 샤론 테이트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또한 롤링스톤즈의 알타몬드 공연에서는 흑인 청년 메레디스 헌터가 오토바이족 헬스 엔젤스의 칼에 맞아 죽었다.[30] 패션이 된 약물은 수많은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위 '27세 클럽'의 '위대한 3J'(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가 약물중독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은 음악계에 흐르던 저항문화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대신 카펜터스, 캐롤 킹, 짐 크로치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노래가 사랑 받게 된다.

밥 딜런 역시 이 시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행복했던 결혼도 권태기에 빠졌다. 결국 밥 딜런의 외도로 아내 사라와 이혼했고 다섯 자녀의 양육권 역시 긴 소송 끝에 잃어버렸다. 또한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 Renaldo and Clara > 역시 평단의 지독한 혹평 가운데 실패했다. 무엇보다 그의 내면에 지독한 허무감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1970년대 밥 딜런은 시적 은유가 가득한 노랫말의 확장과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계속했다. 당시 그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자신의 의미가 무언지를 되묻는 사상적 고뇌가 두드러진다.

당시 밥 딜런은 '흑인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흑인 음악, 흑인 음식, 흑인 스타일에 흑인 애인까지. 부인과 이혼 후 그가 사귀었던 여성들은 모두 남부 출신 흑인들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코러스 싱어 케롤린 데니스(Carolyn Dennis)와 결혼해 여섯째 아이를 낳았다. 그녀 역시 흑인이었다. 한대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밥 딜런은 흑인들의 가스펠에 매료되었고, 그 안에 담긴 그들의 신앙에도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1978년 그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빈야드 펠로우쉽 처치'의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 교회가 속한 '빈야드 크리스천 펠로우쉽'은 은사주의적 성격이 강해 기독교에서 이단 시비까지 일으킨 바 있는 초교파 교회이고, 이적과 체험을 강조한다. 이 교회는 1990년대에는 '모던워쉽'을 주도하며 기독교 음악계에 큰 획을 그었다. 지금도 미국 뿐 아니라 국내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빈야드가 발표한 노래들을 예배 때 부르고 있다.

이런 '복음주의' 기독교는 보수적 교리와 사회관, 그리고 종말론적 가르침을 강조한다. 밥 딜런이 회심한 빈야드 교회 역시 그 특성상 이런 '복음주의' 그룹에 속한다. 이 교회에서 그는 존 듀이어 목사의 영향을 받으며 결정적으로 회심하고 세례를 받는다. 신약성서를 깊게 읽으며 자신의 공허한 일상을 위로하는 예수의 메시지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1979년 발표한 < Slow Train Coming >은 제리 웩슬러(Jerry Wexler)가 프로듀싱하고 다이어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가 기타로 참여하며 평단으로부터도 큰 찬사를 받았다. 제리 웩슬러는 빌보드지 기자 시절 처음으로 '리듬 앤 블루스'(R&B)란 용어를 사용했고, 1950-60년대 레이 찰스아레사 프랭클린 등의 음반을 프로듀싱하며 흑인 음악 활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때까지 그의 수많은 히트곡들을 외면해 왔던 '보수적인' 그래미는 놀랍게도 이 앨범의 타이클곡, 'Gotta serve somebody'에게 그의 첫 번째 그래미상(최우수 록보컬 남자 부문)을 안겨주었다.

밥 딜런의 크리스천 삼부작 앨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종교적 회심의 진정성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딜런은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말씀들을 자신의 노래들에 인용했다.

앨범 발매 이후 딜런은 1979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투어를 진행했다. 총 79회의 공연에서 그는 오직 새롭게 만든 종교적 노래만으로 세트리스트를 채웠고, 공연 중 신앙고백과 전도 메시지를 전했다. 1980년 5월 투어를 마치며 그는 저널리스트 카렌 휴스(Karen Hughe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분이 언제나 나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적절한 때와 뜻을 이루십니다. 나는 바로 그분의 때에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1980년 11월부터 1년간 지속된 다음 투어에서는 공연 중 종교적 노래와 자신의 히트곡을 함께 불렀고, 공연 전 대기실에서 세션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함께 낭송하며 공연을 시작했다.

< 밥 딜런 평전 >(실천문학사, 2008)을 보면 당시 그의 회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가 후대에 기독교에 심취하게된 이유는 미국의 혼란스런 사회상에서 이데올로기도, 아니면 그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도, 전쟁을 찬성하는 국가지배층도, 반대로 반전을 주장하는 이도, 그들의 행동 양식은 결국은 성경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밥 딜런은 빈야드 교회와 결별하며 자신의 회심에 대한 지속적인 고백이나 전도 활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 1982년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중단하고 다시 유대교로 복귀했다는 소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아울러 그의 종교적 입장과 변화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앨범, < Christmas In The Heart >을 발매한다. 종교적 다원사회가 된 미국에서 "Merry Christmas"라는 인사는 공식적으로 “Happy Holiday”라고 표현한다. 2000년대 발매한 대부분의 캐롤 앨범도 “홀리데이” 뮤직으로 명명하지만 밥 딜런은 앨범에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표기하고, 선곡도 예수에 대한 찬미의 노래들로 채웠다.

그의 새로운 신앙의 노래는 의외로 2012년 발표한 앨범 < Tempest >에서 나타난다. 이 앨범에 수록된 'On Narrow Way'의 가사다.

나는 광야의 길을 걷고 있어요. 내 영혼의 안식처를 찾기까지.

나는 내가 뒤에 남겨지리라(left behind)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날이 저물어가던 때에 한 음성을 들었어요.

“평안하라 형제여, 평안히 기도하라”

그것은 먼 길이죠. 아주 멀고 좁은 길이예요.

만약 내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나를 끌어내리겠죠.



4.2. 사용 기타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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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커피 하우스에서 연주했던 그의 첫번째 어쿠스틱 기타는 마틴 1949년형 00-17이었다. 그는 그것을 1959년에 취득했는데, 그가 처음 미니애폴리스에서 뉴욕으로 이주했을 때였다. 그는 이 일에 대해 크로니클에 쓰고 있다.

제가 첫번째로 한 일은 일렉트릭 기타를 팔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렉트릭 기타는 제게 쓸모가 없었을 겁니다. 더블 디 마틴 어쿠스틱 기타입니다. 그 가게의 남자는 나와 균등하게 교환했고 나는 그 기타를 들고 떠났습니다. 나는 이 기타를 몇년 동안 연주할 것입니다.


이 '2년'이란 시간은 그의 공식 녹음일 이전이었이만, 1961년 라이브로 출시된 미네소타 호텔 테이프에서 미네소타 테이프와 '물 속의 웨이드'를 포함한 다른 초기 테이프에서 기타 라이브를 들을 수 있다.

1961년, 딜런은 기타를 케빈 크라운에게 주었는데, 그는 그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크라운이 1992년에 죽었을 때 기타는 피터 매켄지에 넘겨졌는데, 피터 매켄지는 맥과 이브 매켄지의 아들이다. 딜런은 종종 뉴욕 초기에 연주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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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기타는 낡은 깁슨이었던 J-50 모델이었고 프로듀서 존 해먼드 주니어의 말에 따르면, "조금 흠이 있었지만 깔끔했고 훌륭한 기타"라고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 기타는 밥 딜런의 데뷔 앨범 ‘Bod Dylan’ 커버에서 들고 있는 기타다. 또 다음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에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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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어느 날, J-50이 갑자기 행방 불명되었고, 그 대신 그의 가장 유명한 기타인 ‘Gibson Nick Lucas Special’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 기타는 63년 말부터 66년까지 그가 콘서트에서 사용했던 메인 어쿠스틱 기타다.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과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도 이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딜런은 그는 기타 상점을 운영한 마크 실버로부터 그것을 샀다.

나는 60년대에 그에게 몇 가지의 기타를 팔았지만 그 후에 그를 안 봤다. 내가 그것을 그에게 팔았을 때는 새 것 같은 상태였으나, 조금 부서졌다. 그는 그 기타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아마도 70년대 초반에, 저는 우드 스톡까지 차를 몰고 가서 그에게 멋진 60년대 Martin이라는 기타를 팔았어요. 하지만 그는 기타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사업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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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딜런의 기타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한가지 예외는, 다큐멘터리 ‘Eat the Document’에 나오는 펜더사 어쿠스틱 기타다. 딜런과 더 밴드의 로버트슨이 함께 ‘What Kind of Friend is This?’, ‘On a Rainy Afternoon’을 부를 때다. 기타 명은 펜더 킹[31]이고 1963년 이후로 펜더가 내놓은 어쿠스틱 기타 시리즈에 속하며 이는 일렉트릭 기타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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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1970년대 그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뉴포트에서 기타를 빌렸고, 1968년 1월에 거스리 트리부트 콘서트를 열어, Martin 0-18을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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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앨범 Nashville Skyline의 기타는 조지 해리슨에게 선물받은 Gibson J-200이다. 그 해 말에 와이트 섬 축제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70년대 초 그가 대부분의 출연한 곳에선, 그는 마틴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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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Self portrait’ 작업 동안에 사용한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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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캐쉬쇼에서 사용한 Martin Triple-018.

파일:44BF0AEC-231C-45C8-B131-5DEA73CC5A6F.png

방글라데시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D-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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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칠레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00-21.. 마틴이 포크 붐 이전에 제작한, 50년대의 제작한 것이다. 1974년 더 밴드와의 투어에서 대부분 이 기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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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Blood On The Tracks’ 제작 기간 중 뉴욕 세션에서 사용한 칠레 공연에서 사용한 Martin 00-2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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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무도관 투어 동안, 그는 야마하 기타 두개를 받았다. 그는 이 기타를 무도관 투어에서 종종 사용하였고 이 투어부터 워시번 기타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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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투어에서도 워시번 기타를 사용한다. 라이브 앨범 ‘Real Live’의 앨범 커버에도 이 기타가 나온다.

파일:3E2162ED-B80A-4886-B63A-1C2D631AB6CD.png
파일:1BAC7E78-24D1-4C58-958E-27C68C50FBE6.png
1986년과 1987년에는 워시번과 마틴을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 왼쪽 사진이 1987년 6월에 사용한 워시번 기타, 오른쪽 사진이 1986년에 사용한 마틴 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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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엔딩 투에서는 여러해 동안 그는 Martin D-28을 사용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깁슨 기타를 재사용한다. 1998년 이후 거의 전적으로 sunburst J-45을 사용한다. 사진 오른쪽이 199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용한 마틴사 기타. 왼쪽이 2000년 깁슨사 J-45 in 0-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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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2001년 가을 투어에서는 예외적으로 마틴사 기타를 사용한다. 이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 매거진의 기념일로 만들어낸 HD-28이다. 딜런은 그것을 보고 마틴사에게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4.3. 화가[편집]


데뷔초인 1960년대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려오며 본인의 앨범 커버를 직접 그린적도 있다.[32] 밥 딜런의 경우,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뭔가를 볼 때 쓸데없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해짐’을 느낀다고 한다. 1994년 11월에는 밥 딜런의 첫번째 드로잉집 ‘Drawn Blank’가 출판되었다. 모노크롬의 선묘화 화집으로 풍경이나 인물 등 그림의 대상이 다양했다. 선으로 그려진 그림들에 색깔을 칠해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 몇 가지 패턴을 만들어내는 시리즈 ‘Drawn Blank Series’도 2007년부터 전람회가 개최됐다. 그 후 여러 화랑과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그의 회화와 드로잉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아트마켓에서도 제법 잘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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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평범한 이들의 살아가는 모습, 때로는 낡고 누추하지만 독특한 정경을 만들어가는 이름 없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드로잉은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브라질 시리즈>와 <철길 시리즈>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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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시리즈

밥 딜런은 2008년에는 덴마크 코펜하겐국립미술관에서 <브라질 시리즈>'를 선보였다. 또 독일 켐니츠에서는 대표작인 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어 2013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시 초대로 <뉴올리언즈 시리즈>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작업을 토대로 그는 6권의 드로잉집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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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시리즈

2011년에는 세계 최대의 화랑이자, 영향력 1위의 가고시안 갤러리의 초대를 받아 뉴욕 가고시안 화랑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이 전시에 밥 딜런은 아시아 뮤직투어 때 틈틈이 그린 드로잉과 회화를 선보였다. 당시 일본, 중국, 베트남, 한국을 여행했던 밥 딜런은 아시아 여러 도시에서 접한 풍경과 아시안들의 삶을 특유의 드로잉으로 옮겼다. 이는 '아시아 시리즈(Asia Series)>로 소개돼 높은 호응을 얻었다. 2013년에는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영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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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영국 런던 핼시온 갤러리

2013년, 2016년에는 영국 런던 핼시온 갤러리에서 작품 전시회를 했다.


4.4. 호칭[편집]


밥 딜런을 대표하는 호칭으로는 시대의 목소리(The Voice of a generation)[33], 포크의 왕(King of Folk)[34], 포크의 신(God of Folk)[35], 음유시인(Bard) 등이 있다.


5. 관련 인물[편집]


폴 매카트니: 그는 우리의 우상이에요

링고 스타: 밥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조지 해리슨: 아니, 우상이 아니라요, 우리는 단지 그의 레코드를 들었습니다...그리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앨범을 계속 듣고 또 들었죠.


나는 그를 존경했고, 나는 그를 많이 존경했다.[36]

존 레논, 1970년


비틀즈는 1964년 저널리스트 알 아로노비츠의 주선으로 밥 딜런과의 뉴욕에서의 만남이 성사된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서 비틀즈와의 만남을 원하고 있었으나 비틀즈는 딜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37] 딜런은 비틀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리화나를 선물로 준비한다. 이 만남은 이후 비틀즈와 딜런 상호간에 음악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밥 딜런과 비틀즈 멤버들은 나이대가 얼추 비슷한데, 밥 쪽의 경우 존과 링고(1940년생)보다 한살 어리고 폴(1942년생)보다 1살 많다.

흥겹고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가사의 대부분이던 비틀즈는 밥 딜런의 노랫말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65년부터 작사에도 큰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사에 멤버들의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어 철학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가사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포크적인 요소도 수용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 출발점이 비틀즈의 대표 명반 중 하나인 Rubber Soul 앨범이다.

반대로 밥 딜런은 비틀즈의 다이나믹한 록큰롤 사운드의 영향력을 목도하며 과감하게 일렉트릭 기타[38]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이런 그의 음악적 변신의 중심에 밥 딜런의 명곡, 'Like a Rolling Stone' 이 있다. 이 노래는 1965년 그의 세 번째 음반 Highway 61 Revisited에 실려 빌보드 핫 100 2위에 올랐고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밥 딜런, 비틀즈, 그리고 이 둘 모두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버즈(The Byrds), 이 세 뮤지션에 의해서, 종전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포크'와 '록'이 급속도로 융합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화학작용은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두 거물의 만남은 서로에게 엄청난 윈윈이 된 것이다.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과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 관계를 쭉 유지했다.

”우디 거스리는 인간성의 여러가지 측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평범한 노래는 단 한 곡도 없었다. 우디 거스리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비판했다. 이때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진실을 포착했고 마침내 다다른 항구의 바다 깊숙이 무거운 닻이 내려진 것 같은 감각이었다.”

― 밥 딜런


”거스리는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깊은 감정이 넘쳐 흘렀고 힘찼으며 리듬이 살아 있었다. 진지하고 강렬했으며 그 목소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우디 거스리는 그때까지 들었던 다른 그 어떤 가수들과도 달랐다.”

― 밥 딜런


밥은 우디 거스리에거서 자신의 이상, 영적인 아버지이자 음악적 모델로 생각했다. 자신의 ‘에피타프’에 거스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마지막 우상이었네

최초의 우상이었으므로

나와 얼굴을 맞대고

남자들은 남자라고 가르쳐준

내가 만난 최초의 우상이 그였으니

심지어 우상으로서의 자신을 깨트리며

우디는 한번도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고

어떤 희망도 짓밟지 않았네

그는 그냥 인간의 책을 가지고 다녔고

그것을 내게 읽도록 주었으니

그리고 그로부터 나는 가장 위대한 교훈을 배웠네



6. 앨범[편집]



6.1. 정규 앨범[편집]


[ 상세 정보 펼치기 · 접기 ]
#
발매일
제목
장르
프로듀서
길이
메타크리틱
01
1962.03.19
Bob Dylan
포크, 컨트리 블루스
존 해먼드
36분 54초
자료 없음
02
1963.05.27
The Freewheelin' Bob Dylan
포크, 블루스
존 해먼드, 톰 윌슨
50분 4초
03
1964.01.13
The Times They Are a-Changin'
포크
톰 윌슨
45분 36초
04
1964.08.08
Another Side of Bob Dylan
포크
50분 37초
05
1965.03.22
Bringing It All Back Home
포크 록, 포크송
47분 21초
06
1965.08.30
Highway 61 Revisited
, 일렉트릭 블루스
밥 존스톤
51분 26초
07
1966.05.16
Blonde on Blonde
포크 록
72분 57초
08
1967.12.27
John Wesley Harding
포크 록, 컨트리 락, 컨트리
38분 24초
09
1969.04.09
Nashville Skyline
컨트리 락, 컨트리
27분 14초
10
1970.06.08
Self Portrait
포크 록, 컨트리 락, 블루스
73분 15초
11
1970.10.19
New Morning
포크 록, 컨트리 락, 블루스
35분 21초
12
1973.07.13
Pat Garrett & Billy the Kid[1]
포크 록, 컨트리 락
고든 캐롤
35분 23초
13
1973.11.19
Dylan
, 포크 록
밥 존스톤
33분 22초
14
1974.01.17
Planet Waves[2]
루츠
롭 프라보니
42분 12초
15
1975.01.20
Blood on the Tracks
포크 록
밥 딜런
51분 42초
16
1975.06.26
The Basement Tapes[3]
루츠 , 포크 록, 블루스 , 컨트리 락
밥 딜런, 더 밴드
76분 41초
17
1976.01.05
Desire
포크 록
돈 드비토
56분 13초
18
1978.06.15
Street-Legal

50분 18초
19
1979.08.20
Slow Train Coming
블루스 , 가스펠
배리 베켓, 존 웩슬러
46분 19초
20
1980.06.23
Saved
, 가스펠
42분 39초
21
1981.08.10
Shot of Love
, 가스펠
밥 딜런, 척 플롯킨, 펌프 블랙웰
40분 15초
22
1983.10.27
Infidels
하트랜드 록
밥 딜런, 마크 노플러
41분 39초
23
1985.06.10
Empire Burlesque
, 하트랜드 록, 뉴 웨이브
밥 딜런
46분 24초
24
1986.07.14
Knocked Out Loaded

35분 18초
25
1988.05.30
Down in the Groove

32분 10초
26
1989.09.18
Oh Mercy

다니엘 라노이스
38분 46초
27
1990.09.10
Under the Red Sky

잭 프로스트 (밥 딜런), 돈 워스, 데이비드 워스
35분 21초
28
1992.11.03
Good as I Been to You
포크송, 블루스
데비 골드
55분 31초
29
1993.10.26
World Gone Wrong
포크송, 블루스
밥 딜런
43분 51초
30
1997.09.30
Time Out of Mind
블루스 록, 포크 록
다니엘 라노이스, 잭 프로스트 (밥 딜런)
72분 50초
31
2001.09.11
Love and Theft
포크 록, 블루스 록
잭 프로스트 (밥 딜런)
57분 24초
93점
32
2006.10.29
Modern Times
포크 록, 블루스 록
63분 4초
89점
33
2009.04.28
Together Through Life
포크 록, 블루스 록
45분 33초
76점
34
2009.10.13
Christmas in the Heart
크리스마스 캐럴
42분 21초
62점
35
2012.09.10
Tempest
포크송, 포크 록
68분 31초
83점
36
2015.02.03
Shadows in the Night
스탠다드 팝, 보컬 재즈
35분 17초
82점
37
2016.05.20
Fallen Angels
스탠다드 팝
37분 50초
77점
38
2017.03.31
Triplicate
스탠다드 팝
95분 42초
80점
39
2020.06.29
Rough and Rowdy Ways
블루스, 포크송
비공개
70분 33초
95점
40
2023.6.2
Shadow Kingdom
블루스, [[포크]
54분 00초
84점



6.2. 라이브 앨범[편집]


#
발매일
제목
장르
프로듀서
길이
01
1974.06.10
Before the Flood
로큰롤
밥 딜런, 더 밴드
92분 38초
02
1976.09.13
Hard Rain

밥 딜런, 돈 드비토
51분 06초
03
1979.04.23
Bob Dylan at Budokan

돈 드비토
99분 41초
03
1984.11.29
Real Live
포크 록, 하드 록
글린 존스
50분 15초
04
1989.02.06
Dylan & the Dead[39]

존 커틀러, 제리 가르시아
43분 07초
05
1992.10.26
The 30th Anniversary Concert Celebration

제프 크래머, 제프 로젠, 존 드비토
148분 24초
06
1995.05.02
MTV Unplugged
포크송, 포크록
제프 로젠
69분 24초
07
2001.02.28
Live 1961–2000: Thirty-Nine Years of Great Concert Performances[40]
, 포크송, 컨트리
미공개
72분 56초
08
2005.08.30
Live at The Gaslight 1962
포크
스티브 버코위츠, 제프 로젠
46분 29초
09
2005.11.15
Live at Carnegie Hall 1963
포크
제프 로젠
31분 53초
10
2011.04.11
In Concert – Brandeis University 1963
포크송
미공개
38분 24초
11
2016.11.11
The 1966 Live Recordings[41]
포크록
스티브 버코위츠, 제프 로젠
27시간 37분 01초
12
2016.12.02
The Real Royal Albert Hall 1966 Concert (Live)[42][43]
포크,
스티브 버코위츠, 제프 로젠
1시간 34분 12초
13
2018.07.27
Live 1962-1966: Rare Performances from the Copyright Collections
포크송,

2시간 26분 18초


6.3. 부틀렉 시리즈[편집]


현대 팝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아카이브 프로젝트 중 하나.

피치포크[44]


밥 딜런의 골수팬이라면 밥 딜런하면 떠오르는 것중 하나가 바로 부틀렉(해적판) 앨범이다. 딜런은 록 역사상 가장 많은 부틀렉이 있는 아티스트이다. 유일하게 그레이트풀 데드만이 필적할만하다. 딜런은 평생동안 엄청 많은 투어를 했고 거의 모든 공연을 팬들이 녹음했다. 또 딜런은 엄청 많은 곡들을 작곡하고 테이프에 기록하였는데 문제는 비공개된 음악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더 밴드와 모여서 재미로 자기 집에서 부르고 녹음한 음악들이 따로 모여서 시장에 부틀렉(해적판)으로 판매되어 인기를 얻자 결국 공개하기로 하고 모아서 만든 The Basement Tapes 앨범등이 있었으나 여기서 공개가 안된 해적판으로만 있던 비공개곡을 다시 또 모아서 공개한 Bob Dylan & The Band – The Basement Tapes Complete: The Bootleg Series, Vol. 11[45]도 있다. 워낙 비공개된 곡도 상당수준의 음악이 많은 지라 부틀렉(해적판)에만 혈안이 된 이들도 있다고 한다.


#
발매일
제목
장르
프로듀서
길이
메타크리틱
01~03
1991.03.26
The Bootleg Series Volumes 1–3 (Rare & Unreleased) 1961–1991[46]
포크록, 포크송 블루스
제프 로젠
229분 37초
자료 없음
04
1998.10.23
The Bootleg Series Vol. 4: Bob Dylan Live 1966, The "Royal Albert Hall" Concert[47][48]
, 포크록, 블루스
95분 18초
05
2002.11.26
The Bootleg Series Vol. 5: Bob Dylan Live 1975, The Rolling Thunder Revue[49]
포크록, 로큰롤
스티븐 버코위츠, 제프 로젠
102분
06
2004.05.30
The Bootleg Series Vol. 6: Bob Dylan Live 1964, Concert at Philharmonic Hall[50]
포크송, 포크록
104분 12초
07
2005.08.30
The Bootleg Series Vol. 7: No Direction Home: The Soundtrack[51]
포크록, 로큰롤
스티븐 버코위츠, 제프 로젠, 브루스 디킨스, 마틴 스콜세지
144분 31초
08
2008.10.06
The Bootleg Series Vol. 8: Tell Tale Signs: Rare and Unreleased 1989–2006[52]
, 포크송, 포크록, 컨트리 , 블루스
밥 딜런, 다니엘 라노아
137분 07초
86점
09
2010.10.09
The Bootleg Series Vol. 9: The Witmark Demos: 1962–1964[53]
포크
스티븐 버코위츠, 제프 로젠
138분 28초
88점
10
2013.08.27
The Bootleg Series Vol. 10: Another Self Portrait (1969–1971)[54]
포크송, , 컨트리
밥 존스톤
113분 27초
81점
11
2014.11.04
The Bootleg Series Vol. 11: The Basement Tapes Complete[55]
포크송, 루츠 록록 음악
미공개
6시간 33분 49초
99점
12
2015.11.06
The Bootleg Series Vol. 12: The Cutting Edge 1965–1966[56]
가스펠,
미공개
145분 04초
99점
13
2017.11.03
The Bootleg Series Vol. 13: Trouble No More 1979–19[57]
포크,
미공개
2시간 33분 01초[58]
8시간 10분 19초[59]
88점
14
2018.11.02
The Bootleg Series Vol. 14: More Blood, More Tracks[60]
포크,
미공개

93점


6.4. 컴필레이션 앨범[편집]


#
발매일
제목
비고
01
1967.03.27
Bob Dylan's Greatest Hits

02
1971.11.17
Bob Dylan's Greatest Hits Vol. II

03
1978.03.12
Masterpieces
[61]
04
1985.11.07
Biograph
[62]
05
1994.11.04
Bob Dylan's Greatest Hits Volume 3

06
1997.06.02
The Best of Bob Dylan
[63]
07
2000.10.31
The Essential Bob Dylan

08
2000.11.28
The Best of Bob Dylan Vol.2
[64]
09
2005.11.15
The Best of Bob Dylan
[65]
10
2006.06.27
Blues
[66]
11
2006.08.29
Bob Dylan: The Collection
[67]
12
2007.10.02
Dylan
[68]
13
2009.07.27
The Collection

14
2009.10.19
The Original Mono Recordings
[69]
15
2009.10.19
The Best of The Original Mono Recordings
[70]
16
2011.03.29
All Time Best: Dylan

17
2011.10.21
Pure Dylan

18
2011.10.24
Beyond Here Lies Nothin' – The Collection
[71]
19
2012.10.21
The Real Bob Dylan
[72]
20
2012.12.27
The 50th Anniversary Collection
[73]
21
2013.11.05
The Complete Album Collection Vol. 1
[74]
22
2013년 11월
The 50th Anniversary Collection 1963
[75]
23
2014년 12월
The 50th Anniversary Collection 1964
[76]


7. 그 외 작품[편집]



7.1. 저서[편집]




7.2. 미술 작품[편집]




7.3. 필모그래피[편집]


년도
제목
비고
1963년
BBC Sunday-Night Play
1화 출연
1972년
관계의 종말
배우, 음악
1972년
잇 더 도큐멘트[77]
감독, 제작, 음악
1974년
레날도와 클라라
감독, 각본[78], 배우, 편집
1987년
하트 오브 화이어
배우, 음악
1987년
트래블링 월버리스[79]
본인 출연
1990년
뒤로 가는 남과 여
카메오
1999년
파라다이스 코브
배우
2003년
가장과 익명
각본, 배우, 음악


8. 수상 및 기타 내역[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문학상 수상자

20세기 [ 펼치기 · 접기 ]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쉴리 프뤼돔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테오도르 몸젠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호세 에체가라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Military_ensign_of_Vistula_Flotilla_of_Congress_Poland.svg.png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조수에 카르두치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러디어드 키플링
파일:영국 국기.svg
루돌프 오이켄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셀마 라겔뢰프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울 폰 하이제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모리스 마테를링크
파일:벨기에 국기.svg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수상자 없음
로맹 롤랑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파일:스웨덴 국기.svg
카를 기엘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파일:덴마크 국기.svg
수상자 없음
카를 슈피텔러
파일:스위스 국기.svg
크누트 함순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아나톨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하신토 베나벤테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파일:폴란드 국기(1919-1927).svg
조지 버나드 쇼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그라치아 델레다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앙리 베르그송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시그리드 운세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토마스 만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싱클레어 루이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에릭 악셀 카를펠트
파일:스웨덴 국기.svg
존 골즈워디
파일:영국 국기.svg
이반 부닌
루이지 피란델로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수상자 없음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유진 오닐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펄 벅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프란스 에밀 실란패
파일:핀란드 국기.svg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파일:덴마크 국기.svg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파일:칠레 국기.svg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헤르만 헤세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앙드레 지드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파일:영국 국기.svg
윌리엄 포크너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버트런드 러셀
파일:영국 국기.svg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파일:스웨덴 국기.svg
프랑수아 모리아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윈스턴 처칠
파일:영국 국기.svg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할도르 락스네스
파일:아이슬란드 국기.svg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후안 라몬 히메네스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알베르 카뮈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파일:소련 국기.svg
살바토레 콰시모토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생존 페르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이보 안드리치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존 스타인벡
파일:미국 국기.svg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장폴 사르트르
파일:프랑스 국기.svg
(수상 거부)
미하일 숄로호프
파일:소련 국기.svg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넬리 작스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가와바타 야스나리
파일:일본 국기.svg
사뮈엘 베케트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파일:소련 국기.svg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파블로 네루다
파일:칠레 국기.svg
하인리히 뵐
파일:독일 국기.svg
패트릭 화이트
파일:호주 국기.svg
에위빈드 욘손, 하뤼 마르틴손
파일:스웨덴 국기.svg
에우제니오 몬탈레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솔 벨로
파일:미국 국기.svg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파일:그리스 국기.svg
체스와프 미워시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엘리아스 카네티
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 파일:영국 국기.svg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윌리엄 골딩
파일:영국 국기.svg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파일:체코 국기.svg
클로드 시몽
파일:프랑스 국기.svg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월레 소잉카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조지프 브로드스키
파일:미국 국기.svg
나기브 마푸즈
파일:이집트 국기.svg
카밀로 호세 셀라
파일:스페인 국기.svg
옥타비오 파스
파일:멕시코 국기.svg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나딘 고디머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데릭 월컷
파일:세인트루시아 국기(1979–2002).svg.png
토니 모리슨
파일:미국 국기.svg
오에 겐자부로
파일:일본 국기.svg
셰이머스 히니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파일:폴란드 국기.svg
다리오 포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주제 사라마구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귄터 그라스
파일:독일 국기.svg
가오싱젠
파일:프랑스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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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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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등재
루이 암스트롱 <The Complete Hot Five and Hot Seven Recordings> (1920~1928)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엘비스 프레슬리, Sun Records sessions (1954-1955)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3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The Famous 1938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1971)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4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올맨 브라더스 밴드, <At Fillmore East> (1971)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5년 등재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웬디 카를로스 <Switched On Bach>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6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7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행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8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57)
더 후, <The Who Sings My Generation> (1966)
2009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59)
빌 에반스 트리오,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6월 25일)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0년대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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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앤 히스 매직 밴드,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1년 등재
빈스 과랄디 트리오, 애니메이션 <A Charlie Brown Christmas> 사운드트랙 (1965)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2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오넷 콜먼, <The Shape of Jazz to Come> (1959)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 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Soundtrack> (1977)
2013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 (1954)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4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도어즈,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5년 등재
조지 칼린, <Class Clown> (1972)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6년 등재
소니 롤린스, <Saxophone Colossus> (1956)
마티 로빈스, <Gunfighter Ballads and Trail Songs> (1959)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비드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7년 등재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웨스 몽고메리, <The Incredible Jazz Guitar of Wes Montgomery> (1960)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2018년 등재
덱스터 고든, <GO> (1962)
뮤지컬 <헤어>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68)
커티스 메이필드, <Superfly> (1972)
신디 로퍼, <She's So Unusual> (1983)
<Schoolhouse Rock!: The Box Set> (1996)
JAY-Z, <The Blueprint> (2001)
2019년 등재
더스티 스프링필드, <Dusty in Memphis> (1969)
칩 트릭, <Cheap Trick at Budokan> (1978)
티나 터너, <Private Dancer> (1984)
셀레나, <Ven Conmigo> (1962)
닥터 드레, <The Chronic> (1992)

2020년대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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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음악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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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폴 매카트니
발트 3국
디지 길레스피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퀸시 존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엘튼 존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조니 미첼
피에르 불레즈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브루스 스프링스틴
에릭 에릭슨
레이 찰스
라비 샹카르
스티비 원더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밥 딜런
아이작 스턴
버트 배커랙
로버트 무그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미리엄 마케바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키스 재럿
비비 킹
리게티 죄르지
지우베르투 지우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레드 제플린
발레리 게르기예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소니 롤린스
스티브 라이히
핑크 플로이드
르네 플레밍
피터 가브리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 엘 시스테마
비요크
엔니오 모리코네
크로노스 콰르텟
패티 스미스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폴 사이먼
요요마
유수 은두르
카이야 사리아호
척 베리
피터 셀라스
에밀루 해리스
에벌린 글레니
맥스 마틴
체칠리아 바르톨리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스팅
웨인 쇼터
메탈리카
아프가니스탄 국립 음악 연구소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안네 소피 무터
플레잉 포 체인지
안나 네트렙코
다이앤 워런
없음
2022년
2023년
2024년
2025년
2026년
이기 팝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










파일:Kennedy Center honors.jpg
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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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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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포이티어,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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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럴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만 레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년도

1963년
톰 페인상
1997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
도로시와 릴리안 기쉬 상
1999년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2000년
폴라음악상
2007년
아스투리아스 공상 - 예술 부문
2008년
퓰리쳐상 특별 감사상
2014년
MusiCares 올해의 인물
2016년
노벨문학상

  • 수훈


년도
수훈 부문
1990년
프랑스 예술 훈장 1등급 코망되르
2009년
국가 예술 훈장
2012년
대통령 자유 훈장
2014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4등급 오피시에

  • 헌액



파일:로큰롤 명예의 전당 로고.pn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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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밥 딜런
BOB DYLA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8년



년도
헌액 부문
1982년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1991년
미네소타 음악 명예의 전당
2002년
내슈빌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
2005년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년도
명예 학위
1970년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 음악 박사
2004년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 명예 음악 박사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주제가상 수상작

제72회
(2000년)


제73회
(2001년)


제74회
(2002년)

You'll Be in My Heart
필 콜린스
(타잔)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
(원더 보이즈)

If I Didn't Have You
랜디 뉴먼
(몬스터 주식회사)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주제가상 수상작
제51회
(2000년)


제52회
(2001년)


제53회
(2002년)

You'll Be in My Heart
필 콜린스
(타잔)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
(원더 보이즈)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U2
(갱스 오브 뉴욕)


년도

수상작
1980년
도브상 ‘세속 예술가의 앨범상’
Slow Train Coming
2000년
골든글로브상 주제가상
영화 원더 보이즈 ‘Things Have Changed’
아카데미상 주제가상


파일:Grammy.svg
'''[[그래미 어워드#s-5.3.2|{{{#b69858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 수상자
Grammy Lifetime Achievement Award]]'''

[ 펼치기 · 접기 ]
1963년
빙 크로스비
1965년
프랭크 시나트라
1966년
듀크 엘링턴
1967년
엘라 피츠제럴드
1968년
어빙 벌린
1971년
엘비스 프레슬리
1972년
루이 암스트롱, 마할리아 잭슨
1984년
척 베리, 찰리 파커
1985년
레너드 번스타인
1986년
베니 굿맨, 롤링 스톤스, 안드레스 세고비아
1987년
로이 에이커프, 베니 카터, 엔리코 카루소, 레이 찰스, 패츠 도미노, 우디 허먼, 빌리 홀리데이, 비비 킹, 아이작 스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행크 윌리엄스
1989년
프레드 아스테어, 파블로 카잘스, 디지 길레스피, 야샤 하이페츠, 리나 혼, 레온타인 프라이스, 베시 스미스, 아트 테이텀, 사라 본
1990년
냇 킹 콜, 마일스 데이비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폴 매카트니
1991년
매리언 앤더슨, 밥 딜런, 존 레논, 줄리 스턴, 키티 웰스
1992년
제임스 브라운, 존 콜트레인, 지미 헨드릭스, 머디 워터스
1993년
쳇 앳킨스, 리틀 리처드, 델로니어스 몽크, 빌 먼로, 피트 시거, 패츠 월러
1994년
빌 에반스, 아레사 프랭클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1995년
팻시 클라인, 페기 리, 헨리 맨시니, 커티스 메이필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1996년
데이브 브루벡, 마빈 게이, 게오르그 솔티, 스티비 원더
1997년
바비 블랜드, 에벌리 브라더스, 주디 갈란드, 스테판 그라펠리, 버디 홀리, 찰스 밍거스, 오스카 피터슨, 프랭크 자파
1998년
보 디들리, 밀스 브라더스, 로이 오비슨, 폴 로브슨
1999년
조니 캐쉬, 샘 쿡, 오티스 레딩, 스모키 로빈슨, 멜빈 토메
2000년
해리 벨라폰테, 우디 거스리, 존 리 후커, 미치 밀러, 윌리 넬슨
2001년
비치 보이스, 토니 베넷,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밥 말리, 더 후
2002년
카운트 베이시, 로즈메리 클루니, 페리 코모, 알 그린, 조니 미첼
2003년
에타 제임스, 조니 마티스, 글렌 밀러, 티토 푸엔테, 사이먼 앤 가펑클
2004년
밴 클라이번, 펑크 브라더스, 엘라 젠킨스, 소니 롤린스, 아티 쇼, 독 왓슨
2005년
에디 아놀드, 아트 블래키, 카터 패밀리, 모턴 굴드, 재니스 조플린, 레드 제플린, 제리 리 루이스, 젤리 롤 모턴, 파인톱 퍼킨스, 스태플 싱어즈
2006년
데이비드 보위, 크림, 멀 해거드, 로버트 존슨, 제시 노먼, 리처드 프라이어, 더 위버스
2007년
조안 바에즈, 부커 티 앤 엠지 에스, 마리아 칼라스, 오넷 콜맨, 도어즈, 그레이트풀 데드, 밥 윌스
2008년
버트 배커랙, 더 밴드, 캡 캘러웨이, 도리스 데이, 이작 펄만, 맥스 로치, 얼 스크럭스
2009년
진 오트리, 더 블라인드 보이즈 오브 알라바마, 포 탑스, 행크 존스, 브렌다 리, 딘 마틴, 톰 팩스톤
2010년
레너드 코헨, 바비 다린, 데이비드 "허니보이" 에드워즈, 마이클 잭슨, 로레타 린, 앙드레 프레빈, 클락 테리
2011년
줄리 앤드류스, 로이 헤인즈, 줄리아드 현악 콰르텟, 킹스턴 트리오, 돌리 파튼, 라몬즈, 조지 비벌리 시어
2012년
올맨 브라더스 밴드, 글렌 캠벨,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조지 존스, 더 멤피스 혼즈, 다이애나 로스, 길 스콧 헤론
2013년
글렌 굴드, 찰리 헤이든, 라이트닝 홉킨스, 캐롤 킹, 패티 페이지, 템테이션스
2014년
비틀즈, 클리프턴 체니어, 아이즐리 브라더스, 크라프트베르크,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아르만도 만사네로, 마우드 파웰
2015년
비 지스, 피에르 불레즈, 버디 가이, 조지 해리슨, 플라코 지메네즈, 루빈 브라더스, 웨인 쇼터
2016년
루스 브라운, 셀리아 크루즈, 어스 윈드 앤 파이어, 허비 행콕, 제퍼슨 에어플레인, 린다 론스태드, Run-D.M.C.
2017년
셜리 시저, 아마드 자말, 찰리 프라이드, 지미 로저스, 니나 시몬, 슬라이 스톤, 벨벳 언더그라운드
2018년
할 블레인, 닐 다이아몬드, 에밀루 해리스, 루이스 조던, 더 미터스, , 티나 터너
2019년
블랙 사바스, 조지 클린턴 / 팔리아멘트-펑카델릭, 빌리 엑스타인, 도니 해서웨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샘 & 데이브, 디안 워윅
2020년
시카고, 로버타 플랙, 아이작 헤이즈, 이기 팝, 존 프라인, 퍼블릭 에너미, 시스터 로제타 사프
2021년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 라이오넬 햄프턴, 마릴린 혼, 솔트 앤 페파, 셀레나, 토킹 헤즈
2022년
보니 레잇
2023년
바비 맥퍼린, 너바나, 마 레이니, 슬릭 릭, 나일 로저스, 슈프림즈, 하트
같이 보기: 공로상 수상자 · 레전드상 수상자








년도
작품
부문
수상여부
1963년
Bob Dylan
최우수 포크 레코딩
노미네이트
1965년
The Times They Are A-Changin'
1969년
John Wesley Harding
최우수 포크 퍼포먼스
1970년
Nashville Skyline Rag
최우수 컨트리 인스트로멘탈 퍼포먼스
1973년
The Concert for Bangladesh[81]
올해의 앨범
수상
1974년
Pat Garrett & Billy the Kid
영화, TV 및 기타 영상 미디어 부문 최우수 사운드트랙 앨범
노미네이트
1980년
Gotta Serve Somebody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수상
1981년
Saved
최우수 가스펠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1982년
Shot of Love
1989년
Pretty Boy Floyd
최우수 전통 포크 퍼포먼스
1990년
Traveling Wilburys Volume One
올해의 앨범
최우수 록 듀오/그룹 보컬 퍼포먼스
수상
1992년
Series of Dreams
최우수 뮤직 비디오
노미네이트
-
평생공로상
수상
1994년
All Along The Watchtower
최우수 솔로 록 보컬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My Back Pages
최우수 록 듀오/그룹 보컬 퍼포먼스
Good As I Been to You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1995년
World Gone Wrong
최우수 포크 레코딩
수상
1996년
Knockin' On Heaven's Door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Dignity
최우수 록 노래
MTV Unplugged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1998년
Time Out of Mind
올해의 앨범
수상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Cold Irons Bound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1999년
To Make You Feel My Love
최우수 컨트리 노래
노미네이트
2001년
Things Have Changed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영화, TV 및 기타 영상 미디어 부문 최우수 노래
2002년
Love And Theft
올해의 앨범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수상
Honest With Me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2004년
Gonna Change My Way Of Thinking
최우수 팝 보컬 콜라보레이션
Down In The Flood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2007년
Someday Baby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
수상
최우수 록 노래
노미네이트
Modern Times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
수상
2010년
Beyond Here Lies Nothin
최우수 솔로 록 보컬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Together Through Life
최우수 아메리카나 앨범
2016년
Shadows in the Night
최우수 전통팝 보컬 앨범
2017년
Fallen Angels
2018년
Triplicate


9. 투어[편집]


타이틀
일자
국가
공연 횟수
1965년
Bob Dylan England Tour 1965
4월 30일 ~ 5월 10일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8회
1966년
Bob Dylan World Tour 1966
2월 4일 ~ 5월 27일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47회
1974년
Bob Dylan and the Band 1974 Tour
1월 3일 ~ 2월 14일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40회
1975년 ~ 1976년
Rolling Thunder Revue
1975년 10월 30일 ~ 1976년 5월 25일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57회
1978년
Bob Dylan World Tour 1978
2월 10일 ~ 12월 18일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114회
1979년 ~ 1980년
Bob Dylan Gospel Tour
1979년 11월 1일 ~ 1980년 5월 21일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79회
1981년
Bob Dylan World Tour 1981
6월 10일 ~ 11월 21일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54회
1984년
Bob Dylan 1984 European Tour
5월 28일 ~ 7월 8일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27회
1986년
True Confessions Tour
2월 5일 ~ 8월 6일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60회
1987년
Bob Dylan and the Grateful Dead 1987 Tour
7월 4일 ~ 7월 26일
파일:미국 국기.svg
6회
Temples in Flames Tour
9월 5일 ~ 10월 17일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핀란드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30회

타이틀
일자
대륙
공연 횟수
Never Ending Tour
1988년
Never Ending Tour 1988
6월 7일 ~ 10월 19일
북아메리카
71회
1989년
Never Ending Tour 1989
5월 25일 ~ 11월 15일
북아메리카 78회
유럽 22회
100회
1990년
Never Ending Tour 1990
1월 12일 ~ 11월 18일
북아메리카 72회
남아메리카 2회
유럽 19회
93회
1991년
Never Ending Tour 1991
1월 28일 ~ 11월 20일
북아메리카 59회
남아메리카 9회
유럽 33회
101회
1992년
Never Ending Tour 1992
3월 18일 ~ 11월 15일
북아메리카 61회
오세아니아 20회
유럽 11회
92회
1993년
Never Ending Tour 1993
2월 5일 ~ 10월 9일
북아메리카 40회
중동 3회
유럽 33회
76회
1994년
Never Ending Tour 1994
2월 5일 ~ 11월 13일
북아메리카 73회
아시아 14회
유럽 17회
103회
1995년
Never Ending Tour 1995
3월 11일 ~ 12월 17일
북아메리카 70회
유럽 45회
113회
1996년
Never Ending Tour 1996
4월 13일 ~ 11월 23일
북아메리카 56회
유럽 28회
84회
1997년
Never Ending Tour 1997
2월 9일 ~ 12월 20일
북아메리카 78회
아시아 11회
유럽 4회
93회
1998년
Never Ending Tour 1998
1월 13일 ~ 11월 7일
북아메리카 56회
남아메리카 6회
유럽 33회
오세아니아 15회
110회
1999년
Never Ending Tour 1999
1월 26일 ~ 11월 20일
북아메리카 98회
유럽 21회
119회
2000년
Never Ending Tour 2000
3월 10일 ~ 11월 19일
북아메리카 75회
유럽 37회
112회
2001년
Never Ending Tour 2001
2월 25일 ~ 11월 24일
북아메리카 62회
유럽 37회
아시아 13회
오세아니아 9회
106회
2002년
Never Ending Tour 2002
1월 31일 ~ 11월 22일
북아메리카 78회
유럽 29회
107회
2003년
Never Ending Tour 2003
2월 6일 ~ 11월 25일
북아메리카 54회
유럽 33회
오세아니아 11회
98회
2004년
Never Ending Tour 2004
2월 28일 ~ 11월 27일
북아메리카 90회
유럽 21회
111회
2005년
Never Ending Tour 2005
3월 7일 ~ 11월 27일
북아메리카 82회
유럽 31회
113회
2006년
Never Ending Tour 2006
4월 1일 ~ 11월 20일
북아메리카 79회
유럽 20회
99회
2007년
Never Ending Tour 2007
3월 27일 ~ 10월 29일
북아메리카 58회
유럽 28회
오세아니아 12회
98회
2008년
Never Ending Tour 2008
2월 2일 ~ 11월 21일
북아메리카 59회
유럽 30회
남아메리카 8회
97회
2009년
Never Ending Tour 2009
3월 22일 ~ 11월 19일
북아메리카 64회
유럽 33회
97회
2010년
Never Ending Tour 2010
3월 11일 ~ 11월 27일
북아메리카 62회
유럽 25회
아시아 11회[82]
102회
2011년
Never Ending Tour 2011
4월 3일 ~ 11월 21일
북아메리카 28회
유럽 42회
아시아 7회
중동 1회
89회
2012년
Never Ending Tour 2012
4월 3일 ~ 11월 21일
북아메리카 28회
중앙아메리카 1회
남아메리카 11회
유럽 15회
86회
2013년
Never Ending Tour 2013
4월 5일 ~ 11월 28일
북아메리카 50회
유럽 35회
85회
2014년
Never Ending Tour 2014
3월 31일 ~ 12월 3일
북아메리카 35회
유럽 21회
아시아 17회
오세아니아 19회
92회
2015년
Never Ending Tour 2015
4월 10일 ~ 11월 22일
북아메리카 28회
유럽 59회
87회
2016년
Never Ending Tour 2016
4월 4일 ~ 11월 23일
북아메리카 59회
아시아 16회
75회
2017년
Never Ending Tour 2017
4월 1일 ~ 11월 25일
북아메리카 56회
유럽 28회
84회
2018년
Never Ending Tour 2018
3월 22일 ~ 12월 4일
북아메리카 42회
유럽 26회
오세아니아 11회
아시아 5회[83]
84회
2019년
Never Ending Tour 2019
3월 31일 ~
유럽 35회
35회


10. 외부 링크[편집]



  • 기타 사이트
    • 밥 딜런 기록보관소: 딜런의 작곡/작사 노트, 노래 초안, 음반, 사진, 영화 아웃테이크, 공연 기록 등으로 구성된 10만개가 넘는 자료를 보관한 딜런의 기록 보관소는 오클라호마 털사털사 대학교에 있는 길크리스 박물관의 헬메리치 센터에서 열린다. 밥 딜런의 희귀 자료들이 모여 있는 박물관이다. 2018년 건축가를 선정해 건물을 설계했다고 발표했고 2021년에 문을 열 예정이다.
      • 털사 대학교 밥 딜런 연구소 : 털사 대학교 밥 딜런 연구소는 밥 딜런의 인생, 그의 음악 세계의 작업, 영향, 유산을 탐구하는 데 전념해 딜런에 대한 광범위한 학문적 연구 계획을 세우고 딜런 연구의 새로운 본거지가 되기 위해 만들어졌다.
    • Expecting Rain : 밥 딜런 관련 최대 사이트다. 딜런 관련 뉴스, 정보들이 매일 업데이트된다. 밥 딜런 광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며 웬만한 딜런 관련 공연 음원들을 모을 수도 있다.
    • 레딧
    • Bob Links: 밥 딜런의 콘서트 및 셋리스트를 알 수 있는 곳.
    • Bob Radio: 밥 딜런의 노래만 나오는 라디오.
    • Theme time radio: 밥 딜런이 호스트한 ‘Theme Time Radio Hour’의 아카이브.
    • Bob Dylan Magazine
    • Pod Dylan: 밥 딜런 팬 팟캐스트
    • Sad Eyed Lady Of The Lowlands, Elston Gunn: 밥 딜런 관련 자료들을 올리는 유튜버, 방대한 자료들이 눈에 띈다.
    • 밥 딜런 관련 해외 사이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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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밥 딜런은 예명이 아니라 법적으로 개명한 본명이다. 아내와 자녀들도 모두 성씨가 '짐머맨'이 아닌 '딜런'을 썼거나 쓰고 있다. 첫 음반을 내놓을 시기에 밥 딜런으로 법적 개명했다.[2] 개명 전 이름[3] 2018년 위스키 사업 시작. #[참조] A B 밥 딜런 본인의 sns는 아니며 밥 딜런 공식 홈페이지의 sns다.[4] 2012년 미국 민간인 최고 훈장인 자유의 훈장 수훈식에서[5] 밥 딜런과 말콤 X, 피델 카스트로, 존 F. 케네디의 얼굴을 1/4씩 배치했다. 이 커버가 나올 당시 딜런은 Like a Rolling Stone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60년대 초중반 딜런의 가사가 얼마나 크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를 알 수 있는 표지. 하지만 밥 딜런 본인은 이걸 보고 굉장히 불쾌해 했다.[6] 64살에 발매한 32번째 정규앨범 ‘Modern Times’가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했고, 67살에 발매한 33집 ‘Together Through Life’는 빌보드 앨범 차트,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달성했다. 또 74살에 발매한 ‘Shadows in the Night’는 영국 앨범 차트 최고령 1위를 기록했다.[7] 사실상 밥 딜런보다 오랫동안 활동한 대중가수는 1958년부터 활동해온 디온(가수) 정도다. 디온은 밥 딜런이 대중가수의 꿈을 키웠던 버디 홀리의 겨울 댄스 투어 파티에서 게스트로 활동했을 정도다. 디온은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급격한 침체기에 빠지자 기독교 음악과 블루스로 장르를 변경해 다시 부활해 2020년에 40번째 앨범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중이다.[8] 6위 Blonde on Blonde, 14위 Highway 61 Revisited, 38위 Bringing It All Back Home, 55위 The Freewheelin' Bob Dylan.[9] 5위 Blood on the Tracks.[10] 93위 Time Out of Mind.[11] #[12] 전체 2위.[13] Dylan's influence on Garcia and Hunter was a given; both admired his songwriting and thought he gave rock music a modicum of respectability and authority. "He took ‘rock music’ out of the realm of ignorant guys banging away on electrical instruments and put it somewhere else altogether," Garcia said later. Richardson, P. (2015). No Simple Highway. St. Martin's Press. p. 150.[14] "They asked me what effect Bob Dylan had on me," Townshend said. "That's like asking how I was influenced by being born." Flanagan, (1990), Written In My Soul, p. 88.[15] "Bob Dylan, I'll never be Bob Dylan. He's the master. If I'd like to be anyone, it's him. And he's a great writer, true to his music and done what he feels is the right thing to do for years and years and years. He's great. He's the one I look to." Time interview with Neil Young, September 28, 2005.[16] 많은 사람들이 돈 맥린, 돈 매클린으로 알고 있는 가수다.[17] 돈 매클레인과 조니 미첼은 시기와 전달 매체는 다르지만 밥 딜런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한 바 있다.[18] 계관시인이란 영국 왕실이 가장 명예로운 시인에게 내리는 칭호로 지금은 총리의 추천으로 임명된다.[19]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 연구진은 1970년부터 2015년까지 쓰인 생물 의학 논문 중 밥 딜런의 노래가 인용된 논문을 정량적으로 분석해 지난해 영국의학저널(BMJ) 크리스마스 특별호에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밥 딜런 노래 가사의 일부가 인용된 문헌은 727편에 달했고, 이 중 213편은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보고서를 만든 존 린드버그 박사와 에디 바이츠버그 박사에 따르면 밥 딜런 노래 가사 인용 경쟁은 1997년 두 사람이 공동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 메디신'에 발표한 'NO(Nitric Oxide)와 염증: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논문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1963년 피터, 폴 앤 메리가 대히트시킨 "두 번 생각하지 말아요. 모두 잘 될 거예요(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딜런의 노래를 인용하기로 결심한 후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이언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은 네이처 메디신에 발표한 논문 내용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바이츠버그는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딜런의 작품은 너무 멋져서 노벨문학상을 받고도 남는다"며 "오늘 바람 대신 노벨상이 그에게 대답했다"고 덧붙였다.[20] '바람'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은 딜런의 대표 곡인 '블로잉 인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떠올리게 했다. 미국 국립의학도서관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메들라인' 검색 결과 가장 먼저 딜런의 가사를 인용했다고 인정되는 논문은 1970년 '저널 오브 프랙티컬 너싱'에 실린 '그들이 시대를 바꾼다'라는 제목의 연구 성과다. 이 가사는(The Times They Are a-Changin) 이후 무려 135편의 논문에 그대로 쓰였으며 '블로잉 인더 윈드'는 36개 논문에 사용됐다. 주로 미국 과학자들이 논문에 딜런의 가사를 많이 이용했으며 스웨덴 과학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21] 영국 중세 민요인 Nottamun Town의 멜로디에 딜런이 쓴 전쟁의 부조리함을 꼬집는 새 가사를 입힌 곡이다. 다만 딜런이 부른 곡조는 영국 출신의 미국 여성 포크 가수 겸 애팔래치안 덜시머 연주자인 진 리치(Jean Ritchie)의 편곡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리치 측과 합의 하에 3,000달러를 물어야 했다.[22] 많은 사람들이 방사능 낙진(쿠바 미사일 위기 참조)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했는 데, 본인은 부정했다.[23] #[24] 역대 10위[25] 크럼프는 “인터뷰라기보단 익살극 같네요.”라고 인터뷰를 평했다.[26] 금융, 통신회사.[27] 처음으로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즈음엔 언론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기 사진이 잘 나오는 지 신경을 쓰는가 하면, 후술할 첫 일렉트릭 콘서트에서 청중들과 거의 싸울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듯 하다나 공연이 끝나니 관객 수가 몇명인지 묻는 등. 또한 부랑자를 연상케하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섬을 몇 개씩이나 보유한 부동산 부자다.[28] #출처 기사 / #중앙일보 번역 기사[29] 이 발언이 나온 배경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우스타샤 문서 참조.[30] 다만 아무 짓도 안했는데 폭력배가 일방적으로 칼로 찌른 것은 아니다. 메레디스 헌터가 술에 취해 무대로 난입하려다 경호를 맡고 있던 헬스 엔젤스 단원들에게 폭력적으로 추방당했고, 그는 다시 돌아와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이때 헬스 엔젤스 단원들이 그를 제압해 때려눞혔으나, 다시 무대를 향해 리볼버를 꺼내들자, 헬스 엔젤스 단원 한명이 칼을 들고와 그를 찔렀다. 이 장면은 영상에도 찍혀서 화재가 되었으나, 그를 찌른 헬스 엔젤스 단원은 상대가 먼저 총기를 꺼내든 것이 확인되어 정당방위로 무죄를 받았다.[31] 1966년 말"킹맨"이라고 이름 붙여짐[32] ‘Self Potrait’, ‘Planet Waves', 그리고 젊었을 때 "The Band"의 첫 앨범 'Music From Big Pink'의 앨범 커버를 그려주기도 하였다.[33] 출처 출처[34] Daniel Mark Epstein (January 4, 2011). The Ballad of Bob Dylan. Souvenir Press Ltd. p. 94.[35] Colleen Josephine Sheehy; Thomas Swiss (2009). Highway 61 Revisited: Bob Dylan's Road from Minnesota to the World. U of Minnesota Press. p. 108. [36] Wenner, Jann S. Lennon Remembers, Rolling Stone Press (2000) 148쪽[37] 알 아로노비츠가 로큰롤의 역사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말한 내용과 다르다. 딜런과의 만남을 주선한건 레논이었다고 하며, 딜런의 추종자였다는 얘기가 나온다.[38] 포크 페스티벌에 일렉트릭을 들고 나타난 딜런을 보고 관중과 동료들은 '아무리 잘 나가도 그렇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야유를 하고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아니다. 딜런이 하는 것이 포크이니 저게 바로 포크의 미래다.'라며 그를 옹호한 것은 바로 당시 포크계의 대부 우디 거스리.[39] 더 그레이트풀 데드와 합작 라이브 앨범[40] 일본에만 발매됐다.[41] 36CD 박스셋[42] 2CD[43] 그냥 Royal Albert Hall도 도 아니고, 옆에 The Real이 붙은 이유는 이 음반이 진짜 로열 앨버트 홀에서 공연한 실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당연한 각주를 달았는 지는 아래 부틀렉의 The "Royal Albert Hall" Concert의 각주를 참고.[44] 출처[45] 심지여 영화로만 공개되었던 I'm Not There 음악이 여기에 있다! 하긴 그때 1967년도에 만들었는데 그때 명곡을 이렇게 오래동안 숙성시킨 것이다. 이외에도 몇몇 곡들은 앨범에 넣기도 했지만 그에 비해 공개 안된곡이 너무 많다.[46] 3CD, 디럭스 4CD[47] 2CD[48] 이 음반은 사실 로열 앨버트 홀이 아닌 맨체스터의 자유 무역 회관(Free Trade Hall)에서 공연한 실황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로열 앨버트 홀이라고 씌여진 이유는 이 공연이 당시부터 로열 앨버트 홀 공연으로 오랫동안 잘못 알려졌기 때문. 정정하기도 귀찮았나보다. 바로 밥 딜런이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포크를 배신한 사건'의 정점을 찍은 한 관중의 '유다(Judas) 샤우팅'이 나온 공연이다.[49] 2CD[50] 2CD[51] 2CD[52] 2CD, 디럭스 3CD[53] 2CD, 한정판 디럭스3CD[54] 2CD, 한정판 디럭스 4CD[55] 6CD[56] 2CD, 디럭스 6CD[57] 2CD, 디럭스 8CD[58] 스탠다드 버전[59] 디럭스 버전[60] 2CD, 디럭스 6CD[61] 호주, 뉴질랜드, 일본 한정 발매[62] 5LP 세트[63]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정 발매[64]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정 발매[65] 미국 한정 발매[66] 디지털 한정 발매[67] 디지털 한정 발매[68] 싱글 디스크 버전, 디럭스 버전 발매[69] 8CD/바이닐 세트[70] 싱글 디스크 세트, 8CD/바이닐 세트[71] 2CD세트[72] 3CD세트[73] 4CD세트, 유럽 한정 발매[74] 47CD세트, USB로도 발매[75] 6LP세트, 유럽 한정 발매[76] 9LP세트, 유럽 한정 발매[77] 다큐멘터리[78] 샘 셰퍼드와 공동 각본[79] 단편 비디오[80]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81] 조지 해리슨의 앨범에 밥 딜런도 참여했고 수상한다.[82] 3월 31일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내한 공연 한다.[83] 대한민국 두번째 내한,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 헤드라이너